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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5-7. 인디아의 발자취와 제국주의자들의 분렬정복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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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686회 작성일 23-03-23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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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의 발자취와 제국주의자들의 분렬정복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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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류태영 박사

인디아를 생각하고 인디아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면 인디아의 시인 타고르와 인디아의 위대한 넋으로 불리웠던 간디를 먼저 생각하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타고르는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고있던 조선에 대한 시에서 이렇게 썼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다시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조선반도에서 1919년 3. 1인민봉기가 일어난것처럼 인디아에서도 이무렵 영국의 침략에 항거하여 간디의 무저항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간디로부터 시작된 인디아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여 드디여 1947년에 인디아는 독립을 쟁취했다.

1869년에 태여난 간디는 영국으로 건너가 변호사가 된 후 인디아에서 변호사활동을 하던중 남아프리카로 갔다.

당시 그곳에서는 인디아인들이 백인의 노예로 비참하게 학대를 당하고있었다. 간디는 바로 그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간것이였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보낸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점으로 되였다.

이 기간 간디는 민족과 민중을 위한 희생적봉사를 전개했으며 인종차별과 약자를 압박하는 모든 행위에 항거하는 투쟁을 계속했다.

그후 인디아로 귀국한 간디는 비폭력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여러차례에 걸쳐 투옥되여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출옥후 간디는 전국을 돌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와의 분쟁문제를 화해와 단합으로 극복하고 해결하며 독립맞이준비를 할것을 호소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영국은 1947년 인디아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인디아의 분렬을 꾀하고있었다. 영국은 고의적으로 인종들, 종교들사이의 대결을 조장하였으며 인디아의 분할독립을 추구하는 협정을 만들어내였다. 이 협정결과 인디아에서 파키스탄이 떨어져나감으로써 인디아는 갈라지게 되였다.

한편 인디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와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였다.

1948년 1월 30일 여전히 비폭력화해정신을 력설하면서 동분서주하고있던 간디는 힌두교의 극단분자들에 의하여 암살되였다.

이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상투적수법인 서로 싸우도록 하는 방법이 낳은 비극이였다.

간디가 사망한 후에 등장한 인물은 자와하를랄 네루수상이였다. 네루는 간디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서 줄곧 간디와 독립운동을 함께 했고 여러차례 감옥생활도 하였다. 그러나 네루는 간디의 절대적비폭력운동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절대적비폭력이란 곤난하다고 네루는 생각했던것이다.

간디가 암살되기 5개월전부터 이미 수상직을 맡고있었던 네루는 인디아의 모든 주정부들을 재편성하여 사회주의적사회를 실현하려고 노력했고 산업5개년계획을 세워 농지개혁과 농업개발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쁠럭불가담정책을 표방하고 반둥회의에서 평화공존5개원칙을 주장하여 제3세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인디아의 간추린 력사

 

인디아의 력사를 보면 B.C. 15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인디아로 이주하여 베다문화권을 이루었다고 한다.

B.C. 6세기경에 이르러 인디아에서는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한 크고작은 전쟁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B.C. 4세기에 마우리아제국이 세워졌다. B.C. 3세기 중국에서 진나라가 통일중국을 세웠는데 인디아에서도 오랜 혼란을 거친 뒤 통일국가가 최초로 건설된것이였다.

그러나 이 통일국가는 그후 여러개의 왕국으로 분렬되였는데 그중에서 쿠샨왕조가 제일 번성하여 인디아 북부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과 전쟁을 벌리기도 하였다.

A.D. 4세기경에는 인디아의 구프타왕조가 번창하여 힌두교가 인디아의 중심적종교로 등장함으로써 인디아불교는 자연히 쇠퇴되였다.

그런가 하면 A.D. 11세기초에 이슬람교가 인디아를 침입하기 시작하여 한때 인디아는 이슬람제국으로 번창하기도 하였다.

인디아는 또한 1220년대에 이르러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며 15세기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방식민주의자들의 본격적인 침입을 받기 시작하였다.

뽀르뚜갈침략자들이 제일먼저 인디아로부터 고아지방을 강탈하여 침략의 전초기지를 획득했다.

1600년에 인디아를 침략하기 시작한 영국은 동인디아회사를 만들어 침략기지를 설치했고 1608년에는 수라트에 영국상업기지를, 1615년에 무갈제국으로부터 인디아전역에 영국공관을 개설할수 있는 허가를 획득한데 이어 1633년에 오릿사에 영국무역공관을 설치하였다. 그후 영국은 백수십년에 걸쳐 인디아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다가 1757년에 이르러서는 인디아전역을 식민지화하여 근 200년동안 지배하였다.

 

영국의 식민지통치와 분할정책

 

영국이 인디아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함에 있어서 가장 우려한것은 인디아의 거대한 민중세력들의 단결이였다.

이로부터 영국은 인디아를 분렬시키는 묘안을 고안해냈다.

영국이 이 묘안을 적용하기 위해 리용한것이 바로 인디아의 복잡한 사회구조였다.

지난 시기 인디아의 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하게 형성되여있었다.

우선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어 사람들을 브라만(성직자, 학자 등), 크샤트리(왕족, 귀족, 무사 등), 와이샤(공민, 상인, 수공업자 등), 슈드라(잡인, 하인 등), 그밖의 피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천민)들로 갈라놓고있었다.

또한 종교로서는 힌두교(82.6%), 이슬람교(11.4%), 시크교(3%),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있었다.

또한 인디아에는 3 372개의 언어가 있었고 그중 10만명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216개였으며 법이 인정하는 지정언어는 18개나 되였다. 언어의 다양성은 부족사회가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는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디아는 지역적으로 종교와 언어, 문화적전통으로 인하여 제각기 분리된 사회를 형성하고있었다. 실례로 파키스탄, 방글라데슈, 카슈미르가 그러한 지역사회들이였다.

또한 인디아는 제각기 개성이 강한 사회적집단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했기때문에 각양각색의 원시문화와 현대문화가 뒤섞여 복잡한 사건들이 매일같이 발생하고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복잡한 특성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인디아를 통치해왔다.

오래동안 한나라 지경안에서 함께 살아온 파키스탄사람들이 인디아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아우성을 친것도, 방글라데슈가 독립을 원한것도, 오늘 카슈미르에서 끝을 모르는 분쟁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있는것도 다 이러한 제국주의자들의 분할정책으로 인한 결과이다.

미국과 영국의 그리스도교는 종교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싸움을 부추기는 악덕그리스도교이며 타락한 그리스도교이다. 인디아-파키스탄이 싸우면서 숱한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미국과 영국의 그리스도교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해왔다. 하지만 이라크전에서 죽은 미군 수천명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도 소란을 부리고있는가?

인디아에서 반미적힌두민족주의를 주장하고있는 어느 한 당의 관계자는 인디아-파키스탄분쟁문제는 미국때문이라고 하면서 미국이 인디아의 분쟁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있는 리유는 인디아가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에게 중요한 위치에 있기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국은 인디아를 친미국가로 묶어놓기 위하여 애쓰고있는데 인디아는 전통적으로 네루수상초기부터 쁠럭불가담로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는 나라로서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나라가 아니라고 본다.

 

인디아의 독립과 간디와 네루가문으로 이어지는 정치

 

1946년에 영국은 인디아에 정권을 이양할것을 협의했다.

이 협의에 의하여 1947년 8월에 인디아는 독립했지만 영국은 인디아에 조건부적인 권력이양을 했다. 그 조건부란 파키스탄을 독립시키라는것이였다.

당시 파키스탄지역에는 이슬람교가 절대다수를 이루고있었고 힌두교도는 소수파로 분류되고있었는데 영국은 식민지통치자의 본색을 드러내여 강압적인 방법으로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기정사실화했던것이다.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에 살고있던 힌두교도들은 갑자기 짐을 싸고 인디아로 이동을 하고 인디아에 살고있던 이슬람교도들은 고향을 떠나 이슬람의 나라 파키스탄으로 이주해가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였다.

인디아-파키스탄분쟁은 이렇게 시작되였고 인디아는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는 시각에 독립의 기쁨보다 오히려 분렬의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불안속에서 자와하를랄 네루는 인디아의 초대수상이 되였다.

네루총리는 집권초기부터 쁠럭불가담로선을 기본정책으로 삼았으며 1964년에 75살로 세상을 떠났다.

건국의 아버지 네루수상이 사망한 후에 인디라 간디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인디라 간디수상은 1971년에 이전 쏘련과 우호평화조약을 맺었고 이어서 불편하였던 중국과의 관계도 정상회복하였다.

인디라 간디는 국민대회당을 모체로 하여 집권을 하면서 네루수상이 주도했던 정치로선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던중 1984년에 시크교의 극단분자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인디라 간디수상이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수상직을 계승했으나 1989년에 정권을 야당련합체로 구성된 쉐카르에게 넘겨주게 되였다.

하지만 라지브 간디는 네루-간디가문의 전통과 국민대회당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결의끝에 1991년 수상직에 재출마하여 간디가문의 정치적지반인 남부지방에서 지역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였으나 시크교의 따밀분리주의게릴라의 폭탄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한편 쏘냐 간디는 1998년에 야당으로 된 국민대회당의 당수로 선출되여 네루-간디가문의 정권복귀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운동에 편승했다. 그 결과 2004년에 쏘냐 간디는 국민대회당의 당수로 재선되여 네루-간디가문의 명예를 다시 회복시키는 기회를 만들었다.

당시 인디아의 민심은 네루-간디가문의 전통적정권의 복귀만이 인디아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면서 쏘냐 간디가 수상으로 나서줄것을 호소하고있었다.

그러나 쏘냐 간디는 인디아의 수상직을 만모한 싱 전 재무장관에게 양보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만모한 싱은 1991년-1996년에 재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인디아의 경제앞에 조성되였던 어려움을 극복한 경력을 가지고있었다.

국민대회당의 천거를 받아 수상으로 취임한 싱은 국민대회당을 모체로 하고있는 정치세력과 시크교의 배경 그리고 24개 좌파정당들의 련합을 대표하여 집권을 시작했다.

 

만모한 싱수상 등장과 오늘의 인디아

 

2004년 5월에 인디아의 제14대수상으로 취임한 만모한 싱은 인디아독립이래 처음으로 출현한 시크교출신수상이다.

시크교로 말하면 인디아독립초기부터 힌두교의 정통가문인 네루-간디집안과 대립되여있던 종파였다.

이 대립은 그 뿌리가 있었다.

시크교는 16세기에 인디아와 파키스탄의 린접인 판쟙지역에서 생겨난 힌두교의 분파적종교인데 영국에 의하여 인디아와 파키스탄이 두개의 나라로 분렬될 때 판쟙지역의 서쪽은 파키스탄의 령토가 되였고 동쪽은 인디아의 령토가 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영국이 판쟙지역의 한가운데 그어놓은 분리선때문이였다.

이런 정치적혼란속에서 파키스탄령 판쟙지역에 살고있던 시크교도들은 파키스탄이 이슬람국으로 독립된다는 사실을 알고 일제히 인디아령 판쟙지역으로 옮겨왔다. 이와 반대로 인디아쪽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이사짐을 메고 인디아를 떠나 파키스탄쪽으로 집단적이동을 했다.

인디아령으로 옮겨온 시크교도들은 하나의 정치적집단을 형성하고 인디아정부에 분리자치를 요구해나섰다.

그러나 인디아정부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무력을 투입하는 등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결국 정부와 시크교도들사이의 대립은 더욱 커졌으며 그러한 속에 인디라 간디와 그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암살되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러던 인디아에서 시크교출신인 만모한 싱이 집권함으로써 같은 뿌리를 가지고있으면서도 력사적으로 오랜 원쑤가 되여왔던 힌두교와 시크교가 화해할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게 되였던것이다.

싱수상은 집권후 처음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우리 갈라지지 맙시다.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 갈라지면 이 나라는 위험에 빠질것입니다.》

이러한 싱수상앞에 나선 과제는 인디아내부의 화합과 경제살리기로 요약된다.

현재 인디아에는 국민대회당과 함께 정통보수 힌두교근본주의정당이 주요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있다.

이 정치세력은 인디아의 제2의 종단인 이슬람교와 극단한 대결을 주장하면서 이슬람교와 대립하여 싸우는것이 바로 힌두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싱수상에게는 힌두교내부의 대립과 힌두교와 이슬람교 두 종파간의 대립을 해결하여야 할 어려운 과제가 나서고있다.

싱수상의 경제살리기정책은 어떠한가?

과거 5년동안 재무장관으로 재직한 경험을 가지고있는 싱수상은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로 최대의 그룹을 형성하고 그들이 기업과 금융을 주도하여 인디아의 경제를 살리도록 하고있다. 싱수상의 이와 같은 지도력은 국내외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투자가들의 마음을 유도하고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싱정권앞에는 인디아의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고 농민과 빈곤층민중을 구제하며 소외된 계급의 불평과 반란문제를 풀어야 할 과제도 나서고있다.

싱수상은 중국, 로씨야 등 주변나라들과의 련계를 강화하면서 브라질, 남아프리카를 비롯한 신흥경제국들과의 협조도 긴밀히 발전시키고있다.

미국은 지금 인디아에 접근하고있다. 그것은 인디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씨야,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 이스라엘, 파키스탄과 함께 핵무기보유국들중 한 나라로 세계의 인정을 받고있기때문이다.

싱수상은 대외관계에서 자주적인 로선을 지향하고있다.

이것은 인디아와 이란과의 관계에서 잘 알수 있다.

싱수상은 미국의 압력에도 아랑곳않고 인디아의 에네르기확보를 위하여 이란에 친선의 손짓을 보내였다. 그는 인디아를 친선방문한 이란의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여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세계 주요에네르기소비국가인 인디아가 미국때문에 이란과 에네르기거래를 주저할 리유가 전혀 없다는것이 싱수상의 배심인것이다.

인디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73년에 대사급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두 나라는 여러 분야에 걸치는 협조와 교류속에 친선의 뉴대를 강화해나가고있다.

이렇듯 어제날 제국주의자들의 분렬정복정책으로 시달려온 인디아는 오늘 고유한 민족주의전통을 고수하면서 진보와 번영을 지향해나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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