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조선의 힘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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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폭파조를 책임진 류현수는 10여일만에 적구의 박정덕련합부대활동지역에 도착하였다. 처음 만난 경계초소에서 지휘부가 위치하고있는 곳을 대주었다. 얼마후엔 말을 탄 사단장련락병 고기남이 그들을 마중나왔다. 사단장은 지휘관만 데려오고 나머지 인원들은 휴식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수는 고기남을 따라 지휘부로 걸음을 다그쳤다.
말을 탄 기마통신병들이 사방으로 뛰여다녔다. 박격포병들은 길마를 진 말의 궁둥이에 채찍질을 해가면서 어데론가 이동하고있었다. 기관단총과 보총, 미국제소총들이 엇섞여 돌아갔다. 미국제군화, 물통, 군복까지도 눈에 띄였다. 도로상에서는 보병들이 길 굽인돌이 한쪽을 경사지게 깎은 다음 물을 끼얹어 얼구고있었다.
모든것이 새롭게, 그리고 놀랍게 생각되였다. 적구에서 활동하는 부대들에서만 찾을수 있는 특이한 점들이 많았다. 해여진 여름군복, 규정에 없는 미국제 장구류, 길가의 모닥불, 취사용 가마를 등에 진 공골말, 각이한 옷차림… 하지만 그 무엇보다 현수를 감동시킨것은 그들모두의 모습에서 한결같이 엿보이는 그 전투적인 활기와 엄정한 질서였다. 싸움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서만 볼수 있는 모습이였다. 지난 여름의 공격때에 늘 볼수 있었던 그런 자부심 어린, 항시 롱을 하고 또 몹시 서둘러대는,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들이였다.
(이처럼 크고 정연한 련합부대들이 적구에서 싸우고있었구나. 이렇게 큰!… 하는 생각에 현수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현수와 함께 걷고있는 고기남련락병은 좀 나이가 든 아바이병사였다. 말고삐를 잡고 걸으며 그는 련합부대가 싸워온 로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많이는 자기네 《사단장아바이》에 대해서였다. 아바이로 불리자면 사단장보다 제가 먼저 꼽혀야겠으나 그는 말끝마다 《아바이》였다. 아바이가 철원해방전투를 지휘하면서 어쨌고 가평을 치면서 어쨌고 하는 얘기들이였다. 지금은 2차 철원해방전투를 준비한다고 한다.
박정덕사단장은 얼어붙은 개울가에서 화토불을 마주하고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렸다. 현수는 반가운 마음에 부지중 소리쳤다.
《사단장동지!》
박정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공병지휘관이 왔구만, 반갑소!》
그는 손을 내밀었다. 최고사령부에서 파견한 폭파조책임자를 반갑게 맞는 인사였다. 전날의 공병중대장- 견장도 없이 중상당한 상급예심원을 업고 지휘감시소에 나타났던 류현수에 대해서는 가뭇 잊고있는것이였다.
《사단장동지,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현수는 목이 메는것을 느꼈다. 《총살선고를 받았던 공병중대장… 상급예심원동무가 그때 전선사령관동지를 만났지요. 그다음 사단장동지가 저를 불러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가서 전사로 싸우라. 피로써 과오를 씻으라! 하고 말입니다.》
《?!…》
박정덕은 그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를 끄당겨 꽉 끌어안았다.
《동무였군! 이렇게 또… 돌아왔군. 응?!…》
얼떠름해 서있던 고기남련락병이 성급히 말고삐를 당기며 물러갔다. 박정덕은 현수를 화토불가까이 이끌었다.
《그동안 어떻게 싸웠소. 말 좀 해보.- 우리 부대에 내려보냈는데 하늘에서 떨어진것처럼 새 군관복차림으로 나타났으니… 어찌된 일이요?》
그것을 한두마디로 이야기하기는 헐치 않다. 현수는 가능한 짧게 요약해서 지나간 일들을 말했다. 2차 철원해방전투를 준비하고있는 사단장의 시간을 오래 빼앗을수 없다. 그가 말하는동안 박정덕은 주의깊게, 한번도 곁눈을 파는 일이 없이 듣고있었다. 말이 끝나자 그의 손을 잡았다.
《장군님의 기대에 꼭 보답해주오!》
오래도록 그의 손을 꼭 잡고있었다.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무슨 생각엔가 잠겨있었다. 그러다가 정색하여 사업토의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련합부대활동경내의 폭파대상들인 중요도로, 다리, 철길, 야적탄약고, 연유창 등에 대해 알려주고 이렇게 말했다.
《동무에게 우리 사단 공병별동대도 맡기겠소. 지금 문화부중대장을 하던 동무가 림시 지휘하고있는데 적임자가 왔으니 참 다행이요.》
그때였다. 별안간 현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고기남련락병이 두필의 말고삐를 잡고있는 둔덕아래에서 한 녀성군관의 모습이 얼씬했던것이다. 그는 일순간 흐느끼듯이 숨을 들이그었다. 아니, 그럴수 없다. 내가 잘못본게지!… 그 녀자는 적후에서 보기드문 차림으로서 새 모직군복을 입고 번쩍거리는 장화까지 받쳐신고있었다. 말궁둥이들이 빙빙 돌아갔다. 또 그 녀자가 이쪽을 얼핏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현수는 딱 굳어져버렸다.
그의 류다른 표정이 박정덕의 주의를 끌었다. 박정덕은 현수와 저쪽의 녀성군관을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아는 사이요?》
《예.》
《어떻게?》
《방금 제가 말씀드린… 저를 수술한 간호장이 바로 저 동무입니다.》
박정덕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렇댔군!… 오늘은 반가운 일들만 련달아 생기는군. 응?!…》 박정덕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저 동문 닷새전에 왔소. 부상병들을 데리고… 참 놀라운 처녀요. 숱한 부상병들을 데리고 예까지 왔으니… 저 동무 이름이…》
《리숙입니다.》
《옳소.》
사단장은 아까 보던 지도를 무릎우에 펴들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가서 만나보오.》하고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이제…》
《또 만나기 힘들거요. 저 동문 군단지휘부로 소환됐소. 이제 당장 떠나야 하오!》
《?!…》
《어서 가보라는데!》
현수는 벌떡 일어섰다. 사단장에게 규정의 보고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단장은 벌써 지도에 눈길을 박고 골몰해있었다.
《리숙!》
그가 불렀다. 리숙은 고기남과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놀란듯 바라보았다.
《리숙동무!》
현수가 다시 불렀다. 그러자 리숙은 마치 후려맞은듯 손에 쥐고있던 고삐를 힘껏 당겼다.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것이다. 말투레질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현수동무!》
리숙은 입속말처럼 속삭였다. 그리고나서 고삐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서로 손을 맞잡자 웃는지 우는지 그 녀자의 엷은 입귀가 바르르 떨렸다.
《현수동무, 그러니 동무도 여게 왔군요. 그렇지요? 어떻게… 언제 부대와 만났어요? 그때 헤여져선… 곧장 왔어요? 그런걸 얼마나 찾았다구… 글쎄 얼마나 속태우며 찾았다구!…》
《리숙!… 난말이요, 그때… 후퇴하던 구분대를 만나 만포까지 갔댔소.》
《만포?!… 아유 거기가 어디게!…》
그들은 아직도 두손을 맞잡고있었다.
《후퇴하던 도중 어느날 장군님을 만나뵈왔소.》
《예?》
《장군님을 만나뵈왔단말이요!》
《아이 무슨… 꿈이야기같이?! …》
《정말이요!》 현수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장군님을 직접 몸가까이 만나뵈왔소!…》
별안간 리숙은 온몸을 떠는것 같았다.
《그래서요?》
처녀는 속삭이였다. 그것은 겨우 귀전에 들려오는 입속말이였다. 그리하여 현수는 저도모르게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눈내리던 그날밤의 꿈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끝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장군님께서는 그후 나를 적후에 파견하시였소. 장군님께서 직접 여기로 나를 파견해주시였소.》
《장군님께서요?》
《그렇소, 리숙동무. 그래서 이렇게…》
비로소 리숙은 생판 달라진 현수의 모습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현수의 손에서 자기의 손을 떼고 발끝부터 머리까지 또 한번 더듬었다. 검푸른 두눈에서 맑은 샘물이 끓고있었다.
《어마나, 그새!… 또 중대장?!…》
《음, 또 이렇게…》
그런데 이때 개울건너 지휘부가 자리잡고있는 숲가에서 한 군관이 리숙을 소리쳐 불렀다. 리숙은 《예!-》하고 대답하면서 재빨리 현수를 돌아보았다.
《나를 찾아요. 난… 가야 해요.》
《?!…》
비로소 현수는 자기가 리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는것을 깨달았다. 제말만 제말이라고 했다. 자기의 기쁨에만 도취되여있었다. 잊을수 없는 전우들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다. 박원철, 오윤남, 한영순, 김상준… 그들은 어찌되였는지?…
그들은 개울가를 따라 걸어갔다. 몇걸음 걷다가 또 멎었다. 고기남련락병은 두필의 말과 함께 아예 멀찌기 물러가있었다.
이번엔 리숙에 대해서 물었다. 그들의 일행과 그를 소환하는 까닭을 물었다. 재우쳐 묻고 급히 몇마디로 대답을 하며 얼어붙은 개울가에 서있었다.
이렇게 만나자바람으로 또 헤여진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아쉬웠다. 가슴이 알알해났다. 비로소 현수는 자기와 리숙의 운명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리숙은 여전히 입술만 깨물고있다. 빨리 헤여져야 한다. 군단병원 군의장이 성이 나 독촉하고있다. 하지만… 어찌 그처럼 례사롭게 헤여질수가 있으랴. 심중에 간직한 뜻깊은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어찌 무심히 갈라져 갈수 있으랴.
현수는 그 녀자의 곱슬곱슬한 귀밑머리칼과 가늘고 하얀 목덜미를 눈여겨보고있었다. 언젠가 안개 흐르던 새벽, 등판우에서 쪽잠에 들어있던 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곤에 지쳐 잠든 그때 꿈을 찾아헤매던 그 시각에 보총의 총창끝에서는 순결무구한 한송이 보라빛 나팔꽃이 망울을 터뜨리고있었다.…
현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언젠가.》하고 현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수술해준 다음부터… 생각하기를… 난… 동무에게 진정으로 감사의 말을… 거 뭐랄가. 꼭 하고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그만… 오늘까지…》
《저한테요?》
리숙이 가늘게 그리고 아주 힘들게 물었다. 가는 손가락들이 경련을 일으킨듯 했다.
《그렇소.》 현수 역시 힘들게 말을 이었다. 《동무가 아니였다면 난 이처럼 빨리 전투대오에 서지 못했을거요.》
《…》
리숙은 두눈을 쪼프렸다. 현수는 그의 얼굴에 별안간 피곤이 실리는것을 보았다. 그는 당황했다. 녀성들과의 교제에 서툴고 용기조차 부족한 그로서는 더는 할말이 없을듯 했다. 정녕 이제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내놓고는 아무 말도 할것이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놀라운 일이다. 어째서 모든 작별은 서먹서먹하고 거북스러워지는걸가? 정작 헤여지는 마당에서는 누구나 그것을 서두른다. 할말을 다하고 약속도 하고 당부도 하고나면 조바심치며 기차가 들어서기를, 배가 출항고동을 울리기를 은근히 기다린다. 무엇때문일가, 왜 그럴가?… 작별의 연후에 지나간 모든것을 더듬어보기 위해서일가?…
살얼음밑에서 돌돌 구으는 개울물소리가 들렸다. 현수가 기침을 했다. 리숙이 그를 쳐다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동문… 나만 아니라 우리 부상병들 모두를 위해 참 많은걸 해주었소. 고맙소. 언제든 동무를 잊지 않겠소.》
《…》
이번엔 리숙이 놀란듯 했다. 갑자기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고 불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얼어든 작은 손이였다. 그러나 눈만은 그에게서 떼지 않고있었다.
《그게 다예요?》
속삭임같은 목소리였다. 타는듯 한 그리고 경계심어린 눈빛이였다. 만약 이때 그 녀자의 마음속에서 나팔소리처럼 메아리치는 간절한 기대를 들을수 있었더라면 현수의 대답은 전혀 달랐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북스러운 생각밖에 없었다. 괴로운듯 미간을 잔뜩 찌프리며 무뚝뚝하게 말해버렸다.
《다시 만납시다!》
순간 리숙은 두눈을 내리깔았다. 숱진 속눈섭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다. 리숙은 남들이 보는것처럼 그저 도고한 녀자가 아니다. 어찌 그 녀자라고 심신의 피로와 슬픔을 하소하고 무기력함을 느끼게 될 때 자신의 모든것을 의탁하고싶은 마음의 기둥을 가지고싶지 않겠는가! 그라고 어찌 부드럽고 살틀한 한생의 약속에 귀를 기울이고싶은 애틋한 소원이 없을수 있으랴!… 리숙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있었다.
숙아, 리숙아! 한때 너 역시 소중한 이름을 불러 남포등밑에서 심중의 고백을 한자두자 쓰고싶어하지 않았더냐. 네가 쓴 다정한 글줄들이 자부심 강한 어느 젊은이의 가슴을 두드려 굳게 닫힌 마음의 창문을 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더냐. 한때는 소녀다운 호기심으로 또 어느때부터인가는 꿈결같이 흘러드는 몽상속에서 대바르고 결백하고 지혜로운 젊은이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았더냐. 낯모를 그 젊은이와 끝없이 속삭이며 동요시절의 추억이 깃든 바다가 모래불에 마음속 발자국을 나란히 찍어가지 않았더냐!… 하지만 오늘은… 모든것이 심중의 애끓는 추억으로만 남았구나. 네게도 꿈이 있고 눈물의 애수가 크다는것을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구나. 사랑과 진정을 깡그리 바쳤건만 모두… 이렇게 가버리고마는구나!…
눈길을 떨군채 리숙은 걷고있었다. 자기가 지금 어데로 무엇때문에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에서 곧추 숲속으로, 한줄기 희망의 오솔길처럼 뻗어간 송림속에 난 길로 걸어갔다. 뒤미처 성급한 발자국소리가 따라왔다. 리숙은 그 발자국소리에 귀익은지 오랬다. 총상을 입었던쪽의 다리를 조심스레 옮기는 대신 다른 발자국소리는 힘있고 묵직했다.
불규칙적인 발걸음소리가 멎었다. 거친 숨소리가 귀전에 퍼부어졌다.
《가만있소, 리숙동무! 도대체 웬일이요. 응?!… 왜 그러는거요?》
리숙은 몸을 돌렸다. 무심한 눈길로 그를 마주보았다. 왜냐구?…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그걸 내가 말해야 하나요?… 맑고 검푸른 눈동자에서 불빛이 흔들렸다.
《또 만나요.》 리숙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구… 잘 싸워주세요. 그럼… 안녕히!》
리숙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발자국소리는 없었다. 그것을 듣고싶었다. 고개를 돌려보고싶었다. 그러나 조용히 곧추 걸어갔다. 얼어붙은 자갈들이 장화발밑에서 빠드득거렸다. 마음은 쓰리고 어수선했다. 가슴속에 가득 들어차있던 은밀한 꿈과 기대가 바람에 불린것처럼 사라지고 텅 비여버린듯 했다. 이제라도 그가 《리숙이!》하고 한마디만 소리쳐 불러준다면 걸음을 멈추고 느닷없이 그를 향해 달려가련만 그를 부르는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야속하고 분하고 쓰라린 마음… 숨을 죽인 마지막 기대, 타는듯 한 마지막 기대, 차디찬 바람결에 두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저려나는듯 느껴졌다. 이것이 사랑인가? 하다면 이 가슴의 아픔은 무엇이며 눈물은 웬일일가? 까닭없는 노염과 반발심은 또 무슨 영문일가? 얼음장같은 처녀를 눈물의 온기로 녹여버리고 감때사나운 젊은이를 겁먹게 하고 주눅이 들게 하는 이런것이 사랑인가?…
사랑이란 두사람이 한세계를 소유하는것이라고도 한다. 하다면 우리에게는 함께 소유할 한세계가 없단말인가?!…
리숙은 숲속으로 난 한줄기 오솔길로 정처없이 걸어들어갔다. 해빛이 설피여졌다. 바람이 불었다. 미츳미츳한 나무우듬지들이 능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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