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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인민유격대 결성한 안도<대사하 전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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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217회 작성일 18-09-1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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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인민유격대 결성한 안도 <대사하전투현장>  (민족통신)


취재진은 무송에서 안도현 영경향 <대사하치기 전투장 전적지>로 이동했다이 지역의 <소사하>라는 곳의 들판은 김일성장군이 1932년 4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창설한 유서깊은 역사적 현장이다무송에서 4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소사하>를 거쳐 <안도 영경향 대사하 전투장>에 도착해 이곳에서 김일성 항일유격대와 중국공산당 동북항일련군들의 투쟁과 함께 김정숙 항일여성투사의 빛나는 업적들을 살펴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https://youtu.be/Rwue_s9J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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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3성취재2018-안도현영경향-대사하치기전투02.jpg

 

 

 

[기획7]<반일인민유격대>결성한 대사하치기 전투현장


 

 

(1)   김일성주석이 1932 425 <반일인민유격대창설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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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일성주석이 <안도 대사하치기 전투> 전개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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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도현 <대사하 전투>가 벌여졌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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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사하 전투가 벌여졌던 현장 언덕에 세워진 항일투쟁 열사들의 기념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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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사하 전투가 벌여졌던 현장 언덕에 세워진 항일투쟁 열사들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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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사하 전투가 벌여졌던  항일투쟁 열사들의 기념비가 보이고 <대사하>가 흐르는 강물위 다리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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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김백호 편집위원무송에서 4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안도 영경향 대사하 전투장>에 도착해 이곳에서 김일성 항일유격대와 중국공산당 동북항일련군들이 일제와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는가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1932년 <토기점골>들판에서 <반인인민유격대>결성

 [사진]1932년 4월25일 소사하 <토기점골>들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결성

 


동북3성취재2018-안도현영경향-대사하치기전투001.jpg

         

 

 이곳은 특히 김일성 반일유격대가 조직되어 1932년 425 <토기점골들판에서 반일유격대가 출범식을 알리는 사열식이 진행된 유서깊은 장소이다다시말하면 오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이 탄생한 그 뿌리이며 효시라고도 볼 수 있다.

 

-중련군이 동북3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역사 가운데에는 김일성반일유격대의 투쟁역사는 그 중심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중국 동북항일혁명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양정우 총사령관은 조선인 간부양성과 지원에 대하여 김일성장군에게 언제나 감사하면서 조선사람이 없었으면 외차구에서도 일본군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중국혁명군은 전멸할 수 있었다.”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김일성 항일유격대나 중국의 동북항일련군이 무력투쟁에 한층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것은 일제가 1931년 9.18봉천(지금의 심양)침략 사건이후로 기록되었다 

 

김일성 <반일인민유격대>가 출범하려던 막바지 준비시기에 동북3성 각지역에서 청년들이 김일성유격대에 입대하려고 짧은 시간에 무려 1백여명이 참가하려고 이곳에 몰려왔다고 당시 역사는 기록했다.

 

그후 김일성주도 항일유격대의 투쟁 소식들은 조중련군들 속에 신화처럼 퍼져나갔다그 중에 <대사하치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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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중에 <대사하치기 전투>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김일성장군과 김정숙항일여성투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안도 영경향 대사하치기 전투>

 

 동북3성취재2018-안도현영경향-대사하치기전투05.jpg
[사진]대사하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 현장



 

김일성장군의 지휘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1940년 6월 안도현 대사하치기에서 진행한 조우전투의 이야기를 떠 올릴수 있다.


 

김일성장군이 이끌었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당시 연길현과 안도현일대에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리시던 시기인 1940년 6월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에 주되는 화살을 돌리고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토벌》작전에 내몰았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따돌리고 양초구에서 하루밤 휴식한 후 다음날 아침 대사하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골짜기를 따라 산으로 오르려는 순간 악질적인 일본군 《신선대》부대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찾아 다니던 일본 군들은 김일성 주력부대를 먼저 발견하고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김일성장군은 즉시 정황과 주위의 자연지리적조건을 판단하고 기관총분대로 하여금 일본군의 화력을 제압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전체 대원들에게 앞에 있는 봉우리에 빨리 오를것을 명령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순식간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적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정황은 급변하여 적들은 완전히 수세에 빠졌다. 그러나 적들은 수적우세를 믿고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적아간에는 치열한 화력전이 벌어졌다.


 

김일성장군은 산중턱 바위우에 올라서 전투를 지휘했다. 이때 김일성장군의 안위와 신변에 주의를 돌리며 투쟁하던 김정숙 항일투쟁여성은 적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하던 중 산중턱의 한쪽 비탈진 갈밭속으로 김일성장군을 향하여 총을 겨누고 은밀히 다가드는 일본군들을 발견했다. 그 위급한 순간 《사령관동지!》하고 다급히 외치던 김정숙투사는 서슴없이 자신의 몸으로 김일성장군을 막아 서서 맨 앞에 다가드는 일본군 놈에게 명중탄을 안겼다. 이어서 김정숙투사의 어깨너머로 다음 보이는 다음 놈을 쏴 눕혔다. 마치도 서부활극에서 쌍권총을 가지고 상대편을 때려 눞히는 장면들이 이 때에도 연출되었다. 김정숙여성투사가 잡았던 두자루의 권총이 엇바꾸어가며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군 한놈씩 쓰러졌다. 그리하여 갈밭으로 기여들던 적들은 삽시간에 소멸되였다.


 

김정숙여성투사의 영웅적위훈에 고무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적들에게 더욱 강력한 타격을 안겼다. 적들은 예비대까지 투입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김일성장군은 일본군들에게 결정적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기관총을 증강시켜 일부 대원들을 적 배후에 진출시켰다. 일본군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정면타격과 배후타격에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도망치는 놈들에게 또다시 드센 타격을 가하여 번개같이 쓸어 눕혔다. 이 전투도 조선인민혁명군의 빛나는 승리로 아로 새겼다.


 

이 전투에서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보위하기 위해 발휘한 김정숙투사의 희생성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에게 최고사령관을 보위하고 받드는 전사의 자세와 입장을 보여준 충실성의 산 모범으로 기록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사하치기전투의 승리를 비롯하여 홍기하 전투, 올기강 전투 등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토벌》하려고 날뛰던 적들에게 군사정치적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백전백승의 조선인민혁명군의 불패의 위력들은 후에 영도자 결사옹위를 시위한 모범적인 전투들로 기록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국제연대 전투도 강조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수많은 전투들을 벌려 일제의 쏘련침공, 중국침공, 몽골 침공 등을 저지시키는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1939년 8월에 있은 안도현 대사하, 대장강전투였다.


 

1939년 5월부터 일제침략자들은 쏘련, 몽골, 《만주국》국경지대에서 몽골에 대한 대규모적인 도발사건을 일으켰다.


 

몽골에 대한 일제의 침공은 몽골을 강점하고 나아가서는 쏘련령토에 침입하여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절단함으로써 쏘련으로부터 원동을 떼여내려는 흉악한 책동에서 출발한것이였다.


 

그러므로 이 책동은 1938년 7~8월에 일제가 쏘련 연해주남단 하싼호를 침공한 사건의 연장이기도 하였다.


 

쏘련군대와 몽골군은 일제침략자들의 이와 같은 강도적인 침공에 대하여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참패를 당하면서도 계속 《정예》부대들을 동원하여 몽골국경에로 내몰았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에 대한 일제의 이와 같은 침공을 결코 무관심할수 없었다.


 

김일성장군은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한 적배후교란작전을 벌리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당시 일제의 후방이였던 조선과 중국동북지방에서 유격전쟁을 더욱 확대하여 적의 후방을 대대적으로 들이쳐 일본군들의 역량을 대거 섬멸할 과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군사지휘관들이 적정을 정확히 분석하고 조성된 정황을 구체적으로 판단한 기초우에서 매복전, 야간습격전, 유인전, 공격전 등 여러가지 유격전술을 능란하게 배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은 가는 곳 마다 전승하여 주변국들에게 모범을 벌여왔다. 그리하여 중국이 모택동을 중심으로 투쟁하였던 동북중공항일혁명군이 일제를 타격했을 뿐만 아니라 반공전선의 앞잡이로 나섰던 장개석의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 본토를 사수하면서 동북3성지역을 해방시키는데 조선인민혁명군이 기여했던 업적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로 기록되었다.


 

김일성장군은 조선혁명을 위해 중국 땅에서 백두산을 거쳐 조국반도로 진군하면서도 총기 10만자루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유능한 지위관들도 중국혁명을 위해 남겨두고 가는 국제연대의 의리는 모택동주석을 포함하여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중국의 5성기에 나타난 다섯개의 별들 중에 한개의 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공로로 첨가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조중간의 관계를 <조중혈맹>이라고 불러 온 것 같다. 

 

<민족통신>취재진은 이곳 역사의 현장, 대사하의 강물이 아직도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날 주체조선이 어떻게 군사강국으로 그리고 <일심단결>의 정치사상강국으로 건설되어 왔는지 그 배경의 한 부분을 더듬어 보았다. 또한 70년 조국분단의 비극적 역사들을 상기시켜 보면서 어떻게 하여야 분단된 조국이 통일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는 시간들도 가졌다.


 
[기획6]무송지역의  항일투쟁 역사 현장들
<장울화열사 무덤>,<김일성소년 다니던 무송소학교 탐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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