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홍정자 여사 별세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통일운동가 홍정자 여사 별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761회 작성일 16-07-04 04:35

본문


제가 통일운동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셨던 스승 홍동근 목사님의 사모님 홍정자 선생님이 갑자기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2년 반 전에 잠깐 로스앤젤스에서 뵙고 이후 몇 차례의 소식을 주고 받으며 귀중한 저서를 받은 것이 조금 위로가 될뿐입니다.  홍정자 선생님과  북부조국을 수없이 방문하면서 수많은 곳곳을 방문하며 인민들을 만나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린 그분의 소중한 책들은 통일운동의 초석이 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홍정자 선생님, 이렇게 떠나심을 깊이 애도합니다.  이제 홍동근 목사님 계신 곳에서 고이 안식하소서.



아래 기사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홈페이지에서 공유


부            고 

 

홍정자 회원 별세

(고 홍동근 목사 부인)

 

1945년 4월 26일 – 2016년 7월 1일

 

California 주 North Hollywood에 소재한 Valley City  Four Seasons Nursing Care and Wellness 에 입원 가료중 7월 1일 향년71세에 타계하셨습니다.

 

 약      력  

서울 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졸업

이화여자 대학교 조소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불문과 졸업

부산 한성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역임

 

조국통일북미주협회 

이산가족위원회 총무 역임

 민족문화위원회 위원장

마주 통일여성회 부회장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재미예술단장(1989-2000)

 

재미동포전국연합회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예술단 후원단장

서부지역 예술위원장

 

저     서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백두밀림의 항일투사 김정숙 어머님을 추모하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장례는 유가족들이 가족장으로 합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추모위원회를 조직하여 추모모임을 준비합니다.

날짜와 장소는 추후 알려드리겠습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홍정자 회원, 통일운동에 헌신한 애국의 삶.
 
편집국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산하 서부지역연합회 예술위원장을 역임하신 홍정자 회원은 생전 이산가족상봉사업과 북미예술교류사업에 헌신적 활동을 하면서 조국통일에 위해 한생을 살아왔습니다. 홍정자 회원의 삶 일부에 대해 강산재미동포의 방북기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강산 재미동포의 방북기는 201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독자를 위해 방북기 중 홍정자 회원과 관련된 내용을 다시 소개합니다. 
 

 

시애틀에 거주하는 강산 씨가 9월 3일부터 11일까지 25년 만에 북녘 땅을 밟은 후 여행기를 써서 발표하였다. 북 바로 알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필자와의 협의 아래 그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 편집국 
 

 


 

▲2013년 엘에이에서 홍정자 여사와 만난 강산 재미동포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5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이 된 리화순 직포공의 이야기

 

 

 

강산

 

내가 평양방직공장을 방문하면서 이곳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북부조국 인민의 의복문제를 해결하는 생산공장이기도 하지만 특히 미주에서 1992년에 발행된 홍정자 여사의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책에 수록된 리화순 직포공의 이야기를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북조선의 최고명예훈장인 ‘노력영웅’이자 남한의 국회의원 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리화순 직포공이 바로 이곳 평양방직공장에서 그 전설적인 생애를 산 것이다.  

 

홍정자 여사는 나의 가장 존경하는 통일운동의 스승 고 홍동근 목사님 사모님이시다.  2001년 돌아가실 때까지 온 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한 홍동근 목사님에 대해서는 이후에 방문기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홍정자 여사는 내가 작년 이맘때 로스앤젤스에 방문하였다가 옛날 홍동근 목사님과 함께 뵌지 28년만에 뵙게 되었다.  홍 목사님께서 내게 통일에 관한 책들과 편지를 자주  보내주셨고 나 또한 90년대까지 내내 서신으로 연락을 하였으니 홍정자 여사 또한 나를 잊지는 않으셨겠지하고  생각했는데 노길남 박사님 통해서 연락이 닿자 나를 너무도 잘 기억해주셨다.  그렇게 작년에 아주 반갑게 서로 만난 이후로 서로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끊지 않고 지내고 있다.  

 

근래에 내가 북을 다녀온 후 홍정자 여사께 연락하여 방북기를 쓰고 있다고 하자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그토록 어려운 길을 이제 내가 걷게 되었다고 하면서 위로해주셨다.  홍 목사님과 당신이 너무도 험난한 통일운동의 길을 걸어왔기에 내가 피할 수만 있으면 그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란다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해주신 그 깊은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지 못하랴.  여기저기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시절 또한 통일로 가는 분위기라면 굳이 내가 이 길을 걸을 이유가 없다.  정말 10년 전처럼 내가 참여하지 않아도 남북이 서로 오고 가면서 정상회담을 하는 그런 시절이면 아무 걱정없이 내 생업에만 집중해도 좋겠지만 지금은 남과 북이 다시 멀어져버렸고 남의 민중은 통일에 대한 꿈마저 잃어버린 시절이 되어버렸으니 그걸 알면서 어떻게 이 길을 회피할 수 있을까.  

 

 

547034CD4F3C130013

▲왼편에서 두 번째가 홍동근 목사님, 그리고 네 번째가 홍정자 여사의 모습이다.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책에서)

 

 

내가 학문을 연구해온 학자도 아니고 진보적인 신앙의 목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튼튼하게 굴러가는 사업체를 가진 사람도 아닌, 그야말로 살기 어려워 오래 전에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와서는 온갖 밑바닥 일부터 다해보며 살아왔고, 아직도 북의 어떤 인민의 표현처럼 ‘조마조마하게 마음 조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민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통일문제의 선각자로서 이 일을 회피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5470360B482D6D0035

                ▲ 2013년 11월, 홍정자 여사와 28년만에 로스앤젤스에서 재회한 필자.   

 

홍동근 목사님과 함께 28년 전에 하와이에 방문했을 때 우리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했던 것을 기억해주셨다. 그때 함께 하와이섬을 일주하며 좋은 추억을 가졌고, 나는 홍동근 목사님으로부터 민족과 통일에 관한 참 귀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통일운동가들 가운데 홍정자 여사만큼 북부조국의 수많은 인민들을 여러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차례 방문하여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깊은 내면을 우리들에게 알려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권의 저서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를 통하여 독자들은 북의 인민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즉 그들의 삶의 목적에 공감하게 된다.  이웃이 서로 사랑하되 내 가족보다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내가 속한 사회와 나라를 내몸보다 더 사랑하는 그 거룩하기까지 한 그들의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런 북부조국의 인민들을 그 책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나 또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동족인 그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북부조국을 깊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547036BA3F696B001C

▲홍정자 여사의 저서들은 통일운동이 확산되면서 다시 출판되어져야 할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북부조국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우리 모두가 읽으면 그들을 바로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도록 우리 민중을 바꿔놓을 것이다.

 

 

오늘의 나의 방문기는 홍정자 여사가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책에서 평양방직공장에서 리화순 씨를 만나 인터뷰한 이야기로 대신 하기로 하자.   홍정자 여사는 공장 접대실에서 리화순 씨를 만나 자세하게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너무도 진한 감동을 주는 글이다.  홍정자 여사의 수준 높은 문장력으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된 그 이야기를 내가 간략하게 그 줄거리만 여기 옮기기는 하는데 그 감동을 이렇게 줄여서는 제대로 전할 길이 없어 너무도 아쉽다.

 

이화순 씨는 서울 인근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이름은 이화자였다.  충청도로 이사를 갔다가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산으로 들어갔는데 7살 때 아버지는 총에 맞고 죽었다고 경찰이 알려오면서 협박하여 시체마저 찾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에 제대로 옷도 걸치지 못하고 굶주리며 살아가는 동안 너무도 고생이 되어 어머니와 이별하고 서울로 팔려가 아이를 봐주고 청소를 하며 겨우 허기를 채우며 살게 되는데 그런 동안에 주인을 잘못 만나 많이도 맞으면서 심한 고생을 하였다.... (하략)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