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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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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752회 작성일 15-12-1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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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7 회 )

 

28

 

장내를 둘러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이크를 밀어놓으시였다.

《나는 오늘 마이크 없이도 이야기할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발굴된 유적유물들과 그에 대한 여러 학자선생들의 분석자료를 보고받았습니다. 이번에 이룩된 성과는 우리 고고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나는 얼마전 개성에서 온 왕씨가문의 편지에서 충격을 받고 김석진원사에게 보라고 하였는데 과학원당조직에서는 그것을 당원들과 전체 과학자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과학자들속에서도 큰 반향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이번 발굴사업에서 큰 성과를 이룩한 과학원동지들에게 경의를 표시합니다.》

전체 협의회참가자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참가자들은 다시 앉았으나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일어서신채 연단을 거니시였다.

《이번에 이룩된 성과는 또한 력사연구에서 주체성의 원칙을 지킬데 대한 우리 당정책의 정당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과학자들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의 환호와 함께 열렬한 박수를 올렸다. 이것은 그이께 드리는 경의의 표시였다.

이윽하여 수령님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참가자들도 앉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마이크를 밀어놓으신채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나는 오늘 협의회에 당총비서로서가 아니라 력사에 관심을 가진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참가하려고 합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주관과 독단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단군에 대한 연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갑시다.

단군이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가, 수도가 평양이 옳긴 옳은가, 우리 민족이 문명시대에로 이행한 첫 모습은 어떠했는가. … 그사이 발굴사업과 분석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모든 결론들이 거의 종착점에 이르렀지만 한번 더 두드려봅시다. 나의 말에 다른 의견이 없으면 단군출생년대가 언제인가 어느분이 말씀하면 좋겠습니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인가?

김석진원사도 박진규도 그리고 이 학자들의 협의회에 참가한 부원장 리관직이도 설레이는 표정에 불타는듯 한 눈빛으로 서로 마주볼뿐이였다.

김정일동지의 조처에 따라 이 과학자협의회에는 리웅걸비서를 비롯하여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도 참가하고있었는데 회의뒤끝에 취해질 하나의 중요한 대책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보건대도 과학자들에게 할 말이 없는것 같지 않았다. 있었다, 그것도 누구나가 말할수 있는 명백한 대답이.

그러나 과학자들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것은 그 대답은 자기들이 아니라 물음을 던지신 바로 그분자신께서 찾으신것이기때문이였다.

과학자들을 대신하여 리웅걸이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수령님, 수령님에 의하여 단군유골이 발굴되고 그 문제가 과학적으로 밝혀지게 되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장내에는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올랐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긴 박수를 참을성있게 듣고계시다가 언짢은듯 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지 마시오. 내가 허심탄회하자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과학입니다, 과학! 단군연구를 이전부터 심화시켜온것도 과학자들이고 단군묘발굴을 발기한것도 여기 모인 사회과학자들속에 있습니다. 나는 그저 과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그 발기를 지지해주었을뿐입니다. 과학에는 절대로 감정과 의도가 섞여서는 안됩니다. 선생들의 견해를 내놓고 말하시오.》

김석진원사가 일어섰다.

《원사선생, 앉아서 말씀하시오.》

《예.》

《마이크를 쓰시오.》

원사가 마이크를 앞으로 당겨놓고 침착하게 말씀올리기 시작하였다.

《죄송합니다, 수령님… 이번에 단군의 출생이 기원전 3018년으로 판정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의 건국년대가 중국보다 앞설수 없다고 보면서 중국력사에서 전설적인물로 전해지는 요임금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단기원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아왔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고증된 단군의 출생년대에 비하면 이것은 사실보다 600여년이나 뒤늦은것으로 됩니다.

이로부터 단군이 20대에 국왕으로 되였다고 보고 단군이 출생한 기원전 3018년이후에 처음으로 되는 무진년 즉 단군이 25살되는 해인 기원전 2993년이 바로 단군조선이 건국된 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력사에서 제일먼저 건국되였다는 에짚트의 조기왕국(기원전 3000~2800)년과 거의 같은 시기이며 오늘의 이라크에 있었던 바빌로니아국가의 기원년대(기원전 2800년)보다는 100년이나 앞선것입니다. 또 중국력사에서 첫 국가라고 하는 하나라에 비해서는 800년이나 앞선것으로 됩니다. 그리고보면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제일먼저 문명시대에 들어선 민족으로 자랑떨칠수 있게 되였습니다.

우리 학자들은 이 경이적인 사실앞에서 감격을 금할수 없습니다.》

《그건 나도 같은 심정입니다. 우리 민족전체의 심정입니다. 오늘의 성과는 이 자리에 참가한 전체 선생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것입니다.

그럼 다음문제에 넘어갑시다. 단군이 어디서 출생했겠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학자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께서 먼저 말씀하시였다.

《나는 요새 한가지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그 가설이 맞겠는지 맞지 않겠는지 이 자리에서 해명해보자는것입니다. 지금까지 력사계에서는 고구려사람들이 동명왕의 유골을 가지고 오면서 원시조인 단군의 유골을 가지고 왔다고 보았는데 그것으로는 단군의 유골이 강동에 묻혀있는 원인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만일 고구려사람들이 동명왕의 유골을 가지고 올 때 단군의 유골을 묻었다면 왜 더 오래전에 죽은 단군의 유골은 있는데 동명왕의 유골은 없겠는가?》

김석진이 단군묘발굴을 철회할데 대한 편지를 올리면서 우려한 주요론거가 바로 이것이였다.

박진규가 일어서려고 하였다. 그는 장소가 장소였던만큼 볼품없는 지팽이를 가지고 오지 않아 의자등받이를 짚고 일어섰다.

김일성동지께서 얼른 말씀하시였다.

《박진규선생이군요. 앉아서 이야기하시오, 어서.》

《일없습니다, 일어서는게 더 편안해서 그럽니다.》

박진규가 고집스럽게 사양하고나서 말씀을 올렸다.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고견이 정말 옳습니다. 저희 학자들이 료동에서 발굴한 강상무덤과 루상무덤의 유골은 단군유골보다 훨씬 늦은 시기의것입니다. 5천년전에 료동에 묻었던 단군유골을 3천년이 썩 지나 평양지방에 내다 다시 묻고 천오백년을 보존한다는것은 자연지리적조건으로써는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즉 단군이 평양에 나서 사후 즉시 평양에 묻히지 않고는 유골이 5천년동안 보존될수 없습니다.

어버이수령님, 단군은 평양에서 나서 평양에 묻힌 평양사람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내심으로 무척 반가우시였으나 감정을 드러내놓지 않고 무표정하게 좌중에 대고 물으시였다.

《다른 선생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학자들이 각이한 속삭임과 표정으로 말없는 긍정을 표시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학자들이 한결같은 지지를 표시하자 침착한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내가 연구해본데 의하면 단군이란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박달족 또는 밝은 종족의 이름이란 일반적인 이름인데 후세에 한자로 박달나무 단자와 임금 군자를 붙인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지방에는 단군관계의 지명이 남달리 많습니다. 이러한 지명은 료동은 물론 조선반도의 어느 지역에도 없고 오직 평양지방에만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여기에 류의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인차 일어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장내를 둘러보시다가 《신지.》하고 부르시였다.

김석진원사가 진웅이 인민군대에 입대한 사실을 보고올렸다.

그이께서는 놀라운듯 원사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장가는 언제 가려고?》라고 하시였는데 그 말씀이 원사에게로가 아니라자신에게 하시는 물음처럼 들리였다.

원사는 가만히 서있을수 없었다.

《그 동무가 하도 열렬히 청원하기때문에 우리 과학원에서도 그의 결심을 끝내 꺾지 못했습니다.》

그이께서는 자신에게 말하듯 말씀을 이으시였다.

《미국때문에 우리 후대들도 화를 입고있소. 불행의 화근을 우리 대에 말짱 들어내자고 했는데…》

이때 김석진원사가 그이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한마디 덧붙였다.

《수령님, 박진규선생이 사위감으로 점찍어두고있습니다.》

《원사선생이나 박진규선생은 과학밖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김석진원사도 박진규도 그 말씀의 뜻을 리해하지 못하고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것도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당조직을 통해 보고받으신 진웅이와 박진규의 딸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시려다가 기본화제에로 말씀을 돌리시였다.

《진웅선생이 지명계통에는 박사였는데 그를 누가 대신합니까?》

《예.》

진웅이를 도와주던 로학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말씀하시오.》

《예, 단군의 명칭이 종족명칭과 결부되여있다는 어버이수령님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은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군대에 나간 진웅선생과 공동으로 연구해본데 의하면 그것은 단군출신종족이 해(하늘)신을 조상신으로 숭배한다는데로부터 자신들을 해의 후손 즉 천손으로 자부하며 밝은족 또는 박달(배달)족이라 칭하였고 자기의 임금을 하늘이 낸 임금이라는 뜻에서 밝은 임금이라 존칭하게 된 사정과 관련됩니다.》

로학자는 그이께 계속 설명해드리였다.

강동에는 박달곶촌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박달곶촌의 박달은 단군이 태여난 종족명과 같고 곶은 물가의 돌출지역 또는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을 이르는 말이며 촌은 마을을 가리킨다. 지명이 종족명으로 되고 종족명이 지명으로 되는것은 력사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옛지명에 박달곶촌과 같이 박달종족이 산 고장임을 증명해주는 다른 지명이 없다.

현재의 연구로써는 박달곶촌의 위치가 대체로 북쪽으로는 비류강, 서쪽으로는 대동강, 남쪽으로는 수정천을 경계로 한 지역을 포괄한다고 볼수 있다.

또한 단군이 태여난 종족의 이름과 관련된 지명으로서는 박달곶촌가까이에 있는 대박산을 들수 있는데 강동땅에 동서로 뻗은 대박산이 있다. 지명 박달곶촌, 대박산은 그밖의 단군관계지명, 전설자료들과 함께 단군의 출신종족이 강동의 대박산일대에 살았다고 볼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단군의 출생지는 구체적으로 평양근교의 대박산부근으로 인정된다.

로학자의 설명을 귀담아듣고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젊은 연구사가 참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댔다고, 그의 연구가 응당한 결실을 맺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음 좌중에 대고 량해를 구하며 앞탁에 놓여있는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드시였다.

《교환수동무, 최고사령관을 찾소.》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그이께로 집중되였다.

긴장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김일성동지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나 김일성이요. 작전탁을 뜨지 못하고있구만. … 한가지 부탁하자고 하오. 사회과학원에서 최근에 인민군대에 입대한 신진웅이란 언어학자가 있소. 물론 그의 소행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그를 소환해줄수 없겠는가 해서 전화를 하오. … 아니, 그렇지 않소. 최고사령관의 동의를 받아야지. 군사야말로 국사중의 국사가 아니요. 하지만 말이요. … 그렇소, 그렇지… 고맙소! 부대번호?》

김일성동지께서는 송수화기를 드신채 좌중을 바라보시는데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있다.

《일없다구? 그럼 됐소, 고맙소!》

송수화기를 놓으신 그이께서는 모든 과학자들의 가슴을 울린 전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듯이 극히 평범한 어조로 중단되였던 화제를 계속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지명의 유래까지 밝혀지고보니 단군의 출생지가 평양인것이 더욱 명백하다고 하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단군의 출생지가 밝혀짐으로써 첫째로는 단군릉이 대박산기슭에 있는 리유와 그것이 후세에 오래동안 보존된 까닭이 설명됩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죽으면 고향에 묻히는것을 풍습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단군릉이 대박산기슭에 있는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시기에 개건되여 오늘까지 있는것도 일반적으로는 원시조 단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숭배심에 기인된다고 할수 있겠지만 중요하게는 단군후손들이 후세에 오래동안 이곳에 살았기때문에 단군숭배의 사회적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개건되고 보존될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어서시여 연단을 다시 걷기 시작하시였는데 얼핏 보기에는 장시간 앉아계신 후과로 운동삼아 하시는것 같았지만 내심은 몹시 흥분되여계시였다.

그이의 음성이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소리보다 더욱 높았다.

《둘째로》하고 그이께서는 다시 강조하시였다.

《고조선이 평양을 수도로 하였던 리유가 명백해지는것입니다!》

그이의 음성이 쩌렁쩌렁 계속 울리였다. 최근년간에 이렇게 높으신적이 없었다.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기때문에 고구려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고려의 태조인 왕건도 평양을 매우 숭상하였다. 그는 나라를 세울 때 수도를 개성에 정하면서도 평양을 《대업만대의 땅》이라고 하면서 매우 중시하였다.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로 보면 료동지방이 우리 조상의 땅이였다는 근거를 잃게 될수 있다고 하는데 고조선때와 그후 발해때까지 중국 동북지방을 우리 조상이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은 얼마든지 증명할수 있다.

중국의 녕안지방과 심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중국말로 《꼬리청》이라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의 성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보면 중국의 녕안지방을 비롯한 동북지방을 고조선의 후손들이 오래동안 차지하였고 그들이 거기에 많이 산것만은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고구려시기에도 만리장성계선까지 고구려조상들이 차지하고있었다.

사대주의에 물젖은 일부 사가들이 고구려의 력사가 중국의 진나라 력사보다 뒤떨어졌다고 보았는데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전에 모택동과 주은래도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고구려군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쌓은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은것만 봐도 그 일대까지 고구려군사가 진출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단군이 평양에서 고조선을 세우고 북방으로 국세를 늘여나갔으며 그의 계승국인 고구려 또한 옛조상의 땅을 오래동안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이 력사의 진실이다.

이러한 진실이 지금까지 오도된것은 료하지방의 문화가 평양지방의 문화보다 앞서 발전하였다는것, 고조선의 수도가 료하의 왕검성이였다는 틀린 력사자료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평양의 문화가 료하의 문화보다 훨씬 앞섰다는것이 명백하게 증명되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고고학, 력사학의 대단한 승리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자리에 앉으시였다.

그러시고는 조금도 쉬임없이 화제를 돌려 다음이야기로 넘어가시였다.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로 보면 중국이나 일본사람들이 말하는 평양지방의 락랑이 한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에 말려든다는 문제인데 말하자면 〈한사군〉문제입니다. 선생들이 제기한 문제이기때문에 나의 견해를 말하겠습니다.》

학자들이 급히 받아쓸 자세를 취하는것을 보신 그이께서 《나는 리론가가 아니고 력사가도 아닙니다. 뭐 요란한 이야기를 할것도 없는데 선생들이 적을 필요가 있겠습니까?》하고 웃으시였다.

학자들은 따라웃으면서도 원주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이께서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력사기록에는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사군〉을 어디에 설치하였는가 하는것은 자세히 밝혀져있지 않습니다. 지난날 일제어용가들이 우리 나라 력사를 외곡하면서 〈한사군 재평양설〉을 많이 떠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나라의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와 평양지방을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은 리치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력사적으로 보면 한나라때에는 수군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의 군사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평양지방을 오래동안 통치하면서 왔다갔다했다는것은 거짓말입니다. 당나라군사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백제땅에 들어가 신라와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후 고구려를 친것은 사실이지만 한나라가 평양지방의 락랑을 완전히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억측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나는 모든 력사적사실로부터 출발하여 단군이 평양지방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며 평양을 수도로 정하고 고조선을 세운 다음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령토를 료동지방까지 확장하였고 마지막에 평양에서 죽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한사군〉문제를 어떻게 보겠는가? 〈한사군〉과 관련한 유적유물들이 료동지역에 있는것만큼 락랑군은 고조선의 부수도였던 왕검성근방에 설치된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코 평양지방에 있은것은 아닙니다!》

협의회는 끝난듯싶었다.

허나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안경을 벗어 수건으로 천천히 닦으시면서 이따금 《선생들,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하고 반복하시였다.

이윽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안경을 닦으시면서 《김석진원사선생.》하고 부르시였다. 김석진이 일어서자김일성동지께서는 앉으라고 권하시지도 않고 인차 말씀을 떼지도 않으시였다. 참가자들전체가 저으기 긴장해서 그이를 우러르고있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원사선생?》

대부분 참가자들은 수령님의 물으심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하였다.

원사만은 그 물으심의 의미를 알아차리였다.

이젠 《단군릉발굴보고》를 공포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이시였다. 허나 원사는 그이의 사색이 어린 표정을 보고 주춤하지 않을수 없었다. 분명 그이께서는 아직 미흡한 점이 없는가를 따져보고계시리라.

《일본에서 학술토론회가 언제 있었던가요?》

그 말씀을 듣고 원사는 지금 그이께서 매우 심사숙고하고계신다는것을 더욱 확고히 믿게 되였다. 그 학술토론회는 최근에 있었는데 거기에 참가했던 원사는 아직도 우리의 력사가 여러 측면에서 도전을 받고있다는것을 알고 그이께 보고드렸던것이다. 이제 또 어떤 도전이 있을것인가.

김석진원사는 지금 그이께서 그 도전들을 생각하고계신다는것을 알았다.

《우리는 조상들에게 또 후손들에게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 해야 합니다. 단군시기 유골을 적어도 몇개만이라도 더 찾을수 없겠습니까?》

그 한마디의 말씀은 학자들의 가슴에 깃들고있던 안정을 단번에 깨뜨려버리였다. 단군유골을 찾고 그에 기초하여 고대조선력사를 완전무결하게 정립할수 있다는 환희의 감정과 함께 학자들의 가슴에 잠재해있던 위구를 그이께서 먼저 두드리신것이다.

그때의 유골로서 왜 단군유골 하나만이 5천년동안 남아있는가? 단군연구를 심화시키는 과정에 매 과학자들의 가슴에 걸리는 문제였다.

《적어도 한두개는 더 찾아야 합니다. 순장무덤이면 더 좋고… 이것은 학술적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입니다.》

순간 김석진과 박진규뿐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수령님께서 단군릉발굴과 관련하여 올린 석진의 편지 머리에 써보내주신 그이의 친필을 머리속에 떠올리였다.

《…당의 권위우에 민족의 권위가 있습니다. …》 그 친필을 쓰신 수령님께서 지금 민족의 이름으로 학자들에게 요구하신다.

인민의 지향과 념원을 가장 높은 경지에서 체현하고 민족의 존엄과 리익을 최고의 높이에서 대변하고계시는 수령님께서 학자들에게 하시는 요구이다.

허나 학자들은 여전히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있었다.

한동안이 지나서 《수령님, 걱정마십시오. 저희들은 수령님께서 바라신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것입니다!》라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는 침묵속에 잠겨있는 만장에 어딘가 귀에 설게 들리였다.

박진규는 그 목소리의 임자가 리관직임을 알아차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를 잠간 응시하시였다.

그러나 인차 외면하시였다. 그이께서 침묵을 지키고있는 대부분 학자들에게 더 주의를 돌리신다는것이 알렸다.

그이께서는 쉽게 하는 대답보다 힘들게 하는 대답을 더 좋아하시였던것이다.

드디여 박진규가 불편한 몸을 세우며 일어섰다.

《수령님… 찾아보겠습니다.》

리관직이와는 대비도 안되게 낮은 목소리였다.

 

×

 

승용차행렬이 달려가고있었다.

민족의 아들,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신 김일성동지께서 민족의 원시조의 릉을 웅대히 개건할데 대한 구상을 안고 당중앙위원회 일군들과 함께 새로 잡은 릉터를 향해 가고계시였다.

저기 대박산이 눈앞에 다가오고있다.

김석진이와 박진규는 그이의 량옆에 앉아있었다.

협의회가 끝나고 돌아가려는 때에 그이께서 두사람을 자신의 승용차로 불러들이시였다. 두사람은 좀처럼 차례지기 쉽지 않은 행운에 어마지두 놀라 차에 오르긴 했으나 아무런 선통도 없었으므로 어디로 가시려는지 모르고있다가 차가 강동쪽도로에 들어서는것을 보고서야 목적지를 짐작하였다.

두사람은 며칠전에 그이를 모시고 이미 있던 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로 개건할 단군릉의 터를 잡았다. 뒤에 대박산이 병풍처럼 둘러서있고 앞으로는 수정천과 넓은 벌이 있는 풍수로 보면 명당자리였다.

차는 그 릉터앞 로상에 먼저 와있는 어떤 승용차가까이에 가서 멎었다. 그 차곁에 서있던 사람이 그이의 승용차를 보고 다급히 다가왔다.

김석진과 박진규는 그 사람이 정무원책임일군임을 알아보았다. 《선생들은 여기 좀 앉아계시오.》하며 차에서 내려서신김일성동지께서는 차안을 향해 다시 말씀하시였다.

《내가 저 사람과 흥정을 해야 할 일이 좀 있소. 흥정은 사람이 많으면 잘 안되는 법이지.》

두사람은 차문을 닫고 차창을 통해 정무원책임일군을 만나시는 그이를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승용차에 자기들을 그냥 앉혀두는것을 보고 그이께서 어디로 데리고가시려는지 몰라 궁금했으나 당장은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였다.

차안에서는 밖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 책임일군앞에서 손세를 써가며 말씀하시는 그이의 모습만이 안겨왔다.

어지간히 시간이 흘러서야 그이께서 돌아오셨는데 좀 흥분하신 표정이였다.

그이께서는 《흥정이 그만하면 잘 된셈이요.》하시면서도 머리를 저으시였다.

《처음엔 저 사람이 깍쟁이를 부려서 말이 길어졌소. 하지만 그도 나라의 땅을 처음 잡은 시조를 위한 일인데 땅 몇정보가 그리도 아까운가고 박아주었더니 손을 들고말았소. 허허…》

그제야 두사람은 그이께서 며칠전 릉터를 잡으면서 농경지가 없어지는데 정무원에서 속을 앓을거라고 말씀하시던 일이 상기되여 방금 무슨 《흥정》이 있었겠는가를 알아차렸다.

《자금문제는 어떻게 되였습니까?》석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것도 그이께서 말씀하시던 문제였던것이다.

《그것도 잘되였소. 저 사람이 다 내놓겠다고 했소. 리웅걸비서더러 남아서 좀더 토론하라고 했으니 우리는 그만하고 갑시다.》

그이께서는 가볍게 말씀하시며 운전사의 잔등을 건드리였다. 그러자 차가 쾌속으로 움직이였다. 차는 오던 길을 되돌아 얼마간 달리다가 우측으로 갈라진 좁은 길로 꺾어들었다. 공원의 구내길과도 같은 정갈한 포장길을 따라 한참 골짜기로 들어가느라니 생각밖에도 큰 호수가 나지고 호수기슭을 따라 몇채의 휴양각이 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비로소 두사람을 데리고 가는 목적을 알려주시는것이였다.

《우리가 얼마전에 왕건릉개건을 끝내지 않았습니까. 그후 나는 선생들도 알고있는 개성할머니의 편지를 또 받았습니다. 편지는 손자가 쓴것이지만 거기에는 할머니의 마음이 적혀있었습니다. 뭔가 하니 나에게 감사하다고 술을 붓겠다는거지요. 손자가 펄쩍 뛰는데도 할머니는 아니다, 너는 수령님께 아뢰기만 해라, 그분께서는 이 늙은이의 소원을 꼭 받아주실게다. … 그러니 어디 거절할수 있겠더라구요.

나는 할머니를 평양에 모셔다가 거리구경도 시키고 휴양소에서 며칠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가서 할머니의 술잔을 받아봅시다. 허허…》

그이께서 소탈하게 웃고계셨으나 두사람은 따라 웃지 못하였다. 할머니의 마음이자 자신들의 마음, 인민의 마음이였다.

얼마후.

개성할머니가 첫잔을 올렸을 때 그이께서는 그 잔을 김석진원사에게로 돌리며 할머니에게 말씀하시였다.

《할머니, 이 잔을 저분들에게 먼저 드리십시오. 수고한건 저 학자선생들입니다.》

김석진이 큰일 났다고 일어서서 손을 내젓고 개성할머니 또한 할머니대로 그이께 올린 잔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효자로 떠올리고있지만 나의 효성이 따르지 못하고있습니다. 왕건릉개건도 때늦은감이 있고 원시조릉은 이제 시작입니다. 일을 더 잘하겠습니다.》

그리고 잔을 내시였다.

김석진이와 박진규가 차례로 할머니의 술잔을 받은 다음 김일성동지께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큰 잔에 손수 포도주를 부어들고 일어서시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라에는 영웅동, 부모에게는 효자동이 되라는 노래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시다보니 효성을 바칠 기회를 잃고말았습니다. 오늘은 할머님이 나의 부모님을 대신해서 이 잔을 받으십시오.》

《원, 이런!》

그이의 술잔을 받아든 로파의 나이들어 말라버린 두눈에 눈물이 함뿍 고여서 방울방울 굴러떨어지고있었다. 로파는 어깨를 떨며 술절반, 눈물절반을 삼키였다.

그다음 로파는 허리춤에 차고온 큼직한 비단주머니를 떼내여 그이앞에 내놓았다. 거기에는 금붙이로 된 여러점의 패물들이 들어있었다. 족보와 함께 대대로 내려왔을 고려시기 왕족들의 치레거리들이였다.

《이게 몇푼어치 되겠습니까만 받아주시오이다.》

패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난 김일성동지께서는 기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이건 돈으로 계산할수 없는 국보들입니다. 력사박물관에 전시하고 후손들이 조상의 명복을 빌게 합시다!》

《그렇다니 이젠 죽어도 눈을 감겠소이다!》

《돌아가시긴 왜 돌아가신단 말입니까. 우리 함께 오래 살면서 원시조릉이 개건되는걸 봅시다!》

며칠후 김일성동지께서는 개성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와 그 가족에게 자신의 명의로 된 선물을 들려보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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