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 13. 장군님의 특명을 받으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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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의 특명을 받드시여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도천리와 신파일대에 혁명조직들을 튼튼히 꾸리고 그 활동을 강화하도록 하신 후 전국적판도에서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가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원대한 구상을 꽃피우시기 위하여 자신의 활동범위를 국내 종심깊이에로 더욱 넓혀나가시였다.
주체26(1937)년 7월초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사령부통신원을 통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과업을 전달받으시였다.
그것은 시급히 국내에 나가 그곳 혁명조직들과 애국자들에게 조국광복회운동과 관련한 새로운 투쟁목표와 전략전술을 알려주며 분산적으로 활동하고있는 혁명가들과 모든 반일단체성원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묶어세우고 당창건을 위한 준비사업을 적극 밀고나갈데 대한 과업이였다. 특히 지시에는 풍산지구에 나가 혁명조직의 영향하에 있는 천도교인들을 서울에서 열리는 천도교인대회에 대표로 파견하여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혁명적영향을 주며 국내혁명조직들에서 보고하여온 신간회 총무부장이였고 단천농민폭동참가자인 리주연과 애국렬사 리준선생의 아들 리용 그리고 초기공산주의운동참가자인 리영을 각각 만나 사업할데 대한 과업이 제시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맡겨주신 임무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업이였다. 이것은 국내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과 당창건준비사업을 확대발전시키는데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사업이였을뿐아니라 적들의 경계가 심한 동해안일대를 처음 개척하다싶이 하여야 하는 힘든 과업이였다.
조국해방의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지, 그 어떤 조직이든지 다 위대한 수령님의 통일적인 령도를 받게 하여야 한다는 그 불타는 각오를 안으시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압록강을 넘어 동해안으로 향하시였다.
사실 총검의 숲을 이루어놓은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국경을 넘나든다는것도 그렇지만 리주연과 리용, 리영과 같이 각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 산지사방에 박혀있는 사람들을 다 찾아내여 만난다는것은 더우기 어려운 일이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 만나셔야 할 리주연과 리용, 리영 등은 항시적으로 일제경찰의 감시를 받고있는 《요시찰대상》들이였던것이다.
하지만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일제의 밀정들과 경찰들이 그 아무리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해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림기응변의 지략으로 적들의 경계망 한복판에서 공작대상들을 만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하시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리시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먼저 풍산에 도착하시여 천도교 풍산종리원 원장 원충희와 천도교인들을 만나시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시고나서 올해 천도교의 중앙기념행사에 다시 대표단을 파견하는것이 좋겠다는 장군님의 의도를 전달하시고 2천만 우리 민족이 오늘까지도 식민지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것은 온 민족이 한마음한뜻으로 뭉쳐 일제와 싸우지 못한때문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나라를 사랑하고 일제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관계없이 모두다 하나의 대오에 묶어세우기 위하여 조국광복회를 내오시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서울에 대표단을 파견하려는것은 결코 최린 같은 놈을 돌려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린일파와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갈라보아야 한다. 최린과 같은 놈은 철저히 고립시켜야 하지만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고있는 대다수 천도교인들은 모두 교양하여 건져내야 한다. 모든 천도교인들과 온 민족을 한마음한뜻으로 튼튼히 묶어세워 단결된 힘으로 일제를 때려부시자는것이 위대한 장군님의 뜻이다. …
김정숙녀장군의 말씀에 모임참가자들은 모두 도량이 대해처럼 넓으신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한울님》이시라고 하였고 그해 정축년기념행사에 이전보다 더 큰 대표단을 무어 서울로 파견하는 문제와 천도교청년당중앙본부에서 상무로 있다가 돌아온 사람을 다시 서울로 파견하여 그곳 교직자들과 각지 종리원에 위대한 장군님의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을 전달하는 문제, 평안남도와 함경북도, 황해도를 비롯한 전국각지의 종리원들에 이곳의 립장을 알려주어 중앙행사에서 공동보조를 취할데 대한 문제 등을 토의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장군님께서 주신 첫번째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시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천도교인들과의 사업을 진행하신 후 단천으로 가시여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도덕사의 승방에 누워있던 리주연을 만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를 회상하시여 《그때 김정숙동무를 비롯한 공작원들은 풍산지구를 거점으로 정하고 단천지구에서 신간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던 리주연동무와 …련계를 가지고 그곳의 지하조직들을 지도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리주연은 전국각지에 지회를 두고 활동한 반일애국단체인 신간회에도 관계하였고 단천농민폭동을 주도한 《죄》로 체포되여 감옥살이도 한 사람이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 김일성장군님의 지시로 선생을 만나러 왔다고 말씀하시자 병석에 누워있던 사람 같지 않게 벌떡 일어나앉은 리주연은 《고맙습니다. …장군님께서 하찮은 저에게 공작원동지를 보내주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그러면서 그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건강하신가고 장군님의 안부부터 정중히 물었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장군님께서는 건강하시다고, 장군님께서는 한시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을 잊지 않고계시며 이번에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지들과 앞으로의 활동방향과 대책들에 대하여 토론해보라고 우리를 파견하시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며 그가 옥중고초를 겪고 병까지 만난데 대하여 따뜻이 위로해주시였다.
이윽하여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혀주신 조선혁명의 성격과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에 대하여,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을 이룩할데 대한 남호두회의의 사상에 대하여, 혁명투쟁의 실천속에서 기층당조직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당을 창건할데 대한 방침에 대하여 그리고 지난 5월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에서 열린 국내당공작위원회회의에서 제시하신 국내에서 당조직을 급속히 확대하고 혁명조직들에 대한 정연한 조직지도체계를 세울데 대한 방침에 대하여 전달하여주시였다.
국내혁명가들에게 보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전달받은 리주연은 감격에 목메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방침을 전달받고보니 감옥에서부터 암중모색하던 문제가 밝혀지고 앞길이 환히 내다보인다고 하면서 헤여질 때에는 신심에 넘쳐 불편한 몸이였지만 김정숙녀장군을 멀리까지 바래드리였다.
그해 8월에 국내에 다시 나오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단천시 석우리에 있는 그의 친척집에서 또다시 리주연을 만나 평양지방에 나가 공작할데 대한 구체적인 과업을 주시였다. 다음날 아침 김정숙녀장군께서 이곳을 떠나시게 되였는데 리주연은 불편한 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0리가 넘는 곳까지 따라나와 조국광복회운동과 당조직건설사업, 대중투쟁지도에서 나서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많은것을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김정숙녀장군께서 주시는 대답들을 하나하나 명심하여 새겨넣었다.
그후 리주연은 김정숙녀장군께서 가르쳐주신대로 평양으로 자리를 옮기고 평양고무공장과 곡산공장 등 여러 공장들에서 혁명조직을 확대해나갔으며 남포, 강서지구의 혁명가들과도 련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김정숙녀장군과의 상봉은 한생의 좌표를 새롭게 결정해준 의의깊은 사변이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 안겨주신 혁명적열정과 신념을 굳게 간직하였기에 리주연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시기에는 물론 조국이 해방된 후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총무부장으로, 그후 내각부수상으로서 위대한 수령님을 충직하게 받들어올수 있었다.
단천지구에서의 공작목적을 달성하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동해연선 정치공작의 다음단계의 사업으로 리용을 만나기 위하여 리원을 거쳐 차호로 나오시였다.
차호로 걸어가시는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리용은 애국렬사 리준선생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그와 꼭 련계를 맺고 올데 대하여 주신 가르치심을 생각하시며 깊은 회억에 잠기시였다.
리준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잊지 못해하시는 열혈의 애국렬사였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열렬하였기에 을사망국으로 삼천리강산에 곡성이 진동하자 의분을 누를길없어 가슴치며 반일의 길에 일떠섰고 국권수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네데를란드의 수도 헤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배를 갈라 민족의 기개를 떨치였던것이다. 애국적인 그의 장거를 귀중히 여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초기혁명활동의 나날 무송에서 그에 대한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창작공연하시였었다.
그랬던 그 애국지사 리준선생의 아들을 위대한 수령님과 련계맺어주는 일을 자신께서 맡아하게 되였으니 김정숙녀장군의 감회는 남달리 깊었다.
차호앞바다기슭은 붉은색을 띤 차돌층이 수십길의 절벽을 이루고있어 예로부터 《적벽강》이라고 불리웠는데 당시 이곳 명승지는 잘사는 놈들의 유흥장으로 되고있었던것이다.
리원과 차호일대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리용과 만나는 장소를 적들속에 대담하게 들어가 유흥, 유람객들이 수많이 붐비는 《적벽강》의 놀이터에 정하기로 결심하시였다.
차호에 오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푸른 파도가 쉬임없이 설레이는 일망무제한 동해바다를 이윽토록 바라보시였다. 절승경개를 이룬 조국의 장엄한 바다와 수려한 산천들도 감회로왔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펼쳐주신 조국해방의 원대한 구상을 국내의 종심깊은 여기 동해바다가에서까지 꽃피우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혁명가의 긍지가 가슴가득 고여올랐다.
잠시후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적벽강》놀이터에서 리용을 만나시였다. 그때 리용은 자기가 조직한 반일회성원의 집에 와있다가 련락을 받고 그리로 나왔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감격에 겨워 어쩔바를 몰라하는 리용에게 헤그에서 조선독립을 웨치며 분사한 리준선생의 애국충정에 대하여 우리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이시며 조국광복회 회장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지시를 받고 그이의 말씀을 선생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백두밀림에서 여기로 찾아오게 되였다고 자기 소개를 하시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우리는 리용선생이 아버지 리준선생께서 지녔던 고귀한 애국의 넋을 끝까지 지켜 나라의 광복을 위한 투쟁에 한몸바쳐 나서리라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시면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비롯한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방침을 해설해주시였다. 그러시고나서 차호반일회사업에 대하여 료해하시고 반일회에 망라된 각이한 계급, 계층과의 사업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에 대해서와 성원들의 준비정도에 맞게 능란하게 사업할데 대하여 그리고 모든 합법적조건을 최대한 리용하여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반일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갈데 대하여 차근차근 가르쳐주시였다.
김정숙녀장군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광복사상에 커다란 감동을 금치 못한 리용은 이제부터는 김일성장군님의 수하군사가 되여 애국의 넋을 끝까지 지키며 조국해방성업에 일편단심 다해갈 자기의 결의를 장군님께 삼가 전해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당시를 회상하시여 그때 김정숙동무를 비롯한 정치공작원들은 리준의 아들 리용과도 련계를 가지고 그곳의 지하조직들을 지도하였다고, 최근에 리원지구에서도 혁명적인 구호들이 많이 발굴되였다고 하는데 그 구호들도 그때 우리 동무들이 쓴 구호들일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한 애국렬사의 넋을 그 후대에게 련면히 이어주시려는 김정숙녀장군의 헌신과 불굴의 노력이 있어 그후 리용 역시 일제의 폭압속에서도 변함없이 혁명투쟁의 길을 꿋꿋이 걸었으며 해방후에는 공화국의 첫 도시경영상으로 사업할수 있었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그날 리용이 마련한 마차를 타시고 차호를 떠나 유유히 북청으로 나오시였다.
북청군 청홍리에서 조국광복회 북청지구책임자를 만나 이 일대의 적정과 혁명조직의 실태를 료해하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만나보라고 하신 초기공산주의운동자 리영의 최근동향에 대하여 다시금 상세히 알아보시였다.
리영은 3.1인민봉기에도 참가하였으며 1920년대 전반기에는 《서울청년회》(서울파)에 속하여 청년운동과 초기공산주의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파쟁에도 가담하였고 1925년에 창건되였던 조선공산당과도 관계하였으며 1928년에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생활을 한 후 북청일대에서 공산당재건운동을 진행하고 로조, 농조운동을 지도하다가 1933년 또다시 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후에는 먼 북쪽땅인 선봉지방에 가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직선을 찾아헤매다가 실패한 후 그 선을 혹시 북청쪽에서 찾을수도 있지 않을가 하여 북청에 다시 나와있었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조국광복회 북청지구책임자에게 자신께서 리영을 만나보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조직책임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것이 일제군경놈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적들의 일상적인 감시를 받는 《요시찰대상》을 만난다는것은 하나의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기어이 수행하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놀이터인 청홍리솔밭에서 대낮에 리영을 만날 대담한 계획을 세우시였다.
다음날 점심때 북청지구책임자가 리영을 데리고 솔밭에 나타났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리영을 다정히 맞아주시고 선생이 반일애국의 뜻을 버리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고있는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자 리영은 지난날의 투쟁에서는 쓰디쓴 실패의 맛만 보았다고 하면서 그래 연해주에나 가서 다시 투쟁방도를 모색해볼가 하여 선봉지방에서 여러해를 보냈는데 아직도 그 방도를 찾지 못하고있다고 말하는것이였다. 그의 말에는 반일의 뜻을 품고 곡절많은 길을 걸어왔으나 아직도 참된 투쟁의 길을 찾지 못하고 향방없이 헤매는 초기공산주의운동자의 울분과 고뇌가 그대로 어려있었다.
얼마후에야 김정숙녀장군이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하신 공작원이라는것을 알게 된 그는 눈물이 글썽하여 녀장군의 손을 꼭 잡으며 《왜 이제야 그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이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국내에서 활동하고있는 혁명가들을 굳게 믿고계신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국내혁명가들앞에 나서는 과업과 방도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해설해주시였다.
국내의 혁명가들에게 보내는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받은 리영은 이제는 앞길이 환히 열리고 모를것도 무서울것도 없다고 하면서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한길에서 모든것을 다 바쳐나가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다지였다.
옳바른 투쟁의 길로 이끌어줄 령도자를 모시지 못하여 방황하면서 투쟁의욕과 용기를 잃고있던 리영에게 새로운 삶의 희열과 투쟁의 열기, 활력을 안겨주신 김정숙녀장군의 정력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그후 리영은 김정숙녀사의 말씀대로 서울에 가서 공산주의운동관계자들을 만나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로선에 대하여 전달하였으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쓰딸리단》(강철과 같이 굳센 조직이라는 뜻), 《산악대》 등의 조직들을 새로 조직하고 그것을 서울을 중심으로 강원도, 경상북도, 평안남도일대에로 확대할수 있었다. 리영은 조국이 해방되자 위대한 수령님의 새 조국건설로선을 받들고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공화국이 창건된 후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책임적인 직책에서 사업하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는 그후 풍산으로 나오시는 길에 문조리 양지마을에서 주병포의 집에 머무르시면서 그에게 혁명적교양을 주시였고 풍산비밀근거지에 들리시여 소부대, 소조사업을 지도하시였으며 중일전쟁발발소식에 접하고 돌아오시던 길에는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일하고있던 리인모를 파발리에서 만나 투쟁의 앞길을 밝혀주시였다.
참으로 김정숙녀장군께서 신파를 거쳐 풍산, 허천, 단천, 리원, 북청일대에서 벌리신 빛나는 혁명활동은 국내깊이에서 혁명조직들을 확대하는데서와 국내의 반일투쟁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통일적인 령도를 실현하는데서 거대한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활동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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