나의 북부조국 방문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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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6
가보기 전엔 어쩔 수 없다. 홍 여사의 ‘아오지를 가다’
나의 방문기 지난 회에서 홍정자 여사의 두 권의 책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를 언급하였는데 살펴보니 전자는 1992년 미국에서, 후자는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의 ‘말’지를 통하여 그 가운데 여러 내용은 한국에도 소개가 되어 북부조국을 바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는데 1994년에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살림터’에서 출판하여 한동안 베스트 10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평양 인근의 넓은 도로와 새로 생겨난 아파트들.
홍정자 여사는 우리들이 잘 아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친누나다. 홍동근 목사님과 결혼 전의 본명은 백정자. 미술을 전공하였고 또한 불문학도 전공하였으며 한국에선 대학에서 미술 강사로도 있었다. 홍 여사의 방문기는 그분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성과 묘사력,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북을 깊이 이해하는 따스한 눈을 통하여 읽는 독자들에게 북부조국의 진실과 그 인민들의 삶을 깊은 감동으로 전달하였다.
책의 내용들 가운데 한가지 예를 들어본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배워 공산주의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보내서 중노동을 시키는 곳으로 알고 있는 아오지 탄광 방문을 북의 관리들을 어렵게 설득하여 1994년 10월에 기어이 답사하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가까운 곳에 여러 탄광들이 있는데 왜 그 먼 곳까지 찾아가야 하느냐는 북의 관리들에게 홍여사 특유의 고집으로 기어이 그곳이 아니면 안된다며 답사를 이뤄내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들이 알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김 주석이 4번이나 현지지도로 방문하여 탄광의 환경과 복지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곳인데 우리는 그곳을 반공정권으로부터 정반대로 배우고 세뇌당하고 있었음을 그 책을 통하여 밝혀내었으니 홍정자 여사와 그 책의 업적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나처럼 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조차도 홍여사의 그 책을 통하지 않았다면 아오지 탄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도 아오지 탄광을 북이 축구경기에 진다면 감독을 거기로 보낸다고 표현하는 남한의 언론이 있었는데 신문에 제목만 그렇게 붙였지 내용에서 거론하지는 못한 것으로 안다. 이제 함부로 막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홍 여사의 이런 방문기를 통하여 그 진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기 때문이리라. ‘아오지 를 가다’라는 제목의 그 글은 1995년 월간 ‘말’지를 통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직도 북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하고 편견에 가득차 있는 것이 남한의 현실인 것을 생각한다면 북을 수십 번 방문하면서 수많은 동포들과 만나 인터뷰를 통하여 진실을 알리는데 기여한 홍 여사의 책들은 다시 출판되어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온 민중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미주에서 2002년 출판된 홍정자 여사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자신의 책과 같은 제목의 구호 앞에서의 홍정자 여사
이왕 아오지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나의 방문기가 약간 옆길로 빠진 듯해도 오늘은 홍정자 여사의 ‘아오지를 가다’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여기 소개하여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젠 아오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곳 아오지 한 곳만 제대로 이해해도 그동안 우리가 듣고 배워온 북부조국이 그 진실과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아오지라 불리웠던 지역은 옛 함경북도 경흥군 소재지 읍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진족의 말로 ‘불타는 돌’이라는 뜻이었다. 1977년 인민들의 제안에 따라 ‘은덕’군으로 개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수령님의 은덕을 가장 많이 입은 고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해방 후 산간벽촌 아오지는 천지개벽을 하게 된다. 김주석 께서는 아오지로 하여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도록 수차에 걸쳐 현지지도와 교시를 내려주셨다. 그리해서 석탄화학공업 부문의 공장을 비롯 여러 개의 중앙공업기업소들과 20여 개의 지방산업 공장들이 일떠서게 된다. 또한 은덕천을 가운데 두고 양기슭에 거리가 형성되면서 문화회관, 4개의 군 도서관, 체육구락부, 은덕화학공업대학, 고등석탄전문학교, 고등화학전문학교를 비롯 수많은 학교, 탁아소, 유치원들이 골고루 배치되었고 6.13 탄광병원을 비롯 여러 개의 병원진료소, 상점, 이발소, 목용탕 같은 갖가지 편의봉사시설이 마련되어 인구 9만을 헤아리는 주민, 근로자들의 문화적 수요를 보장하고 있다. 특별히 1966년에 살림집을 많이 지었고, 1972년도에 들어와 1966년도의 12배를 더 많이 지었다고 한다. 아오지는 교통이 아주 발전돼있다고했다. 각 리마다 농촌버스가 운행되고 주요 자동차 길로는 은덕-회령, 은덕-샛별, 은덕 –선봉, 은덕-원정 이렇게 자동차 길이 뻗어 있다./
아오지 (6.13) 탄광의 정문 모습
홍정자 여사와 탄광의 일꾼들. 홍 여사는 아오지 탄광을 직접 답사해서 온 민중을 세뇌시킨 그 거짓을 밝혀내었다.
/정기화 지배인은 이제 6.13 탄광에 대하여 알고자하는 나에게 먼저 김 주석께서 6.13 탄광에 대하여 그리고 탄부들에 대하여 그 어떤 사랑과 가르침을 주었는가에 대하여 자랑을 하고자 했다. 김 주석께서는 1948년 6월 6일, 1954년 7월 7일, 1959년 3월 17일, 그리고 1968년 6월 13일 (이 날의 방문을 기념하여 탄광의 이름을 바꾸게 됨) 그렇게 네 차례에 걸쳐 아오지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그중 1954년과 1968년엔 김정일 지도자를 동반해 오셨다. … 김 주석께서는 특별히 탄부들에 대한 사회적 우대를 강조하시어 “석탄이 공업의 식량이면 탄부들은 나라의 맏아들”이라 하시며 내세워주시고 해마다 7월 7일을 세계에 없는 “탄부절”로 제정해주시기도 했다. /
/과연 6.13탄광기업소 내에는 여기저기 김 주석의 교시가 새겨져 모심을 받고 있었는데 그중 인상적인 것들로 이런 글귀를 볼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탄부를 존경하며 어떤 모임을 할 때에는 주석단에도 많이 앉게 하여 탄부들이 실지 생활을 통하여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영예를 간직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탄부들을 비행사 대접하라” (탄부들의 노임 수준을 말함)./
/과연 그들은 김 주석의 교시를 받들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한 결과 1967년 100만 톤 능력의 수직 갱을 건설, 6.13 탄광을 100만 톤 탄광으로 만들었고, 오늘날 종업원 5천명 가운데 70%가 청년들로 되었으며 운반 100% 채굴 40%가 기계화되었다. 여성일꾼들은 갱내에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규칙이나 현재 30여명 정도의 권양기 운전공과 4-50명 정도의 전차운전공이 여성들로 되어 있다./
/아오지에서 출생했으며 한 직장에서 40년 일해오고 있다는 장진세씨로부터 놀라웁게 들은 것은 그의 아내도 그의 딸도 청진의학대학 출신으로 현직 의사로써 봉직하고 있다는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다. 오직 그 사회에만 있는 일이 아닐는지, 탄부를 남편으로 모신 여의사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가. 탄부의 딸이 그리 쉬이 의과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것인가../
/중학교 교원인 아버지와 유치원 보육원인 어머니, 그같은 인텔리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청진에서 도시생활을 즐기면 그만인 꽃다운 처녀 박옥화 양, 그러나 그녀는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어 직장에서 받은 모처럼의 휴가를 고스란히 탄광에 바치러 왔다가 그만 눌러앉기로 했다. 그대신 온 직장 총각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고…/
/아오지 탄광에서 한생을 바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령님과 당이 바라는 힘든 부문”에 몸을 바치고자 12년째 굴진공으로 일한다는 김순복 씨는 평남도 평원군에 있는 광산설계원 양성학교에 추천되어 3년간 공부한 바 있다. 그는 다른 탄광보다 수령님이 많이 찾아오신 이 탄광에서 자자손손 대대로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상 홍정자 여사의 '아오지를 가다'에서)
내가 근래에 홍정자 여사와 전화로 통화하면서 잠깐 나눴던 대화를 소개한다. 날더러 참 귀한 사람이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프시다며 나의 집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어서 참 다행이라고 하기에 내가 집사람이 그렇게 이해해주진 않지만 옳은 일이기에 이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하니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1980년대 초반, 홍동근 목사님이 처음 북으로 간다고 할 때 간절히 붙잡고 싶었고 막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가신다는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홍 목사님이 어머니를 만나뵙고 돌아오신 지 3개월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만일 조금만 때를 놓쳤다면 홍 목사님은 생전의 어머니를 만나볼 수조차 없었으리라. 홍 여사는 처음엔 북에서 발행된 신문이나 인쇄물이 집으로 배달되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보기 전엔 어쩔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옳은 말씀이다. 우리의 세뇌당한 것은 그렇게도 깊고 깊은 것이다.
내가 홍 여사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책을 내기까지엔 어려움이 무척 많았겠다고 하자 잠깐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홍 목사님을 찬밥 잡수시도록 홀로 두고 북을 방문할 때는 미리 부탁하고 갔는데도 막상 도착해보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했다. 며칠 동안의 머무는 시간은 촉박한데 그곳에선 홍정자 여사가 그동안 진실을 알려왔다며 좋은 평을 하면서도 답사와 인터뷰를 제대로 주선해주지 못해 속이 많이 탓다고 하셨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년을 조르기도 했고, 자료준비를 미리 요청하면 준비한다고 해서 믿었는데 가보면 준비가 안된 경우도 허다했다는 것이다.
북의 대표적인 배우 김룡린과 함께한 홍정자 여사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의 화보 가운데)
임수경 학생이 평양에 입성할 때 기다리며 환호하던 인민들을 통하여 북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 판문점을 통하여 함께 남으로 넘어오는 길에.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의 화보 가운데)
내가 그 시절이 ‘고난의 행군’시절이었기도 하니 북으로서도 참으로 어려울 때여서 교통편이나 모든 것이 준비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며, 그렇게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수십 차례 북을 방문하여 답사하고 인터뷰하여 나온 책이기에 지금 남북관계가 다시 이렇게 어렵게 되고 진실이 묻혀지는 시절이 된 상황에서 그 책들이 더더욱 빛이 납니다하고 위로해드렸다. 올해 칠순인 홍 여사께서 고맙게도 내가 쓰고 있는 방문기를 읽고 싶으시다기에 적당한 분량을 프린팅을 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리기로 약속했다. 홍 여사는 미 동부 지역의 친지가 초대하여 잠깐 바람도 쐴겸 방문하러 떠나신다기에 부디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좋은 대화 나눕시다하고 말씀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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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홍여사님이 피아니스트 이자 지휘자인 백건우씨의 친누님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홍여사님의
글이 책으로도 발간되었고 잡지에도 실렸다는데 그런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같은 사람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했던 셈인데...당시 그런 정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북에 대해 보다 근접한 내용을 잘 모르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홍여사님의 책이 당연코 다시 재발행되고 홍보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런 류의 일들이 현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듭니다.
참으로 세뇌의 벽이 생각보다 두텁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매스컴의 세뇌공작이 그래서 참 무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렇게 북의 인민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이미 진실은 오래 전에 밝혀졌는데도 그걸 묻어버리고 매스컴이 나서서 북을 이상한 나라로
만드는데 앞장선 것이 결과적으로 제법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북에 대하여 호감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지요. 그바람에 통일을 말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어졌습니다.
세뇌는 매일같이 조금씩 진행되어져가는 것이기에 그걸 돌려놓으려면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온 민중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선각자들만 진실을
알 수 있고, 아는 사람만 노예된 것을 벗어나 자유하게 되는 셈이지요.
사람의 생각의 틀이 한정된 상황으로 갇혀있는데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