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 <새나라> 27-28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조선소설 <새나라> 27-28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817회 작성일 15-11-09 23:15

본문

27

 

이튿날 장군님께서는 허정숙을 비롯한 선전부문 일군들을 집무실로 부르시였다. 집무실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과 시보안서장 오진우가 먼저 와있었다.

《보통강개수공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토의하자고 동무들을 불렀습니다.

교통국장동무, 이리로 나오시오.》

장군님께서는 교통국장을 평양시지도앞으로 불러내시였다.

《지금 동평양지구의 건국로력대원들이 공사장까지 걸어서 다니고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안에 사는 사람들보다 한시간이상은 먼저 떠나야 하고 하루일을 마친 후에는 한시간이상 힘들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여기 사동역에서부터 대동강역을 거쳐 서평양조차장까지 사이에 림시통근렬차를 운영하도록 하자는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교통국장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자신있게 대답올렸다.2

《할수 있습니다.》

《기관차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차장에 차갈이에 쓰는 구내기관차가 한대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무임승차를 해야 합니다.》

《예?》

교통국장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깍쟁이 부리지 마시오.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한테 돈을 받겠다는게 우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고 또 돈을 내야 한다면 누가 기차를 타겠다고 하겠습니까? 공사가 완공되면 철도에서두 신세를 지겠지요?》

《그렇긴 합니다. 홍수때에는 조차장부근도 물에 잠기고 철길로반이 못쓰게 됩니다.》

《그것 보시오. 그러니 로력동원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통근렬차를 리용할수 있도록 시간표를 짜보시오.》

《알았습니다. 이왕이면 방통두 제일 좋은것으로 달도록 하겠습니다.》

교통국장이 시원스레 대답올렸다.

장군님께서는 그 다음순서로 오진우를 지명하시였다.

《보안서장동무, 최근에 공사와 관련돼서 제기된 동향자료를 들어봅시다.》

오진우가 차렷자세를 취했다.

《장군님, 제가 일을 쓰게 못해서 시내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자기 비판을 하라는게 아닙니다. 객관적사실을 들어봅시다.》

《지금 시내에서는 반동놈들이 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곳곳에 삐라를 뿌리고 류언비어들을 많이 퍼뜨리고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험담들입니다.》

《일없습니다, 들어봅시다.》

장군님께서는 온화한 표정으로 오진우에게 계속하라고 이르시였다. 오진우는 할수없이 책짬에서 몇장의 삐라를 내놓았다.

《<개수공사는 공산당의 선전포스타이다>, <애국로동은 강제로동이다>, <공산당원들이 십장노릇한다> 뭐 이러루한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떤데서는 건국로력대원들에게 발급한 로력동원증을 태워서 그 재를 먹으면 아이 못 낳던 녀자들이 아이를 낳을수 있다느니, 또 평천리 가죽공장에서 채찍을 많이 만드는데 그게 공사장에서 십장들에게 줄거라느니 하여튼 별별 류언비어가 다 돌아가고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삐라를 대충 읽어보시고 주먹을 틀어쥐시였다.

《나쁜 놈들!》

정녕 분노하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계급이 다르고 리념이 다르다 해도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그렇게까지 악착할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미군정의 사촉을 받고 꼭두각시노릇을 한들 평화적인 민주건설을 이렇게까지 악랄하게 헐뜯다니…

하지만 그네들이 아무리 날뛰여도 력사는 제 곬으로 흐를것이다.

혼자생각에 잠겨계시던 그이께서는 오진우에게 다시 눈길을 돌리시였다. 오진우는 보고를 계속했다.

《이틀전에 시보안서에서는 서평양목재창고담벽에 반동구호를 써붙이던 놈을 하나 붙잡았습니다. 그놈이 진술한데 의하면 서울에서 보통강개수공사를 파탄시키기 위해 반동놈들을 침투시켰다고 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혼자소리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하긴 그놈들도 이 공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리득이 되는가를 모르지 않겠지.》

장군님께서는 근엄한 안색으로 오진우에게 말씀하시였다.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막아보려는것은 가소롭고 어리석은짓입니다. 앞으로 시보안서에서는 반동들의 준동을 제때에 철저히 적발분쇄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전번에도 강조했지만 이 공사는 치렬한 계급투쟁을 동반한다는것을 잊지 마시오.》

《알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오진우를 자리에 앉히시고 이번에는 허정숙에게 시선을 돌리시였다.

《선전부에서는 공사를 제 기일내에 끝낼수 있도록 주민들에 대한 사상선전사업을 강화해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선전사업에서 중요한것은 이 공사를 당시 수행하고있던 제반 민주개혁과 밀접히 결부시키면서 광범한 대중을 진보적민주주의사상으로 무장시켜 새 조선의 참된 주인으로 교양하는것이라고 지적하시였다.

《그리고 이 공사는 민주건설의 출발점이며 평양을 지키는 중요한 사업이라는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로동정신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공사기간에 여러가지 선전선동수단을 다 동원하여야 합니다. 정로사에서는 매일 공사소식을 신문에 내도록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종 예술단체들로 위문공연을 조직하여 공사장이 들썩하게 해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그다음에도 장군님께서는 공사장 곳곳에 기발과 구호판, 경쟁도표판들을 내다걸어 공사의 전투적분위기를 더한층 높일데 대한 문제, 창작가들이 공사장에 나와 시도 짓고 노래도 창작보급할데 대한 문제 등 선전선동사업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토론해주시였다.

《재삼 말하지만 우리는 이 공사를 통하여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인민대중이라는것을 다시한번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주인의 지위에 올려세우는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중요한것은 그들이 주인으로서의 역할, 다시말하면 주인구실을 다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 공사를 완공하는 과정에 인민들자신이 자기 힘으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있다는것을 깨닫도록 하여야 합니다.》



28

 

공사가 시작되자 제일 급해난것은 김운상이였다. 한것은 아직 남교제방수문설계를 완성하지 못했기때문이였다. 물길을 돌리는 곳에 수문을 설치하여야 장마철에 새 물길로 미처 빠지지 못한 물이 본래의 강으로 흘러내려 서산리앞에서 대동강에 흘러들수 있었다. 지휘부에서는 수문공사를 할 자리만 남겨놓고 제방공사를 하기로 했으니 김운상으로서는 꽁무니에 불이 달린셈이였다. 더구나 그를 속상하게 한것은 수문설계를 위한 기초기술자료가 빈약한것이였다. 왜놈들의 설계를 수정하여 공사를 시작했기때문에 그놈들이 만들어놓았던 보잘것 없는 수문설계의 기초자료도 별로 도움이 안되였다. 수리구조물은 강하천의 물량과 그 흐름의 특성에 의해 계산된다. 구체적으로는 기준평균한해흐름량, 큰물량과 강수량 그리고 흙모래를 포함한 강하천의 운반물류출량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 수문의 크기와 높이를 결정할수 있고 투자규모를 산출해낼수 있었다. 그런데 보통강에 대한 조사관측자료는 력사적으로 기록해놓은것이 없었다. 초보적인 자료에 의하면 평양에는 1923년과 1942년 큰물이 가장 혹심한 피해를 가져왔었다.

1923년 8월 6일부 《동아일보》에도 평양과 대동군의 일부 지역의 큰물피해에 대하여 쓴 기사가 있었지만 그 정도의 자료만 가지고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었다.

오늘도 운상은 점심밥을 먹자마자 현장을 답사하려고 기술부사무실을 나서다가 우뚝 멈춰섰다. 하얀 위생복을 입고 마당가에 서있는 처녀를 알아보았던것이였다.

《아니, 수영씨가?》

오늘부터 현장치료대가 나온다더니 그럼 이 처녀가?… 운상은 반가왔다. 반갑다는 감정의 구체적색갈은 분석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반가왔다. 운상은 미소를 짓고 처녀에게 다가갔다. 수영이도 수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운상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이런 공사판에 나올 생각을 다 했습니까? 남자의사들도 많을텐데…》

《제가 자원했어요.》

《자원이요?》

운상은 정말 놀랐다. 귀공녀같은 이 처녀가 그런 결심을 했다는게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수영은 운상이 놀라는것을 탓하지 않았다.

《여기 나와보면 현실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더군요.》

처녀는 자기의 심정을 그렇게밖에 표현할수 없었다.

수영은 병원에서 보통강개수공사장에 현장치료대를 파견한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여태 의사들이 공사장에 치료하러 나간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것이다. 그런데 치료뿐아니라 로동자들에게 음료수도 끓여주어야 한다는 소리에 그만 아연해졌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구나. 꿈속에서조차 행복을 맛볼수 없었던 비참하고 무권리한 백성들을 어쩌면 그렇게까지 위해준단 말인가.

(공사장에 나가보자.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떤 모양새로 숨을 쉬는지 그 구조를 더 잘 알수 있을거야.)

그래서 그는 이 공사장에 진심을 바치고싶어서 나왔다고 운상에게 떳떳이 말할수 없었던것이다. 처녀의 심리가 어떻든 운상에게 중요한것은 수영이가 공사장에 나왔다는 사실 그자체였다.

《잘했습니다. 여기 있느라면 많은걸 배우게 될겁니다. 김일성장군님이 어떤분이신지, 건국이란 어떤것인지, 이 공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될겁니다.》

《그럴가요?》

《그야 응당하지요.》

운상은 처녀앞에서 자연히 웅변가가 되였다.

우주의 혼돈과 암흑속에서 무질서하게 부딪치고 폭발하는 물질들의 운동과정에 지구가 생겨났고 여러차례의 빙하기를 거쳐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 탄생하였다. 최초의 인류는 대자연의 속성을 몰랐던탓으로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고 눈비가 오고 화산이 분출하는 등 무질서한 자연의 광란앞에서 공포를 느끼군 했다. 때문에 그들은 신의 존재를 두려워했고 소박한 질서를 지향했으며 안전한 공간속에 자기를 은페시키려 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것을 미리 알수 있었으면, 태풍이 불거나 화산이 폭발하는것을 미리 알수 있었으면, 낮이 가면 밤이 오는것처럼 모든 자연현상에 차례가 있고 질서가 있었으면… 그래서 원시시대의 예술은 직선예술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예술이였다. 이것은 원시인들의 질서에 대한 반영이였다. 그러나 대자연의 횡포는 오늘까지 계속되면서 불가사의한 힘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있다. 무질서는 자연에서뿐만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어쩔수 없는것으로 되고있다. 부자와 빈자의 알륵, 강한자와 약한자의 대립, 종족과 종족간의 충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부터가 해방이라는 력사적정황앞에 당황하여 어디에서 내 위치를 찾아야 할지 몰라 동서남북을 두리번거리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인민의 힘을 믿고 자연에 도전하여 이 공사를 발기하심으로써 건국의 순서조차 몰라 갈팡질팡하던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대번에 바로잡아주시고 40만 평양시민들은 장군님의 구령에 따라 이 공사장에 한사람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결국 이 공사는 장군님의 두리에 질서있게 뭉친 대중의 단결력과 자연의 무질서와의 대결이라고 할수 있지요. 말하자면 보통강개수공사를 통해서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동시에 인간들의 사상개조까지 실현하는 바로 여기에 김일성장군님의 위대한 신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수영은 새삼스런 눈으로 운상을 바라보았다. 이 열정적인 청년에게는 뭐나 다 명백하고 모를게 없어보였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그것은 운상이가 바라던 소리였다. 그런데 뭘 도와준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자 도대체 도와줄게 있어보이지 않았다.

현장치료실은 지휘부의 방 한칸을 내고 자리잡았는데 운상은 치료실을 꾸리는데 남자손이 필요한것 같아 슬그머니 가보았다. 그런데 지휘부에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꾸려준 덕에 운상에게는 일감이 차례지지 않았다. 그가 도와준것은 약병들을 올려놓는 당반을 만들어준것뿐이였다. 그걸 만드느라 운상은 밤을 꼬박 새웠다. 운상은 처녀가 공사장에 나온것을 그렇게라도 환영하고싶었고 가까운 벗이 되고싶은 자기 마음을 그렇게라도 전달하고싶었다.

수영은 아침일찍 송진내 풍기는 삼단짜리 당반을 들고 치료실에 찾아온 운상에게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흰색라크칠을 해야겠는데…》

운상은 더 할 말이 없어 치료실을 나왔다. 마음은 공연히 즐거웠다.

하지만 생활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상은 자기에게 어떤 검은 마수가 뻗쳐오고있는지, 그것으로 해서 자기가 어떤 곡절을 겪게 되겠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로이문으로부터 공사설계를 담당한 사람이 김운상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구진배는 깜짝 놀랐었다.

그는 자기가 중요한 공작대상을 놓치고있었다는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구진배는 민심을 흉흉하게 하여 공사속도를 늦추는데만 신경을 썼지 설계와 설계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었다. 그 리유는 기본설계가 이미 끝나고 시공단계에 들어갔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기존설계를 수정한 사람이 김운상이고 지금은 수문설계때문에 애를 먹는다는것을 알게 되자 그는 속으로 이마를 쳤다. 신변이 다소 위태롭더라도 김운상을 한번 만나봐야 할것 같았다. 그를 재간껏 구슬려 남쪽에 데리고 나가면 좋고 그렇게 안되는 경우에도 공사장에서 물러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류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삐라를 뿌리는 일들은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이번일은 승산이 있을것 같았다. 하여 그는 로이문을 통해서 운상의 하숙집주소를 알아냈고 지금은 하숙집토방에 쭈그리고앉아 운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구진배는 동경시절부터 김운상을 알고있었다.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운상은 건축학을 전공했고 구진배는 토목학을 배웠었다. 평양이 고향이라는것으로 해서 두사람은 대학초기부터 가까이 지냈다.

운상에 대해 회상할 때마다 맨먼저 떠오르는것은 모형기중기사건이였다.

어느해인가 건축학부에서는 건설기계모형전시회를 조직하였다. 당선자들에게는 대학졸업후 직업선택에서 우선권이 부여된다는 요란한 광고까지 나붙었다.

구진배는 자신이 없어서 애당초 전시회에 참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운상의 하숙집에 들렸다가 앉은뱅이책상우에 놓여있는 모형기중기를 보게 되였다. 손재간이 좋은 운상은 모형기중기를 조립식으로 만들었는데 하얀색, 파란색으로 색칠까지 해놓아서 하나의 완전한 예술작품같았다.

구진배는 눈이 커졌다. 견물생심이라고 눈이 커지자 욕심도 커졌다. 저것이면 1등은 문제없었다. 구진배는 한번이라도 이름을 떨쳐보고싶었다.

그는 운상이가 돌아오기를 무료하게 기다릴수 없었다. 고학을 하는 운상은 일공판에서 삯짐을 지다가 밤늦게야 돌아올것이다.

구진배는 모형기중기를 들고 나오며 하숙집녀인에게 돈을 맡겼다. 두달분 학비는 되고도 남을만큼 넉넉한 돈이였다. 그는 자기의 행동이 운상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전에도 운상의 학비를 보태준적이 있었던것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시상대에 올랐던 구진배는 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

잠옷바람으로 밖에 나가보니 운상이가 서있었다.

운상은 제잡담 손에 쥐고있던것을 구진배에게 집어던졌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락엽처럼 흩날리는 지전장들을 희미하게 비쳤다.

《사람을 어떻게 보는거야? 시시하게…》

운상은 자기의 거친 행동을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성난 표정으로 구진배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당황해난 구진배는 얼른 그의 팔소매를 잡았다.

《미안하네. 그거 말이야… 작다면 더 주지.》

《너 정말 너절하게 놀겠어?》

운상은 구진배의 잠옷깃을 와락 잡아당겼다.

진짜로 한대 때릴 기상이였다. 키는 컸지만 체격이 단단하고 야구팀주장인 운상에게는 언제나 한손 접히우군 하는 구진배였다.

운상은 자기가 너무했다고 느꼈는지 손을 놓고 그냥 돌아섰다.

《날 고향친구로 생각한다면 그러지 말게.》

구진배는 운상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서라구, 모형을 안 가지고 가겠나?》

《필요없어!》

운상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구진배로서는 그의 괴벽한 행동이 잘 리해되지 않았다. 돈도 안 가지고 모형도 안 찾아갈바에야 이밤중에 뭣때문에 왔단 말인가? 도대체 그를 분노하게 한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날 대학강당에서는 숱한 교직원, 학생들의 참가하에 전시회가 열렸다. 구진배가 내놓은 모형기중기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1등은 따놓은 당상이였다. 기린처럼 목을 뽑은 구진배는 여느때보다 키가 더 커진듯싶었다.

드디여 나비수염에 나비넥타이를 맨 교무주임이 연탁에 나섰다.

《에또, 이제부터 전시회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1등, 건축과 3학년 야스끼상.》

박수소리…

《2등, 토목과 4학년 히데오상.》

박수소리…

구진배는 아연해졌다. 1등과 2등을 받은 작품들은 자기것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것들이 아닌가.

아무리 《천황》페하께 충성을 맹세했다 해도 조선학생은 일본학생보다 앞설수 없다는 불문률을 구진배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3등, 토목과 3학년 구진배상.》

《예!》

그나마도 기뻤다. 박수소리가 터지려는 찰나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건 협잡이요!》

소리를 지른 사람은 김운상과 한학급에서 공부하는 일본인학생이였다.

《모형기중기는 김운상의것이요. 난 그걸 만드는걸 봤단 말이요.》

모두의 눈길이 김운상과 구진배에게 쏠렸다. 구진배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사실이 밝혀지면 명예는 고사하고 협잡군으로 몰리울 판이였다.

교무주임이 김운상에게 따져물었다.

《김운상, 그게 사실인가?》

구진배는 간이 콩알만 해서 운상의 입을 지켜보았다. 운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내건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인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것은 분명 운상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구진배도 덩달아 박수를 치며 옆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불었다.

그것으로 일이 끝났으면 좋으련만 운상이 다시 불집을 일으켰다.

《전 의견이 있습니다. 구진배군의 모형기중기는 다른것들보다 훨씬 우수한데 어째서 3등밖에 안됩니까? 조선학생이기때문인가요? 학원에서는 마땅히 진실과 진리만을 존중해야 할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조선학생들이 그의 말에 호응해나섰다.

교무주임은 운상을 노려보며 차겁게 뇌까렸다.

《무슨 잔말인가? 김운상, 너는 오늘부터 한달동안 정학처분이다. 그리고 구진배상의 모형기중기는 락선이다!》

구진배는 숨이 탁 막히는것 같았다. 그날 전시회는 결국 흐지부지되고말았다. 저녁에 그는 하숙으로 향한 운상을 붙어잡았다.

《가자구, 한잔하세.》

거리의 번화가에는 현란한 색등들이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길옆의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안은 빈 자리가 없을만큼 혼잡을 이루고있었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호경기를 맞은 군수산업체들의 덕분에 식당업자들도 벌이가 괜찮아진 모양이였다. 그들은 구석쪽에 겨우 빈 식탁을 하나 잡고앉았다.

술취한자들의 고함소리, 멱따는듯 한 노래소리로 소란한 가운데 기모노를 입고 악사석에 앉은 계집의 샤미셍소리가 끊길듯말듯 간간이 들려왔다.

구진배는 인차 혀가 꼬부라졌다.

《이 마사무네라는게 이상하단 말이요. 도수도 세지 않은것 같은데 어느새 취하거던. 하긴 일본민족자체가 이상한 족속이지. 이렇게 술도 약하고 음식도 달콤하고 계집도 나긋나긋하고 악기마저 저렇게 애간장을 녹이며 약한 소리를 내는데 사람들은 천하에 지독하거던. 그저 무슨 일에서나 앞자리를 양보할줄 모른단 말이요.》

그는 아직도 자기가 1등이 되지 못한게 알찌근했던것이다.

《운상군, 한가지 묻기요. 아까 왜 모형기중기가 내것이라구 거짓말을 했소?》

《존엄때문이야. 조선사람끼리 일본놈들앞에서 네거다 내거다 싸워야겠나? 그놈들이 조선사람을 얼마나 업수이 여기는가 오늘 봤지?》

구진배는 술잔에 남아있던것을 마저 들이키고 푸념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골받이를 해야 소용있소? 차라리 가만있었으면 3등상이라도 타는건데…》

구진배는 운상의 얼굴이 험악해진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중얼거렸다. 《지금 세상에 정의와 진리라는게 도대체 뭐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랬다구 월계관을 쓰면 그게 진리지. 이 소란한 식당에서 샤미셍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술취해서 부르는 노래소리도 들리는데 어느것이 진짜 음악이요? 도대체 세상의 온갖 소음속에서 진정한 진리를 가려들을수 있나 말이요?》

운상은 그의 넉두리를 더 듣고싶지 않은지 의자를 밀어제끼고 일어섰다.

《이보라구 진배,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것만도 원통한데 자존심마저 버리겠나?》

구진배는 운상의 뒤모습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래우다가 술병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보면 두사람은 인생에서 귀중한것이 무엇인가를 가르는 기준이 서로 달랐다. 구진배에게 있어서 존엄은 생존 그다음이였다.

지금도 구진배는 그때일을 돌이켜보며 김운상은 인생을 참 힘들게 살아갈 팔자라고 속으로 단정하였다.

운상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돌아왔다. 요새는 일이 바빠 공사장에서 숙식하댔는데 하숙집에서 친구가 기다린다고 누군가 알려주기에 우정 들어온것이다.

운상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구진배가 반가왔다. 옛날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해도 자기를 찾아온 고향친구를 랭대할 까닭은 없었던것이다.

《이게 얼마만인가? 어서 들어가자구. 들리는 말이 자네가 남조선에 나갔다던데?…》

구진배는 숨길 필요가 없어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지주였는데 별수 있소?》

《그러니까 지금 남조선에서 들어오는 길인가?》

《그렇소. 이것저것 볼일두 있구 친구들도 만나고싶구 해서…》

잠시후 두사람은 하숙어머니가 차려준 간소한 술상에 마주앉았다. 두부를 썰어넣은 남비탕과 마른 명태 몇마리가 상우에 올라있었다. 구진배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선배에 대한 도리를 지킨다면서 가지고온 술병을 꺼내놓았다. 한잔씩 마시면서도 구진배는 자기 정체가 탄로날것 같아 좌석이 편안치 못했다.

《난 김형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있을줄 알았는데…》

《이름은 고사하고 난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도 미처 못 끄고 전전긍긍하는판일세.》

운상은 구진배에게 수문설계로 인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자넨 토목을 전공했겠다, 평양이 고향이겠다, 그러니 보통강개수공사에 무관할수 없겠지? 자네가 한달만 빨리 나타났어도… 참.》

그때까지도 운상은 구진배의 아버지가 보통강토목공사의 리권을 절반이나 가지고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설사 알았다 해도 그는 구진배에게 뭐든 숨기지 않았을것이다. 그만큼 그는 구진배가 이 공사를 파탄시키려는 원쑤일수도 있다는데 대해서는 꼬물만큼도 생각지 못했고 그를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믿고있었던것이다.

구진배는 흥분을 애써 누르며 심상하게 말했다.

《나야 뭐 김형만큼 아는게 있소. 그래두 설계를 한번 볼수 있으면 좋겠구만.》

《왜놈들의 설계에는 수문자리에 무넘이제방을 쌓게 되여있네. 애당초 볼 필요가 없어.》

《그럼 그대로 하면 되지 않나?》

《안돼. 그러면 본래의 보통강은 장마철에만 물이 흐르는 병신강이 된단 말이야.》

《그래두 그게 수문보다는 안전하구 경제적으로도 리득일것 같은데… 좌우간 술이나 들기요.》

구진배는 자기가 알바 아니라는듯 잔에 남은것을 쭉 들이키고 화제를 돌렸다.

《그 얘긴 그만하구 김형은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이요?》

《어떻게라니?》

《여기서 김형이 뭘 하겠는가 말이요? 남조선은 미국의 원조밑에 일떠서겠지만 북조선의 미래는 어떻소? 지금 북조선에서는 맨주먹으로 나라를 세워보겠다고 하는데 이런 한심한 형편에서 현대 건축학을 공부한 김형같은 수재가 할 일이 뭔가 말이요? 차라리 나하구 같이 남으로 나갑시다. 서울에 가면 김형은 장차 조선의 건축가로 이름을 날릴거요. 저 보통강감탕판에 자기 재능을 묻을게 있소?》

운상은 구진배가 두말 못하게 눌러놓았다.

《그런 생각은 말게. 난 여기 평양에서 나의 리상을 실현하겠네.》

그래도 구진배는 실망하지 않았다.

《현재 이북에서는 공산쏘련의 본을 따서 프로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잡은 계급사회를 세우자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민주주의를 표방하고있지만 그들이 일본에 가서 대학공부까지 한 김형을 가만놔둘것 같소?》

그때에야 운상의 머리속에는 반동이란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구진배를 바라보며 직방 물었다.

《자네 나한테 왜 왔나?》

구진배는 아차- 하고 혀를 깨물었다. 몇잔 마신김에 너무 속도를 냈던것이다.

《난 그저 김형의 처지를 동정할뿐이요.》

만약 그때 김운상이 계급적원쑤를 가려볼수 있는 사상적준비가 되여있었다면 일이 다르게 되였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구진배가 반동노릇을 할만 한 재목은 못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오히려 자기가 너무 신경을 곤두세운것 같았다. 해방전에 풍청거리며 살다가 땅도 집도 다 떼웠으니 이북에 대한 감정이 좋을수 없겠지…

《자네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앞에서 이북정치를 시비하지 말게. 다시 그런 말 하면 좋지 않아. 그리구 평양에서 볼일을 다 봤으면 곱게 돌아가라구.》

운상은 큼직한 손으로 마른 명태껍질을 쭉쭉 벗겨서 그앞에 놓아주었다. 구진배는 마치나 자기 정체가 그렇게 발가벗기우는것 같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생각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운상을 쏴버리고싶었지만 그는 자신을 다잡았다. 그에 대한 처리는 공산정권에 맡기는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오늘 자기를 만났댔다는 사실만 폭로되여도 김운상은 공사장에 붙어있지 못할것이다. 결국 그의 존재는 공산정권하에서 지식인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세상에 폭로하는 선전물로 리용될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