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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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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978회 작성일 15-12-0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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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2

 

김석진원사는 앞탁을 마주한채 까딱 않고 앉아있었다.

작달막하고 단단한 체구로 해서 고령이지만 결패가 느껴졌다. 허나 나이는 속일수가 없어 로인반점이 다분다분한 얼굴은 생기가 없이 희뿌옇게 보였다. 게다가 지금은 그 얼굴에 그려진 주름과 눈표정으로 하여 가뜩이나 늙어보이는 모습이 더욱 늙게 보이였다.

두뇌에 실려있는 어떤 무거운 심리가 얼굴을 통해 반사되고있었다. 앞탁에는 흰 종이에 또박또박 정히 박아쓴 편지 한통이 놓여있었다.

편지봉투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 삼가 올립니다.》

누군가가 어버이수령님께 올린 편지였다. 수령님께 올린 편지가 어떻게 석진의 앞에 놓여있는것인가.

원사는 벌써 이 편지를 세번째나 읽고있었다.

《꿈결에도 뵙고싶은 어버이수령님.

안녕하십니까?

개성시 ××기업소 책임자로 일하고있는 당원 왕무한(61살)이 수령님께 아뢰고싶은 간절한 사연이 있어 외람된 이 글을 올립니다.

지금 곁에서는 저의 할머니가 자자구구 간참하고있습니다. 할머니는 서두에 〈왕씨가문의 제일 효자 전상서〉라고 굳이 쓰라는겁니다.

우리 당의 총비서이시며 사회주의조국의 건국의 어버이이신 수령님의 존함에 어찌 그런 어리석은 표현을 쓸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도 곡진하게 바라기에 할머니의 망녕된 마음을 여쭙지 않을수 없습니다. 할머니의 그 마음에는 손자인 저에 대한 한이 맺혀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달리보면 수령님께서 세상하직을 눈앞에 둔 사연많은 한 늙은이의 심중을 누구보다 헤아려주셨다는 진정어린 감사가 깃들어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감사의 정을 달리는 표현할수 없는 이 나라 한 공민의 류다른 소청인줄로 아시고 받아주시기를 바라면서 삼가 어리석은 글월을 올립니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할머니로부터 한생 불효자식으로 치부되여오고있습니다. 제가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왕씨가문의 대를 끊어놓았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불효자식으로 할머니의 원한을 산데는 보다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1960년대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되여 온 직후였는데 할머니는 저를 불러앉히더니 고려태조 왕건의 왕씨족보와 왕의 옥새를 꺼내놓으면서 이젠 내가 잘 건사했다가 다음대에 넘기라는것이였습니다. 저는 그날에야 저의 가문과 조상에 대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저는 화닥닥 놀랐습니다. 놀랐다기보다 겁이 났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를 놀래운것은 뜻밖의 사실로부터 오는 공포였습니다.

당의 품속에서 주체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로동당원인 제가 하루아침에 신분세습제도가 존재하던 낡은 봉건왕조의 후손으로 변했던것입니다.

이제는 력사책에서나 볼수 있는 봉건왕조의 상징인 옥새와 그 시조왕의 족보를 비밀로 간직하고 600년의 세월을 주시해온 왕씨의 후손들에 대한 세평, 정확히 말하면 당에서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겠는지가 걱정되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왕의 옥새와 족보를 받아든 저는 생각이 많을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무렵 저는 강동군에서 중학교 력사교원을 하는 사람이 〈단군릉〉을 남모르게 돌보아온 일이 알려져서 당적처벌문제가 제기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준것은 그곳에 살고있는 우리 왕씨가문의 사람이였습니다.

피줄은 속일수 없는것 같습니다. 왕씨들은 어디에 널려 살건 무슨 변고가 생기면 서로 알려주고있었습니다.

이러한 상례에 따라 강동군의 왕씨도 개성에 있는 저에게 이 사실을 알려오면서 주의하라는 〈경고〉까지 하였습니다.

리성계의 손에서 요행 살아남은 왕씨들의 피줄에는 피해의식이 흐르고있으며 그것은 대를 이어가며 집요하게 유전되고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러한 피해의식이 왕씨들로 하여금 나라에서 옛 왕조, 특히는 우리의 조상인 고려왕조를 어떻게 대하고있는가를 지켜보지 않을수 없게 하였습니다.

저 역시 왕씨의 한사람, 그것도 직계자손인 까닭에 더했으리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니 할머니가 족보와 옥새를 내놓았을 때 어찌 겁을 먹지 않을수 있었겠습니까.

강동 력사교원이 했다는 일이 건국시조묘의 벌초임에도 불구하고 처벌문제가 제기된걸 보면 고려왕조의 시조왕족보와 옥새를 숨겨온 죄는 그 정도가 아닐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군사복무기간에 입당한 로동당원이였습니다.

반당반혁명분자들이 들고나왔던 복고주의를 반대하여 투쟁할데 대한 당정책의 정당성을 알고있었고 복고주의에 무엇이 속한다는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족보와 옥새문제에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환경에서는 그저 가슴이 떨릴뿐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가 자리를 뜬새에 족보와 옥새를 부엌아궁에 쓸어넣고 불을 달려고 하였습니다. 뒤미처 나타난 할머니는 〈불효막심한 놈!〉하고 저의 귀뺨을 때리며 족보와 옥쇄를 빼앗아 다시 감추고 지금껏 내놓지 않고있었습니다. 언제 운명할지 모를 나이에 이른 할머니는 속마음을 앓으며 자주 신음소리를 내군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어버이수령님께서 왕건릉을 찾으시고 첫 통일국가의 시조릉답게 웅건하게 개건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

저의 할머니가 수령님을 〈왕씨가문의 제일효자〉로 칭함은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이신 수령님에 대한 근 한세기를 살아온 할머니의 류다른 진정이 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원 왕무한은 비로소 왕씨가보만이 아닌 나라의 국보로 될것을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왕씨가문의 족보와 옥새를 이 편지와 함께 삼가 수령님께 올립니다. …》

원사는 생각이 많았다. 수령님께서 왜 이 편지를 나에게 보내주시였을가.

수령님의 책임서기 전기철이 직접 가져다준 편지를 여러번 읽어보고난 김석진은 그것을 강동중학교 력사교원이라는 편지에 나오는 인물과 련결시켜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력사교원의 이름은 박진규였다. 박진규는 백송리시절의 그의 제자였다.

박진규의 정치적운명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고있던 1968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정확히 12월 18일 밤이였다.

김석진에게 있어서 박진규와 관련된 문제는 그의 학자적량심에 걸리는 몇건 안되는 문제중의 하나였기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이날 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사업을 하고있던 김석진은 초급당비서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초급당위원회에 갔을 때 그의 방에는 당중앙위원회에서 왔다는 나이 지긋하고 진중하게 생긴 사람이 앉아있었다. 김석진이 방에 들어서는것을 본 당비서는 자리를 피했다.

손님이 자기 소개를 하였다.

김석진은 상대를 알자 저으기 긴장해졌다. 그는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제기된줄 알았다. 그때는 사대주의, 교조주의, 복고주의 등 이색적인 사상여독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때였다.

《뜻밖이겠는데 이렇게 부른걸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손님이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는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

응대는 하였지만 그의 대답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한가지 알아보자고 합니다. 학술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무관한건 아니구요. 력사문제란 곧 정치문제라는걸 알고계시겠지요?》

《더 이를데 있습니까! 허허…》

이렇게 응답하면서도 김석진은 여전히 굳어진 자세였다. 정치적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 상대의 말이 어딘가 자극이 되였던것이다.

《력사연구에서 제왕들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있습니까?》

《제왕문제말입니까?》

이것은 상대의 말을 잘못 들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한 물음이였다. 김석진은 한동안 입이 붙은듯 아무말도 빼지 못하고있었다.

《놀랄건 없습니다.》

그러나 김석진의 입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력사연구에서는 제왕들에 대한 문제가 거의 론의되지 않고있었다. 인민사 즉 사회발전과 반침략투쟁, 봉건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차지하고있는 인민들의 지위와 역할문제가 력사연구의 기본을 이루고 봉건제도발전과 통치체제문제가 취급되였을뿐 제왕들은 력사연구대상에서 차요시되고있었다.

그 어느 학자도 제왕들에 대해서는 시야밖에 두고있었으며 거기에 손대는것을 꺼려하고있었다. 력사연구의 중진인 김석진이도 례외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지나간 력사의 한담이나 나누고싶어 온것이 아닌 당중앙위원회의 일군앞에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수 없었다.

《아직 깊이 연구해보지 않은 문제여서…》

《그건 저도 알고있습니다. 소장선생을 만나기 전에 몇몇 학자들을 먼저 만났습니다. 그들 역시 일가견을 가지고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을 만나는겁니다. 우리를 도와주어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김석진은 상대의 이 말을 통해 손님이 자기의 문제가 제기되여 찾아온것이 아니라는것이 명백해지자 마음이 풀려 한가지 물었다.

《저, 딱 찍어 무슨 대답을 들으려고 합니까?》

《허허…》

손님은 좀체로 풀어놓으려 하지 않는 그의 심리가 짐작되는듯 난처해하다가 정색한 어조로 말했다.

《력사에서 봉건제왕들의 지위와 역할문제입니다. 그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정치적평가를 내려야 할 일이 있어 그럽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일을 좀 도와주십시오.》

정치적평가란 말이 나오자 김석진은 다시 굳어졌다. 그는 이날 끝내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과연 그에게 문제의 견해가 없었던가.

소심했다. 이것으로 하여 그는 경각에 이른 자기 제자의 정치적운명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였다.

그는 이 사실을 두시간도 못되여 알게 되였다.

뜻밖에도 수령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시였다.

《정말 견해가 없었습니까?》

《…》

《단군릉벌초문제때문에 당적처벌을 받게 된 당원이 있습니다. 알아보니 그는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내가 몇년전에 단군묘에 가보았을 때 묘가 방치유적으로 있는데 대해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어떤 지인이 추석을 맞으며 손을 댄것을 보고서 마음이 어지간히 풀렸드랬습니다. 해당 부문에서는 선생의 견해를 들어보고 자기들 단계에서 처리하려다가 나한테 제기해왔습니다. 나는 단군릉을 돌본 력사교원이 아니라 그를 문제시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결론을 주었습니다.》

《…》

《어째서 대답이 없습니까? 적어도 력사를 연구한다는 학자가?》

석진은 죄송스러워 할말을 찾지 못했다. 수령님께서 자신의 처사에 대하여 못내 유감스러워하시는것이다.

《선생까지 이러면 어떡합니까, 섭섭합니다!》

전화는 짤막했으나 등골이 축축해졌다. 과학자들앞에서는 언제한번 싫은 내색을 하신적이 없는 그이이시라는것을 잘 알기때문이였다. 충격은 컸다.

한참후에 전화종이 다시 울렸다.

《선생, 지금 당에서 복고주의를 때리라고 하니까 선조들의 업적을 부정하라는것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동명왕이나 왕건왕의 무덤을 마사버리기라도 했단말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거신듯 하였다.

《명백히 말하지만 학계는 제왕들의 문제를 외면할것이 아니라 당성, 로동계급성의 원칙 그리고 력사주의원칙에서 마땅히 바로 보아야 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명왕이나 왕건, 세종왕 등 력사발전에 긍정적역할을 한 왕들에 대하여 지적하시고는 《명백합니까, 석진선생?》하고 상대가 자신의 말을 옳게 받아들였는가를 확인하고나서 또박또박 찍어서 말씀을 끝마치시였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나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성전과 같은 애국적인 투쟁, 거기서 사람들이 발휘하는 애국심은 력사적으로 어느 시기에나 정의롭고 진보적인것입니다. 력사연구의 주인은 정치가들이 아니라 바로 력사학자들, 선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주인이 자기 주견 하나 똑똑히 주장못합니까?》

《고맙습니다, 수령님!…》

저도 모르게 튀여나간 소리였다. 무엇을 고맙다고 한것일가. 제자의 운명에 대한 수령님의 구원의 손길을 념두에 두었는지 아니면 외곬으로 나갈번 한 력사학의 넓은 통로를 지적해주신 그이의 높으신 식견과 애국심에 대한 경의였는지 자신도 잘 알수 없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져있던 그 어떤 덩어리가 한순간에 활 부서져나가는듯 한 감이 들면서 눈물이 울컥 나왔을뿐이였다.

그저 그의 귀전에는 《…력사교원이 아니라 그를 문제시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결론을 주었습니다.》라고 하신수령님의 말씀만이 꽉 차있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때 받은 충격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김석진으로 하여금 력사연구에서는 물론 모든 사업과 생활에서 당과 수령의 뜻과 호흡에 발걸음을 따라세우게 하였다.

김석진은 지금 원사, 교수, 박사이며 사회과학원 원장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여러가지 사회적직무도 맡고있다.

사회과학원의 초대원장이였던 백남운을 비롯하여 학자로서뿐아니라 정객으로서도 명망이 높았던 선대원장들에게 견주어봐도 조금도 짝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심성은 거의 기질적결함이였다. 그것은 그의 피속에 섞여있으면서 육체가 존재하는 전기간 남아있을 모양이였다. 그는 이 시각 편지를 내려보내주신 수령님의 진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괴로와하고있었다. 자연 편지에 나오는 인물인 강동군의 중학교 력사교원, 오랜 세월 량심을 괴롭혀온 박진규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였다.

벌써 여러번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듣지 못하고있었다.

문밖에는 큰 키에 외지팽이를 짚고 어깨가 굽은 사람이 한손에 문건을 들고 와서 다급히 손기척을 내고있었다. 고고학연구소의 중세고고학실장인데 그가 문제의 박진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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