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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아리랑> 9-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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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1,864회 작성일 16-01-1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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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디선가 쉭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가까운 곳에서 무서운 폭발이 일어났다. 어찌나 폭발이 셌던지 서가들이 넘어질것처럼 세게 흔들렸으며 창문들이 깨여져나가고 천정에서 흙부스레기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리였다.

전상음은 금시 무너질듯이 몸부림치는 건물의 진동에 공포를 느끼며 한쪽벽에 기울서하니 넘어진 서가를 꽉 붙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김포비행장과 영등포지구에서 들리던 폭음과 총소리는 밤이 지나자 서울시내의 각곳에서 어지럽게 울려왔다. 한치의 땅, 하나의 건물, 하나의 거리를 놓고 적아간에 치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상음이, 어디 있나? 상음이!》

매캐한 화약내와 흙먼지가 자욱한 방안공기를 가르며 문쪽에서 귀익은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림진우였다. 그의 뒤를 따라 연밤색코트차림에 흰 목수건을 돌려쓰고 배낭을 가뜬히 멘 진애가 들어서는것이 눈에 띄였다.

《여기 있는줄 모르고 허튼델 다니며 찾았구만.》

너저분한 방안을 한번 휘둘러본 림진우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인가?》

전상음은 대답대신 씩 웃었다. 그는 저으기 긴장해하는 진우며 낯빛이 핼쑥한 진애의 얼굴을 일별하고나서 헌헌하게 대답했다.

《이 상음일 부리당의 하늘소처럼 여긴거구만. 다들 가는데 나두 따라야지. 바늘따라 실 간다질 않나.》

《자식.》

림진우는 낯빛을 풀며 손을 들어 그의 한어깨를 툭 쳤다.

《그런걸 난 또 어쩌나 하고 근심했댔지. 어때, 진애야. 이 오빠의 짐작이 맞지?》

《오빠두 참.》

《이자 자네 얘길 했댔어. 이 앤 글쎄 자네가 북행길을 썩 달가와하지 않는다는거야. 그래서 저두 떨어질 소리를 하데. 그래 내 욕을 좀 했지. 또 장담했고. 한데 내 짐작이 틀림이 없거던.》

《오빠! 시간.》

《오참, 그렇지.》 림진우는 그제야 펀뜩 놀라 상음이를 재촉했다.

《자, 그럼 빨리 가자구. 시청앞에서 우리를 기다려.》

《잠간만.》

전상음은 앞서걸으려는 그들을 멈춰세웠다.

《조금만 량해를 구하자구. 이걸 가져가야지.》

《그건 뭔가?》

《여태껏 모아두었던 내 재산이야, 악보.》

전상음은 쭈그리고앉아 바삐 손을 놀려 책무지를 뒤지며 악보들을 골라내였다.

《짐스럽지 않을가, 북에도 이런 악보들이 많겠는데.》

《이건 원전악보네. 출판업자들이 출판할 때마다 구미에 맞게 조금씩 뜯어고치는 그런게 아니지.》

《그럼 이것두 넣으라나?》

진애에게 도와주라는 뜻으로 손짓하고나서 림진우는 상음의 곁에 끓어앉아 민족음악총보들을 집어들었다.

《내버려두게. 그거야말로 짐이야.》

《왜 그러나. 이것도 역시 우리 문화재산에 속하는거 아닌가.》

《문화재산?》

전상음은 손놀림을 멈추고 반문하였다.

그는 갑자기 진우가 든 악보들을 손가락질하며 자기가 든 악보를 흔들어대며 어성을 높였다.

《그게 어떻게 재산이 될수 있어? 그래 내 그 도도리, 배뱅이굿가락따위나 건져내려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 서고에 뛰여들어온줄 아나? 문화재산이라, 천만에. 국보적가치를 가지는 문화재산이라고 하면 바로 이런 작품들, 전세계가 인정하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하이든의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일세.》

《허 자네두, 내가 가지고가면 될텐데 성은 왜 내나. 자, 시간이 없어. 빨리 짐을 싸들고 일어나자구.》

잠시후 시청앞을 출발한 자동차는 총포탄이 작렬하는 시가지를 벗어나 양주방향으로 가는 도로에 들어섰다.

림진우는 가면서 말해주었다.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으로 전선경비사령부협주단이 조직되였는데 협주단 기본인원을 몇개 소조로 나누었으며 첫 조는 벌써 사나흘전에 서울을 떠났다는것, 진우네 조는 김포비행장방어전투에 참가하고 돌아오던중에 폭격을 만나 지체되는 바람에 맨나중에 떠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이제 양주서 가평, 춘천, 화천으로 꺾었다가 평양쪽으로 길을 돌리면 금시 순천이야. 도로도 안전하고 자동차도 있겠다 순천에 가면 우린 기본대렬과 만나게 될거네.》

그러나 그들이 가는 로정은 진우의 장담처럼 결코 순탄치 않았다. 수시로 변하는 전선형편으로 하여 림진우네들은 불쑥 나타난 미군기갑부대의 추격을 받아 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도 했으며 빈번히 출몰하는 반동분자들때문에 기본도로를 벗어나 에돌아가기도 했다. 여기에 마가을의 선득한 랭기와 식량난 역시 그들을 항시적으로 위협하고있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떠날 때부터 푸르럭거리던 자동차마저도 기관이 마모되여 서버리는통에 일행은 사리원근방에서부터는 도보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걸음마다 층층이 막아나서는 온갖 난관들, 그것은 진우네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것이였다. 그중에서 제일 힘들어하는 사람은 전상음이였다.

그는 자기가 겪고있는 어려움을 달게 받아들일수 없었다. 전상음은 추위와 굶주림, 지어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당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며 웃는 곁의 사람들의 사고가 리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포와 불안을 감추어보려는 일종의 허세라고 단정하고있었다. 상음은 오직 미궁같은 앞날이 불안스러웠으며 선택을 경솔히 하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에만 싸여있었고 그래서 자체모순에 빠져 허덕거리고있었다. 만일 림진우오누이와 굳게 맺어진 인간관계가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모순의 해결을 위하여 합리적인 출로를 찾아 즉시 행동하였을것이다. 허나 그가 안깐힘을 쓰며 놓지 않는 그 감정도 차츰 식어가고있다는것을 전상음이는 물론 진우도 진애도 그 누구도 알수 없었다.

도보로 상원을 떠난 일행은 며칠동안의 행군끝에 배산고개어방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알을 세여먹던 닦은 강냉이마저 떨어져 길량식을 구하지 않고서는 목적지까지 갈수가 없었다.

림진우는 일행중 제일 건장한 사람들을 데리고 식량을 얻으러 인가를 찾아 내려갔다. 여기에는 전상음이도 포함되여있었다.

서북쪽방향으로 되짚어내려와 근 반나절을 헤매고나서야 마을을 하나 찾아낸 진우네들은 너무 기뻐 한달음에 동네어귀에 들어섰다. 꽤 깊어보이는 골안을 따라 띄염띄염 집들이 들어앉은 마을은 무척 아담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서니 멀리서 보기와는 다르게 마을에는 알수 없는 적막이 무겁게 깃들어있었고 행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첫집과 마찬가지로 어느 집을 돌아보아도 비여있었으며 눈에 띄우는것는 오직 깨진 장독이며 부서진 문짝, 울타리, 무엇에 의해선지 온통 짓이겨진 배추밭들뿐이였다.

림전우를 따라 집들을 돌아보며 마을끝에 이른 전상음은 허리에 두손을 얹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틀전부터 때없이 찾아드는 허리아픔이 발작했던것이다.

《몸을 차게 건사해서 더하지 않나?》

림진우의 걱정어린 위로였다.

《내게 털요가 있는데 오늘 저녁엔 그걸 덮고자라구.》

《괜찮네.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뭐.》

동통부위를 세괃게 주무르며 상음은 흔연하게 대답했다. 아픔이 덜해지는감이 들었다. 손놀림을 멈추고 무심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는 갑자기 덮쳐드는 엄청난 전률에 으드드 몸서리를 쳤다.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무서은 괴성이 터져나갔다.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량식창고 비슷한 목조건물앞에 되는대로 쌓여있는 사람들의 시체를 발견하였던것이다. 피가 랑자해서 쓰러져있는 사람들속에는 너덧명의 인민군부상병들도 섞여있었다.

림진우네들은 마을에 무겁게 드리운 까닭모를 음산하고 싸늘한 적막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다.

《누가, 누가 이런…》

누군가의 억눌린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처럼 들려왔다. 사람들과 함께 그리로 다가간 전상음은 눈길을 허둥거리다가 발치에 뒹구는 이불거죽같은것을 주어들었다.

- 《대한민국》의 전시법에 따라 북한빨갱이를 도와주거나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렇게 엄정처형할것이다. -

《개새끼들.》

상음의 손에서 나꾸채듯이 당겨들고 읽어본 림진우는 격분을 터뜨리였다.

《그러니까 인민군부상병을 숨겨주었다고 이런 승냥이짓을 벌려놨어. 아,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야만들, 개새끼들》

일행은 한동안 끔찍한 참변앞에 얼어붙은듯이 서있기만 했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신음같기도 했고 흐느낌같기도 했다.

《산 사람이 있구만. 저쪽이요.》

사람들은 림진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목조건물뒤로 달려갔다. 건물뒤에 이른 그들은 또다시 몸서리를 치지 않을수 없었다. 마른 강냉이대만이 누런 이파리를 실렁대는 거기에도 역시 무자비한 살륙의 선풍이 휩쓴 흔적이, 녀인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한벌 쭉 깔려있었던것이다. 이상한 소리는 어머니인듯 한 젊은 녀인의 가슴에 두손을 얹고 온통 피칠갑을 하고 앉아있는 너덧살정도 나보이는 계집애가 내고있었다. 그 애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고있었는데 사람들을 보자 공포에 질려 시체들속을 비집으며 몸을 숨기려고 버등거리는것이였다.

《우리 암만 시간이 바빠도 시신들을 감장해주고 갑시다.》

조금 지나서 전상음의 귀전에 퍼그나 갈린 진우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신동무, 이 앨 데리고 먼저 떠나오.》

오후 한겻이 되여서야 일을 끝낸 일행은 식량공작에 착수하였다. 살륙과 함께 략탈과 파괴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식량이 남아있을리가 만무하였다. 땅거미가 짙게 내린무렵까지 헤매고난 뒤 그들이 얻은것이란 겨우 서너바가지나 될 강냉이, 그것도 한절반 불에 탄 강냉이였다.

전상음은 그동안 내내 아무말없이 무의식적으로 일행을 따라다니였다. 때로 그는 일손을 멈추고 공허한 표정으로 마을을 둘러보며 멍하니 서있는가 하면 무엇인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고통스러운 인상을 짓기도 하였다.

《속이 말짼가?》

일행이 귀로에 오르자 림진우가 다가와서 물었다. 상음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가마며 화식도구가 들어있는 배낭을 추슬러메고는 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순천에 당도하면 그 다음목적지가 어딘가?》

《만포까지 가야 할거네.》

《국경이구만. 조선 한끝…》

전상음은 나직이 긴숨을 내쉬였다.

《진우, 자네는 시국형편을 잘 알테니 어디한번 말해보게. 어떻게 될것 같나. 이 란리는 도대체 언제 끝날것 같은가.》

《이건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야.》

《그럴테지.》

상음은 머리를 끄덕이며 미련없이 림진우의 말허리를 꺾었다.

《자넨 인민군은 반드시 남하하며 결국엔 이 전쟁이 북의 승리로 끝날거라고 주장하고싶겠지? 그건 그때 가봐야 알노릇이고. 어쨌든 이보게, 인민군이 밀고내려온다고 치세. 여하간에 피는 또 흘려야 하겠지?》

《그건 무슨 소린가, 누가 피를 흘린단 말인가?》

《자네도 방금 보지 않았나. 그들을 왜 죽였어? 적수공권의 늙은이들과 녀성들, 아이들을. 그네들은 단지 인도주의적인 감정에서 인민군부상병을 도와주었을뿐이지. 그것이 죄였네, 적군을 도와주었다는 죄. 그래 인민군의 남하가 시작되면 이런 일이 없을거라고, 되풀이되지 않을거라고 믿나? 내 말을 마지막까지 듣게.》

전상음은 무엇인가 말하려고 들먹거리는 진우의 거동을 제지시켰다.

《되풀이될거네. 왜냐하면 인민군도 역시 전쟁을 하고있으니까. 전쟁이란 뭔가? 인간성정에 잠재하고있는 멸시와 학대, 증오와 잔인성, 타인에 대한 온갖 무차별적인 배타정신의 산물이 아닌가. 그래 전쟁이 사리와 분별, 경우와 도리같은 인간성을 아나? 그런걸 바지가랭이에 붙은 엉겅퀴만큼도 여기지 않는게 전쟁이 아닌가?

같네, 이편이나 저편이나. 악에 달이 뜬 눈에는 전투원과 녀성들, 늙은이들, 어린이들의 구별이 필요없네. 오직 누구편인가 그게 중요하지.》

《…》

《무슨 일이나 그건 언제나 사회와 인류앞에 일종의 륜리도덕적가치를 가지는 법이네. 그러나 살륙의 이 대무희는 일고의 가치도 없어. 왜? 전쟁은 곧 리념의 힘겨루기이고 특정인이라 일컫는 정치가들의 너절한 정치적야심과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때문이네.

리념, 정치가. 진우, 난 이것에 혐오감을 느껴. 그들은 어째서 여기에 그토록 매력을 느끼며 사람들을 괴롭히는것인가. 그네들은 5천여만의 인명을 앗아간 2차대전을 연출하고도 무엇이 성차지 않아 이 땅, 이 자그마한 땅을 둘로 갈라놓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죽일내기를 벌리게 하는것인가.

민족은 지쳤어. 왕가의 고리타분한 세습정치에 시달렸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험한 고생을 했어. 력사의 운명, 이 운명의 세파속에 부대낄대로 부대껴온 우리 민족이 세기를 내려오며 일일천추로 바라온것이 뭔줄 아나? 안정과 화목, 평화와 부요한 살림이였네.

해방후 그 소망이 피였댔지. 아침이슬처럼 잠간, 마치 무지개처럼. 그다음엔 둘로 갈라지고 또다시 신앙이요, 리념이요 하는 대립과 반목의 력사가 시작되고.

끝장내야 돼, 어떻게 하나. 인위적인 운명이 강요한 이 전란을 끝장내고 민족의 소망을 한시바삐 풀어줘야 한단 말이네.》

《난 자네의 그 견해에 공감하지 못하겠어.》

림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아까처럼 전상음이 자기 말을 제지시킬가봐 그러는지 빠른 말씨로 뒤를 잇는것이였다.

《인민군이 진격하면 누가 피를 흘린다는건가. 민간인들? 상음이, 자네도 잘 알고있지 않나, 저번에 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할 때 어떤 일이 있었나. 인민군이 수백문의 야포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고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댔지. 실제적으로 그 소문은 영 무근거한것은 아니였고. 그런데 서울에 포탄이 떨어졌댔나. 오히려 시가전에서 피를 흘린것은 인민군이였어. 후에 우리가 안 사실이였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셨댔나. 문화재와 시민들이 상할수 있다고 야포사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지.》

《…》

《자네 일을 놓고봐도 그렇지. 자네의 견해대로 한다면 인민군은 전상음이라는 인간을 가만놔두지 말아야 했었네. 이전의 일은 젖혀놓고서라도 전쟁이 시작되자 리승만의 어용나팔수가 되여 미국의 전쟁참전을 주장한 그것만으로도 엄벌에 처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인민군은 어쨌나. 용서했어. 재능으로 민족의 이름을 떨쳐보겠다는 자네의 그 량심을 귀히 여겨 용서하고 무대에 내세워줬지.》

《그만하게.》 전상음은 울기에 차서 부르짖었다. 《난 어디까지나 예술가야.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당시엔 사고와 견해가 혼탕이 되여있었단 말이네.》

《지금은 어때?》

진우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자 그는 당황해서 머뭇거리였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네.》

진우의 목소리는 상음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전쟁의 륜리도덕적측면, 리념의 힘겨루기 아니, 전쟁에 대한 자네의 견해는 온당치 못하네. 일반론에 불과해.

이보라구 상음이, 전쟁을 그래 누가 일으켰나. 미국과 리승만이 아닌가. 그네들은 오직 공산주의에 대한 배타적인 증오와 자기 리념의 지배령역확대, 이걸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평등과 백성중심의 정치로 민족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고있는 공화국을 상대로 해서 말일세.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건 해방된 이남땅에 실시된 토지개혁과 같은 경이적인 현실을 체험하며 북을 리상사회의 모델이라고 격찬하던 자네 얘길세. 정당한 평가였지. 한데 북에 대하여 아무런 파악이 없고 알려고조차도 않은 자네가 다 그 정도였는데 공화국정치의 진가를 생활로써 체험한 민중의 심정은 어떠했겠나. 그들은 북의 정치를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를 따르는것을 천분으로 간주하고있었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전쟁을 강요했어. 그래 민중이 이걸 순편히 받아들였나? 땅을 도로 빼앗고 노예처럼 살기를 강요하는 이 전쟁을 우리 민중이 용납하고있는가.

상음이, 오늘 선과 정의는 민중의 편, 북에 있네. 때문에 나는 이 전쟁을 그 무슨 리념의 힘겨루기나 정치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온갖 불의와 정의의 대결, 온갖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대결로 생각해.》

《민중을 거들면서 외피를 씌우지 말게. 어쨌든 자네 주장의 리면에도 리념이 싱싱하게 태동하고있구만.》

전상음은 거칠게 툭 내뱉았다.

《차라리 이전처럼 자본주의에 비한 공산주의의 영원성을 주장하는게 자연스럽네. 자넨 그래 북을 아나? 거기서 살아봤나?》

림진우는 허거프게 웃었다.

《살아본적이야 없지, 한번도. 그저 해방후 5년동안 북에서 해놓은 일을 들으면서 그리고 북과 반대되는 〈남한〉땅의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에 공화국을 알게 되였어. 이 전쟁을 통해서도 체험했고.》

전상음은 머리를 수굿하고 걸었다. 금방 달이 떠올라 길이 훤하게 보였는데도 그는 자주 돌부리에 걸채여 몸을 비칠거리였다. 상음은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독백하듯이 입을 열었다.

《진우, 여하튼 우린 예술가지. 이제 만포에 가면 으음- 북에 가면 자유로운 예술가생활을 담보받을수 있나? 이를테면 자기의 견해와 개성을 작품에 마음껏 표현할수 있을가?》

《왜 없겠나? 자네도 공화국예술인들이 부민관에서 한 공연을 보았지?》

《확실히 자넨 믿음이 강하구만. 하긴 오래전에 벌써 공산주의이데올로기에 심취되였댔으니까.》

전상음은 진우의 불만스러워하는듯 한 얼굴빛을 보고 시정한다는 투로 한손을 저었다.

《노여워 말게, 한마디 그저 해본건데. 아, 어쨌든 이 전란은 언제 끝이 나겠는지. 승부가 빨리 나야 이 수난이 끝나겠는데.》

림진우는 머밋거리다가 위안조로 그루박았다.

《옳아, 승부가 나야지. 인민군대는 반드시 재진격할거네. 믿게, 미국놈은 꼭 망해.》

아니야. 전상음은 일순 내심으로 부르짖었다. 재진격? 미국이 가만 있을것 같나? 그 나라는 강대국이야. 히틀러와 무쏠리니, 제국 일본을 타승한 2차세계대전의 대전승국이란 말이네. 비록 일시적으로 패한다해도 미국은 부유한 나라여서 아무리 퍼내도 마를줄 모르는 딸라와 쟁기를 이 전쟁에 쏟아부어 이기고야말걸세.

그들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인지 꺼내여 그것을 깨려고 노력하였으나 전상음은 자기와 진우사이에 벌써 눈에 보이지 않는 두터운 장벽이 가로놓여있다는것을 은연중 직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달빛이 내려앉아 희읍스름하게 보이는 개울을 건너 일행이 숙영하고있는 소나무숲속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들은 누구도 말을 떼지 않았다.




10

 

밤이 이슥해지자 랭기가 짙게 배인 어둠을 밀어내며 기세좋게 타오르던 모닥불도 어느덧 기운을 잃고 사그라져가고있었다.

삭정이 몇개를 던져넣고 불을 돋군 전상음은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이름모를 아늑한 기운이 스며들어 온몸은 취할듯 한 기분에 젖어든다. 탁탁 장작이 타는 소리며 따거운 불기운, 지글거리며 타는 씁쓸하면서도 아릿한 송진냄새, 눈에 바라보이는 저기 검푸른 하늘, 거기에 걸려있는 크고 푸르스름한 달을 이따금씩 가리며 천천히 흘러가는 희벗한 그름더미들.

이것은 거의 수개월이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괴롭히던 어수선한 주위의 모든것을 밀어내며 부드러운 안정과 무아경같은 세계만이 가득찼던 지난날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음악의 첫걸음을 떼던 그때, 코뢰 분겐의 단조로운 선률음을 따라부르며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야릇한 깊이를 감수하자 몸을 떨려 행복에 취해있던 소년시절, 파고들수록 미궁같이 갈래와 깊이를 알수 없는 음악세계여서 그앞에 막연함만 체험하던 사춘기시절, 청년시절의 첫걸음을 박력있게 내짚은 해방3주년 기념파티. 나는 그때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커다란 쾌감에 싸여있었다.

이 상음의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던 외국인들과 서울시민들의 흥분에 찬 모습을 보며 나는 드디여 인류공동의 언어로 말할줄 알게 되였구나, 음악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언어인가 해서였다.

전상음은 마른침을 힘겹게 넘기며 팔베개를 풀지 않은채 한켠으로 돌아누웠다. 그런 내가, 장래에는 서울바닥이 아니라 세계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인류의 언어로 나의 세계를 마음껏 읊조리리라고 결심품었던 이 상음이는 지금 도대체 어떻게 하고있으며 어디로 가는것인가.

봉건왕조말기의 몰락한 량반가문에서 태여난 전상음은 어려서부터 궁중예술을 주관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서인지 음악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리 민감했다. 그래서 상음은 전씨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온 집안이 그를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신동으로 여기고있었다. 허나 나이는 어쩔수가 없는지 그 시절 전상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엄격한 음악교육보다도 장난에 정신이 더 쏠려있었다.

워낙 동갑이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통에 승벽심이 강한 성격이여서 벌리는 장난 또한 여간 세차지 않았다. 동네아이들을 데리고 남의 집 참외밭을 결딴내지 않는가 하면 돌팔매싸움끝에 이웃동네 애들의 머리를 터쳐놓아 동네끼리 어른싸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하튼 그때문에 집안사람들은 한시도 마음을 편히 가져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놀음에 흠뻑 젖어 돌아가던 전상음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녀의 손에 이끌려 여느때없이 집에 일찍 들어섰다.

《게 앉거라.》

지은 죄가 있는지라 방안에 들어서며 구석에 늘쌍 세워져있는 회초리단을 힐끔거리며 보던 상음은 전에없이 엄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만 기가 질려 어깨를 움츠리였다.

《너 거문고줄은 왜 벗겼니. 벗겨가지고는 뭘 했느냐?》

아버지는 앞에 놓인 줄이 모두 없는 거문고를 가리켰다.

《어서 말하지 못할가.》

《투석놀이를 할 때 쓸 돌구럭을 만들려구.》

《네 지금 나이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상음아, 이 아버지에게 오늘 네 속을 어디 툭 터놓고 말해보거라. 너는 장차 뭘할 결심이냐?》

잠시후 아버지는 상음에게 말을 건네왔다.

《군대라? 흠- 무장이 되고싶단 말이지.》

《…》

《우리 바람이나 한숨 쐬자꾸나. 어서 일어나거라.》

가타부타 표현없이 그저 이렇게 되뇌이던 아버지는 움쭉 몸을 일으키며 밖을 가리키였다.

황혼이 짙게 깔린 봄날의 그 저녁, 전상음은 아버지와 함께 후원숲속을 오래동안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자고로 이 나라의 력사는 때로 풍파를 겪어 이 동네앞 내물처럼 흐르기도 했고 사토속에 잦아드는 물줄기처럼 끊겨질번도 했지만 단군에 발원지를 둔 천운의 덕을 입어 도도창창한 대하처럼 자기를 잃지 않고 흘러왔다. 그런데 단군의 이름으로 존귀한 이 력사가 지금 어떤 치욕을 당하고있느냐. 수많은 명군주, 용인맹장, 순국지사들의 애국충정에 받들려 배짱 세게 흘러온 이 나라의 력사가 오늘 어느 지경에 이르렀느냐 말이다.

근년간만 살펴보아도 일국의 국모가 청청백야에 한갖 무뢰배에 불과한 사무라이들에게 시해당하지 않았는가 하면 머리통에 청관자, 홍관자를 두른 대신이라는자들은 속사포소리에 얼이 나가 나라를 다담상에 받쳐 통채로 팔아버리고도 눈섭 하나 까딱않고…

바야흐로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인데 사처에 창궐하는것은 역적무리들뿐이요, 간신배들뿐이니 이 얼마나 통곡스럽고 가슴터지는노릇이냐.》

《…》

《지금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독립항전의 기치를 든 애국의사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는가 하면 저기 대륙과 아라사에선 무슨 공산주의라는것이 흘러들어 폭력쟁전을 선동한다든데 형국이 참 이상하게 번져가고있다. 왜놈들과 싸울 대신 총대를 휘둘러 불쌍한 동포들에게서 돈이나 옭아내고 흑하에서처럼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일내기를 하고.

이제 그네들은 제절로 쇠락할거다. 단합의 저력이 없는데다가 성정이 모두 이지러지고 씨가 안먹었기때문이지.

무릇 어느 민족이든 강세와 렬세의 차이는 정신의 청초함에 달려있다. 민족정신이 정하고 깨끗하면 강세를 이룩하는것이고 반대로 무지하고 둔학스러우면 쇠하고만다. 목하정세에서 나라가 힘을 키워 독립을 자초하자면 폭력항전보다도 민족의 정신을 부활계몽시키는것이 선차이다. 말하자면 학도는 공부를 잘하여 조선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장공인은 세계으뜸의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매 사람이 제 몫을 다하여 나라를 개명시켜야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을 론할수 있다. 악이 악을 낳는 폭력으로는 절대로 독립을 성취할수 없다.

상음아, 허망한 꿈에 기대를 가지지 말거라. 너는 꼭 음악을 공부해야 한다. 앞으로도 같다. 일체 속세의 쟁론에 현혹되거나 귀를 기울이지 말고 음악을 꾸준히 전수하느라면 장차 너의 재능 하나만 가지고도 너의 명예뿐이 아니라 민족에게 영광과 자신심을 가져다줄수 있다.》

그 저녁에 다는 리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날부터 아버지의 말은 이상한 견인력을 가지고 그를 돌려세웠으며 미지의 음악세계를 파고들수록, 나날이 성장하며 주위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투영해볼수록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것을 시시각각 체험하게 되였다.

3. 1인민봉기나 6. 10만세시위를 놓고봐도 본의든 아니든 여하간에 민족사에 애꿎은 민중의 피가 흐르는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말씀은 지극히 정당하다. 난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재능을 련마해서 꼭 빛을 보고야말테다. 그래서 나라의 영광을 떨치고 상처입은 민족의 마음을 화목과 안정의 멜로디로 위안해주리라.

전상음의 이 결심은 곧 실천에 옮겨졌으며 해방후에 만난 미국 시카고교향악단의 전속지휘자이며 스탠포드대학의 예술학교수인 캐써린 헤밀톤에 의하여 더욱 확고부동한것으로 굳어져갔다.

《당신은 동양인치고 보기 드문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요. 그러나 시야는 작소. 협소합니다. 예술가는 마땅히 민족이 아니라 전인류를 위하여 복무해야 하오.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갑시다. 가서 보면 알게 될것이요, 민족주의와 범인류적인것과의 차이를. 민족주의가 예술가의 재능과 자유를 얼마나 속박하는가를 말이요.》

이것은 캐써린교수와 사제지간이 된 후 어떤 자리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상음의 음악철학을 듣고난 그가 저으기 불만스러워하며 털어놓은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상음은 헤밀톤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생활한 다섯달, 이 기간에 상음은 미국각지를 다니면서 아메리카대륙의 신흥음악사조와 서유럽의 음악에 완전히 심취되여버렸다. 결과 종래의 견해로부터 완전히 전향하여 헤밀톤의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였고.

미국려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전상음은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 재능을 련마하였다. 원래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인지 인차 상음의 존재는 서울의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헤밀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한 해방3주년 기념공연에서의 성공적인 초연은 예술가로서의 그의 장래를 믿음직하게 담보해주었다. 전상음이자신도 앞으로의 더 큰 성공에 대하여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운명은 참으로 가혹하게 변해버리였다. 전쟁은 전상음의 온갖 화려한 꿈과 믿음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놓았던것이다.

아니다, 상음은 끙 하고 바로 누우며 입밖으로 부르짖었다. 비록 전쟁이 일어났다 해도 나의 앞길은 여전히 순조로울수 있었다. 캐써린을 따라 미국으로 가버리면 그만이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미국으로 가자고 권고하는 그의 편지를 받고도 북으로 가는 걸음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가. 외면할수 없는 진우나 진애의 극진한 설복? 아니면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공화국의 민중정책? 그럼 이것이 나의 운명의 순리를 뒤집어놓은 원인이였단 말인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허나 명백한것은 더는 인위적인 운명에 순종하면 안된다는것이다. …

《아직 눈을 붙이지 않으셨군요?》

귀익은 목소리에 전상음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림진애였다. 그 녀자는 손에 든 장작단을 내려놓고나서 사그라져가는 모닥불을 손질하는것이였다.

《퍽 늦었구만. 진선생의 병이 아주 중해졌나보지?》

서울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대렬속에 부상자가 더러 생겨서 진애는 2명의 녀성과 교대로 저녁마다 그들을 돌보군 했다.

《진선생은 일없어요. 오던 길에 애한테 들리다나니.》

《그 앤 좀 어때?》

《첨엔 울기만 하면서 전혀 곁을 안 주던 애가 죽을 받아먹는걸 보니 마음이 안정되는것 같아요. 한데 애가 무서움을 타는건 여전해요. 어디서 바스락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라겠지요. 그때 애의 눈빛을 보면 도무지 어린애같지 않아요.》

《그 나이에 끔찍한 참변을 직접 목격했으니 자률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그럴거야. 피여났다니 됐구만. 애를 안구올 땐 다들 걱정했는데…

진애, 이젠 너무 자길 혹사하지 말어. 홀몸도 아니잖아.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힘들어하는데 진애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어.》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다들 도와주니 오히려 미안하기만 해요, 상음씨.》

진애는 언뜻 생각이 나는지 이렇게 불러놓고는 품속을 뒤적이는것이였다.

《자, 어서 들어요. 배고프지요?》

얼결에 진애가 내민것을 받아든 전상음은 불현듯 코끝이 시큰해났다. 아이주먹보다 조금 큰 두알의 군감자. 이건 필경 진애의 저녁밥이였으리라. 원래 한알씩 차례졌는데 진애는 임신부여서 한알을 더 줬을것이다.

《매번 이러면 진애는 어떻게 해?》

정말 그랬다. 체집이 커서 남보다 더 배고픔에 헐썩거리는 상음에게 진애는 종종 자기의것을 남겨두었다가 주군 했다. 림진애는 상음이 내미는것을 밀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까 영자언니가 뭘 좀 줘서 난 일없어요. 어서 들어요.》

…쉬임없이 홀러가던 구름더미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별들이 무수히 빛나는 검푸른 대공에는 크고 아름다운 달만이 그린듯이 까딱않고 걸려있었다. 숲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름모를 밤새의 울음소리며 또다시 기분좋게 탁탁 튀며 타오르는 모닥불만 아니였다면 삼라만상은 태고의 적막속에 깊이 잠들어있는듯싶었다.

아! 좋은 밤이다! 전쟁만 아니라면 얼마나 쾌적한 밤인가! 전상음은 자기의 팔을 베고 누운 진애를 애정에 넘쳐 바싹 끌어안았다,

《이것봐, 진애. 자?》

《아네요.》

《무슨 말이든 해. 어쩐지 이밤을 그저 보내기는 싫구만.》

무슨 이야긴들 안했겠는가. 둘은 서로 다정하게 화제를 이어가며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였다. 전상음은 진주만에서의 일본의 대승리를 경축하는 음악회때 림진애를 겁탈하려 했던 일본군해병대장교를 때려눕히고 자기가 류치장에 갇히자 상음이 죽으면 뒤를 따르려 했다는 진애의 말을 듣고서는 끝없는 행복감에 도취되였었다.

부지중 림진애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그 녀자는 말없이 상음의 손을 끄당겨 자기의 배에 가져다댔다. 무엇인가 꿋꿋한것이 푸들거리는 느낌이 손바닥에 마쳐온다.

《애가 노는것 같애.》

《그래요. 해산달이 돼오니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이래요. 빨리 나오고싶어 그러는가봐요.》

《!》

《상음씨.》

그 녀자는 전상음의 뺨에 더운 입김을 내불며 속살거렸다.

《인츰 아버지가 되겠는데 뭘 바라죠? 아들? 딸?》

《아무거면 뭐래. 어떻게 키우는가에 달려있지.》

《그래도 남자들은 아들을 더 바란다면서요.》

《글쎄, 그렇긴 한데.》

《봐요. 호- 이러다 딸이라도 낳으문 어쩌나.》

《허튼 걱정.》

그는 림진애의 길동그란 귀를 아프지 않게 당겨주었다.

《딸이문 어쨌다는거야? 아들맞잡이루 귀하게 키워내면 되는거지.》

《그럼 앞으로 뭘 시킬 생각이예요?》

상음의 꺼칠한 볼부위를 장난삼아 매만지며 잠시 말이 없던 진애는 한발 더 들어갔다.

《제 외삼촌이나 엄마가 열광적인 련공분자들이니 애가 태여나면 마르쿠스의 제자로 키워야지. 참, 도이췰란드에 류학보내는게 어때? 그럼 나중엔 맆크네히트나 로자 또는 제트낀 클라라가 될수 있거던.》

《응- 롱담 그만해요.》

림진애는 응석을 부리는것처럼 몸을 흔들며 그의 볼을 꼬집어주었다. 전상음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크게 웃어댔다. 오래간만에 시름놓고 웃어보는 그였다. 어찌나 오래 들먹거려댔는지 배가 막 아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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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만 웃어요. 자, 이젠 대답해요. 롱담 말구, 어서요.》
림진애는 상음의 품에 바싹 다가붙으며 지꿎게 바른대답을 요구했다.
《진애, 우리 애는 아버지처럼 아니, 아버지의 키를 릉가하는 대예술가가 되여야 해. 그렇지?》
말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긍정하는 진애였다.
그 녀자는 행복에 겨워 이제 태여날 아이를 큰 예술가로 키우자면 어머니의 교육이 자못 중요하다는것을 력설하는것이였다.
《상음씨의 뜻대로 애를 키우자면 조기교육을 잘 줘야 해요. 그건 아마 내 몫일거예요. 이태리에서는 아이들의 음악적감수성을 높여주려고 태아때부터 라 음을 들려주고 음악감상도 시킨다지요? 애를 낳으면 난 태아적에 못한것까지 합해서 조기교육을 해주겠어요. 단음청음부터 9화음계렬까지. 참, 화성문제풀이법까지는 아무래도 내가 맡아야겠군요.》
《진애가 그래주면야 아이의 발전속도가 한결 빨라질거야. 원체 아이의 지능지수는 어머니의 두뇌, 어머니의 교육과 상당하게 련관되여 있으니까.》
《한데 산통이 언제 올가. 순조롭게 해산했으면 좋겠는데.》
시종 화기연연하게 흘러오던 화제는 갑자기 여기서 뚝 끊기였다. 둘다 침묵속에 밤하늘만 시름겹게 쳐다보았다. 전상음은 화제를 이으려고 부러 애쓰고싶지 않았다. 진애가 무척 근심스럽게 말끝을 흐리자 엄혹하고 랭랭한 현실이 자각되며 기분이 침울해났던것이다. 진애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진애, 진애는 내 안해지?》
한동안 지나서 전상음이 먼저 입을 뗐다. 그는 의아해하는 그 녀자의 눈길을 피했다.
《그럼 내 의견을 들어봐. 진애가 해산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 우리 얼마간 마을에 내려가있으면서 대세를 관망해보는게 어때? 지금처럼 어수선한 형국에 이런 길을 계속 가다가는 어른도 아이도 객귀가 되고말아. 우리에게 먹을것이 있나, 이 마가을날씨에 몸을 감쌀 변변한 옷가지가 있길 하나.》
《순천에 가면 퍽 나아질거예요. 오빠말이 거기에 기본대오가 있대요.》
《순천이 뭐 이웃동넨가. 글쎄 한 백리걸음쯤 된다니까 멀지야 않지. 하지만 거기라고 편안할것 같애?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마을을 도륙 낸 〈국군〉이 순천에 벌써 당도하지 않았다고 장담할수 있어? 우린 산길을 타지만 그들은 트럭을 타고 대도로로 가고있잖아. 순천에 기본대오가 있다고 해도 같지. 진우군의 말을 들으면 거기서 또 만포까지 가야 한다는데 진애나 내겐 이게 얼마나 황당한노릇인가 말이야.》
《상음씨, 여기까지 고생하며 끝내 왔는데 이제 와서 왜 그래요? 곁에 영자언니랑 옥순아주머니가 있기때문에 해산하는건 그리 힘들지 않을거예요. 조금만 참자요, 네?》
《그렇게는 못해.》
전상음은 팔을 빼며 벌떡 일어나앉았다. 그 서슬에 진애도 따라일어났다.
《난 진우군이나 진애와는 달리 공산북에 아무런 사상적공감이나 생활적미련이 없는 사람이야. 한데 이 상음이 왜 북으로 가는 길에 올랐는가. 오직 사랑과 우정때문이야. 이런 내가 어째서 제 처가 당장 해산이 림박하게 된걸 보구 그냥 속수무책으로 보고있기만 하겠어.》
전상음은 그 녀자의 두어깨를 꽉 틀어잡으며 진애의 눈가까이로 제얼굴을 바투 가져다댔다.
《진애, 넌 내 안해야. 그러니 무조건 나를 따라야 해. 내 당장 진우군을 만나서 리해시키겠으니 래일 나와 산을 내리자구. 알겠지?》
림진애는 대답대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안된다구? 어째서.》
《오빠가 승인할리 만무하겠지만 나도 량심에 꺼리껴서 차마 그렇게는. 다들 험한 고생을 하면서두 우릴 위해주느라고…》
《뭐라구? 량심?》
전상음은 그 녀자의 어깨를 밀치다싶이 놓으며 신음소리를 뿜었다.
《아예 조직규률이라고 표현하지, 조직규률이라고. 으음- 그러니까 그 알량한 이데올로기가 제 남편이나 아이보다 더 중하단 말이지.》
《상음씨, 난.》
《그만해.》
흑- 하는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진애가 두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마음이 약해지며 한숨이 나갔다. 전상음은 진애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그 녀자의 어깨에 한손을 얹으며 우울하게 뇌이였다.
《됐어, 진정해, 진정하라니까. 가야지 뭐, 눈 먼 장님처럼 진우군의 손에 이끌려 진애의 손을 꼭 잡구.》
허나 전상음은 끝내 북행길을 가지 못하였다. 가지 않았다고 표현해야 정확할것이다. 순천근방에서 적항공륙전대의 습격을 받아 일행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체포된 전상음은 그것을 기회로 여기고 북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포기해버렸던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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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나는 그때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친구며 안해도 자식도 버리고 가버렸었다. 이런 내가 이제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만나며 설사 만난다 해도 그네들이 어떻게 나를 용서할수 있겠는가.
어둠이 내리덮이는 창가에 서서 오래동안 괴로움에 잠겨있던 전상음은 문기척소리가 나자 그리로 몸을 돌리였다. 문가에는 새하얀 반팔샤쯔에 까만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주택관리인이 서있었다.
《선생님, 〈대한민국〉 국정원에서 손님 한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내 전에 그 사람이 오면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소?》
《선생님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마는 그래도 꼭 만나뵈워야겠다고 합니다. 긴히 중대한 문제를 상의할것이 있다고 합니다.》
《중대한 일?》
전상음은 입가에 엷은 조소를 띄우며 되받았다. 분명히 2002년 6월 서울에서 개최하는 월드컵경기대회 개페막음악작품의뢰때문에 왔을것이다.
《가서 말하시오, 무슨 일이든 이 상음이는 만나고싶지 않아한다고.》
《예, 알겠습니다.》
관리인은 머리를 굽석하고나서 금박으로 화려하게 테를 두른 편지봉투같은것을 내밀었다.
《이건 캐써린 헤밀톤씨의 부인이 보내온것인데 선생님이 수락하시면 알려달라고 전해왔습니다.》
그것은 래달에 열리게 될 캐써린을 추억하는 음악회초청장이였다.
《참가하겠단다고 알려주시오.》
전상음은 초청장을 받아 펼쳐보고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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