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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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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514회 작성일 15-12-1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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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6 회 )

 

26

 

평양역 널다란 려객홈은 군사복무를 탄원하여 입대하는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 친척, 친우들과 함께 일하던 직장사람들로 인파를 이루었다. 군인 한명에 열명, 스무명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켜 돌아가는 모양이 흡사 날바다에 동시에 일어난 수많은 소용돌이를 련상시켰다.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라!》라는 대형구호판이 려객홈의 한쪽면을 차지하고있었고 《신입병사들을 열렬히 환송한다!》라는 구호들이 려객렬차의 방통마다 나붙어있었다.

떠나는 군인들에게 사람들이 무엇인가 군용배낭에 넣어주고있었다. 로병인듯 한 어떤 로인이 공화국기발을 넣어주는데 보매 그 기발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포연에 끄슬린 기발 같았다. 군인들을 싣고갈 렬차의 지붕에도 위장망이 덮여있었다.

떠나는 군인들속에는 진웅이도 있었다.

신지글자연구에서 중요몫을 맡고있는것만큼 그의 입대를 사회과학원 당위원회에서는 신중히 토의하였으나 진웅의 완강한 주장을 굽힐수 없었다. 나이가 많다고 기웃거리던 해당 부문 일군들도 진웅의 진정어린 제의에 감동되고말았다.

탄원서를 낸 후에 그는 고향 강동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진웅이가 대학때 불치의 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간 뒤 아버지는 혼자몸으로 농사일을 하고있었다. 이제는 나이가 지나 쉬여도 되련만 아버지는 농장부업반에서 일손을 놓지 않고있었다.

입대탄원서를 쓰면서 제일 마음에 걸린것이 아버지였다. 이제는 며느리를 맞아 손자를 놓고 즐겨야 할 여생인데 자기는 아직 장가를 안갔을뿐더러 이제 군대에 나가게 되면 아버지의 기대는 또 몇년으로 늦어지게 될것인가.

진웅의 아버지 신영균은 오래간만에 집에 온 아들을 위해 오후한겻을 꼬박 바치였다. 닭도 잡고 떡도 쳤다. 진웅이가 만류했으나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생의 말년에 아버지의 소원은 손자를 안아보는것이 아니라 아들인 진웅이가 력사연구에서 한몫 하여 자기의 지난 시절의 잘못을 씻어주는것이였다. 그 아들이 고조선의 신지글자연구를 주제로 잡고 심혈을 기울여 론문을 완성함으로써 어버이수령님을 직접 만나뵈왔으며 그이께 다소나마 기쁨을 드리였다고 한다. 영균은 생의 여한이 말끔히 가셔지는것 같았다.

《박진규선생은 잘 계시냐?》

밥상을 마주하고 진웅이가 술병을 꺼내들었을 때 영균은 물었다.

《예.》

《그 선생이 끝내 민족앞에 큰일을 했구나.》

진웅이만이 아버지의 고민을 알고있었다. 단군릉발굴로 하여 아버지의 죄책감은 더 커졌던것이다. 바로 아버지는 30년전에 그 릉을 허황한것이라고 하면서 추석에 낫을 들고 나선 박진규선생을 문제시하였고 그때문에 한생을 자책속에 살아오고있다. 만약에 이번 발굴에서 그 무덤이 실지로 우상에 지나지 않았다는것이 판명되였더라면 아버지의 그 죄스러움이 한결 덜어졌을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발굴이 시작되기 전날에 남모르게 그곳을 찾아와 부디 성과가 있기를 념원했던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자기에게 말했다.

《조상을 욕되게 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씻을수 없는거다.》

아버지는 지금 자기가 저지른 죄를 수령님께서 씻어주셨다고 믿는것이다.

아버지도 역시 혈육과 혈통과 조상앞에 경건한 한 가정의 성원이고 이 나라의 공민인것이며 민족의 한 성원인것이다.

진웅은 아버지앞에서 탄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저, 아버지, 전 인민군대에 탄원했습니다.》

아버지의 술잔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한참만에 그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는데 그답지 않게 술 한잔을 단숨에 내였다.

천천히 저가락을 상앞으로 뻗치며 신영균은 입을 열었다.

《네가 과학을 전공하도록 떠밀어준 아버지로서 아들이 한다하는 연구사가 된 오늘 한가지 아쉬운것이 있었다. 그것은 너에게 고생을 못시켜본것이였다. 사람은 고생을 겪어봐야 진짜사람 구실을 할수 있다. 특히 군대물을 먹어봐야 한다. 그런데…》

진웅은 머리를 수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듣고있었다.

《네 나이가 너무 늦지 않았니. 이제 군사복무를 한다는게 헐치 않을거다.》

《아버지, 아버지도 자신의 잘못을 씻기에 늦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저를 오늘 이렇게 박진규선생곁에 세운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일손을 놓지 않고있는것이고…》

《그래, 네 말이 옳다.》

영균은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진웅이가 떠나올 때 그는 《늦어서 떠난 길은 다우쳐 가야 한다.》라고 한마디 당부를 하였었다. …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진웅이도 여러 겹의 사람들로 둘러싸여있었다. 제일 안쪽 그의 가까이에는 과학원처녀들이 서있었다.

고성기에서는 전시가요가 울리고있었다.

 

                                      가슴에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니

                                      영예로운 별빛이 머리우에 빛난다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인민의 조국을 지키자 목숨으로 지키자

 

이때 역홈지붕을 고이고있는 커다란 원형기둥뒤에서 몸을 숨긴채 이 광경을 바라보고있는 처녀가 있었으니 그는 례영이였다.

발차를 알리는 기관차의 기적소리가 역구내에 길게 울려퍼졌다. 뒤늦게 나와 바래줄 대상을 미처 찾지 못한 사람들이 들고나온 물건을 맞다들리는 아무 군인에게나 서슴없이 쥐여주었다. 례영이도 들고나온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에게나 쥐여줄것이 못되였다.

기관차의 기적소리가 연거퍼 울리자 례영은 결심하였다.

만나자! 만나서 따뜻한 말로 바래주자.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을 바래주는거야 누구나의 권리이고 의무가 아닌가. 허나 다음 순간 그는 자기가 그런 권리와 의무조차 잃은 가련한 존재임을 의식하였다.

그의 검고 큰 두눈에 핑하니 눈물이 고였다. 눈물속에 바라보니 진웅이 렬차에 오르려고 하고있었다.

례영은 황급히 인솔자인듯 한 상위의 령장을 단 한 군관에게 자기의 편지를 넘겨주며 이미 렬차에 올라 환송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있는 진웅이를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였다.

인솔군관이 승강대에 올라 그것을 진웅에게 넘겨주는것을 보고난 례영은 비로소 기둥뒤에서 나왔다. 그리고 머리를 짧게 깎고 빨간 령장이 달린 새 군복을 입어서 10년은 더 젊어보이는 진웅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렬차가 떠나고 사람들도 흩어져간 텅 빈 역홈에 처녀는 오래도록 홀로 서있었다.

 

27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중부 철원쪽에서 이른바 《정형고지전투》라는것이 있었다.

이 전투는 저락된 《유엔군》의 사기를 돋구기 위해 미군이 세계보도진을 데려다놓고 벌린 하나의 시범전투였다. 이때 적의 최신예전쟁장비들과 유생력량에 비해 아군의 방어력량은 그리 많지 못했다. 특히 포병무력은 거의 없는 형편이였다.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께서는 포병부대들을 긴급출동시키시였다.

초저녁에 기동한 부대가 새벽까지 전투현지에 가닿지 못하면 이 전투에서의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적의 군사적의도를 충족시켜주는 결과가 빚어질것이며 전쟁형세가 아군에게 불리해질수 있었다. 전쟁시기 제일 속을 태운 때라고 그이께서는 자주 회고하시였다.

이번에 벌린 과학자들의 발굴전투때에 바로 그러하시였다.

어떤 출토품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정작 출토품이 나오자 또 다른 근심에 싸이였다.

후날 단군조선문제가 해결된 후 그이께서는 《정형고지전투》때만큼 속을 태웠다고 말씀하시였다.

어째서 그러하시였던가.

객관적으로 볼 때 출토품들은 옛기록들 특히 이웃나라의 력사기록들을 많이 부정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린방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력대로 력사위조의 명수들인 일본의 학계는 저들의 정략적목적밑에 아직도 고대조선의 력사를 외곡하고있으며 많은 글을 써서 세계에 뿌리고있다. 이에 동참하고있는 남조선의 학자들도 영향력을 미치고있다.

우리 과학자들은 출토품이 나올 때마다 환희와 기쁨에 넘쳐있었으나 그이께서만은 이러저러한 문제에 류의하시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이윽고 그이의 눈길이 책상우에 쌓여있는 중국의 옛책들에 가닿았다. 순간 중국의 주은래의 얼굴이 떠오르시였다.

해박한 력사지식을 가지고있었지. …

책임서기 전기철을 불러 주은래의 사진이 있으면 몇장 가져오라고 이르시였다.

전기철이 몇장의 사진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이께서는 그 사진들을 한장한장 들여다보시다가 전기철에게 의문스러운 눈길을 던지시였다.

《그 사진이 있을텐데?》

《수령님, 무슨 사진을 찾으십니까?》

《아, 그렇지. 그때 사진을 못찍었지.》

그이께서 아쉬워하시는것을 보고 전기철이 미안해하였다.

《내탓이요, 내탓이야. 그때 한장 찍어두는걸 그랬어!》

1960년대초 주은래는 중국의 당과 정부의 위임을 받고 진의외교부장과 함께 우리 나라를 공식방문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셨지만 그가 도착한 첫날 초대소에 직접 찾아가시여 그를 만나주시였다. 중국의 미남, 남달리 짙은 눈섭과 그밑에서 예지롭게 빛나던 눈동자, 자신의 손을 잡고 건강에 류의하셔야 한다며 조중친선의 력사에 대하여 피력하던 그의 다정한 음성이 귀전에 지금도 쟁쟁하다.

김일성동지, 동지께서 건강하셔야 사회주의동방초소가 튼튼해집니다.》

《고맙습니다, 주은래동지!》

주은래는 자기 나라에서 가지고온 남방과일 한개를 집어 손수 권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성의가 고마와 귤 한알을 다 잡수시였다.

《변변치 않지만 받아주시여 감사합니다.》 주은래는 기뻐하며 그이의 손을 한참 잡고있다가 진지한 어조로 한마디 하였다.

김일성동지, 지금의 자리는 공식적인 회담의 좌석도 아니니 허물없이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부탁할 일이라던가…》

《허허… 공식회담을 위해 온 동지에게 부탁은 무슨?》

《괜찮습니다, 이런 호젓한 기회가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은래동지의 진심을 믿고 한가지 속생각을 털어놓지요.》

《예, 어서…》

그때 김일성동지께서는 백두산천지와 압록강상의 적지 않은 섬들에 대하여 털어놓고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 나라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사이에도 계산은 바로 해야 한다는…

조중인민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섞여살았고 다같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보니 나라지경문제에 관심을 돌릴 사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기 자주독립국가가 섰습니다. 지경문제에서 선을 똑바로 세우지 않으면 국가간에 오해가 생길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더구나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성산이지요. 제 귀국하여 토론하겠습니다.》

《그래도 좋겠지만 이런 문제는 제창 락착짓는게 더 좋을것 같습니다. 더구나 동지께서 중국의 당과 정부를 대표하여 온 걸음이고 외교부장도 같이 온것만큼 여기서 결론 못할 일이 없을줄로 압니다.》

주은래가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벼운 표정으로 주은래를 안내하여 휴계실로 나오시였다.

두분께서는 해빛이 잘 드는 휴계실의 포근한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참, 제가 먼저 감사를 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력사학자들의 사업을 도와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사의를 표합니다.》

우리 력사학자들이 중국당의 방조하에 세차례에 걸쳐 료동에서 조사발굴사업을 진행한적이 있는데 그때 주은래는 우리 나라 력사학자들을 직접 만나주었고 그들과 장시간 담화도 나누었다고 한다.

우리 학자들은 돌아와서 김일성동지께 주은래의 다문박식한 식견을 두고 칭찬을 많이 하였다.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주은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다고 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력사적으로도 그러하였는데 세시기로 나누어볼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 량국과 두 민족의 력사적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침략을 받았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되였을 때이다. 이 시기 중국과 조선은 한전호에 선 혁명적인 전우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모두는 사회주의국가이며 형제당, 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시기 두 당, 두 나라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 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가 있다. 력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두 나라 력사학자들의 일대사변이고 응당 해야 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 할 일이다.

제1시기는 력사기록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관계는 제국주의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천~4천년이상 긴 기간이였다. 이러한 력사년대에 대한 두 나라 력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닥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옛중국의 력사학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대국배타주의)의 관점에서 서술한것이 주요원인이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래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료하, 송화강류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료하와 송화강류역, 두만강류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경박호부근에는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곳은 발해의 수도였던것이다. 민족의 력사발전을 연구하는 좋은 방법은 출로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것이다. 서적상의 력사기록은 믿을만 한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어떤것은 당시사람이 쓴것이지만 관점이 틀렸을수도 있고 또 어떤것은 외곡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을수도 있기때문이다. 력사책은 력사연구에서 2차적자료일뿐이다. 이러한 력사자료를 연구하려면 중조 두 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중세에 중국은 항상 봉건대국주의태도로 조선을 대하면서 조선을 침략한 례가 많았다. 중국의 력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외곡했고 심지어 조선민족은 《기자자손》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진, 한나라 이후 빈번히 료하류역으로 진출했는데 이것은 전쟁에서 실패하자 그냥 돌아갔을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르었고 또 실패했으나 조선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조선의 훌륭한 장수 연개소문이 침략군을 무찔렀다. 고구려후로는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거란족과 녀진족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다들린 문제는 거란족(료나라)과 녀진족(금나라)의 중국본토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골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 역시 조선을 침략했지만 결국 멸망했다.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진행했으나 만주족이 빨리 봉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료하류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다만 이런것들은 력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 한다.

력사는 외곡할수는 없다.

압록강, 두만강 북쪽은 력사이래 중국땅이였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였다는 말은 황당한 이야기이다. 봉건시대에는 중국에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상당히 강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오면 그것을 조공이라고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우호교류를 할 때에도 그들이 알현하러 왔다고 하였다.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를 할 때에도 그들이 자기들의 신하로 복종하여왔다고 하였으며 중국에 대해 천조, 상방으로 칭했다고 했다. 이것은 매우 불평등한것이였다. 모두 력사학자들의 붓끝에서 나온 오유이다. …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은래와 함께 조중관계의 제2, 제3시기의 력사에 대해서와 평등과 호혜, 자주성의 원칙과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원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우리 나라 력사기록자들도 잘못이 많다. 옛중국학자들이 대국주의관점에 섰다면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사대주의적관점에 서있다.

지금 쓰고있는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중국의 요임금의 원년과 대비하여 정하였는데 그것은 잘된것 같지 않다. 우리가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정하면서 오랜 력사국인 중국의 력사와 대비하여 정할수 있겠지만 중국의 건국년대보다 늦게 정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중국의 원시조는 헌원황제일것이다. 아직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있는것 같은데 우리도 원시조인 단군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있다. 이것이 우리 학자들의 숙제이다.

중국은 헌원을 원시조로 하여 자기 력사를 쓰고 우리는 단군을 찾아 자기 력사를 쓰면 될것이다. 여기서 건국년대가 누가 앞서고 누가 뒤서고가 문제로 되지 않을것이다. 이것이 력사의 진실이다.

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력사를 보면 춘추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이 나라를 지배했으나 제후들의 세력이 강해져서 주왕실을 형식적으로 인정하고 받든다고 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는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여러개 나라로 분렬되여있었다.

중국에는 춘추시대이후 전국시대가 시작되는데 그때 패권을 쥐기 위한 싸움을 많이 벌렸다. 이 과정에 7개의 제후국이 진시황에 의하여 통일되였다. 중국은 진시황때 통일되였고 우리 나라는 단군조선때부터 동방의 강국으로 위용 떨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에 물젖은 우리 나라의 일부 력사가들은 고조선의 건국년대가 중국보다 앞설수 없다는것을 기정사실화해놓고 요임금의 즉위년도와 비슷하게 정하였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것이다.

주은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였다.

주은래는 중국인민의 경애하는 총리였다.

오늘 선대수령들을 존대하고 따르는 중국인민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것이다. 학계도 정계도 그의 유지를 잊지 않고있을것이다.

날이 밝아오고있었다.

서재에서 밤을 밝히신 그이께서는 문발을 헤치시고 대성산의 옛 성터를 바라보시였다. 려명속에 대성산이 이 아침따라 더욱 찬연히 부각되고있었다.

오늘 그이께서는 학자들을 만나실 계획이였다. 그사이의 조사발굴사업에 대하여 견해를 나누고싶으시였다.

얼마 남지 않은 개천절에 우리 인민뿐아니라 온 세상에 대고 조선민족의 원시조에 대해, 이 나라의 반만년력사에 대해 알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신의 이 심정을 터놓고싶으시여 송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시였다.

과학에는 욕망과 주관이 작용해서는 안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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