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조선의 힘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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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있었다. 령너머에서는 벌써 땅크포가 꽈당거리고 대구경기관총이 무섭게 울부짖고있었다. 리숙은 그 총소리를 채찍소리같이 들으며 릉선우로 치달아올랐다. 릉선을 빼곡이 덮은 소나무들사이에서 반땅크총을 둘러멘 두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가는것이 보였다. 사수와 부사수였다. 두사람은 릉선우의 구뎅이곁에서 열심히 손짓하고있는 군관에게로 달리고있었다. 그때에야 날이 밝기전, 그토록 무시무시한 심연처럼 느껴지던 그 끊어진 다리우로 기여드는 적땅크들, 열바퀴차와 선두의 짚차를 보았다. 미군장교놈이 찦차우에서 손짓하자 대기하던 땅크들이 속도를 높여 다리 한복판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비좁은 다리우에 파르스름한 배기가스들이 꽉 뒤덮였다. 열바퀴차가 비켜서고 짚차가 비켜서고 속도를 높인 땅크가 끊어진 다리중간에로 돌진해갔다. 별안간 다리 전체가 비스듬히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가까운 소나무숲에서 어느 전사인가 참지 못하고 《무너진다!-》하고 소리쳤다.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공병들인 모양이였다. 다음순간 다리우에 들어섰던 땅크들과 열바퀴차들 할것없이 모두 세차게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뒤걸음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무너져내리는 경간과 함께 땅크와 포차들이 얼음물속으로 곧추 곤두박혀들어갔다. 얼음장이 꺼져나가고 물기둥이 솟구쳐올랐다.
리숙은 소란스럽게 숨을 내뿜었다. 하얀 입김이 터져나갔다.
(이젠 가야 한다. 공병들이 끝내… 성공했으니 빨리 가자, 빨리 가야 한다!)
그는 소나무들사이를 질러 강쪽으로 내려달렸다. 군단장 부관이 특별히 그쪽으로 오지 말라고 했지만 골안 한끝까지 가대려면 그 길밖에는 없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서는 적들이 보였다. 적들이 쏘아대는 총탄이 발부리에 날아와 박히기도 했다.
그때 한 병사가 달려나오며 가까운 웅뎅이속으로 리숙을 밀어던졌다. 리숙은 대뜸 강기슭으로 면한 홈타기의 눈속에 코를 박고 쓰러졌다. 누군가 그를 장난감처럼 쥐여뿌린것 같았다. 전혀 아프지 않게 훌쩍 밀어던진듯 한데 어느새 눈더미속에 날려가 머리를 구겨박은것이였다.
《다치지 않았수?》
그를 쥐여뿌린 우악스러운 병사가 고함치듯 물었다. 눈더미속에서 머리를 쳐든 리숙은 자기가 아주 위험한 집중사격구역에 들어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얼음판을 걸어 건너는 적들이 강기슭으로 면한 밋밋한 경사면에 미친듯 총탄을 퍼붓고있었다. 군단장부관이 강기슭으로는 들어서지 말라고 경고한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놀라운 일은 지난 전투때 죽어넘어진 적들의 시체가 강기슭에 끝없이 널렸는데 새로 나타난 미국놈들이 그것을 인민군대의 매복인줄 알고 끊임없이 집중사격을 퍼붓는것이였다. 리숙은 머리조차 들수 없었다. 일이 더럽게 되였다.
시간을 앞당겨 빨리 가대려 한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히고말았다.
《가만, 움직이지 마시우.》 리숙을 눈속에 구겨넣은 병사가 또 엄청나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런덴 왜 와가지구 남을 속쓰게 하시우.》
리숙은 힘꼴이나 쓸 건장한 그 병사의 흐려진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중대에나 유쾌한 익살군이 있는것처럼 과묵한 고집불통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말이 적고 침울한 사람들일수록 괴벽스럽기때문이다.
기동기재를 움직일수 없게 된 적들이 저쪽 대안에 각종 전차와 포차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불을 다는것이 보였다. 짙은 연기가 강기슭을 핥으며 밀려오고있었다. 포차들에 적재했던 포탄상자들이 튀면서 무시무시한 폭음을 울렸다. 얼음판우에서 불길이 너울거리고 물에 빠진 적들의 비명소리가 구을러왔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얇은 얼음판우로 새까맣게 덮으며 건너오는 적들을 이쪽에서는 총 한방 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그것이였다. 적들이 쏘아대는 무질서한 총소리만이 새벽추위에 얼어붙은 대안을 선풍처럼 휩쓸뿐이였다. 강복판에서 미군장교들의 구령소리가 나는것을 똑똑히 들을수 있었다. 강기슭과 골어귀 그 어데라 할것없이 미국놈들로 꽉 들어찼다. 천으로 만으로도 그 수를 셀수 없을것 같았다. 간단없이 쏘아대는 자동총의 련발사격소리와 웨침소리, 장구류들이 부딪치는 절커덕소리와 함께 어데선가 녀자의 비명소리, 어린애의 울음소리도 들려오는듯싶었다. 리숙은 자기가 신경과민인것처럼 생각되였다. 며칠째 잠을 설친탓이리라. 이 싸움판에서 난데없는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듣다니… 간밤에도 눈 한번 붙여보지 못한때문이라고 리숙은 생각하였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 우악스러운 병사에게 간청하듯 말하였다.
《난 가야 해요.》
그러나 몸집이 실한 그 병사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알아듣지 못한것 같다. 리숙이 허리를 펴자 또 힘껏 잡아당겼다.
《제길, 가만있지 못하겠수!》
《동무!》 리숙은 증을 냈다. 《내겐… 중요한 임무가 있어요!》
그러나 그 병사는 여전히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리숙에게는 머리도 들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는 허리까지 몸을 일으켜세우고 이를 북북 갈고있었다.
《이 미친놈들, 짐승같은놈들아!… 악귀같은놈들…!》
리숙은 더 참을수 없었다.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려는 그 병사의 행동이 더없이 고맙긴 해도 더이상 여기서 지체할수는 없었다.
리숙은 벌떡 뛰쳐일어났다.
《동무, 난 가야 해요. 알겠어요?》
날카로운 부르짖음이였다. 몸집이 실한 병사가 놀래여 돌아보았다.
《예? 군관동무, 뭐라구요?》
귀가 먼것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를 고함소리처럼 내질렀다.
사납게 일그러진 그의 너부죽한 얼굴에서 한점 물기가 번질거렸다. 리숙은 아연해졌다.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납고도 쓰라린, 광포하고도 비애에 찬 표정, 리숙은 그에게서 뒤걸음 쳤다. 그리고 아츠러운 총탄이 나무아지를 뚝뚝 부러뜨리는 숲으로 내달려갔다. 눈구뎅이속에 엎드려있을 때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격렬한 총성들이 사방에서 그를 둘러싸는듯 했다. 맵짠 칼바람이 귀부리를 에이는듯 했다. 총탄의 회파람소리는 질풍보다도 더 세차게 그 녀자를 휘감아버렸다. 사방에서 성난 웨침소리들이 날아왔다. 하지만 리숙은 몸집이 실한 그 병사, 우악스러운 그 병사의 눈가에서 번질거리던 초물같은 자욱만을 생각하고있었다.
(왜 그랬을가. 그 동문 왜 나를 그렇게 보았을가?…)
별안간 리숙은 나무그루터기에 걸려 나딩굴었다. 멀지 않은곳에서 비명같은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리숙이 적탄에 맞고 넘어진줄 안 모양이였다. 리숙은 해묵은 가랑잎들이 눈더미우에 널려있는것을 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산중턱으로 질러갈수 있을것이다. 어데선가 박격포병들이 적들의 무리가운데 포탄을 날려보내는듯싶었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와와- 밀려다니며 악마구리끓듯 하는 적들의 웨침소리들이 터지군 했다. 그러나 일제사격의 총성은 아직 없었다. 적들을 삭녕20리골에 꽉 채워놓기 전에는 쏘지 않을 작정인듯 했다. 얼토당토 않은 생각인줄 알면서도 리숙은 이렇게 짐작해보았다. 그 순간 리숙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째지는듯 한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은것이였다. 이어서 아까 어렴풋이 들었던 그 웨침소리-늙은이들과 아낙네들의 울부짖음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는 전장을 쏘아보았다.
암갈색의 짙은 포연이 삭녕20리골을 휩쓸고있었다. 꾸역꾸역 밀려가고 밀려오는 포연속에서 적들의 총알받이가 되여 허우적거리며 밀려오는 늙은이들, 아낙네들, 애어린 소년, 소녀들이 바라보였다. 그들의 뒤에서 총을 겨눠둔 미국놈들이 악에 받친 고함소리를 지르며 잔등을 찌르고있었다. 놈들은 지난 이틀간에 수천의 시체를 남긴 죽음의 삭녕20리골을 어떻게 하던 뚫고나가려고 마지막 발악을 하고있는것이였다.
리숙은 바질바질 가슴이 타드는것 같았다. 비로소 우악스러운 그 병사의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이 리해되였고 자기를 쏘아보던 그 눈빛에 깃들었던 가차없는 경멸과 비난의 뜻을 알수 있었다. 한 녀인이 둘러안고있는 젖먹이의 울음소리가 특히 리숙의 가슴을 사정없이 찢고있었다. 포단과 띠개가 흘러내려 거의 발가숭이나 다름없는 젖먹이를 껴안고 녀인은 허척지척 걸음을 내짚고있었다. 바스라지듯 울어대는 어린것의 몸부림도 눈가루를 날리는 강바람도 무섭게 짖어대는 적들의 위협적인 총성과 욕설도 다 그 녀인에게는 들리지 않는듯 하였다. 논두렁을 타고넘고 얼어붙어있는 적들의 시체도 밟고넘으며 어덴지 먼 하늘가 차디찬 려명속에서 마른 벼락처럼 섬광이 번쩍거리는 하늘가 한끝만을 바라보고있다. 쓰러질듯 비틀걸음을 하고있다.
언제였는지… 리숙은 자기의 눈가에 차디찬 이슬이 맺혀 얼어붙은것을 느꼈다. 무엇인지 그 젖먹이가 부르는 웨침소리가 있었다. 미래가 부르는 소리였다. 소중한 욕망, 정겨운 환희, 모든 꿈과 희망이 담긴 미래가 부르고있었다. 리숙은 오직 그것만을 리해했다. 그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뒤는 싸늘한 인생의 페허로 될것이였다. 리숙은 포연이 자욱한 그곳으로 막 뛰여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아우성치는 사민들가운데로 달려나가는 한사람이 있었다.
《지봉이!-》
《지봉동무!-》
산기슭의 홈타기들에서 병사들이 웨치고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무어라고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웨치며 포연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가운데로 뛰여들고있었다. 모자도 없고 웃도리도 벗어제친 맨내의바람이다. 방금전 리숙에게 무자비한 경멸의 눈총을 쏘던 그 우악스러운 병사였다. 그 병사가 팔을 길게 내뻗치며 힘껏 웨치자 아우성치며 밀려오던 사람들이 좌우로 쫙 갈라지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총탄들이 불꽃을 튕기는 그곳, 논두렁 한가운데로 달리며 연신 무어라고 고함을 치고있었다. 적들과 끌려나왔던 인민들사이에 별안간 대통로가 열린듯 간격이 생겼다. 어지러운 총성들이 터지며 늙은이가 쓰러지고 두손을 맞잡은 오누이애들이 땅을 허비며 꿈틀거렸다. 매복했던 아군중대들에서 일제사격의 총성이 날아가며 적들을 쓰러눕혔다. 그러는 가운데 적들속에 뛰여들었던 병사가 젖먹이를 안은 녀인을 잡아끄는것을 리숙은 보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구겨박힌 녀인에게서 병사는 젖먹이를 그러안았다. 병사는 젖먹이를 품에 안았으나 웬일인지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다음순간 태질하듯 울어대는 벌거숭이 젖먹이를 앞으로 쳐들었는데 그것은 마치도 리숙을 향하여 떠맡기려는듯이 보였다. 맵짠 바람에 젖먹이의 기저귀가 너펄거렸다. 리숙은 앞으로 내달렸다!…
얼음을 타고 강바닥을 기여 골안을 휩쓸던 찬바람이 뼈속까지 스며든 모양으로 젖먹이는 숨이 꺽꺽 막히군 했다. 푸르스름한 반점들이 얼룩을 그리는 종아리를 꼭 껴안고 리숙은 그리 깊지 않은 홈타기로 달려가고있었다. 이제 다섯, 아니 여라문걸음만 더 달리면 어린것을 껴안은채 눈속에 딩굴것이다. 솜저고리쪼각이 날리고 쪼그라진 군용밥통이 발끝에 채웠다. 탄피들이 널린 밭둔덕아래 굳어진 시체들이 엇가로 누워있있다. 조금만, 몇걸음만 더…
순간 리숙은 둔중하고도 뜨거운 타격이 뒤잔등에서 가슴을 치는바람에 우뚝 멎어섰다. 숨이 콱 막혔다. 그가 바라고 숨가삐 달려온 홈타기는 눈앞에 있었으나 발을 옮길수 없었다. 다음순간 숨길을 메웠던것이 열리며 그는 비틀거렸다. 그때 리숙이 느낀것은 무엇인가 상서롭지 못한 일, 그가 바라지 않던 불행한 일이 뜻하지 않게 불쑥 일어났다는 어렴풋한 의식이였다. 그는 얼결에 한손을 가슴앞섶에 밀어넣었다. 다음순간 손을 움츠러뜨렸다.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감촉이 진저리나게 했다. 어쩔새없이 그는 허리를 꺾으며 주저앉았다. 가슴에 안은 젖먹이의 종아리가 푸들쩍 뛰는것이 감촉되였다. 그때 목쉰 울음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래 살았구나!… 너를… 살렸구나!…)
리숙은 젖먹이를 껴안은채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발버둥치는 어린것의 울음소리를 귀담아들으며 놀랍게 생각하였다.
(웬일일가. 내가 왜 이 모양일가?… 과연 그것이 왔단말인가?… 이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별안간… 온단말인가?…)
눈속에 틀어박은 이마가 뜨겁게 녹고있는듯 했다. 등허리로부터 가슴 안쪽까지 뜨거운 쇠집게로 사정없이 쥐여뜯고있었다. 비로소 모진 고통과 무서운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그저 아픔인것이 아니고 참을길 없는 뜨거움이였다.
다급한 발자국소리들이 달려온것은 그때의 일이였다. 누군가 목터지게 리숙을 부르고있었다. 리숙은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흐릿해진 눈길로 누군가의 모습을 자꾸만 찾고있었다.…
…현수는 적들의 총알받이로 끌려나온 사람들이 로지봉이 밀어준 좌우측 산기슭으로 쫙 흩어져가는것을 보았다. 인제는 마음놓고 적들을 족칠수 있게 되였다. 적들의 무리속에서 박격포탄이 무시로 튀였다. 간단없는 웨침에 쩍 벌어진 시꺼먼 입들이 보였다. 현수는 강기슭으로 달려갔다. 로지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봉동무, 어데 있소?》
얼굴 한쪽이 째진 병사가 그를 향하여 소리쳤다.
《저기 지봉동무를 끌어옵니다. 부상입니다!…》
어깨를 낮춘 두 전사가 개인천막으로 감싼 로지봉을 끌어내는것이 보였다. 그중 한 전사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있는 박영일이라는 전사였다.
《어떻게 됐소. 어델 다쳤소?》
현수는 휘청거리는 박영일을 붙들어 멈춰세웠다.
《부상입니다. 중대장동지! 복부에 탄알을…》
그때 맨내의바람의 로지봉이 모지름을 쓰며 울부짖었다. 김빠진 거쉰 소리였다.
《중대장동무, 저 동물, 저 동무를 먼저…》
내의를 물들인 피자욱이 거뭇거뭇했다. 현수는 보지 않고도 상처가 중하다는것을 깨달았다.
《지봉이, 입을 다물어. 말을 하면 안돼!》 그는 박영일을 밀어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후송하오. 위생병을 부르오!》
로지봉은 극심한 고통에 못이겨 헐썩거렸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긁으며 무섭게 부르짖기도 했다. 거쉰 그 소리를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그를 맞들어갔다.
적들은 무리로 쓰러지면서도 계속 앞으로앞으로 밀려들었다. 수류탄이 날아가고 련발사격의 총성이 엇바뀌면서 무수한 불꽃을 쥐여뿌렸다. 그러나 앞에도 뒤에도 죽음밖에 없다는것을 안 적들은 무작정 골안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섬광이 번쩍거릴 때마다 춤을 추듯 너울거리는 그림자들이 늘어갔다. 악을 쓰는 고함소리, 단말마의 비명소리들이 불구름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지군 했다.
그때 현수는 로지봉이 안아오던 젖먹이를 생각했다. 분명 리숙이라고 짐작한 한 처녀가 그에게서 어린것을 받아안던 모습도 상기했다. 그다음 회오리처럼 흽쓸어가던 불구름, 리숙의 모습을 더는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후려쳤다. 보지 못했다!… 당황한 눈길로 사방을 살폈다. 산중턱으로 기를 쓰며 달려오는 흰옷입은 사람들에게서 다음 강기슭에 면한 매복진지들에서 수류탄을 뿌려던지고있는 전사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없다. 어데도 없다!… 별안간 가슴이 비틀리운듯 했다. 어느 눈구뎅이속에 젖먹이를 안고있는 박원철이 보였다. 그를 향해 무어라고 울부짖는것 같았다. 현수는 그리로 달려갔다.
《중대장동무!》 그를 알아본 박원철이 젖먹이를 안은채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부르짖고있었다. 《중대장동무! 이 일을 어떡합니까. 예?!…》
현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것을 느꼈다. 다리가 무섭게 와들거리고 숨이 콱 막혔다. 무엇인지 무섭고 만회할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그는 눈구뎅이속으로 뛰여들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그렇게도 낯익은 처녀의 얼굴을, 눈더미처럼 창백하고 모진 고통에 이즈러진 리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믿을수 없는 일이, 상상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진것이다. 리숙이 몸을 옹크리고 깔고앉은 눈더미우에 질벅이 고인 검붉은 피가 굳어져있었다. 숨이 콱 막혔다. 손을 더듬어 처녀의 하얀 손우를 덮었다. 살을 지지는듯 차디찬 랭기가 전해졌다.
《리숙이, 이게 어찌된 일이요?!》
그러나 리숙은 동그랗게 흡뜬 눈으로 그를 바라볼뿐이였다. 작은 입은 비통하게 꽉 다물려있었다. 역시 검푸르고 싸늘하게 굳어져가는 시선에는 몸서리치게 하는 무서운 의미가 있었다.
《붕대!》 하고 현수는 격하게 소리쳤다. 《붕대를 주오!… 리숙이, 내 이제 응급처치를 하겠소. 걱정마오. 이제 곧… 붕대를 처매고… 원철동무, 뭣하오. 빨리 붕대를 꺼내!》
그러나 리숙의 어깨를 그러쥐던 손길을 가드라뜨리고말았다. 허리를 잔뜩 굽히고 몸을 꼬고있던 리숙이 《안돼요!》하고 신음소리처럼 부르짖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고통스러워 손을 허우적거렸다. 호흡이 절박해졌다. 매순간 매초마다 생명이 새여버리는듯 했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아랗게 되였다. 현수는 가슴이 터지는듯했다. 이러한 참사가 바로 자기의 눈앞에서 그것도 다름아닌 리숙에게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아무리해도 믿을수 없었다. 갑자기 목이 꽉 메여와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부지중 처녀의 손을 꼭 더듬어쥐며 속삭이듯 부르짖었다.
《조금만 참소. 응?! 이제 다 잘될거요. 이제 붕대를 매고 병원에 보내겠소. 조금만 참으면 되오. 조금만!…》
그는 꿈결에서처럼 박원철이 내밀어준 붕대를 잡았다. 제손으로 상처를 헤치려 했다 그러자 몸을 옹송그린 리숙이 또다시 가느다란 목소리로 힘겹게 그리고 차디찬 죽음의 목소리로 부탁하였다.
《안예요. 다치지 말아요. 제발…》 그 녀자의 두눈에서 한점 불꽃이 타올랐다. 불타는 애원을 거기에서 보았다. 대리석같이 희여진 이마 언저리가 메말라갔다. 눈가에 맺혔던 이슬도 얼어들었다. 가는 주름살들을 거쳐 스러져가는 경련의 파도가 분간되였다. 동그랗게 몸을 옹크린 그 녀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있다. 아마도 그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리도 모질게 애써 싸우는 육체의 전률인듯싶었다. 이슬머금은 한송이 보라빛 나팔꽃이 추위에 스러져가고있다.
현수의 마음은 조여들고 뿌직뿌직 심지처럼 타들었다. 거센 울부짖음소리가 막 터지려 했다. 여전히 12월의 하늘은 재빛연기에 쌔워 머리우에 낮추 드리웠고 바람은 살을 에이는듯 날카롭게 불어쳤다. 이따금 재가루인지 눈가루인지 아프게 떨리는 눈섭을 성가시게 때리군 했다.
그때 리숙이 가드라드는 손으로 집게처럼 그의 손목을 잡아끌어당겼다.
현수는 숨길이 꽉 막힌듯 고통스럽게 몸을 떨면서 그 녀자의 가슴우로 머리를 수그렸다. 뜨겁고도 열렬한, 소란스럽고도 가쁜 숨결이 토막치듯 퍼부어졌다.
《현수동무, 나도… 꼭 하고픈 말이 있었는데…》
《리숙동무! 알고있어. 나도 그렇고… 동무도…》
《그래요. 정말 우린… 알고있지요. 그런걸 난… 그냥…》
리숙은 시꺼멓게 변하는 입술을 힘겹게 놀렸다. 무거운듯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있었다. 현수는 대원들에게 지시하여 군단지휘부에 전화를 거는 한편 리숙을 후송하게 했다. 리숙이 또 무슨말인가 하고싶어했지만 막무가내로 그를 담가에 실었다.
포연속에서 흐릿해진 해빛이 눈녹은 땅우에 얼씬거렸다. 열띤 총성들이 무섭게 울부짖었다. 현수는 마지막으로 리숙의 맥이 진한 한손을 꼭 잡았다. 차디찬 숨결이 파릇파릇 힘겹게 뛰고있었다.
…최현이 리숙의 중상에 대하여 보고받은것은 그로부터 얼마후의 일이였다. 욕골부근의 언덕우에 그는 서있었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미l기병사단의 패주대렬에 대한 섬멸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서울제4보병사단 전투원들이 돌격해나가고있었다. 그때 4사의 통신참모로부터 군단장의 담당간호장 리숙이 한 어린이를 구원하기 위해 비발치는 총탄속에 뛰여들었다가 중상당하였다는 전화가 왔다. 부관이 그에 대해 보고하였다. 최현은 시꺼먼 눈을 두릿거리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 우리 리숙이야 공병중대에 있질 않나!》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전투에?… 그가 왜 거기서 전투를 한단말인가. 당치 않은 소리!》
최현의 얼굴은 사납게 변모되여가고있었다. 기어이 무슨 사실을 부정해보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시도였다. 부관은 그가 알아들을수 있도록 침착하게 전말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최현은 숱진 장미를 흠칫흠칫 떨었다. 부르쥔 주먹을 번쩍 쳐들었으나 어쩌지 못하고 손가락을 꽉 펴들었다. 그런 다음 별안간 그 손으로 자기의 권총집을 꽉 움켜잡았다.
《그래 지금… 리숙이 어데 있소?》
《후송하고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요?》
《전투가 한창이여서… 담가를 메고서는…》
《자동차를 뛰게 하오!》하고 최현은 노기를 띠고 소리쳤다. 《큰길로 해서 군단병원까지 직통 가닿게!… 그리고 자동총수들로 호위를 조직하오!…》
부관이 참모장에게 달려간 다음에도 그는 한동안 누구를 기다리고있는 사람처럼 자꾸 뒤를 돌아다보군 했다. 발자국소리만 나면 고개를 홱 돌렸다. 돌아보고는 킁 킁 코를 불면서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프렸다. 나어린 전화수의 목소리에도 흠칠 놀라군 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처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투는 이날 하루종일 또 밤새껏 계속되였다. 삭녕20리골의 모든 야산과 둔덕들, 논밭과 강기슭은 적들의 시체로 한벌 덮이고있었다.
밤부터는 눈이 내렸다. 하염없이 퍼붓는 그 눈송이들을 맞으며 최현은 화토불곁에 앉아있었다. 그는 리숙의 위생가방가운데서 사진 한장을 꺼내들고 오래도록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라고 짐작되는, 구식 헬메트를 손에 든 사람이 리숙이와 나란히 어느 일각대문앞에 서서 웃고있었다. 리숙은 퍼그나 어릴 때 모습으로 하얀 쎄라복을 입고있었다. 머리엔 무슨 꽃송이를 달고있는것 같았다. 동그란 까만 두눈이 최현을 쳐다보며 웃고있다. 위불없이 룡옥이의 어릴적 모습이다.
최현은 뜨거운것이 목구멍으로 울컥 치미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구김새없이 웃고있는 리숙의 단아한 모습이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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