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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에 대한 조선의 지원 (2&3) (해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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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099회 작성일 18-08-30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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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에 대한 조선의 지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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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베트남지원에서 가장 명성을 남긴 것은 2개의 비행연대들이 미군 전투기들을 대상으로 벌인 공중전들입니다. 지금도 세계전쟁역사에 기적으로 기록되어 수많은 공군전문가들의 연구대상인 하노이 공중전을 비롯하어 인민군 비행연대들이 벌인 공중전들은 기존의 전략전술과 군사기술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며 과거 백두산에서 100만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50년대에 16개국 국제연합군과 맞서 싸운 조선인민군 만이 창조하고 벌일 수 있는 전무후무한 사변들입니다.

이때 조선공군은 미그-17을 운용하었고 미 공군은 F-4와 F-105, 미 해군은 A-6과 A-8을 운용하었는데 어느 기종이 더 기술적으로 우월한가에 대한 평가자료들이 인터넷에 차고 넘치므로 자세한 설명을 약합니다. 사실 미그-17로 미 공군과 해군의 주력전투기들과 대결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실지로 같은 기종을 운용하던 베트남공군은 미 공군과 미 해군의 전투기들앞에서 파리신세었습니다. 당시 베트남 공군은 소련공군고문들의 지휘밑에 전투를 벌였는데 어떤 전투에서는 미군 전투기를 단 한대도 격추하지 못하고 자기 전투기들을 모조리 격추당하어야 하었습니다. 쉽게 말하어 스피드나 기동성은 둘째치고 화력에서 20mm기관포와 공대공미사일 '사이드와인더'와의 대결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전쟁 2년간에 북베트남 공군은 주력전투기들을 거의다 잃어 버렸으며 대공포로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고공전략폭격기들의 융단폭격과 공대지유도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들의 정밀타격앞에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었습니다. 우선 비행장 자체를 유지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 조선에서 파견된 2개의 추격비행연대가 극비밀리에 베트남에 도착하었습니다. 그들은 소련고문들과는 달리 그 어떤 특대우를 바라지 않았으며 본국인 조선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열대정글의 폭염과 폭우, 맹수들의 공격을 자체로 이겨내면서 야전비행장을 건설하고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기본활주로에서 멀리 떨어 진 열대정글수림속에 은밀히 미그-17을 은폐시키고 비행기 위를 덮은 나무가지에 공중캠프를 매달고 거기서 숙식하면서 전투를 하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낮에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과 밤에 열대코브라들의 공격에서 도저히 살아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행사들이 수면부족과 이색입맛, 심한 설사증으로 고생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공군의 추격비행연대들이 정글수림속에 고도의 위장술로 은폐해 있다 보니 조선공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은 한동안 극비로 취급되었고 지어 비행장 근처의 민가들에서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비행기의 국적마크도 조선공군 마크가 아니라 베트남 공군마크를 페인트하었기 때문에 식별 안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비행사들은 베트공들과 꼭 같은 포즈에서 남베트남군인들이 아니라 미군 비행사들과 싸우기 위해 온 진실한 전투원, 북베트남의 동지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선비행사들이 베트남어를 몰랐으므로 전투과정에 조선어로 말 하게 됩니다. 이것때문에 조선비행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며 훗날 조선에서 공식 인정함으로써 전 세계가 알게 됩니다.

첫 전투에서부터 소련과 베트남공군과 너무도 다른 조선비행사들의 담력과 비행제어술, 가늠안되는 전법앞에서 혼이 난 미군 비행사들은 앞에 미그-17들이 출현하면 통신헤르츠를 미그-17에 동조시키고 거기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가 조선어인가 아니면 베트남어인가에 고도로 신경썼다고 합니다. 즉 조선어가 나오면 전투임무와 공중전을 포기하고 전장을 이탈했으며 베트남어가 나오면 우습게 여기고 끝까지 추격하어 격추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선비행사들이 거처한 곳을 찾아 내기 위해 미군은 특공대까지 동원하었으나 상식을 벗어 난 조선공군 기지의 은폐수법을 끝내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조선의 지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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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군의 2개 비행연대무력으로 북베트남의 전역을 방어하거나 미국의 지상작전을 파탄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시 미군 비행무력은 조선공군의 수십배에 달하며 조선비행사들의 기본임무자체가 지상작전지원이 아니라 반항공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조선비행사들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어하는 공군무력의 일부분으로서 작전하었습니다.

그때 미군 비행기들은 오전에 남중국해에 배치된 미해군 항공모함이나 남베트남의 비행장들에서 이륙하어 하노이에 대한 공습작전을 주기적으로 벌였는데 얼마나 오만했는지 그 시간이 고정되다시피 하었습니다. 바로 조선비행사들은 이런 미군 비행사들의 오만성과 일율적인 작전형식을 역응용하어 전투마다에서 좋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수많은 전투들 가운데서 8대의 미그-17로 단 한대의 희생도 없이 32대의 F-4, F-105를 모두 격추한 공중전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노이로 공습하는 어느 한 미군 비행연대의 작전시간과 지역, 작전방식, 비행기대수가 거의나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조선비행사들은 그 미군 비행연대를 대상으로 공중전을 기획합니다. 그런데 그때 조선공군에는 전투에 참가할 만한 비행기가 미그-17 8대 뿐이고 미군은 F-4와 F-105가 4대씩 8개 편대, 즉 32대입니다. 더욱이 미그-17은 연유탕크가 작고 공중급유가 불가이기에 이륙하어 작전지역상공에 도달한 후 10분밖에는 공중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공중전은 승패는 고사하고 생사조차 가늠하지 못할 모험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 비행사들은 미군 비행기들이 작전상공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이륙하어 초저공으로 작전지역에 도달한 후 미군비행기들이 보지 못하게 높은 산 후면에서 초저공선회하었습니다. 자기들이 지나 가는 높은 산 후면의 초저공에 조선비행기들이 은폐하고 있다는것을 알 수 없는 미군비행기들은 예전처럼 4대씩 편대를 지어 하노이로 접근했습니다. 미군 비행기 한개 편대가 산 정점을 지날 때마다 한대의 조선비행기가 상승하어 접근하었습니다.

8개의 비행기들이 모두 한개씩의 편대들을 담당하고 공격준비를 끝내자 편대장의 '돌격"명령에 따라 8대의 미그-17은 일제히 미군 비행기들의 한복판에 뛰어 들었습니다. 순간에 40대의 비행기들이 혼전에 말려들어 적아구분이 불가이고 공중전 규범이나 비행제어술 같은 것은 무용지물인 카오스판이 형성되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라 미군 비행기들은 어쩔바를 몰라 돌아 쳤지만 사전에 치밀한 약속을 한 조선비행사들은 적아구분없이 앞에 보이는 비행기는 무조건 격추해 버렸습니다.

첫 순간에 8대의 비행기가 추락하고 연이어 기총에 맞거나 서로 충돌하어 떨어 졌습니다. 당시 미군 비행기들은 미사일을 장착하었고 조선 비행기들은 기관포를 장착하었으므로 기총사격은 오직 조선비행기들만 가능한데 미사일이 발사된 것은 한발도 없고 기관포소리만 드문히 울리다가 그마저도 몇분후 잠잠해 지더니 40대 비행기들이 모두 땅에 떨어 졌습니다.

그로부터 몇분후 조선공군 기지에 3대의 비행기가 귀환하었는데 모두 여러 곳에 손상을 입었고 특히 연유와 기관포탄은 모두 소비한 상황이었습니다. 나머지 5명의 비행사들과 5대의 비행기들의 생사문제로 비행연대군인들과 근방의 베트남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사방을 헤멨는데 하루 지나 확인하니 모든 비행기들과 비행사들이 무사하고 전투지역으로부터 반경 수백km의 지역에 흩어 져 평지나 도로에 각기 불시착륙하었습니다. 지어는 다른 비행장에 착륙한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그-17이 적기들의 추격에서 벗어 나기 위해 가력기를 연결하면서 연유소비가 급등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조선비행사들은 단 한대의 비행기나 한명의 비행사손실이 없이 32대의 미군 전투기들을 모두 격추하는 기적을 창조하었습니다.

베트남전쟁과정에 공중전에서 희생된 조선비행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50명까지 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 30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조선공군의 추격비행연대 편제에서 한개 비행중대에 4대, 비행대대에는 12대, 비행연대에는 36대의 비행기가 있으므로 비행사가 30여명 희생되었다고 해도 완전편제로 한개 비행연대가 전사했다는 의미로 됩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호지명은 김일성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전쟁과정에 조선이 사심없는 지원을 준데 대하어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었으며 베트남의 통일독립과 사회주의를 위해 희생된 조선비행사들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유해를 베트남인민들이 관리하면서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교양에 이바지하도록 하겠다고 말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로부터 20여년 후에 빈 휴지장으로 되고 맙니다. 1980년대에 들어 와 소련의 수정주의노선에 추종하면서 선대들이 창조한 반제반미투쟁전통을 스스로 버리고 제국주의자들의 돈에 현혹된 베트남의 새 세대들은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 남조선과 관계정상화에 나서면서 베트남전쟁과정에 조선으로부터 받은 지원과 조선의 희생에 대하어 외곡은폐하었으며 지어는 개인의 자유의사표현이라는 명목으로 조선비행사들의 유해가 있는 곳을 전혀 관리하지 않다 못해 여러개의 묘비들을 까 버리기까지 하었다고 합니다.

이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조선이 1990년대말에 약 20여년이상 공개하지 않았던 베트남전쟁과정에 있은 역사적사실들에 대하어 드디어 공개하고 조선비행사들의 유해를 모두 송환하며 2013년에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참전열사묘로 이장하었다고 합니다. 베트남에 지금도 조선비행사들의 유해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상황을 보아서는 이미 모두 송환하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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