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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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7 조선신보 기자들을 만나다 전화를 하신 노 박사님은 반바지 차림으로라도 나오라고 하셨지만 평양에서의 첫 날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옷을 차려 입고 복도로 나왔다. 아까 복도를 지나치면서 오른편의 방 하나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조선신보’ 평양 사무실이라고 했는데 지금 거기서 전화를 걸었다면서 거기로 얼른 오라고 한 것이다. 문을 노크하니 제법 넓은 사무실에 노 박사님과 두 젊은 여성이 있었다. 나를 미국에서 온 동포라고 소개하면서 그 두 사람과 인사를 시키신다. 한 여성은 ‘조선신보’의 로금순 기자였는데 노 박사님이 얼마 전에 일본 취재여행에서 서로 만나 같은 성씨여서 동생으로 삼았는데 오늘 뜻밖에 평양에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한 여성은 월간 잡지 ‘이어’의 김숙미 기자인데 이곳 평양에 취재차 몇 달을 머물고 있다고 했다. 노 박사님이 민족통신의 기자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본에서 나고 자란 3세 동포 기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김숙미 기자가 정성들여 끓여준 차를 나누며 대화를 했다. 우리가 조총련으로 부르던 총련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일본의 동포사회에서 아주 크고 힘있는 단체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산하에 수많은 초.중.고등학교가 있고, 조선대학교가 있으며 이렇게 신문사와 잡지사까지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도시들마다 한인회가 있지만 몇 곳 외엔 대부분 한인회관 하나 번듯하게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비하여 일본의 총련은 하나의 작은 나라와도 같은 조직을 갖고 있어 동포사회의 권익을 지켜준다고 한다. 무엇보다 재일동포들이 이렇게 단결되어 있어 총련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전국에 수많은 학교들을 운영하고 조선대학교까지 둘 수 있는 것이고, 그 단결의 바탕에는 북부조국에서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재일동포들을 따스하게 돌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지원을 해주었고, 그것은 북이 아주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의 동포들이 총련으로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 동포들의 절대다수가 경상남북도 출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을 둔 2세 혹은 3세이니 원래 고향은 남한이지만 해외에서 제 3의 눈으로 판단하기로 미군정과 이승만 이후의 남한을 모국으로 선택하지 않고 고향방문을 하지 못하면서까지 일본 정부에서 조선출신 외국인에게 준 표식일 뿐인 조선을 조국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라해서 아직 국교가 없는 북부조국 국적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나라인 조선이라는 기호를 일본정부가 그들에게 준 것이니 일종의 무국적이나 마찬가지라 한다. 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북을 오가며 조국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로 보답하고 있다. 내가 대략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이렇게 재일동포 기자들을 통하여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호텔의 아침식사 시간에 다시 만난 로금순 조선신보 기자. 노길남 박사님과 로금순 기자 이틀 후 로금순 기자와 호텔의 아침식사 때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로금순 기자는 북부조국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취재한다기에 근래에 지어진 집들을 답사해볼 기회도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북의 가정집들은 아주 잘 지어졌고 그 크기도 일본의 우리집보다 더 큽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내가 원래 일본 집들은 작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그래도 일본의 부모님들과 함께 사는 우리집은 큰 편인데 여기선 더 크게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집을 무료로 줍니다”라고 말한다. 그래 내가 이곳에선 무료에다 사용료를 얼마인지도 모를 만큼 조금만 낸다고 하는데 일본의 로금순 기자가 살고 있는 집은 어떻게 하는가를 물어보았더니 “아버지가 은행융자금을 갚고 있는데 그 금액이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같은 자본주의 세상이니 일본에서도 동포들이 집을 지니고 사는 일에는 내가 사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큰 부담을 안고 사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로금순 기자는 9월 12일에 북측의 기자단들과 함께 인천 아시안게임 취재차 한국에 간다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한국에서 여기저기 다닐 수도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한국에 가면 머무는 숙소와 경기장 외에 바깥세상 출입은 한국에서 절대로 금지시키기 때문에 외출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재일동포인데도 남한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것이다. 그 표정이 못내 아쉬워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분단의 아픔은 여기에도 있다. 9.9절 연회에서 다시 만난 김숙미 기자와 함께 로금순 기자와 함께 9.9절 연회에서 추석 다음날이자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일인 9.9절 밤에 평양호텔에서 북을 방문중인 많은 해외동포들이 한 자리에 모인 연회가 있었고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김숙미 기자가 앉은 것을 보고는 다가가 기념사진을 찍는데 맞은편에 로금순 기자도 있었다. 반갑게 다시 만나 함께 사진을 남겼다. 북을 떠나기 전에 노 박사님과 함께 만나 저녁 식사라도 나누자고 하였지만 더 이상 함께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북부조국을 재일동포들에게 알리는 일에 열심인 젊은 두 기자의 앞날에 좋은 일이 많이 있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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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룡성 金竜誠님의 댓글
김룡성 金竜誠 작성일
그 총련을 우리는
조국을 대신하는 어머니 품
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