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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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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650회 작성일 19-12-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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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행은 9명이였다. 소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릉선우에 람루한 군복차림의 부상병들이 리숙을 둘러싸고있었다. 머리에 타박상을 입은 무전수 오윤남, 해군소속 포중대의 포장, 그를 부축하고있는 간호원 한영순, 두눈에 붕대를 감고있는 운전사 김상준과 류현수, 박원철 등이였다. 김상준은 다행히 파편이 눈두덩을 찢어놓았을뿐 눈은 다치지 않았다. 처음엔 피범벅이 되여 앞을 보지 못했고 지금은 붕대로 감싸고있어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불안한 생각으로 리숙은 몸을 떨었다. 이제부터 이 사람들 전부를 보살피며 먹여주고 처치하고 이끌어가야 할 그였으나 첫 시작부터 03호병원을 목표로 떠난 그들이였으므로 적들이 앞길을 막아버린 지금에 와서는 어데로 가야 할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붕- 붕 소리가 났다. 황동색 비단조끼를 입은 산벌이 날아가고있었다. 기가 죽어있는 사람들은 아랑곳도 않고 붕-붕- 폭격기소리같이 숨죽인 정적을 휘젓더니 아까 자동차가 굴러난 그 구배길로 사라져갔다. 그쪽에서 까마귀 한마리가 사위스럽게 울어댔다.

리숙은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찌르는듯 한 류현수의 눈빛과 마주쳤다.

《갑시다.》

그가, 류현수가 한 말이였다. 리숙은 그것을 목소리로서가 아니라 그의 입놀림으로 알아들었다.

어데로?!… 리숙의 묻는듯 한 눈빛을 보면서도 그는 입을 다물고있었다. 어쨌든 떠나야 할게 아닌가? 시작이 있어야 끝도 있을게 아닌가. 그리고 여기선 동무가 지휘관이 아닌가?!… 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하여 그들은 걸음을 떼였다. 누렇게 퇴색한 구름장들이 머리우에서 흘러갔다. 발밑에서는 두텁게 쌓인 락엽이 짓이겨지고 마른 삭정이들이 뿌적뿌적 부러져나가군 했다.

일행은 북으로 가고있었다. 부대들이 가는 곳, 수도 평양이 있는 곳, 최고사령부가 있는 그곳- 북으로 북으로 가고있었다. 길을 잃을 때도 있고 오래도록 망설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리숙은 전날 공병중대를 지휘했던 류현수를 눈길로 찾군 하였다. 현수는 무섭게 충혈지고 아픔에 조프려진 사나운 눈빛으로 리숙의 말없는 물음을 알아들었고 동의해주었다. 하지만 리숙은 다음 순간에는 어쩐지 그 눈빛과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아직 단 한번도 중대장이였던 그가 왜 전사로 되여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 아픈구석을 건드리고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게 될것을, 그리고 꼭 알아야만 할 리유도 없는것을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여 상처를 처치할 때에조차 그들은 말한마디 없었다. 리숙이로서는 응당 아프세요? 괴로우세요?… 괜찮아요. 조금만 참으세요! 하는 말들로 부상자를 도와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류현수에게는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온몸을 땀으로 적시면서도 신음소리조차 없었다. 견갑골아래에 파편이 박혔으므로 상체를 움직일 때마다 단말마의 고통에 입귀가 비틀어지군 했다. 그러나 참았다. 리숙이 처치를 끝내면 그가 먼저 말했다.

《고맙소.》

아픔과 고통과 힘껏 싸운데 대한 찬사였다. 자기가 아니라 리숙이 더 지독한 고통을 이겨냈다고 하는 역설적인 격려였다.

한번은 릉선의 숲속에서 령길을 가득 메운 적들의 자동차종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엔징소리의 파도가 밀려오고있었다. 땅크발동기소리, 무한궤도소리, 수십대의 자동차들이 앙- 앙 모지름쓰고있었다.

앞못보는 김상준이 속삭이듯 물었다.

《놈들이디요? 예?!… 북쪽으로 밀려가는가보디요?…》

아무도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준도 더 묻지 않았다. 잠자코 귀를 강구며 오한이 나는듯 어깨를 흠칫거릴뿐이였다.

그때에도 리숙은 자기에게 견주어진 류현수의 찌르는듯 한 눈길을 느꼈다. 그러자 마음이 언짢아졌다. 나는 싫다. 정말이지 참을수 없이 싫다. 나를 비난하는듯 한, 무섭게 질책하는듯 한 동무의 그 사나운 눈빛이 싫다!… 리숙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걸음을 떼였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걸음… 그래도 간다!…

전선은 멀리 북으로 옮겨갔고 그들의 걸음은 연자망처럼 느리다. 어느덧 먼 포성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날이 부상병들의 상처는 험해지고 먹을것도 거덜이 났다. 하나의 령을 넘는데 인제는 옹근 하루를 바쳐야 한다.

밤이 깊어서야 어느 골안에서 쉬기로 했다. 적막한 골안을 훑어내린 찬바람이 등판의 새초숲을 흔들며 지나가군 했다. 지치고 굶주린데다가 춥기까지 하여 부상병들은 괴로와했다. 무선수였던 오윤남전사가 불을 피우자고 제기했다. 리숙은 망설이다가 결국은 동의했다. 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돌아보고 오겠어요.》

그는 어둠속을 걷고있었다. 그 녀자로서는 그외 더 할 일이 없었다. 약도 없고 식량도 없다. 극도로 허약해지고 지쳐버린 부상병들에게 해줄 위안의 말조차 없다. 걸음마다 밟히는 적들의 삐라는 전선이 38°선을 멀리 넘어갔다고 했다. 투항하라고 유혹하는 녀자방송원의 목소리도 더는 머리우에서 들려오지 않는다. 그 비행기들도 후퇴하는 인민군련합부대들을 노리고 먼 북쪽으로만 날아가는 모양이였다. 부상병들로 무어진 리숙의 일행만이 이 산중에 홀로 남은것 같았다.

가끔 큰 부대가 지나간 길을 발견하군 했다. 풀대들이 짓이겨지고 나무가지들이 부러져나간 길아닌 숲속의 대통로였다. 그것을 바라보느라면 그들만을 남기고 모두 가버린듯 한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내리는듯 했다.

리숙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서 부상병들이 불을 피우고있다. 한마디 말도 없이 한점의 불꽃을, 한점의 온기를 기다리고있다.

불꽃들이 흐트러지는것이 보였다. 누군가 엎드려 세차게 입김을 불어댔으나 저녁무렵에 내린 이슬비때문에 불이 당기지 않는것 같았다.

리숙은 어깨가 죄여들었다. 참을수 없이 오한이 잔등을 줄달음쳤고 눈굽이 따끔거렸다. 쩝쩔한 눈물의 온기마저 지금은 그리워났다. 그렇게 지금 저기에서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험한 상처를 입고 시달릴대로 시달린 사람들이 누워서, 앉아서 한점의 불꽃을, 한점의 희망을 간절히 바라고있다.

리숙은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도 피곤이 심하고 하도 허기져 꿈속을 걷는듯 했다. 갈마드는 생각도 두서가 없고 제멋대로였다. 어머니생각… 그러면 까닭없이 이어지는 애달픈 회한, 가슴속이 쩌릿해지고 눈시울이 떨려났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이러는걸 보면 아버지는 뭐라실가?…

외동딸 리숙이를 무던히도 끔찍이 사랑한 아버지였다. 자기 딸이 남달리 아름답고 지혜롭고 강인하다고 굳게 믿던 아버지, 리숙이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성취할것처럼 그 아버지는 생각했었다.

《너 체육선수가 되고프냐?》하고 언젠가 아버지는 웃으며 물었었다. 《학교롱구팀에 들어갔다며?》

《글쎄 그렇긴 한데… 하필 체육선수는 왜요?》

《요즘 거게만 정신을 파니말이지.》

《아뇨. 나야 키가 작은걸요.》

《음-》

전기기술자인 리성조는 아무래도 자기 딸이 기술분야엔 적합치 않다고 본것 같았다.

《그럼 사회활동가가 되지. 로자 룩셈부르그같은.》

《연설말예요? 아버지, 선거선전때 보니 내 말이 제일 설득력이 없는것 같더군요.》

《그렇게 여겨질뿐이겠지. 요구가 높다보니.》

《참, 아버지두.》

《아니면 영화배우는 어때?》

《그럼 일생 남이 써준 대사나 옮기게요? 독창적인 제말은 없이…》

《독창적으로 하려무나. 넌 그런 재간이 있지 않니?》

《그래도 필림만 랑비할거예요. 사진에 박힌 내 얼굴 좀 보죠? 전혀 나같질 않아요!》

아버지는 손을 내젓고말았다.

《어쨌든 넌 한우물을 파야 해!》

아버지처럼 말하던 또 한사람이 있었다. 의젓한 체구에 미남자이던 학교민청부위원장이였다.

《동문 어느쪽이요?… 롱구와 바이올린!… 물과 불이지. 그건 그렇고… 쓸데없는데 정력을 쏟지 말고 수학적재능을 살리오. 그러면 곧 두각을 나타낼거요. 웃지 마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갈릴레이가 말했듯이 동무야말로 수학이라는, 자연이 말하는 언어를 리해하고있단말이요. 이게 어디 간단한 일이요? 천부의 재능이지!》

그때 리숙은 자기의 박식과 다변을 뽐내려는듯 열심히 말마디들을 고르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흘깃 치떠보고나서 유쾌하게 웃어댔다.

《동무에게도 천부의 재능이 있군요. 배우와 같은… 어쨌든 생각해줘서 고마와요. 그런데… 난 뭐나 다 하고싶으니 어떻게 해요. 아무거나 다!…》

시와 외국어, 학과경연과 연예선전의 류랑한 나팔소리로 응원받던 그 시절의 한토막 추억이였다.

…멀리 산너머 어데선가 발동기들의 소음이 울려오는듯싶었다. 리숙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강구었다. 그쪽에 북으로 가는 큰길이 있다. 미국놈들이 땅크와 대포를 끌고 쉼없이 밀려가는 큰길!… 지금 전선은 어데 있을가. 우리 동무들은? 우리 부대는?… 놈들은 계속 북쪽으로 밀려드는데 우린 부절히 산속을 헤매며 지치고 굶주리고있구나!… 이렇게 속수무책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못마땅해 하는걸가?… 사납게 번뜩이던 류현수의 눈빛이 떠올랐다. 100여명나마 되는 중대를 지휘하던 사람, 수수께끼같은 사람이다. 상처의 고통과 싸우는지, 내심의 고통과 싸우는지 알수 없다. 어쨌든 무엇인가 피타게 갈구하고있는 사람이다. 가혹하게 자신을 매질하고있고 또 무섭게 달구고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무서운 그 열광에 자신을 다 연소시켜버릴지 모른다.

리숙은 몸을 돌려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마음이 조급해났다. 퍼그나 멀어진 화토불을 바라고 덤벼치며 걸어갔다.

화토불에 이르자 부상병들이 그에게 자리를 틔워주었다. 화토불의 따뜻한 온기가 그들의 얼굴에 어려있었다. 리숙은 자리잡고 앉았다. 박원철과 오윤남은 개울가에서 돌멩이를 뒤져 가재잡이를 하고있었다. 앞못보는 김상준은 그들 가까운 곳에 앉아 참개구리도 찾아보라고 권하고있었다. 류현수는 보이지 않았다. 리숙은 그가 어데 갔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개울쪽에서 박원철이 다가왔다.

《보초근무를 서겠다면서… 저기 등성이쪽으로 갔습니다.》

《뭐라구요?》 리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몸으로… 무슨 보초근무를 말하는거예요?》

박원철이 쭈밋거리다가 뜨직뜨직 대꾸했다.

《보초도 없이 어떻게 불을 피우고 잘수 있는가 하면서… 갔습니다. 제가 가겠다고 했더니 성을 내면서… 다들 굶주리고있는데 동무야 할 일이 좀 많은가 하면서… 갔습니다. 누구도… 막을수 없었습니다.》

다른 부상병들이 그것을 확인하였다. 명령하기에 습관된 강경한 어조로 사람들을 눌러놓고 그자신은 보총을 메고 나섰다는것이다.

리숙은 아무말없이 몸을 홱 돌려 류현수가 갔다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차츰 걸음이 빨라졌다. 격해지는 심정을 누를길 없어 거의 반달음쳤다. 그때 누군가 숨을 헐떡거리며 뒤따라왔다. 리숙이 걸음을 멈추자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린채인 박원철이 앞을 막아나섰다.

《간호장동무, 제가, 제가 가서 교대하겠습니다.》

리숙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동무들은 뭐예요. 누가 보초를 서라고 했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 일을 제멋대로 맡아나서나 말예요. 제가 있고 간호원도 있는데… 또 몸이 성한 동무도 있는데 어쩌면… 상처가 중한 부상자를 혼자 가게 할수 있어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만… 그렇지만 간호장동무, 간호장동문 그가… 우리 중대장동무가 얼마나 괴로와하는지… 다 모를겁니다. 뭐 상처때문에 그러는줄 압니까? 왜 보초를 선다고 갔는지 압니까? 혼자 있고싶어서… 그래서 갔을겝니다. 그래서 저도… 더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간호장동문…》

어둠속일망정 그가 몸을 떠는것이 알렸다. 차츰 흥분으로 하여 숨결마저 가빠지고있었다. 리숙이 몸을 움직이자 또 그를 가로막아나섰다.

《간호장동무! 말이 난김에… 좀 하겠습니다. 간호장동문 우리 중대장동무가 어떻게 돼서 전사가 됐는지… 압니까?… 모르지요? 도대체 그걸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그런건 간호장동무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분합니다. 난 간호장동무가 그런줄은… 정말 그렇게 박정하고 무정한줄을 몰랐습니다.》

《예, 뭐라구요?》

《물론 부상병들때문에 잠도 못자고… 고생이 막심한줄은… 압니다. 하지만 간호장동문 왜 아직 한번도 우리 중대장동무가 어떤 무서운 일을 겪었는지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끔찍한 일이 왜 생겼는지 알아보지 않는가 말입니다. 예?… 우리 중대장 동문… 총살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간호장동무때문에… 뭐 알기나 합니까?!…》

《?!…》

리숙은 후려맞은듯 했다. 미처 아픔도 느낄새 없이 누구인지 무섭게 매질한듯 저도모르게 입을 벌리고있었다. 페부를 찌르는 차고도 매운 바람… 박원철이 또 격한 말마디들을 퍼부었다.

《간호장동문 다 잊었겠지만 우린 기억에 생생합니다. 언젠가 우리 도하장에 나타나 뭐라고 했습니까. 부상병들을 후송해오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했지요?… 그래서 배떼다리를 폭파할 임무를 받고있던 우리 중대장동문 기다렸습니다.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요.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넘도록 간호장동문 오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놈들의 땅크가 달려들었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압니까?… 끝내 우리 중대장동문 체포되고 상부에선 총살할것을 명령했지요. 그것이 최고사령부에까지 보고되고… 비록 총살명령은 취소되였지만… 보다싶이 전사로 강직되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중대장동문… 죽기로 싸우면서… 피로써 과오를 씻겠다는… 그 한가지 생각만 하는데… 그런데도 간호장동문 뭐라구요? 제멋대로라구요?…》

그는 목구멍이 칼칼해서 마지막 말마디들을 겨우 넘기고있었다. 어느덧 리숙은 온몸을 덜덜 떨고있었다. 무엇인가 그의 가슴을 게염스럽게 파먹고있는듯 했다. 아픔과 쓰라린 울분과 분노와 노염이 덩이덩이 뭉쳐서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듯 했다. 그는 울컥울컥 치미는 마음속 번열을 삼키며 부르짖었다.

《그럼 동문 어째서… 이제야 그 말을 하는거예요. 왜 아무말없이 있다가?!…》

《어떻게 말합니까. 그걸 말하면 우리 중대장동무가 가만 있을것 같습니까?》

《그만해요!》 드디여 리숙은 힘껏 웨쳤다. 《옹졸해요. 동문!…》

리숙은 박원철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등성이로, 어둠속으로 마구 헤덤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쩔새없이 돌뿌다귀를 걷어찼다. 뼈에 사무치는 전률이 허벅지를 따라 쭉 뻗어올랐다. 그는 허리를 꺾고 주저앉으며 앞코숭이가 터져나간 장화앞끝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물렀다. 불같이 지지는 고통에 마음이 구깃구깃해졌다. 쓰리고 아프고… 어찌 알았으랴. 그런 무서운 일이 벌어졌을줄이야. 그 누가 상상인들 했으랴!… 그날 덕암산의 방어진지에서 부상병들을 찾았을 때엔 벌써 적들이 주변을 온통 덮고있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다 죽는줄 알았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탄갑을 모았고 탄알을 세여 나누었었다. 그러다가 정찰소대가 달려와 그들을 도와 강을 건느게 해주었다. 그저 그뿐이다. 전쟁판에선 흔히 있을수 있는 일로서 그들은 그 일을 곧 잊어버리고말았다. 그런데 한 공병중대장은 그 일로 하여 총살을 선고받았었다고 한다!…

벅찬 흥분과 아픔이 심장을 비틀었다. 리숙은 오한이 나는듯 온몸을 떨며 마음속으로 현수를 향해 부르짖었다.

《현수동무! 그런 일이라면야 왜 말해주지 않았나요.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말한마디 없이… 제가 도울 일은 없을가요? 제가… 우리가 도우면 안될가요?…》

언틀먼틀한 비탈을 허우적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멎어섰다. 헐떡거리며 움직이고있는 시커먼 그림자를 보았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웅크러뜨린 그림자, 어깨우로 비죽 솟아있는 총창, 류현수였다. 아직 등성이를 절반도 채 오르지 못하고 멎어있었다. 보총을 세워짚고 잔뜩 몸을 뒤틀고있다. 숨가쁘게 헐떡거리다가도 신음소리를 삼키느라고 부득부득 이발을 갈고있다. 그에게서는 살을 저며내는것 같은 아픔이 찬바람처럼 전해오고있었다.

리숙은 숨조차 쉬는것 같지 않았다. 찬바람이 이슬젖은 풀대들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리숙은 오한이 나는듯 했다. 더는 한발자국도 움직일것 같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헐떡거리고 끙끙 모지름을 쓰는 시커먼 그림자만 지켜보고있을뿐이다. 이슬비에 질벅해진 흙이 장화밑바닥에 꽉 엉켜붙은것을 느꼈다. 심장에 사무쳐오는 불길같은 아픔, 왜 이리 안타까운가, 어째 이리 고통스러울가?… 현수동무, 어쩌문 좋아요.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가요?!… 어느새 두볼은 뜨거운 눈물에 젖고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시커먼 그림자를 향해 달려나갔다.

《현수동무!》

눈물에 젖은 부르짖음이였다. 그 소리에 현수가 머리를 돌렸다. 흐릿한 눈동자가 얼른거렸다. 또 한번 신음소리를 삼키는듯 했다. 그다음 리숙을, 울고있는 리숙을 알아본것 같았다. 드디여 그의 굳어진 눈동자속에서 한점 불빛이 떨렸다.

《간호장동무가?…》

《예, 저예요. 리숙이예요!》

오열을 삼키며 비틀거리는 현수를 붙잡았다. 팔을 돌려 그의 어깨를 감아안으며 조심히 부축해 일으키려니 가슴둘레로 뜨거운 경련이 지나갔다.

《가자요. 이제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골바닥에서 차거운 안개가 흘러오고있었다. 별빛하나 없는 밤하늘에서 역시 누기찬 어둠이 무겁게 땅을 짓눌렀다.

리숙은 앙당그려문 이발사이로 가쁜숨을 내그으며 현수를 부축해갔다. 발밑의 풀줄기가 미끄러웠다. 차츰 목구멍에서 무엇이 가릉거렸다. 현수가 멎어섰다.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거칠게 속삭였다.

《됐소, 인젠… 나혼자서 갈수 있소.》

《…》

리숙은 아무말도 않고 현수가 들고있던 보총을 당겨왔다. 그리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보총의 총창에 확확 달아오른 볼을 대였다. 이슬젖은 총창에서 차디찬 음향이 울려왔다. 물론 혼자서도 갈수 있겠지. 그처럼 무섭게 강심을 먹고있으니 죽음도 이겨내겠지. 하지만… 우린 어째서 서로 도우면 안되는가? 우리 서로 고통과 아픔도 나누고 죽음도 같이 헤쳐갈수 있지 않는가?!… 리숙은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등성이우의 풀숲에서 무엇이 설렁거렸다. 불쑥 리숙이 물었다.

《왜 저한텐 아무 말도 안했어요?》

《?…》

현수는 어리둥절해진듯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리숙은 애써 흥분을 누르며 자기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목에 긴장을 주었다.

《나도 다 들었어요.… 거기 도하장에서 우릴 기다리다가 끝내 무서운 일이 있었다는걸… 들었어요. 결국 나때문에 중대장동무가…》

리숙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결에 손을 올려 자기의 입을 막았다. 그와 마주서있던 현수가 갑자기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급격히 몸을 떨었던것이다.

《무슨 소리! 그게 아니요!》 그는 부르짖었다. 허턱대고 두릿거리며 비틀거리면서도 리숙이 부축하려들자 세차게 밀막았다. 《누가 그렇게… 동무들때문에 어찌 됐다고 합디까?…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요. 명령에 관한 문제만도 아니요. 난… 말하고싶지 않았지만… 이왕 말이 났으니… 합시다. 간호장동무, 난… 총살선고를 받았소. 그런데 그것을 집행할 임무를 받은 한 상급예심원은… 중상을 입고도 병원으로가 아니라 전선사령관동지를 만나려고… 갔소. 거기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나도 다 모르오. 하지만 난… 내 문제가 최고사령부에까지 보고되였다는것을 알게 됐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 떨리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간호장동무때문이겠소. 절대 아니요. 나는 사실… 죽을 죄를 지었소. 제때에 명령을 집행하지 못해 엄중한 후과를 초래했소. 또 부상병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간호장동무랑… 거기 갔는데… 도울 생각도 않고있었소. 그러니 내가 무슨 지휘관이였소. 지휘관의 자격은 고사하고… 죽어도 마땅하오!… 그런데 난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소. 총살선고를 받았던 내가!… 간호장동무, 어떻게 이리 됐는지 아오? 난 지금… 심장으로 느끼고있소. 지금같은 때에, …이렇게 어려운 때에도 나같은 한 전사의 운명까지 다 보살펴주시는 어버이의 뜨거운 정을 느끼고있소. 난 살아서 피로써 그 은정에 보답하겠소. 다시 진격하는 날, 승리한 그날엔… 난 죽어도 한이 없소. 한이!…》

리숙은 울고있었다. 왜 울고있는지 자신으로서도 그 리유는 설명할수 없으나 소리도 없이 옷섶이 흠씬 젖도록 울었다. 와들와들 떨면서 리숙은 그를 부축해가고있었다. 왜 그런지 아버지생각이 났다. 계모도 생각키웠다. 무엇때문인지 이제 그를 만나면 어머니라 부를수 있을것 같았다. 모두들 이 전쟁을 떳떳이 이겨내고 다시 한데 모여 화목한 가정을 이룰것 같았다. 그렇다! 우리는 이길것이다. 힘을 내야 한다. 힘을… 우선 이 사람을 도와야 한다. 그가 용감성과 위훈으로 과오를 씻도록 해주어야 한다. 최고사령부에 보고되였다고 하니 이 깨끗한 사람의 운명은 제대로 될것이다. 내가 이 사람의 상처를 고치자. 다른 누구의 손을 빌것도 없다. 나라고 왜 못한단말인가. 이 사람처럼 강심을 먹고 달라붙는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나자신이 수술을 하여 상처에 박혀있는 파편을 왜 파내지 못하겠는가!…

등판우의 짚더미들이 가까와졌다. 어둠속에 고깔모자같이 솟아있는 짚더미들… 리숙은 그리로 현수를 부축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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