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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분단과 육탄전을 벌인 세기의 프로레슬러 역도산과 이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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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흥노
댓글 0건 조회 1,401회 작성일 23-01-3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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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도산은 한일 국민영웅

역도산 (본명 김신락)은 우리 민족이 낳은 세기의 영웅으로 민족의 얼과 명예를 세계 만방에 떨친 진정한 애국자다. 그는 함남 출신으로 불과 14살 나이에 군민대항 씨름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다. 16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선수로 뛰었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씨름에 능통한 역도산은 최단시일에 일본 스모계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0 여 년의 스모선수 생활을 접고 1951년 미국을 방문해서 미프로레슬링계를 돌아보고 미국 진출 가능성을 모색한다. 새로운 미지의 셰계에 진출하려면 무엇 보다 뭔가 남들이 갖지 않은 신기술이 절대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레스링을 위한 새기법을 발명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물론 레슬링 연마도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새기법 개발에 전력투구했다. 마침내 그는 스모와 카라데를 조화롭게 접목한 '카라데찹' 개발에 성공한다. 지금은 이 기법이 레슬링계에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먼저 그는 하와이로 가서 터를 잡았다. 미 본토를 오가며 1년에 200회 이상 시합에 참여해 대부분 승리를 획득하고 정상급에 올라섰다. 미국 전역 뿐 아니라 전 세계 운동애호가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자 새로운 꿈을 설계하면서 프로레슬링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국 레슬링협회 (NWA)의 두터운 신뢰를 획득한 역도산은 미국레슬링협회의 전권을 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주로 후배 양성과 스포츠사업에 뛰어든다. 돌풍을 일으키고 승승장구한다.

2) 역도산의 꿈 <한반도 평화, 북일 수교>

레슬링 도장을 열고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결성하고 최초로 프로레슬링시합을 개최했다. 54년에는 국제레승링시합 까지 개최해서 일본 전역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 역도산은 부동의 큰 스포츠 사업가로 돈, 명예, 권력 까지 검어쥔 대단한 인물이 됐다.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인종차별, 조국의 분단이라는 검은 그림자를 털어낼 도리가 없다는 데에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도산의 수제자로 가장 반죽이 맞아 서로 흉허물 없이 털어놓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정상급 프로레슬링 선수 이노끼다.

역도산이 꿈을 실현키 위해선 정치참여 불가피론을 제기하자 전적으로 지지 동의하고 이를 위해 역도산의 정계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정계 투신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 우익 정치가들의 한반도 분단 고수와 서울의 군사쿠테타 지지가 결정적 이유로 보인다. 도쿄에서 역도산은 합법적 민주 정권이 군사 정변으로 몰락하고 통잉릐 싹들이 잘려지는 아픔을 목격한 것이다. 역도산이 한일 스포츠 교류라는 명목으로 방한해 운동과 무관한 38선 비무장지대를 방문했다.

남북의 대치점에서 역도산과 가장 먼저 마추친 사람이 코쟁이 헌병이었다. 역도산은 경비병과 일행들에게 말도 없이 외투와 웃통을 벗어던지고 쏜살같이 한참 달려갔다.한참동안 내달리더니 멈춰섰다. 그리고는 잘 들리진 않았지만 북녘을 향해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고향에 계신 연노한 어머니와 형님을 불러봤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그는 아마 "어, 여기가 뉘땅인데, 코쟁이가!"라며 코쟁이와 한판 붙었으면 하는 심정을 달래기 위해 뜀박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3)역도산 꿈실현에 일생을 바친 이노끼

역도산은 61년 귀국선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다항에 도착한 친딸 김영숙을 만났다. 그는 고향을 2번 방문했다. 모두 일제때였고 해방후에는 정치적 이유로 방문을 자제한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고향을 단 헌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것은 후일 이노끼의 증언에서도 나온다. 그는 60년 대 초에 거금을 평양에 기부한 걸로 알려졌다. 62년에는 김일성 주석의 생신선물로 벤츠자동차를 보낸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활동과 4.19혁명, 5.16군사쿠 등을 종합해보면 정계에 진출해 일본 정치와 국제외교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구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역도산의 수제자 일본인 이노끼는 63년 작고한 역도산의 꿈을 실현하는 데 일생을 바친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다. 이노끼는 어려서 가난을 경험하다가 살길을 잧아서 10대에 부라질 이민길에 들어섰다. 막노동을 하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부라질을 방문한 역도산을 만나게 됐다. 자신의 어려운 형편과 장래 포부를 밝히자 역도산은 그를 일본으로 대려가 레슬링을 가르친다. 이노끼는 체구도 완벽하지만 영리하기도 해서 쉽게 그리고 빨리 정상급 레슬링 선수가 됐다. 당시 이노끼를 가장 성심성의껏 지도한 사람이 선배 김일이다. 

전남 출신 김일은 어느날 우연히 일본잡지에 실린 역도산 기사를 읽고 그자리에서 역도산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처자식을 뒤로 하고 56년 일본 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 도착 즉시 체포돼 옥살이를 한다. 57년 이듬해 한국으로의 추방 명령이 떨어져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그는 최후 수단으로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의 주소를 알길이 없어 그냥 "역도산'이라고만 봉투 겉봉에 적었다. 하늘이 도와선지 구원이 손길이 뻗쳤다. 역도사이 워낙 유명해서 그의 이름만 가지고도 편지가 전달된 것이다.역도산의 후광으로 수용소를 빠져나와 바로 역도산의 도장에서 맹훈련에 들어갔다. 

김일 (1929-2006)은 빠르게 정상급에 올랐다. 그는 이노끼, 자이언트바바와 함께 역도산의 3대 제자 중 하나가 됐다. 그는 귀국후 병마로 고생했다. 이노끼는 정성껏 선배를 모셨고 문안도 자주 했다. 이노끼는 2000년 김일을 문안하고 서울로 올라가 '만남의 집'을 방문하고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김일의 엄격한 지도하에 일급 선수생활을 하던 이노끼가 선수생활을 접고 정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89년 '스포츠 평화당'을 창당하고 참의원에 당선됐다. 그가 35번이나 방북하면서 가장 커다란 업적을 이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건 역시 '평화를위한국제체육및문화축전' (평화의 제전 1995.4.28-30)이다. 이 성대한 축제는 세계 유명선수들이 평양으로 초대됐고 50-60만 평양 관중이 몰렸고 세계 각국 기자들과 관광객 3만 명 이상이 평양으로 찾아들었다. 대성공이었다. 그는 잊지 않고 매번 역도산의 딸 김영숙을 찾아보고 역도산의 핏중를 만나곤 했다. 이노끼는 자신의 정계 진출에 대해 역도산이 못다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라고 말했다. 또 자신과 평양을 연결한 사람이 역도산 스스이라고도 했다. 

후일 공명당으로 바꿔서 참의원에 재선되고도 그의 우선순위 정치적 과제는 북일 수교와 한반도 평화라는 역도산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북일수교를 주장했고 이를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했다고 자신이 밝혔다. 그는 일본 정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는 죽기전 흴체어를 타고서도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봐서 얼마나 평양을 사랑했나를 짐작케 한다. 역도산은 비록 정치적 뜻을 이루지 못하고 63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한일국민의 영웅으로 살아있다. 우리의 얼과 혼을 세상에 널리 알린 위대한 위인이 분명하다. 동시에 역도산을 은사로 따르면서 그의 꿈을 실현키 위해 일생을 깡그리 바친 이노끼 의원은 우리 민족으로선 도저히 잊어선 안될 일본인이다. 그는 역도산과 같이 정계에 뛰어들어 한반도에 평화 번영을, 그리고 일본 졍계를 개편하는 동시에 일본이 앞장서서 미국을 움직여 북미 수교를 견인한다는 큰 그림을 꿈꿨던 체육인이다. 역도산과 이노끼는 반드시 기억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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