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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아리랑> 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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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942회 작성일 16-02-1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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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월에 들어와서도 릉라도의 5월1일경기장은 여전히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기 위하여 나드는 평양시민들과 지방인민들, 남과 해외의 동포들과 외국인들로 하여 명절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이무렵 김정일동지께서는 나라의 북부지구를 누비시며 군부대들을 시찰하고계시였다. 검덕광산을 비롯하여 함경남도 단천지구의 광산들과 북청군내의 협동농장들을 현지지도하신 그이께서는 그길로 인민군군부대의 어느 한 녀성중대를 찾으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먼저 구분대의 싸움준비정형을 료해하신 다음 세목장과 식당, 일일창고를 돌아보시며 중대의 후방공급실태를 알아보시였다. 식당을 나서신 그이께서는 병실로 향하시였다. 병실에서는 중대군인들의 소박한 예술소조공연이 진행되였다.

공연이 끝난 뒤 김정일동지께서는 3중창이야기 《우리의 병사시절》에 출연한 3명의 병사를 몸가까이로 부르시였다.

뜻밖에도 그이의 부르심을 받는 영광을 지닌 그들은 처음에는 주춤하다가 거듭 이르시자 곁에 와앉아서는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하며 서로마다 그이의 팔을 부여잡는것이였다. 집은 어딘가, 부모들은 무엇을 하는가, 병사생활이 힘들지 않는가를 물어주시며 그들이 부른 3중창이야기를 평가해주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오른쪽에 앉은 신입병사에게 시선을 돌리시였다.

《동무는 고향이 어디요?》

《평양입니다.》

《오, 그래?》

몹시 반가우시였다.

그이께서는 병사에게 다시 물으시였다.

《부모님들이랑 집이 몹시 그립지?》

《처음엔 그랬댔는데 이젠 일없습니다.》

《어디 한번 솔직히 말해보오. 명순동무는 병사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제일 힘든가?》

《힘든거 없습니다.》

명순이라 불리우는 녀병사의 여돌찬 대답이였다.

《왜? 구대원들의 요구성이 분대장이나 부소대장보다 더 높다든가, 또는 집에서 제때에 소식이 오지 않으면 기다리게 된다든가, 하여간 조금이라두 있겠지?》

《그런건 저…》

《허, 명순동무가 쭐났는데. 이웃남자기관포중대와의 팔씨름단체경기에서 이겼노라고 이자 노래에서 자랑하더니 어떻게 된건가?

우물쭈물하는걸 보니 힘든게 있긴 있는거구만.》

《정말 힘들지 않습니다. 그저 꼭 보고싶은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호기심이 동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명순병사의 손을 꼭 잡으시며 자애넘친 어조로 재촉하시였다.

《어서 말해보오, 뭘 보고싶어 그러는지.》

《지금 평양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한다는데 그걸 텔레비죤으로 보고싶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였다.

《〈아리랑〉?》 김정일동지께서는 의아한 눈길로 수행성원들을 둘러보시다가 다시 명순병사에게 시선을 주시였다. 《〈아리랑〉을 보고싶어하는데는 사연이 있는거구만.》

명순병사는 퍼그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을 터놓았다. 지난 4월부터 텔레비죤과 방송, 신문에 매일같이 평양 릉라도의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공연소식이 실렸다고 한다. 더우기 평양에 갔다가 《아리랑》을 보고온 군관들과 군부대 군인가족예술소조원들이 하는 말이 《아리랑》을 한번 보면 우리 나라의 력사와 미래 즉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의 모습을 한눈에 그려볼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저희들은 텔레비죤을 켜면 방영순서만 살펴보는데 왜 그런지 아직…》

《동무들도 같은 심정이요?》

《그렇습니다.》

김정일동지의 물으심에 병사들은 목소리를 합쳐 힘차게 대답올렸다.

《그럼 풀어줘야지. 우리 병사들의 소원인데…》

김정일동지께서는 수긍하시며 인민군지휘성원들의 뒤에 서있는 김준남비서를 찾으시였다.

《물론 나도 텔레비죤방영은 〈아리랑〉이 끝난 다음에 하려고 한다는걸 알고있는데… 그래도 무슨 대책이 없겠소?》

김준남은 들고있던 수첩을 내리며 길쑴한 얼굴에 우선우선한 기색을 지였다.

《한창 총편집을 하고있는데 당겨서 빠른 시일내에 방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오.》

다소 마음이 놓이시였다. 허나 썩 개운하지는 않으시였다.

 

중낮이 조금 지나서 김정일동지께서는 점심식사도 하고 차정비도 할겸 차를 세우도록 하시였다. 골개물이 흐르는 길건너 숲속에서 수행성원들과 함께 간소한 야전식사를 마치신 그이께서는 문건가방을 들고 웃쪽으로 올라가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물속에 박혀있는 둥글둥글한 바위들중 맞춤한 자리를 골라 그우에 가방을 놓고 신발을 벗으시였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두발을 물속에 잠그시였다. 선득해날 정도로 차디찬 골개물, 신선한 숲속공기와 소연한 물소리, 골개물이 완만한 저 아래쪽에서 수행장령들이며 일군들, 운전사들의 웃고 떠드는 즐거운 목소리들. 김정일동지께서는 한순간 이 며칠동안 아니, 이 몇달동안 쌓이고쌓였던 피로가 삽시에 풀리는듯싶으시였다.

그이께서는 허리를 굽혀 빠르게 흘러가는 물속에 두손을 잠그시였다. 문득 무심하게 흘러가는 골개물이 아까우시였다.

전기! 이만한 힘과 락차고이면 여기서도 무엇인가 할수 있겠는데. 자강도에선 물흐름속도가 완만한 곳에는 띄우개식발전기를 리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고있지 않는가. 가만, 여기가 무슨 군이던가. 어쨌든 먼저 돌아봐야겠군. 가파로운 웃쪽과 어른주먹만 한 자갈이 한벌 깔린 아래쪽을 눈여겨보시였다. 우로 썩 올라가 물흐름과 락차고를 가늠해보기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곳 군당책임비서를 만나 가능성을 토론해봐야겠다고 결심하시였다.

얼마쯤 두눈을 감고 피로를 푸신 김정일동지께서는 한껏 힘소흡을 하고나서 집무에 들어가시였다.

문건들은 항용 그러하듯이 김정일동지의 비준과 가르치심, 그이의 동의와 조언을 바라는것이였지만 이번 문건인 경우에는 달랐다. 태반이 전선길에 오르신 두어달어간에 진행된 국가적규모의 각이한 사업들에 대한 총화보고였으며 동시에 조국통일과 외교부문에서 이룩한 성과보고이기도 했던것이다.

그이께서는 황해남도토지정리전투총화내용이 적힌 문건들 드시였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결사관철의 정신을 발휘하여 근 1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평안북도토지정리면적에 비하여 2배가 넘는 10여만정보의 토지를 후세에 가서도 속색이 없는 기계화포전으로 훌륭히 정리해놓았다.

좁은것은 넓히고 굽은것은 곧추 폈으며 물을 마음대로 논에 대고 뽑을수 있게 물길을 정리해놓았을뿐만아니라 다리, 암거, 분수관을 비롯한 구조물들을 필요한 곳에 재설치하여 큰물피해를 막을수 있게 하였다. 포전도로같은 경우에는 곧고 넓게 정리되여 거름을 비롯한 물동나르기에 편리하게 되였으며 종합적기계화를 실현할수 있는 전망이 열리게 되였다. 이번 황해남도의 토지를 정리한 결과 늘어난 면적은 수천정보나 된다고 한다. 문건에는 또한 지난 1년동안 청단군 심평리, 갈산리, 강령군 내동리를 비롯하여 도적으로 세대당 70~80평방메터의 1동 2세대로 지은 15개의 60동마을이 생겨나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오늘까지 130여개의 농촌마을이 새로 일떠섰다.

다음문건은 얼마전에 평양견학을 하였던 황해남도토지정리전투참가자들이 단체별, 개인별로 올린 감사의 편지들이였다.

편지들마다에 사랑의 친필존함을 써주시며 계속 읽어나가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한 돌격대원처녀가 올린 편지에 존함을 쓰려다가 펜을 멈추시였다. 물론 그 편지도 앞서의것들과 마찬가지고 자신의 건강을 축원하는것과 함께 앞으로 벌리게 될 평안남도토지정리전투에서도 더 큰 위훈을 세우겠다는 결의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김정일동지께서 펜을 멈추신것은 그저 평범하게만 읽을수 없는 이런 대목때문이였다.

돌격대원처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얼마전에 량강도에서 사는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댔는데 제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못 보았다는것을 알자 몹시 섭섭해하였습니다. 큰아버지는 말하기를 앞서 구경을 하고온 농장사람들에게서 자기네가 일하는 대홍단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보니 더는 순서가 되길 기다리게 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기차를 두번씩이나 갈아타면서 평양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큰아버지는 그러면서 〈아리랑〉에는 자기네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토지정리전투장이랑 나오는데 〈아리랑〉을 보고나니까 조선사람으로 태여난 긍지와 자부심이 새삼스럽게 들고 잘살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더라는것이였습니다. 저는 동무들에게 큰아버지가 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동무들도 자기네 부모들과 친척친우들, 〈아리랑〉에 참가하고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들어 이미 알고있었습니다.

아버지장군님.

평양에 갔다가 〈아리랑〉을 못 보고 내려온것이 정말 한스럽습니다.

…》

김정일동지께서는 펜을 쥔 한손을 무릎우에 얹으신채 편지대목의 낱말을 곱씹어외우시였다. 조선사람으로 태여난 긍지와 자부심, 잘살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 《아리랑》을 보지 못한 한스러움, 그말고도 《아리랑》을 보려고 두번씩이나 기차를 갈아탄 처녀의 큰아버지의 수고도 헤아려지게 되시였다.

우리 군대와 인민이 《아리랑》을 보고싶어한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당을 믿고 수령을 따라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이겨내고 이 땅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수 없는 강국을 일떠세운 그들이.

이 하루에 벌써 두번씩이나 체험하게 되시는 감정이였다.

정비를 끝냈는지 저 아래쪽에서 야전차들이 하나둘 동음을 울리며 길우에 올라서고있었다. 문건을 정리하여 가방에 넣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처녀돌격대원의 편지는 따로 건사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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