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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4. 감옥투쟁에서 살아 있는 가족 친지들과 어떤 연계 속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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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677회 작성일 23-03-2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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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4.

감옥투쟁에서 살아 있는 가족 친지들과 어떤 연계 속에 있었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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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비전향 35년 9개월동안 살아 있는 어머님을 3번 면회하였으며 손위 누님은 2번면회 했으며 형수님도 2번 면회했다. 큰 형님은 1번, 큰누나도 1번 면회했다. 그러니까 총 9번 면회를 하였다.

어머님과 큰형님의 면회는 내가 사형받고 대구 미결사에 있을 때이다.

이때는 1954년 4월 28일 남원 고등군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 민변 변호사가 나를 귀엽게 여겼는지 나를 보고 고향이 어데이며 가족이 있는가고 묻기에 가족이 입산해서 다 죽은 줄 알고 있다고 말을 하니 혹시 살아 있을 수도 있으니 주소나 한번 가르쳐 달라해서 가르쳐 준 사실이 있었다.

대구서 어머님 면회는 이때 이 변호사가 편지를 한 모양이다. 이편지를 받고 꿈인지 생시인지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하면서, 이미 자수자가 내가 총을 맞고 쓰러져 죽은 것을 봤다고 해서 이미 다 잊고 살았는데 사형을 받고 대구로 이감갔다는 편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듣기도 했다.

또한 대구에서 박치호 변호사의 편지를 받고 분명이 살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대구 미결사에 있을 때 사방 관구부장이란 자가 내가 사형을 받고 있는 것을 측은지심이 들어서인지 어느날 나를 불러내 대구에 유명한 변호사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는데 하루 지나 면회를 했었다. 면회한 결과 박치호변호사 편지를 받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급히 달려오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처음 뵈었을 때 서로 살아 있음이 확인돼 그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살아 돌아올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하는 눈빛으로 변하여 흘리는 어머님의 눈물이 나의 마음속을 아프게 했다.

형님에게 논전답을 다 팔아서라도 내가 살아 나올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을 하니까 그렇게라도 네가 살아나올수만 있다면야 하기에 다음에 면회 올 때는 변호사 만나보고 그것이 가능하면 내 면회 하고 불가능하면 면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이 올 줄을 내심 기다렸다.

그후 형님은 촌 논전답을 다 팔고서 박치호변호사를 만났으나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술로 그 논전답값을 다 소비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때부터 집도 논전답도 다 마사졌고 문중 제각에서 살게 되는 빈한한 삶이 계속 되었다. 집없이 사는 신세라 형님은 서울 안양촌에 단칸방에 월세로 살면서 안양촌 물난리 때 집이 물난리에 무너져 막내 아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아들을 건지려다 떠내려가서 익사하고 말았다. 아들은 10리쯤 떠내려가다가 나무에 걸려 살아났다.

두 번째 면회는 사형에서 무기로 받아 대구에서 김천 소년 형무소에 있을 때다. 1955년도다. 어머님께서 아직도 대구형무소에서 살고 있는 줄 알고 대구교로 면회왔다가 김천소년형무소로 이감 갔다는 소식을 듣고 김천소년형무소로 버스타고 오는중 큰 조카딸이 식모살이해서 번 돈 2000원을 삼촌에게 넣어주라고 준 돈을 쓰리당해 한 푼도 넣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어머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당시는 촌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허술한 돈주머니들을 절도범들이 노려서 쓰리 당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어머님의 마지막 세 번째의 면회가 1966년도 여름이었다. 이때는 전향공작상 면회가 꼭 필요하다는 의도에 의해서 한번은 시켜주고 있는 때였다.

그때도 소장실에서 소장입회하에서 교무과 유종음 교회사가 참가하는 3인이었다. 이때 어머니 너무염려 하시지 말라고 하니까 소장놈이 챙겨들어 공산주의자는 부모님도 모르는 냉혹 인간이라고 하기에 공산주의 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맞받아 쳤더니 소장놈은 화를 내며 이젠 이런 사람은 면회 시킬 필요 없다 하면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님은 유엔에서 대한민국기가 휘날리고 있다하는 말씀을 듣고 어머님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교화과에서 이런 말을 하라고 시키더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면회는 전향공작상 필요에 의해서 한번은 시켜주는데 사전에 교화과에서 어떤 말을 할 것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고 하는 것임을 확인했었다.

그후에 어머님은 지금 같으면 위암에 걸려 백약이무효하다는 큰조카딸의 편지를 받기도 했었다.

그후 8월 25일에 영승이를 부르며 마지막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돌아가신 후 2개월 만에 큰 조카의 편지를 받고 독방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평소에 아버님이 58세에 돌아셨다는 비보를 듣고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데 그때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하기도 했다.

그후 대전감옥에서 살 때인 1975년 여름에 사회참관 한번 나가서 서울에 살고 있는 막내 동생집에 가본적이 있다.

그때 큰형님과 막내 내외를 만나 점심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첫날 서울에가서 서울구치소에서 하루저녁을 자고 큰형님을 만났다.

그때 큰형님이 전향하면 나온다고 하는데 감옥에서 평생살다가 죽어서 나올것이냐고 말하기에 전향한다고 당장나오는 것도 아니고 내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나에게 맡기라고 말하니 네 죽어도 나는 모르니 잘 알아서 하라고 하기에 내가 죽거든 내무덤에 공산의자 김영승이란 표말 하나 세워달라고 말했더니 교회사는 듣고서 빨리 가자고 해서 대전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후 광주에 있을 때 일차 만기가 74년 4월28일이 만기인데 만기 한달을 남겨놓고 큰누님이 면회와 교화과 상담실에서 나를 붙잡고 전향하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나는 내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만하고 내 보낸 후 신학원담당놈은 전향을 않는다고 마구 짓밟고 갈비를 차서 한달간 꼼짝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살도 하려 했으나 이렇게 죽으면 개죽음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새로운 마음을 단단히 하고 살아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전감옥에 살 때 23세 때에 머리가 아파 벗겨지기 시작하자 의무과 진찰을 해본 결과 아직 박사될 나위는 안되었는데 영향부족에서 온것이기 때문에 영향을 많이 섭취해야 된다는 처방을 받았다.

머리가 아프고 가려워 손으로 머리를 긁으면 머리칼이 수없이 빠졌다가 다시 나고 한다. 결국에는 잔털이 된다. 그래서 벗겨지기란 별명을 갖기도 했다. 사방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내가 책임지고 많이 나가기 때문에 계호과에서는 벗겨지기 또 나왔네 라고 간수들이 말한다.

그래서 고향집에 영양이 부족해서 머리가 다 빠졌으니 영양제를 좀 부쳐달라고 편지했다.

촌에서는 보리미수가루 소두 한 말을 부쳐오기도 했으나 차입품은 일체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소포는 왔으나 영치되어 있었다.

광주로 이감갈 때 영치품을 뒤져보니 없어지고 말았다. 김천감옥에 살 때도 보리미수가루 소두 한 말 부쳐왔는데 받아주었다. 나는 한 되박도 못먹고 다 나누어 주는 바람에 김천 번호가 429번인데 내 인기가 아주 좋았다. 나는 남을 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내 사촌 막내동생이 있었는데 전북 곰서에서 생선장사를 하는데 이 동생이 내가 출옥하면 갈 데가 없어서 방한칸을 마련하여 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전향을 안한다고 다시 2년을 받아 살게 되고 감호처분까지 받아 살게되니 영치금 2000원씩을 몇 번 부쳐주었다. 돌밥만 먹어 어금니가 다 마사져 있던 때라 이 치료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몇 년전에 암으로 죽었지만 잊을 수 없는 사촌동생이이다. 나는 징역사는 동안 소포는 보리미수가루 두 번 받은 것 뿐이고 영치금은 몇 번 받았다.

가족면회 없는 동지만이 전방하는 바람에 궁핍한 생활 환경에서 살았다. 그것도 매일 검방검신하는 바람에 면회오는 동지들의 원조도 받기 힘들었다.

음식을 받았다가 만일 제때에 먹지 못하던가 할 때면 검방에 걸려 주는 동지와 받은 사람도 징벌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시가 심할 때는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런닝구가 없어서 날근 하나 구해서 입었는데 헤어져서 걸레 조각을 붙여 꿰매고 또 꿰매다 보니 맨 내중에는 실밥만 남을 정도가 되어 검신에서 이게 난닝구냐고 하면서 조작해서 입는다고 압수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궁하게 사는 때도 있었다. 대전 감옥 생활 실태이다.

지금 생각하면 독자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23년 3월 26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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