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만들었던 한국의 역사교과서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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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의 중간제목은 ‘국가의 형성’이며, 그 아래 소제목은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다. 고조선이 청동기시대에 건국되었다는 뜻이다. 청동기시대가 된 후 국가가 세워진다는 것은 한국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독단이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해 창조한 이론인데, 한국 사학계의 주류는 아직도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건국됐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교과서도 이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국사 교과서 29쪽에는 “신석기시대에 이어 한반도에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15세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기원전 23세기에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한 반면, 국사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은 일반적으로 셋으로 분류된다. 이를 삼조선이라고 하는데,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그것이다. 국사 교과서가 위만조선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 살펴보자.
“고조선은 요녕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대부·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위만의 집권’이라는 소제목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국이 전국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중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국사 교과서에 처음 등장하는 고조선 임금의 이름은 부왕(否王)과 준왕(準王)이다. 이는 국사 교과서의 고조선사 인식체계가 혼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선 부왕과 준왕이 어디에 속해 있는 인물들인지 불분명하다.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부왕과 준왕은 단군조선에 속한 임금인가? 아니면 기자조선에 속한 인물인가?
중요한 것은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것은 동쪽에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자 모순이 생겼다. 중국 기록에 위만이 조선 왕이 되기 전에 조선에는 이미 부왕과 준왕이라는 임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왕과 준왕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인물인지 기자조선을 계승한 인물인지에 대해 국사 교과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위만조선 이전에 부왕과 준왕이 있었고,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위만조선 이전에 이미 조선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모두 부인한 채 마치 위만조선만 실재했던 것처럼 기술한 것이다. 국사 교과서는 위만조선이 사실상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용한 국사 교과서의 고조선 관련 부분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첫째,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때 건국했으므로 만주에서 건국했을 경우 빨라야 기원전 15세기, 한반도에서 건국했을 경우 빨라야 기원전 10세기 이상 올라갈 수 없다. 따라서 기원전 23세기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일연의 <삼국유사>는 결국 거짓이 된다.
둘째,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야 부왕·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나와 왕위를 세습한다.
셋째, 준왕은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중국의 고대 사서 <삼국지>에 고조선의 부왕과 준왕이 나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써주기는 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미아 같은 존재다. 단군조선의 후예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다음 구절을 보자.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국사 교과서는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조선전’을 근거로 해당 부분을 저술한 것이다.
먼저 <사기> ‘조선열전’을 살펴보자.
“조선왕(朝鮮王) 위만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왕(燕王) 노관(盧튷)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했는데, 1,000여 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 복장(?結蠻夷服)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上下휮)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만이(蠻夷), 옛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망명자(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王)이 되었으며, 왕검성(王險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국사 교과서 무슨 자료를 보고 썼나
한나라의 혜제(惠帝, 기원전 195~188) 때 고후(高后)가 섭정하면서 천하가 안정되자 요동태수에 의해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고, 주변 소읍들을 정복해 항복시키고 임둔과 진번도 와서 복종해 사방 수천 리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서> ‘조선전’의 내용도 거의 같다.
이 글을 볼 때 유의해야 할 점은 한나라를 중심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역대 기록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낮춰 기록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것도 자신과 싸웠던 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게 비하한다는 점이다.
<사기>와 <한서>의 조선 관련 기록은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왕 노관의 신하였다가 다시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이다. <사기>나 <한서> 기록만으로는 위만이 조선왕이 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삼국지> ‘동이열전’ ‘한(韓)조’에 더욱 자세한 정보가 등장한다. <삼국지>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더욱 자세한 사항을 기록한다.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으로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조선왕의) 자손(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弱化)되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조) 이 대목은 위만이 등장하기 전의 조선이 강성한 나라였음을 말해 준다.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중국인들이 고조선도 주나라의 한 제후국이었다고 강변하기 위한 대목에 불과하다.
<삼국지>의 내용은 연나라가 동쪽 고조선을 공격하려 하자 고조선왕이 역습하려고 했는데 고조선의 대부 예가 말리자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 후 조선왕의 후손이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조선왕의 후손이 교만’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조선의 세력이 강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진개가 “조선의 서쪽 영토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이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체가 3,000리이며 현재의 평안남도는 1만2,300여㎡로 200여 리에 불과하다. 당시의 리(里)와 현재의 리(里)가 약간의 차이는 나겠지만 2,000여 리를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했다면 고조선은 광대한 강역을 지닌 제국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부왕과 준왕이 등장하기 이전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사장시킨 채 위만이 정권을 빼앗은 다음 고조선이 강성해졌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이다.
고조선 서쪽 강역은 난하에서 시라무렌강까지
러시아의 고조선 연구자 유 엠 부친은 고조선의 강역이 서기 전 3세기까지 서남쪽으로는 베이징(北京) 위쪽의 난하(?河), 서북쪽으로는 내몽고의 시라무렌강 너머까지 이르렀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우리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을 한반도 내에 가두기 위해 애쓰고 있다. 또한 위만의 왕위 찬탈이 고조선을 크게 발전시킨 사건인 것처럼 쓰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을 부인한다.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에 대응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점이 생긴다.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가 속해 있던 은(殷)나라가 동이족의 국가였다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만, 이는 다음 일이다. 일제 식민사관의 잔영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국사 교과서는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동북공정의 논리적 오류를 반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은(殷)나라는 주(周)나라에 의해 기묘년인 BC 1122에 망한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일어서면서, 주나라 무왕(武王)은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箕子: 은나라 주왕의 숙부)를 풀어준다. 이때 감옥에서 풀려난 기자가 단군조선(壇君朝鮮)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실체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말이 나오게된 동기는 한(漢)나라때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근거한 것이다. <사기>를 인용하면, “무왕봉기자우조선 (武王封箕子于朝鮮)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때문이다.
기자조선이 허구(虛構)임은 다음과 같다.
남송(南宋)때 범엽이 지은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록에,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옛날 기자가 은나라의 운(運)이 다하여 조선으로 피했다”라고 되어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은 없다. <후한서>는 중국의 4대 사서(史書)의 하나다.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지은 ‘동이열전’에 의하면,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은나라 큰스승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단군조선)으로 피신해 살았다”라고 되어 있다. 기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은(殷)나라의 신하로, 은나라가 망하자 단군조선(壇君朝鮮)으로 피신한 것이다. 여기서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다.
기자가 은(殷)나라의 감옥에서 단군조선에 망명한 때는 BC1122 년경이다. 당시 단군조선은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으로 나뉘어 있었던 때이다.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번조선)에서 기씨(箕氏)가 왕 노릇한 것은 번한왕 74대중 69대인 기후씨(箕후氏: BC390), 70대 기욱씨(BC346), 71대 기석씨 ( BC321), 72대 기윤씨(BC296), 73대 기비씨(BC277), 그리고 74대 기준씨(箕準氏: BC243)로 기자(箕子)로 부터 기후씨까지는 약 730년의 연대차이가 난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단군조선 즉 번한(번조선)의 왕이 된 것이 아니고 ,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한후 약 730년이 지난 후에, 그의 후손인 기후씨가 번한의 69대 왕이 된 것이다. 따라서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의 왕이 된 사실은 없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이맥(李陌,1455~1528)은『 단군세기檀君世記 』를 쓴 고려 말에 문하시중(국무총리)을 지낸 문정공 행촌 이암(李嵓,1297∼1364)) 선생의 현손(고손자)이다.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으로 재등용되었는데 그 때 내각에 있는 비장도서를 읽고 단군이전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전하기 위해 『태백일사』를 저술하게 되었다.
이맥의『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한관경본기)의 기록를 보면,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蘇台壇君: BC 1337)이 나이가 많아 어지러워진 국정을 감당할 길이 없어, 종친인 서우여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다. 제22대 단군(壇君)이 된 색불루(索弗婁) 단군(BC1285)의 반란으로 좌절된다. 서우여(徐于餘)가 번한(번조선)의 30대 왕이 된다. 이때가 BC1397년의 일이다.
번한의 30대 왕인 서우여(徐于餘)는 기자(箕子)가 아니다. 약 163년간의 연대차이가 난다.
주(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사기>의 기록은 진실 (眞實)이 아니다. 번조선(번한) 땅에 대대로 살던 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인 기후가 쿠테타로 번조선 왕이 되어 6대를 내려가 기준(箕準)에 이른다. 연(燕)나라 왕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할 때, 노관의 부하 위만(衛滿)이란 자가 번조선에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壇帝)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번조선왕 기준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封)했다. 강도(强盜) 위만이 망명 온지 불과 3년만에 번조선을 멸망시킨다. 이때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 한(韓: 마한)의 땅에서 한왕(韓王)이 되어 자신의 성(姓)인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꾸고, 자신의 40대 조상인 기자(箕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며, 모든 기씨 조상을 한왕(韓王)으로 추존(推存)한다. 그리하여 기준(箕準)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가된다.
식민사학의 시작
평양 한사군 중심지 낙랑군의 탄생
현재 일부 사학계에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도발로 전개된 평양 일대를 한사군(漢四郡)의 낙랑(樂浪) 지역이라고 믿고 있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을사늑약 이후 한반도에 설치된 조선통감부가 세키노 다다시에게 평양 석암동의 전실묘와 고분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 조사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만철(滿鐵,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해당 지역의 철도를 인수하고 설립한 국책 기업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약칭)의 의뢰로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나타난다.
그는 만철의 지시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 시대의 고적 학술 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치고는 대동강 인근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며, 이 일대를 낙랑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조선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지화 정책을 펼쳐 나가면서 어떻게든 한국인의 의식 속에 식민의식을 심어야겠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한사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조선총독부로 한반도는 오랜 옛날부터 외국의 식민지였다는, 한 마디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논리를 주입시키려 하였다. 이런 시기에 도리이 류조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총독부에 기존의 '고구려 고적 조사 사업'을 '한대(漢代) 낙랑군 유적 조사 사업'이라 개칭을 건의 및 관철시키고,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게 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조사를 시작하여 우리 고대사 유적과 유물을 식민사관으로 해석과 조작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1915년 조선총독부는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 조선 반도사 편찬에 착수하여 3월 「조선고적도보」 발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고, 1919년 2월 「조선금석총람」을 발간하였다. 이들이 전하는 바는 하나같이 평양 일대는 낙랑군의 지배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으니 기자(箕子)라는 인물의 문제가 발생한다.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尙書大典)」, 「사기(史記)」 등에서 기자는 은 주왕의 그릇된 정사를 간쟁하다가 투옥되었는데,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석방시켜주었으나 기자는 주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동쪽으로 망명하여 조선, 즉 단군조선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상당수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한반도까지 왔다고 믿고, 조선과 중국을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는 소중화(小中華) 의식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동안 평양 지역에서 발굴한 중국계 유물들이 조선과 중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강해지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옛부터 왜인(倭人)이라 부르며, 섬나라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일본인의 통치에 반발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1916년 '조선 반도사 편성 요지 및 순서'에서 일선인(日鮮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인 사실을 분명히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 조항에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시라토리는 1894년 단군을 부정한데 이어서 1910년에는 “기자는 조선의 시조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기자는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마니시(今西龍)는 1929년에 <단군고>를 쓰면서 단군을 부정하였다.
이마니시는 또 시라토리가 기자를 부정한 12년 후인 1922년에 <기자조선전설고 箕子朝鮮傳說考>를 쓰면서 “조선에 전해지는 기자전설은 연구의 가치가 조금도 없는 전설(傳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이마니시 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 부터라고 서술하였다. 이는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한사군, 임나일본부, 조선총독부로 이어지는 식민지배를 주축으로 하여 일제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책략이었다. 이렇듯 평양 지역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으로 재탄생되었다.
이병도와 식민사관의 망령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이다. 이병도는 일본 역사 왜곡의 선봉장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제자로, 1927년 조선사편수회가 조직을 확대 정비할 때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로 들어가서 한민족 고대사를 왜곡하는 데 헌신적으로 기여한 자이다.
일제가 물러간 후 그는 이승만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일제 식민사학이 날조한 한민족사를 그대로 계승하거나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답습하였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이론異論 을 제기하는 학자는 무조건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역사 해석권을 독점한 그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득세하는 과정에서 이 땅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과연 어떤 지경에 처해 있겠는가?
민족사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아 부분적으로 시정되었지만, 이 땅의 2세들이 보는 역사 교과서는 여전히 일제 식민사학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는 고조선사는 알맹이가 빠진 채 10쪽 내외로 간략히 기술되고 있으며,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역사는 불교사와 유교사로 온통 채색되어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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