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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허에서 (김유길)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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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599회 작성일 19-08-2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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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허에서

김유길              

 

화전현 북쪽에 무치허라는 강이 있다. 이 강 상류로 올라가면 좌우켠에 이깔, 분비, 잣솔, 가문비, 봇나무 등 산림자원이 울창한데 거기에는 일본인재벌이 경영하는 목재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4사 경위중대에 속하여있었는데 1939년 정월 우리 부대는 무치허부근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최현동지의 인솔밑에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안되는 날밤 200여명의 동지들이 또 여기에 왔다.

우리의 숙영지는 야산이 빙둘러있는곳인데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멀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깊은 눈이였다. 그러므로 한번 행동하면 눈우에 발자국이 나군 하였으나 그 부근 농민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매일 멧마당(밭가운데 있는 탈곡장)에 있는 콩깍지나 짚을 발구에 싣고다니면서 그것을 알아볼수 없게 지워버렸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유격대가 자기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싸운다는것을 알고있기때문에 밤이면 자진하여 강냉이, 조, 수수, 콩, 팥 같은 식량을 져다주었다. 우리들은 이들과 련계를 강화하며 무치허목재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목재소의 일본인 경영주놈은 조중 두 나라 로동자들을 값싼 임금으로 마소와 같이 혹사하면서 여기서 채벌한 목재를 멀리 일본에 날라갔다. 무치허에 모인 목재로동자들의 다수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이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고있을 때 경영주놈은 《목재소가 경기 좋다.》고 기만하여 끌고왔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곳에서 농민들이 여기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곳도 그들의 생활을 안착시킬수는 없었다. 그들은 값싼 임금에 허덕이며 그날그날 겨우 목숨을 이어나갔다. 로동자들이 무슨 의견을 말하면 경영주놈은 《빌어먹을 자식들! 일이나 더 잘해라. 썩은 강냉이도 주기 아깝다.》고 욕질을 하군 하였다.

그놈의 꾀임에 들어 목재소에 올 때 자기의 소와 말을 가지고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빚때문에 일년도 못되여 그것을 목재회사에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소까지 빼앗긴 사람은 도로나가 농사를 짓기도 난처한 일이였다.

로동자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였다. 그들의 가족은 몸에 걸칠것도 없었다.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에 아침일찍부터 어두울 때까지 혹사당하면서도 나무에 치여 몸이나 상하는 날이면 온 가족의 목숨이 떨어지는 판이였다. 로동자들속에서는 목재소경영주놈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그들은 모두 《유격대가 와서 이놈의 목재판을 없애치웠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로동자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에게 혁명적영향을 주는 동시에 우리의 식량을 해결하며 목재를 일본으로 실어가는것을 파탄시킬 목적으로 이 목재소를 습격하게 되였다.

목재소에는 산림경찰대놈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일본지도관놈이 있었다. 전투에 앞서 유격대에서는 목재소에 사복을 한 정찰원들을 파견하였다. 나는 이 전투가 진행되는 날밤에 련대의 참모장, 그의 련락병과 함께 셋이서 밤중에 부대의 선두에서 목재소로 향하였다. 우리들은 은밀히 목재소근방에 접근하였다. 목재소주위에는 나무로 쌓은 높은 울타리가 있었다. 그 울타리는 통나무의 아지를 따지 않고 밑둥아리가 안에 놓이고 끄트머리가 밖으로 나오게 하여 안으로 들어가려면 나무아지들이 가로세로 엉켜 몸을 들이밀 방도가 없었다. 밟으면 《와싹! 와싹!》소리가 났다.

우리는 침착하게 서두르면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한곳에 송아지와 망아지들이 넘나들어 나무가 푹 낮아진곳도 있었다.(목재소에는 소와 말이 1,000여마리나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공지를 좀 지나자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참모장과 함께 말먹이는 로동자에게 가서 경찰대놈들의 병영, 보초의 위치, 포대의 정형을 알았다. 적들은 토성을 쌓고 그밖에 철조망을 둘러친 그속에다 병영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목재소 경영주놈과 지도관놈의 사택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료리집까지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부대에 련락이 되자 모두 은밀히 먼저 우리가 넘어온데로 해서 목재소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철조망을 끊고 경찰대놈들의 병영으로 접근하다가 료리집에서 경찰대 한놈이 초롱불을 들고 비틀거리며 나오는것을 제껴치운 다음 계속 정문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이때 포대의 적들이 고함을 치더니 사격을 시작했다. 적들의 위치는 높은데고 우리는 낮은곳에 있었다.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우리가 더욱 불리하게 된다.

우리의 기관총대는 굳게 닫힌 성문 접철부분에 2정의 기관총으로 련발사격을 들이댔다. 접철언저리가 벌둥지처럼 되였을 때 한꺼번에 달려들어 문을 콱 밀치니 적들이 하늘처럼 믿던 대문이 와지끈하고 나떨어졌다. 기관총대는 안으로 들어가며 계속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적들은 어쩔줄을 몰라 쩔쩔매였다. 집중사격으로 포대가 잠잠해졌다. 그런데 잠시후에 지하포대로 빠져들어간 놈들이 사격을 하며 발악을 하였다. 그리하여 발악하는 놈들에게 수류탄묶음을 들씌워 열대여섯놈을 즉사케 하였다. 놈들은 병영에서 지하포대로 통하는 굴을 뚫어놓았던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놈들은 얼마나 바빠맞았던지 기관총을 쏘지도 못하고 짚낟가리속에 감추어두었다.

소탕전이 끝난후 우리는 산림경찰대놈들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잠시후 한 대원이 마루바닥을 제끼더니 커다란 구멍안에 사닥다리가 놓여있는것을 발견했다.

련락병이 사닥다리로 내려가려하니 그밑에서 《꽝!》하고 총소리가 났다. 적들이 숨어있는것이였다. 련락병은 발을 부상당하였다. 놈들의 비밀은페소는 들어가는 구멍뿐이지 나오는 구멍은 없었다. 그속에는 목재소에서 로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고있던 일제놈들이 저희들만 살겠다고 숨어있는것을 30여명이나 일망타진하였다.

전투가 끝난후 우리는 굶주린 로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창고문을 열어놓고 식량과 피복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날이 밝은 다음 우리는 목재소를 떠났는데 많은 로동자들이 로획물자를 지고 부대와 함께 길을 떠났다. 나는 한 젊은 로동자와 함께 오면서 우리는 어떤 군대이며 누구를 위하여 싸운다는것을 자세히 이야기하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일제와 그 주구들에 대하여 참을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유격대가 목재소를 치니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소. 무치허목재소는 〈철망없는 감옥〉이라오. 한번 들어만오면 다시나가지 못하니까.… 나는 농사를 짓다가 소를 가지고왔는데 빚을 지다나니 회사에 소를 빼앗기고말았수. 정말 생지옥이지요.》하고 이야기하면서 자기도 유격대에서 싸우겠다는것을 말하였다.

우리 부대가 무치허를 떠난후 원쑤들은 비행기까지 띄우며 발악했었다. 그리하여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적들과 싸우며 퇴각하였다.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눈은 허리까지 쳤다. 그러나 많은 로동자들은 계속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왔다.

무치허전투는 광활한 동북땅의 풍부한 자원을 강도처럼 략탈하며 인민들의 고혈을 마음대로 빨아먹던 일제침략자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주었으며 그해겨울 《동기토벌》에 날뛰던 놈들에게 우리 유격대의 위력을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 전투는 억압과 천대를 받으며 기아에서 허덕이던 로동자들에게 우리 유격대가 그들의 리익을 위하여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무장력이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보여주었으며 혁명의 전망에 대한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이리하여 각성된 로동자들은 한두명씩 개별적으로 혹은 십여명씩 집단적으로 유격대에 입대하여 우리의 대오는 더욱 강화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우리 유격대는 항상 이렇듯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는바 바로 여기에 그의 힘의 원천이 있었다. 무치허를 떠난 우리는 다푸르허쪽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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