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50년 여름 제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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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밤새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장들은 아침이 되자 쪼각쪼각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골짜기마다 밥짓는 연기에 뒤섞여 무럭무럭 피여오르던 안개도 사라지고 잎새마다에 맺혀있던 물방울들이 쏟아지는 해빛에 말끔히 걷혀졌다. 행군하는 보병전사들의 몸에서는 김발이 피여올랐고 지휘관들의 얼굴에는 웃음발이 피였다.
진격이다. 남으로!
최현은 비 그친 아침의 밝은 해빛으로 하여, 길가에서 보게 되는 활기찬 행군대렬의 씩씩한 모습으로 하여 더욱 기분이 좋았다. 후방이 아니라 전방에로, 전투지대에로 그를 불렀다는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다만 오는 도중에 차가 범람한 산골개울을 건느다가 빠져 30분 지체한것으로 조급증이 덧쳤을따름이다.
평강에 와서 도로경무장으로부터 강건총참모장이 한시간 앞서 통과했다는것을 들은후부터 최현은 보다 심중하게 미지의 새 임무를 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밤 전화에서 구체적인 지시는 강건을 통해 주겠다고 하시였다. 하여 임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피하고 어렵다는것만 강조하시였다.
《최현동무, 난 매번 어려운곳에 동무를 보내게 됩니다. 옛날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힘들면 나를 원망하시오.》
가슴을 쩌릿하게 하던 다정한 말씀이 지금도 귀가를 쟁쟁히 울린다. 최현이 자동총을 멘 두명의 보초가 서있고 몇대의 위장한《윌리스》가 서있는 동기와집앞에 이르렀을 때 모포를 친 문이 열리더니 군관 한명이 뛰여나왔다.
《기다리고계십니다.》
최현은 물바께쯔를 들고 내리려는 운전수에게 신칙하듯 말했다.
《차청소는 하지 말고 즉시 뛰게 하오. 밥도 차에서 먹고-》
그리고 자기를 호기심에 차 바라보는 군관에게 말했다.
《저 동무 대식간데 운반식사를 하게 해주.》
《그럼 려단장동지도 식사를 못했습니까?》
《난 차에서 했소.》
최현은 한때 사민집이였음을 알리는 노루발쪽 손잡이가 달린 문앞에 다가갔다. 귀익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52사의 지체는 서울해방작전에 커다란 난점을 조성하고있습니다. 동서량익의 사단들과 이 보조타격사단들의 진공속도를 주타격부대들과 일치시키는것, 이것이 현재 전방지휘소앞에 제기된 당면한 과제입니다.》
《들어가십시오. 도착한 즉시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첫눈에 강건이가 띄였다. 대형작전지도가 걸린 앞에서 강건이 말하다가 최현이를 보고 알릴듯말듯 눈인사를 했다. 그옆 책상에서 만년필을 든 최용건이 지도쪽을 향해 앉아있다가 최현이를 알아보고 움씰 일어나 다가왔다.
《보위상동지, 38경비려단장 최현 임무를 받기 위해 왔습니다.》
최용건은 그의 두손을 꼭 잡고 회의중이라는것을 생각했음인지 말없이 자기 의자옆에 데려갔다. 최현은 그의 손이 뜨겁고 땀이 배였음을 느꼈다. 주변의 장령들은 주의깊은 눈길로 최현이를 바라보았다. 강건이 최용건에게 묻는 눈길을 던지자 최용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건은 왼손에 쥐고있던 지시봉을 책상우에 놓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질문할것이 있으면 하십시오.》
그리고는 질문을 바라지 않는다는 태도로 성급히 말했다.
《문의할것이 있으면 15분후 나의 방에 오십시오. 그리고-》
강건은 시계를 보았다.
《23분후부터 김일성장군님께서 방송연설을 하십니다. 통신부부장동무, 야외마이크 설치를 끝냈습니까?》
《네,끝냈습니다.》
《최현동무만 남고 돌아들 가시오.》
최용건이 말했다. 한사람두사람 일어나 걸상을 책상쪽에 밀어넣고는 최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약속이나 한듯 수고하게 됐습니다 하고 인사들을 했다. 그들이 다 나가자 최용건이 입을 열었다.
《남들은 인사를 했는데… 난 구태여 인사치레는 안하겠소. 지금 52사는 제일 뒤떨어져있소.》
그는 책상우에서 파란 봉인도장이 찍힌 봉서를 열고 타자친 모조지를 꺼냈다.
《38경비려단장 최현을 인민군52사단장으로 임명할데 대하여.》
최현은 맨밑에 옆으로 흘려쓴 그토록 눈익고 친근한 글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최용건은 그 종이를 다시 봉서에 넣고 책상우의 지도를 끄당겨오다가 최현의 엄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동무에게 어려운 사태에 직면한 사단을 맡기게 된데 대하여 가책을 느끼오.》
최용건은 최현이 그대로 서있자 고개를 흔들었다.
《앉소. 례식을 차릴 시간이 없소. 지금 52사가 걸렸소. 전반작전행동이 52사로 하여 위협을 당하고있소. 강건동무, 상세히 얘기해주시오.》
강건은 기다렸던듯 새 지도 한장을 작전탁우에 펼쳐놓았다.
세개의 붉은 화살표가 남으로 뻗었다. 두개는 서울쪽으로 다른 한개는 춘천에 가서 멎었다. 그 화살표앞에는 《최현동무!》라고 쓴 글발이 있었다. 최현이 묻는 눈길로 강건이를 바라보자 약간 상기된 얼굴의 강건은 저으기 심중한 태도로 말했다.
《이 지도는 장군님께서 친히 최현동무에게 주라고 하신 지도입니다. 화살표들은 장군님께서 직접 그으신것입니다.》
최현은 약간 흠칫하며 강건이를 뚫어질듯 바라보다가 지도에 고개를 수그렸다. 불그레 상기된 얼굴에서 눈섭오리가 푸들푸들 떨었다. 강건은 흥분한 어조로 계속했다.
《최현동무도 알고있겠지만 지금 전반적전선에서의 반공격속도는 대단한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부대들이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것으로 하여 장군님의 의도를 관철하는데서 상당한 난국을 조성하고있습니다.》
강건은 색연필뒤등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시간상 정황설명은 길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개 화살표는 서울로 나가는 53사와 54사 905땅크려단의 행동선입니다. 이번 반공격작전에서 이들이 주타격부대로 나가게 됩니다.
52사는 중부를 담당하여 괴뢰 6사가 막고있는 춘천을 해방하고 더 나가서 수원을 차단함으로써 적의 기본 유생력량이 집결된 서울지구를 뒤로 절단하여 53사, 54사와 함께 포위소멸전을 하게 됩니다. 이 작전이 계획대로 되였더라면 우리는 적어도 90%의 적의 병력을 붕괴소멸시킬수 있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대로 되자면 춘천은 어제 오후까지 해방되여야 했습니다.》
강건은 영민하고 날카로운 눈길로 최현을 바라보았다.
최현은 입술을 꾹 다문채 지도만 내려다보았다.
강건은 미간에 실주름을 지은채 계속하여 적정과 린접부대들에 대하여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최현이를 응시하면서 또박또박 힘주어 말을 이었다.
《장군님께서는 2~3일내로 서울을 해방할것을 바라십니다.
만약 52사가 계획대로 춘천을 해방하였다면 2~3일안의 해방은 문제없는것이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초기 계획하신 춘천점령시간은 언제였습니까?》
《늦어도 오늘새벽까지는 끝내기로 되였습니다… 늦었습니다.》
최현의 얼굴이 이지러지였다. 장미가 바늘처럼 일어섰다.
《위청은 지내 덤비다가 실패했소. 마구다지로 맞받아치다가 대원들만 잃었소.》
최용건이 불같은 성미의 최현이 너무 격동한것에 안심찮아 말했다.
《또 한번 그런 사태가 빛어지는 경우 그 사단은 1제대 부대로 활동할 사기마저 잃을것이요. 물론 여기에는 위청만 아니라 나의 불찰도 크오. 나는 심중할걸 바라오. 그러나 오늘내로 무조건 해방해야 하오.》
《최현동무! 만약 52사가 지연되면 서울작전안은 수정해야 합니다.》
최용건의 뒤를 이어 강건이 다짐을 두듯 말하자 최현은 찌프린 눈길을 쳐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초기계획에 제시된 우리 사단의 서울측방 진출시간은 언제입니까?》
《27일이요. 그 지도에도 밝혀있소.》
최용건이 대답하자 최현은 끌날같은 눈길로 맵짜게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말없이 책상우의 지도를 차곡차곡 접어 전투가방에 넣었다. 딸깍! 하고 맞단추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성급하다고 할 재빠른 동작으로 의자를 밀치며 일어섰다.
《돌아갈만합니까?》
최용건은 묵묵히 최현을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최현동무, 난 믿소. 아직까지 그 어떤 전투에서도 실패를 모른 동무가 아니요. 잘 싸워주오.》
최현이 밖에 나왔을 때 강건이 따라나왔다.
《최고사령부에서 몇시에 떠났습니까?》
최현은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한시경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두루 심뇌가 크겠지요?》
《더 말할것 있습니까. 내가 떠나올 땐… 참 오영혜 있잖습니까?》
《오중흡의 조카말이지요?》
《네, 그 체네때문에 더욱 심란해했습니다. 그 새침데기까지 군대에 가겠다고 하니 장군님께서 오죽했겠습니까.
더더구나 장군님께서는 최현동무를 힘든곳에 보낸다고 몹시 마음을 쓰시더군요. 그리고 동무에게 꼭 다짐을 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참을 <인>자를 생각하라는것입니다.》
《그건 그전에 누군가 나를 삼국지의 장비로 비유한탓이요. 허 참… 난 결코 망하는 모험은 안합니다. 장군님을 다시 뵈야지 않겠소.》
최현은 웃었으나 김일성동지의 다심한 정에 눈굽이 뜨뜻이 달아올라있었다. 강건은 뭔가 더 이야기를 할 차비였으나 채 할수 없었다. 53사지휘부에서 전화가 왔던것이다.
최현은 그와 다시한번 악수를 하고 차에로 다가갔다.
그가 차에 오르고 운전수가 발동을 걸 때 아래우 맞달린 퍼런 운전수복을 입은 특무상사가 손을 저으며 달려왔다. 차가까이 이른 그는 최현을 보고 와닥닥 놀라며 돌아설가말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최현은 강건참모장의 운전수를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요?》
《편지를 좀 부탁하려고 합니다.》
《편지?! 보자구.》
최현은 그의 손에서 편지봉투를 받아쥐였다. 수신인 이름을 본 최현은 씨무룩 웃었다.
《오영혜가 부탁했어?》
《네, 저 내각수상실 기술서기입니다.》
《안다. 그런데 이건 무슨 편지래?》
《모르겠습니다. 비밀을 꼭 지켜달라고 했는데…》
특무상사는 뒤더수기를 긁었다. 최현은 눈섭을 찌프렸다.
《그렇다면 비밀을 지켜야지. 벌써 두사람이 더 알지 않아. 하여튼 이건 내가 전해주지.》
최현은 그 편지를 품속 안주머니에 밀어넣고는 자기 운전수의 어깨를 쳤다.
《자, 날아보자.》
차가 전방지휘소 골짜기를 벗어났을 때 최현은 무선방송에서 올려나오는 흥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최현은 소리조절기를 최량으로 높였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바로잡고 반쯤 눈을 감았다. 순간 후사경에 자기 차를 따르는 모터찌클이 보였다. 최현은 차를 세우게 했다. 모터찌클이 차꽁무니에 부딪칠듯한 거리에서 멈춰섰을 때 최현은 거기에 탄 각광을 단 하사관을 불렀다.
《동무넨 어데 가오?》
《사단장동지의 호위임무를 받았습니다.》
《이 차에 옮겨타오. 장군님께서 방송연설을 하시오.》
두눈이 휘둥그래진 하사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뒤꽁무니에 올라탔다. 차가 제동을 풀고 다시 달릴 때 재차 방송원이 중대방송연설을 알리고 뒤미처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친애하는 동포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우리 인민군 군관, 하사관, 병사들!》
최현은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목소리가 좀 갈리신것 같구나.)
최현의 눈앞에는 마이크앞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동지의 근엄한 영상이 방불히 보이는듯싶었다.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짓누르고 산악처럼 높이 솟아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밝으신 모습으로, 분노와 증오에 충만하여 원쑤격멸을 호소하는 서리발 풍기는 모습으로 그 영상은 부단히 변화되였다.
《리승만역도는 동족살륙전쟁을 통하여 남반부에서 지배하고있는 반인민적인 반동통치제도를 공화국북반부에서까지 실시하려 하며 우리 인민이 쟁취한 민주개혁의 성과들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리승만반동도배는 공화국북반부에서 실시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의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토지의 주인으로 된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다시 지주들에게 돌려주려 하며 북반부인민들이 쟁취한 모든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려 합니다.
리승만역도는 우리 조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며 전체 조선인민을 미제의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최현은 번쩍이는 눈길로 하사관을 돌아보았다.
《명심해, 이걸.》
《인류력사는 자기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결사적으로 궐기한 인민들은 언제든지 승리한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정의의 투쟁입니다.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인민의 편에 있을것입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우리의 정의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하고야말리라는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최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도우에 써넣으신 김일성동지의 글발이 불길처럼 안겨왔다.
최현동무!
련속타격! 시간! 시간!
오불꼬불한 산길에 들어서 얼마간 달렸을 때 이 산간에 어울리지 않는 빨간 벽돌집 한채가 덩그렇게 보였다.
《저기가 사단지휘부입니다.》
하사관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자 최현은 피끗 보고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사단참모장을 태우고 날 따라오우. 소양강으로.》
차가 높은 고개마루로 올라갈 때 참모장을 데리러 갔던 모터찌클이 다쫓아왔다. 최현은 그 차에 중성 세알의 군관이 탄것을 보고는 차를 세우게 했다. 모터찌클에서 내린 기름한 얼굴에 안경을 낀 52사참모장이 달려오자 최현은 마뜩지 않은 눈길로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지도는 가져왔소?》
《네, 그런데 위청동지가 인계때문에.》
《인계는 문제가 아니요. 이 차에 타오.》
최현은 자기 부관에게 눈짓으로 앞자리를 가리킨 후 참모장이 거북스럽게 앉는 뒤좌석에 자기도 옮겨앉았다. 참모장이 전투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내밀자 최현은 확대경을 꺼내들며 운전수에게 소리쳤다.
《전속으로!》
고개마루에 오르자 길은 보병들과 박격포병들, 가마마차들로 꽉 메워지다싶이 했다. 모터찌클이 앞서 달리며 연신 경적을 울리고 참모장이 일어나 사납게 소리치자 길이 점점 트이였다. 최현은 지도를 보다 말고 이따금 옆으로 지나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살피였다. 한결같이 사기왕성한 모습들이였다. 그들은 시퍼런 왕별 견장을 단 장령을 놀라움과 감탄속에 바라보고는 서로 수군덕거렸다.
《세우오.》
최현이 갑자기 소리쳤다. 45미리포 네문이 길가에 나란히 서있는것을 띠여본것이다. 그가 차에서 뛰여내리자 길도랑이며 산비탈에 주저앉아 쉬고있던 군인들이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일어섰다. 소성 세알을 단 군관이 《차렷!》을 웨치고 달려오는것을 보았으나 최현은 그쪽이 아니라 포에로 다가갔다.
《중대장이 누구야?》
최현이 한 소대장을 향해 묻자 《차렷!》을 준 군관이 《접니다.》 하고 달려왔다.
《쉬엿하시오.》
최현은 상위의 흙물이 든 바지며 장화를 보다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포는 왜 세워놓고있소?》
그러자 포중대장은 참모장을 흘깃흘깃 보며 선뜻 대답할념을 못했다. 참모장이 어색한 낯빛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포가 은페할 곳이 없어 여기에 뒀습니다. 개활지여서 포가 맞을수도…》
최현의 눈섭이 사납게 일어서고 두눈이 이글이글 타며 참모장을 쏴보았다.
《그래 포가 마사지는 위험은 보고 보병들이 쓰러지는것은 못보오. 포가 뭣하러 있소?》
《이 포는 반땅크전투에 쓰기 위해 아껴야 한다고 위청사단장동지가-》
《동무!》
최현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허리를 잘랐다. 그는 참모장의 피기 잃은 얼굴을 억이 막혀 보다가 포중대장에게 돌아섰다.
《저 포는 이 차에 달고 다른건 그대로 끌고가자. 포탄은 질수 있는껏 지고, 집행하오.》
최현이 벼락같이 호통을 치는바람에 참모장까지 포탄상자를 날랐다. 최현은 차에 포를 달고 포장까지 태웠다. 내리막길이라 차는 힘들지 않게 포를 끌었다. 산굽이를 돌자 앞이 확 트이며 넓은 논벌이 펼쳐졌다. 휘여든 장검같은 강이 논판을 가로질렀다.
강건너편에는 뾰족모자를 댕그렇게 놓은듯 한 산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자지러지게 총소리가 울렸다.
적탄은 시퍼런 벼모가 늠실거리는 논판에 비오듯 쏟아졌다. 누런 군복을 입은 병사들의 산병선이 논판에 엎뎌있었다.
《헛참!》
최현은 기가 막힌듯 혀를 차며 번뜩이는 눈길로 참모장의 옆모습을 쏴보다가 《세우라!》 하고 소리쳤다. 차가 삑-하고 급정거함과 동시에 30메터앞 길바닥에 우박치듯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운전수가 다급히 후진시키려 하자 최현은 태연한 어조로 《일없어.》 하며 락탄점을 살피다가 《저게 최대사거리야!》 하고 긴장해있는 사람들에게 웃음어린 얼굴을 보였다. 숲에서 중성 두알을 단 군관이 뛰쳐나왔다. 최현은 4련대장이라고 소개하는 참모장의 말을 들으며 차에서 내려 마주 다가갔다. 련대장이 미처 보고도 하기전에 그는 매우 못마땅한 기색으로 논판을 손저어 가리키며 크게 물었다.
《왜 저기 엎드려있소?》
《공격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게 되여있습니다.》
《적의 사격속에 있어야만 공격준비요? 당장 이 계선까지 철수시키시오.》
《알겠습니다.》
련대장이 기세좋게 대답하고 돌아서려 할 때 최현이 재차 명령했다.
《그리고 이제 45미리포사격을 신호로 봉의산에 대고 일제사격을 해야겠소.》
《…》
련대장은 의아한 빛이였다. 최현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정찰하자는것이요.》
《아, 알겠습니다.》
련대장은 선망어린 기대에 찬 눈길로 최현이를 일별하고 활기에 넘쳐 내달려갔다. 최현은 고개마루로 내려오는 45미리포들을 지켜보다가 길옆에 나가넘어진 뽀뿌라나무에 가앉았다. 담배까지 꺼내 무는것을 본 참모장이 불안스럽게 속삭였다.
《음페부로 갑시다. 포사격이 있을수 있습니다.》
최현은 어딘가 야유어린 눈길로 돌아보다가 참모장의 진중한 얼굴에 멎자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놈들의 포는 저 다리에 사격제원을 잡아놓고있소. 그러니 마음놓소. 이제부터 예 앉아서 구경이나 하기요.》
45미리 포병들이 포를 끌고 내달려왔다. 사단장이 직접 본다는데서 사기가 오른 그들은 숫기좋은 말처럼 진창을 마구 튕기며 내달았다. 최현은 포병중대장에게 포의 전개위치를 찍어주었다.
《목표는 봉의산정점!》
최현은 《포 전투준비 끝!》이라는 보고가 울리자 담배대를 집어던지고 포병중대장에게 싱긋이 웃으며 귀속말하듯 말했다.
《쏴보오!》
네문의 포는 거의 동시에 발사했다. 예리한 금속성이 대기를 찢으며 울릴 때 온 벌판이 일떠설듯 수천발의 총탄이 봉의산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봉의산은 그대로 활화산이 불을 뽑듯 으르릉거렸다. 수백개의 목화송이같은것이 피여오르며 다리부근과 논판에 불기둥을 일으켰다. 포탄과 탄약의 소나기, 쿵쾅거리는 폭음과 아츠러운 저격무기의 총성으로 온 공간이 차넘쳤다. 최현은 한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바늘꽂힐 자리도 없을만큼 총총한 봉의산의 화력망을 살피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일어났다.
《다음 명령을 주십시오.》
련대장이 다시 나타났을 때 최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뚝뚝히 말했다.
《전사들을 좀 만나보기요.》
최현은 솔밭가운데서 얼른거리는 어깨며 팔에 붕대를 동인 사람들을 띠여보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풀숲을 질러오르는사이에 그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최현은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련대장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은 뭐요?》
《부상병들입니다.》
《그런데 왜 바퀴처럼 숨는거야?》
《후송될가봐 그럽니다.》
《후송될가봐?》
《네, 춘천을 먹는걸 보기전에는 떠나지 않겠답니다. 장군님의 방송연설을 듣고 다들 버팁니다. 떠나지 않으면 처벌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냅니다.》
최현은 눈섭을 찌프린채 부상병들이 사라져버린 곳을 점도록 바라보다가 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이지경이 되다니.》
이 순간 그의 눈매는 더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참모장동무!》
그는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며 말했다.
《전방군의소를 이 현장에 옮겨오게 하시오. 가능한한 저 동무들의 소원대로… 둬두시오.》
숲을 꿰질러가던 최현은 숟가락이 밥통에 부딪치는 달가닥소리를 듣고 귀기울이다가 돌각담옆에 일여덟명의 군인들이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것을 보았다. 한사람은 군관복차림인데 견장이 없었다. 그는 세운 무르팍우에 밥통을 올려놓고 내키지 않는 숟가락질을 하고있었다. 다른 전사들은 이따금 그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밥을 먹고있었다. 최현이 그리로 다가가자 전사들이 놀라며 일어났으나 구령칠념은 않고 견장없는 군관을 흘끔흘끔 살폈다. 누군가 《대대장동지!》 하고 속삭여서야 고개를 들린 그는 슬며시 일어서며 각광을 단 하사관에게 눈짓했다.
그 하사관이 《차렷!》 하고 구령을 쳤다.
《쉬엿하오.》
최현은 전사들이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눈치를 슬슬 보는것을 감촉하고 견장없는 군관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서른이 되였을가 말가한 기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시원히 뽑혀지고 코마루가 우뚝한것이 록록치 않은 인상이나 최현의 눈길앞에서 죄진 사람처럼 외면하였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였다. 최현은 기억을 더듬느라 눈귀를 쪼프렸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았다.
《동문 직무가 뭐요?》
《없습니다.》
군관은 용단을 내린듯 얼굴을 쳐들었다. 될대로 되라 하는 자포자기와 일종의 반항심이 서린 담찬 눈길이 최현의 불만스런 눈에 도전하듯 마주왔다.
최현은 또한번 (어디서 봤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련대장을 돌아보았다. 련대장은 진흙에 범벅이 된 장화코만 내려다보다가 최현이 《이 사람은 뭐요?》 하고 불쾌하게 물었을 때야 알아차리고 얼른 입을 열었다.
《2대대장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다리돌파명령을 접수하지 않은것으로 하여 위청사단장동지한테서 철직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에 불복해-?》
최현은 노염어린 눈길로 견장없는 군관을 쏴보았다. 련대장에게 눈길을 옮길 때 그 얼굴은 더욱 험상궂게 이지러졌다.
《왜 이런 사람을 둬두오?》
이제라도 총살형을 내릴듯 한 격분에 련대장은 황급히 변호하듯 말했다.
《따져놓고보면 명령불복종은 아닙니다. 위청사단장동지가 실패로 끝나는 정면돌격을 세번째로 이 대대에 떨구자 이 동문 몇사람만 가겠다고 대대를 전멸에 처하게 할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위청사단장은… 권총을 빼들다가…견장만 떼버렸습니다.》
《사실이야?》
최현은 《철직》된 대대장을 바라보았다.
《사실입니다.》
《전투시 명령불복종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지 알아?》
《압니다.》
《어떻게 동무같은 사람이 우리 군대의 군관이 될수 있어.》
《전 무익한 희생은 참을수 없었습니다. 제가 총살당한다해도 전… 그 명령을 집행할수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거였어?》
《묘안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적의 집중사격구역으로 마구 나가는… 자멸행위는 찬성할수 없었습니다.》
《내가 나가란다면…?》
《철직》대대장은 낯이 대리석처럼 하얗게 질렸다. 볼편근육이 부르르 떨었다.
《같은 방식이면 전… 전사로는 나가도 명령하는 지휘관으로는 나갈수 없습니다.》
최현의 눈에 호감어린 빛이 스친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엄해진때문이기도 하였다.
《못나간다?! 그렇게는 안될걸. 난 최현이야.》
《알고있습니다.》
《어떻게 알아?》
《전 사단장동지가 2소분소에 계실 때 소대장이였습니다.》
《으-음.》
최현은 비웃듯 눈을 쪼프렸다. 그제야 기억에 떠올랐다.
보안간부훈련소를 한창 꾸리기 시작한 첫해 겨울이였다.
병실이 모자라 령하 20도를 오르내리는속에서 집을 짓지 않으면 안되였다. 작두로 짚을 썰고 그 짚을 진흙에 섞어이겨 벽을 발랐다. 세면장물이 떵떵 얼어붙는 그날 병실작업장을 돌아보던 최현은 코등에 진흙덩이를 빚어붙이고 어리광대흉내를 내면서 맨발로 진흙을 이기는 이 군관을 인상깊이 보아두었던것이다. 이 군관의 소대가 병실꾸리는 작업에서 1등을 한것이 기억된다. 그후 최현은 인차 거기를 떴으므로 이 사람에 대해서 더 알 기회는 없었다.
최현은 이 회상과 더불어 《철직》대대장에 대한 호감이 더 커지는것을 어쩌지 못하여 이마살을 찌프리고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동무넨 명령에 불복한 상관을 어떻게 생각하오?》
최현의 목소리는 높았으나 위험천만한 사태를 예고하던 추상같은 기운은 사라졌다. 아까 《차렷!》 구령을 쳤던 하사관이 얼굴이 빨갛게 질리여 한걸음 나섰다.
《장령동지, 말씀드릴만 합니까?》
《말하오.》
《사실 우리 대대장동진 대대를 위해… 그랬습니다. 철직…을 맞고도 이쪽 강으로 도하할 방도를 찾아 강을 건너갔다 왔습니다. 우리 대대장동진.》
《대대만을 위하는 대대장은 필요없소. 동무들은 장군님 방송연설을 들었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흰 당원들로 습격조를 꾸려 적의 화점들을 칠가 합니다.》
《누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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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누구의 발기요?》
《대대장동지가.》
《그-래?!》
최현이 두눈을 간잔지런히 쪼프릴 때 애된 전사가 불쑥 소리쳤다,
《장령동지, 우리 대대장동진 강건너 고지까지 가서 화점 하나를 까고왔습니다. 대대장동진.》
《그만하오.》
최현은 가슴이 억해 《철직》대대장을 돌아보았다. 대대장은 고개를 떨군채 울고있었다. 눈물도 소리도 없었으나 그가 전사들의 마음에 감격해 울고있는것만은 명백했다.
《다들 앉소.》
최현은 마른 잔디에 주저앉았다. 담배 한대를 붙여물고 《철직》대대장에게도 권했다. 대대장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가치를 뽑아서 옆의 전사가 켜주는 성냥불에 붙여물었다. 첫모금에 연기에 개키여 기침을 기었다. 그통에 얼굴이 시뻘겋게 되고 이마전에 혈관이 살아올랐으나 고집스럽게 연거퍼 담배를 빨아댔다.
최현은 파랗게 감겨오르는 담배연기를 즐기듯 바라보다가 곁눈질로 《철직》대대장을 흘깃 보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름이 뭐요?》
《박로수입니다.》
《박로수?》
최현은 놀라 되뇌이며 실눈을 짓고 대대장을 다시 뜯어보았다.
(허참 별일이라구야, 이 친구가 오중흡의 조카딸과 눈이 맞다니… 그래, 남자답게 생기긴 했어.)
최현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오영혜를 알아?》
《네-?》
이제껏 당황하지 않던 대대장은 눈을 한껏 치뜨며 어리둥절해 최현을 보았다.
《오영혜를 몰라? 내각에 있는-》
《압니다.》
《가까워?》
박로수는 고개를 수그렸다. 솥뚜껑같은 그의 커다란 손이 조약돌을 턱없이 주무르고있다. 최현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무같은 사람이 어떻게 오영혜와 가까울수 있어. 오영혜가 어떤 처년지 알아? 그의 아버지, 삼촌들이 어떤 혁명가였는지… 오영혜가 눈이 멀었어.》
《사단장동지.》
박로수가 펄쩍 일어났다. 주먹이 꽉 부르쥐여지고 눈에 달이 뜬듯 이글거렸다.
《절 모욕하지 마십시오. 저도 그분들처럼 싸울 각오를 다진 사람입니다.》
최현은 담배불을 비여끄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영혜의 편지가 내한테 있어. 동무한테 보내는 편지말이야. 그러나 안줄테야. 동무같은 사람과 오영혜는 가까울수 없어. 자격이 없단말이야. 자격이.》
그 말에 박로수는 머리를 푹 떨구었다.
최현은 담배를 휙 집어던지고 전투가방에서 지도를 꺼낸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판다른 부드러우면서도 심중한 어조로 말했다.
《내옆에 앉소. 이걸 보오.》
최현은 엄지손가락으로 지도의 한점을 짚었다. 박로수는 의아스럽게 최현의 얼굴을 보고는 지도에 시선을 박았다.
《여기까지 몇시간이면 갈수 있어?》
《두시간이면…》
《좋아, 그런데는 적들 모르게 간다는 여기에 방점이 있어. 거기서 이 홈타기로 빠져 봉의산을 에돈다. 이 에도는 시간을 한시간으로 주겠어. 합계가 얼마야.》
《세시간입니다.》
《옳아, 거기서 동무가 신호탄을 날리고 배후를 칠 때가 사단의 공격시간이야. 무슨 말인지 알만해?》
최현이 처음으로 싱긋이 웃으며 박로수를 보았다. 《철직》대대장의 얼굴은 비씻긴 뒤의 달처럼 환해졌다.
《알겠습니다. 사단장동지, 우회기습입니다.》
그의 굵진 목소리는 감격으로 하여 노래부르는것처럼 들렸다.
《두개 중대를 주겠소. 선별권한은 동무에게 주지. 그리고 사단정찰에서 한개 소대를 배속시키지. 어때?》
《알았습니다.》
박로수가 차렷하고 거수경례를 할 때 그 눈에 콩알같은 눈물방울이 슴새여올랐다. 최현은 그 눈길을 피하여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편지는 봉의산에 가서 주겠어. 보충적으로 줄 명령은 손끝 하나 상해도 안된다는거야. 동무도, 대원들도.》
《알았습니다. 사단장동지,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는 동무의 이 전사들께 주라구.》
30분후 최현이 탄 차는 진흙탕을 흙비처럼 뿌리며 2층벽돌집마당에 이르렀다. 차안에서 참모장에게 지휘부비상소집을 명령한 그는 련락병을 시켜 포병부사단장을 찾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젊은 포병부사단장이 달려왔을 때 최현은 승용차기관실우에 지도를 펼쳐놓고 전반적인 포들을 전방계선에 진출시킬데 대한 지시를 주고 색연필로 점을 찍어가며 주요배치지점들을 정해주었다.
《…모든 포들은 봉의산정면을 때리게 돼야 하오.》
《박격포도 말입니까?》
《그렇소. 모든 포요. 한시간내로 이동을 끝내고 사격준비를 끝내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반포대대의 45미리 네문을 내가 소양강 기슭에 배치했소. 동무와 합의없이 해서 안됐소.》
최현은 지휘부성원들이 다 정렬한것을 보고 포병부사단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문 먼저 움직이시오.》
최현은 사단참모장이 대렬경례를 하려는것을 못하게 하고 군사부사단장으로부터 후방부 취사병까지의 대렬 전체를 무려 5분동안이나 말없이 살펴보다가 취임인사치고는 너무나 짧은 지시를 주었다.
《인사는 춘천을 해방하고 합시다. 이제부터 사단지휘부는 춘천이 내려다보이는 삼각고지로 합니다. 한시간안으로 지휘부 이동과 전개를 끝내야 하겠습니다. 군사부사단장동무가 조직하시오.》
최현은 참모장을 데리고 위청장령의 방으로 갔다. 위청은 문가에서 그를 맞았다.
《안녕하오. 늦어서 안됐소.》
최현이 먼저 인사를 했다. 위청은 입술을 가늘게 떨었을뿐 말은 못하고 습관적으로 거수경례만 하였다.
하얗게 피기잃은 얼굴에서 칼자리가 퍼런빛을 띠였다. 그는 인계문건이 가득 쌓인 책상앞에 다가가 절도있게 돌아서 엄숙한 눈길로 최현이를 보았다.
《문건은 참모장동무에게 넘기시오.》
최현은 눈길을 내리깐채 조용히 말했다.
《이건 어떻게 할가요?》
위청은 까만 에나멜도색을 한 네모난 함을 가리켰다.
《무엇이요?》
《부호자, 지남침, 쌍안경… 그러루한것들이요.》
《거야 동무것이 아니요?》
《나한테 이런것들이 더 필요하겠는지?》
《동문 무슨 소릴 하오?》
최현의 눈빛이 사납게 번쩍였다. 위청은 그를 외면한채 전화선을 거두고있는 통신병을 보다가 정색하여 물었다.
《최현동문… 자신있소?》
《자신?!… 그래 동문 자신이 없이 싸웠소?》
《모르겠소. 자신은 있은것 같은데.》
최현은 불시에 그가 측은해졌다.
《위청동무, 평소에 우리가 <장군님 전법>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나한텐 그게 승리의 비결이고 자신이요.》
《알겠소. 나도 좀 깨달아지는것이 있소…》
《부탁할것이 있소.》
최현은 뚝뚝하게 말을 잘랐다. 위청은 눈을 치뜨며 의아히 물었다.
《무슨 부탁이요?》
《동무가 철직시킨 대대장이 생각되시오?》
《누구?》
《6련대 2대대장 박로수-》
《네?! 내가… 그때… 아, 알겠소.》
위청은 수치심에 낯이 벌겋게 되며 피씩 웃었으나 그것은 자기모멸에 가까운 침울한 웃음이였다. 최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동무의 철직명령을 취소해주시오.》
《아, 그거야… 이젠 내 권한밖이 아니요. 최현동무 결심대로…》
《그럼 동의한것으로 믿겠소. 잘 가시오.》
《다른 인계는?》
《필요없소.》
달리는 차우에서 최현은 지도를 펼쳐놓고 누구도 알아보기 힘든 부호를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이따금 서울쪽으로 뻗은 화살표를 보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최현은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것이 매우 어렵다는것을 알았기때문이였다. 남이 저질러놓은 잘못이지만 이제부터 그 모든 손실은 자기가 메꿔야 하는것이다.
최현장령이 소양강 기슭으로 다시 가고있을 때 아군의 주타격사단들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로 육박하고있었다. 의정부전방 수키로일대는 적아 량측이 쏘아대는 무시무시한 포화속에 자욱한 초연의 바다로 되여있었다.
…송기덕이 속한 중대는 의정부정면 5㎞지점의 야산앞 논벌에 산개하여있었다.
《이보게, 암만해도… 저기 화점들이 다는 없어질것 같지 않아… 저 바위짬들을 잘 보라구.》
온 얼굴에 흙탕이 뒤여 탈바가지를 쓴듯 우습게 보이는 중대장 최만덕이 고지쪽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는 송기덕에게 틈만 있으면 가르치는것이다.
기덕은 쓴입을 다시였다. 어제밤에야 중대를 따라잡은 그는 자기가 전투에 《풋내기》가 되였다는것으로 심사가 비틀려있었다. 불시에 고막이 쩡-하고 저려들었다. 고지정점을 때리던 포사격이 멎은것이다.
《시작될것 같습니다.》
기덕은 그의 끈덕진 《연설》을 피하고싶어 이 말을 하며 자동총 안전장치를 소리나게 벗겼다.
고지우에 타래치던 연기가 바람에 이리저리 밀리며 거밋거밋한 바위며 새파란 관목과 소나무들을 드러냈다. 검붉게 패인 포탄구뎅이들과 전호의 륜곽이 알렸다.
이 논벌로 접근할 때만도 총탄의 소나기를 퍼부어대던 그 참호들이 조용하였다. 기덕은 한시바삐 내닫고싶은 충동에 온몸에 힘줄이 푸들푸들 뛰였다,
《진정하게… 아직 좀, 여유가 있어.》
중대장은 안절부절 못하는 기덕의 잔등에 손을 얹었다. 대대군관들속에서 팔방미인으로 통하는 중대장은 기덕의 곱지 않은 눈길을 보고는 약간 섭섭한 기색이였다가 웃어보였다.
《잔소리로 듣지 말게… 동문 내 1대리인이 아닌가. 만약 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동무가 중대를 지휘해야 해. 덤비다간 중대가 망하네…》
이 소리에 기덕은 역시 속에서 돌덩이같은것이 치밀어올랐으나 진정어린 중대장의 눈빛이 그것을 눌러버렸다.
《참… 처한테 편지는 썼나?》
《네-에?》
기덕은 너무나 왕청같은 소리에 눈이 째지게 치떠보았다.
엊저녁 중대를 따라잡았을 때 중대장은 첫마디에 처에 대한 문제부터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나자 그저께 복심이 문제로 련대장에게 불리워갔다왔을 때만도 《조혼》해독성을 두고 장단을 맞췄던 그가 붉으락푸르락해서 기덕을 나무랐다.
《동문 사람이 아니라 돌덩이야. 나무토막이야. 사죄편지를 당장 쓰던가 하지 않으면 문화부에 제기해 문제를 봐야겠어.》 하고 을러메기까지 했다. 기덕은 그의 말이 별로 싫지 않았고 얼마간 감동돼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반승낙을 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써도 사죄는 어떻게 하며 또 뭐라고 빈단말인가.
《안썼군. 동문, 안되겠어.》
《전투가 끝난 다음 쓰지요.》
기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꼭 그러게… 우리 전투를 하는 사람은 무슨 후회가 없게끔 뒤가 깨끗해야 돼.》
의정부하늘로부터 새들의 한떼가 날아왔다. 화살처럼 내리비치는 해살과 포연에 검붉게 핀 구름밑을 나는 그 새들을 유심히 보던 중대장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우리쪽으로 와. 새들도 제 살데를 안다니.》
《포사격이 시가쪽으로 접근했습니다.》
《1소대장, 만약 경우 이 전투가방을 넘겨받으면 그안에 집에 보내는 편지가 있네. 부탁해.》
《아, 원 새빠진 소리.》
기덕은 속이 좋지 않았다.
《이제 공격이 시작되면 나는 2, 3소대와 함께 정면으로 달릴테니 동무넨 저 우측 홈타기로 에돌라구.》
기덕은 중대장의 의도를 알아맞쳤다. 적의 화력이 강할것을 타산하고 정면공격과 함께 우회포초하여 고지를 점령하려는것이였다.
기덕은 홈타기까지 에돌 거리를 타산해보았다. 적의 사계에서 상당히 떨어진 위치였다. 거기까지 가는 사이면 적의 모든 화력은 중대의 기본 전투서렬에 미칠것이다.
《중대장동무, 우리 소대가 정면을 맡겠습니다.》
《아니, 동무네 소댄 달리기에서 1등이기에 멀리 에돌게 한거야.》
《중대장동무! 그렇게 얼릴내기를 하지 맙시다.》
《이제부턴 명령이야.》
중대장은 아예 그의 말을 더 듣지 않을 잡도리인듯 딱 잡아떼고 기덕의 손목을 꼭 잡았다놓았다. 그때 대대의 공격나팔소리가 울렸다. 논판에 머리를 박고있던 모든 전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약간 창백한 표정들이였다.
《동무들!》
중대장이 상체를 일으켰다. 파릿한 입술이 떨었다.
《조국을 위하여! 장군님을 위하여!…》
중대장은 권총을 추켜들며 일어섰다.
기덕은 중대장의 목소리가 이처럼 크고 우렁찬줄은 처음으로 알았다. 《조국》과 《장군님》이라는 그 단어는 끝없이 신비하고 장중한 노래처럼 안겨들며 거센 추진력으로 온몸을 훌 띄웠다.
《장군님을 위하여 앞으로!》
죽은듯 하던 고지에서 미친듯 불꽃이 번쩍이고 륙공포탄이 날아왔으나 굳센 결심과 각오로 굳어진 전사들은 타는 눈을 번쩍이며 무섭게 내달았다. 발목이 푹푹 빠져드는 홈타기로부터 산비탈로 오른 기덕은 브로닝경기를 휘두르는 놈을 자동총으로 갈겨치우고 교통호로 뛰여들었다. 측면으로 기여든 기덕이네의 불의의 돌격에 적들은 급급히 흉장을 뛰여올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흉장우에 뛰여올라 또 한번 중대장쪽을 보았다. 공화국기를 든 기수의 앞장에서 중대장이 뭐라 웨치며 계속 내닫고있었다.
고지꼭대기에 올라 창격전을 벌리면서부터는 좌우앞뒤를 돌아볼 사이가 없었다. 얼씬하고 푸른 군복이 나타난다던가 총창이 번뜩일 때면 날쌔게 몸을 피하며 총탁을 휘둘러야 했다.
보안간부훈련소시절부터 창격전에서 이름을 떨친 기덕은 앞뒤 좌우로 번개같이 날며 총탁으로 구두발로 놈들의 머리통을, 사타구니를 치고 까고 하였다.
낯이 벽돌장처럼 질린 1분대장은 총은 어데다 뒀는지 맨손으로 구척같은 키다리의 목을 잡고 연신 머리받기를 들이대고있었다.
키다리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미구에 혀까지 빼물었으나 석동근은 계속 머리받기를 들이대고있었다. 중대장 련락병인 꼬맹이 정금룡은 보병삽을 비껴든채 총창을 꼬나든 두명의 적을 맞받아 부살처럼 날아들었다. 기덕은 그중의 한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놈이 내지르는 총창을 총신끝으로 쳐버리고 총탁으로 면상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정금룡이 맡은 적을 향해 돌아서니 꼬맹이 정금룡이가 무슨 억척장사가 되였는지 그놈을 타고앉아 보병삽으로 돌판을 까내듯 계속 조겨대고있었다.
《금룡아, 그놈은 죽었다.》
《이… 이… 놈이 중대장을 죽였어요. 중대장을!》
고개를 돌린 금룡의 눈에 피눈물이 맺혀 번쩍였다.
《뭐라구?!》
기덕은 아연하여 소리쳤다. 그때야 그는 금룡의 어깨에 중대장의 전투가방이 메워있음을 보았다.
《중대장동진… 이걸 소대장동지에게 주라고 하고는…》
금룡은 더 말을 못잇고 전투가방을 넘겨주고는 적을 향해 산아래로 내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아-》
기덕은 자기도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그를 앞서 비호같이 내달았다.
《모조리 죽여라.》
중대장이 전사했다는 웨침이 사방에서 호곡처럼 터져나오며 대원들을 무서운 복수전으로 떠밀었다.
기덕은 이때 제1제대서렬에서 자기 중대가 제일 앞섰기때문에 응당 대대지휘부와의 련계를 취한 상태에서 움직여야 한다는것을 알았댔으나 그대로 공격에로 이끌었다.
《모조리 죽여라!》
시내방어를 맡고있던 적들은 단 한개중대가 악악 소리치며 달려드는것을 처음엔 자기편으로 생각하였다. 알았을 때는 늦었다.
길목을 차단한 바리케트는 수류탄벼락에 순식간에 부서지고 살아남은 적들은 미처 격발기를 여닫을새없이 총창과 총탁에 쓰러졌다. 아군땅크공격을 막으려 배치한 이 무반동포중대를 일격에 족쳐버린 기덕이네는 세거리 모퉁이에서 기관총의 집중사격에 들었다. 모든 집과 전주대, 지어 돼지우리에서까지 적탄이 날아왔다. 건물의 바람벽과 도랑창에 의거하여 응전해나서자 적들은 륙공포를 쏘아댔다.
이럴 때 한쪽 골목에서 땅크가 불쑥 나타났다. 뽀얀 연기속을 헤치며 달려오는 땅크를 본 기덕은 유일하게 아꼈던 반땅크수류탄을 뽑아들었다.
《2소대장, 부탁한다!》
땅크를 향해 달려가던 기덕은 일순간 자기가 잘못될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무서움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중대장과 함께 복심이의 얼굴이 망막에 희끗 스쳤다가 사라졌을뿐이였다.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덕이를 맞받아 달려오던 땅크가 멈춰서더니 기관총사격을 비쏟듯 퍼붓던 적들의 2층 석조건물을 단방에 부셔버렸다. 뒤이어 기덕이네 중대를 향해 달려들던 맞은편 도로의 적공격 서렬가운데에 포사격을 가했다.
《아군땅크다!》
전사들은 모자를 벗어저으며 땅크에 달려갔다. 땅크 포탑문이 열리며 탄염에 절은 거뭇한 얼굴이 불쑥 솟구쳤다.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는 기덕이를 보며 그는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동무넨 어데요?》
《54사 18련대입니다.》
기덕은 대답하다 말고 굳어졌다. 땅크에서 묻는 군인은 종합련습때 몇번 본일이 있는 류경수장령이였던것이다.
《장령동지!》
기덕은 거수경례를 하였다,
《여보, 우린 동무때문에 간이 떨어질번 했소.》
수류탄을 든채 달려든것을 념두에 둔 말이였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만… 몰랐습니다.》
《창격전을 했소?》
《네.》
《그럴수 있소. 그런데 지휘관이 그러면 어쩌오?》
《…우리 중대장동무랑… 전사들이… 희생되였습니다.》
기덕이 우울해 하는 말에 장령은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록 강심을 먹어야 돼. 원쑤를 다 없애기전에… 심장이 터져나가면 어떻게 하오.》
두개의 땅크가 더 들어오자 류경수장령은 진로를 시가중심으로 돌렸다.
이때는 의정부시가가 삼면포위속에 들어있었다. 의정부계선방어에 투입된 적의 병력은 괴뢰 2보사를 중심으로 7보사, 3보사의 총 8개 련대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53보사의 일부와 54보사, 905땅크려단으로써 정면과 측면을 쳐 공격하였다.
포천에서 출발한 53보사는 905땅크려단과 함께 두개 종대를 편성하여 의정부 동북쪽 약 8키로지점에 요새화된 축성령을 정면공격과 우회공격으로 점령하고 의정부를 측방과 배후로부터 압축하여나갔고 덕정리일대에서 저항하는 7보사의 방어진을 무찌른 54보사는 의정부를 정면과 우측 측면으로 압축하여 포위하였다.
송기덕중대의 의정부시가진입과 동시에 의정부시가 좌측으로 돌파해 들어온 류경수장령의 척후 땅크들은 시가를 중심으로 꿰뚫어나갔다. 이로 하여 적의 진중에서 무서운 혼란이 일어날 때 아군 보병련대들이 시가에 들어서 최종 소멸전을 벌리였다.
이 전투는 전쟁개시후 적아 량측이 가장 주도세밀히 짜고든 대표적인 전투였다. 의정부는 괴뢰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이였기때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전투가 서울해방의 관건적고리를 해결하는 열쇠로 될뿐만아니라 나아가서 현대전을 처음으로 치러보는 전방지휘소 장령들과 부대지휘관들에게 련합부대들의 전투조직과 지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범을 보여줘야 한다는데서도 그 의의를 크게 부여하시고 전투조직의 세부까지 친히 작성하고 지휘하셨다.
전쟁에서는 그 어떤 전투던 수많이 첨가되는 이런저런 특수성과 우연으로 하여 완전한 의미에서 계획대로 되는 일이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 의정부전투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무결히 째이고 성공된 전투로써 작전으로부터 매 전투원들의 정신도덕적상태까지 하나의 완벽된 경지에서 치러진 싸움이였다. 두개의 보병사단과 한개의 땅크려단으로 3개사단이 방어하는 지역을 포위공격하여 해방한것이다.
창호지를 비쳐 들어오는 마지막 볕이 방안을 불그레하게 만들었다. 전화기 한대만 남기고 모든 사품을 들어내여 휑뎅그렁하면서도 한결 넓어진 방안에서 최용건은 뚜벅뚜벅 거닐다가는 이따금 창가에 멈춰서서는 성수나 뛰여다니는 군인들을 내다보았다.
전방지휘소가 의정부로 이동하게 된것이다. 최용건은 54사 18련대의 한개 중대와 땅크들이 의정부시가에 진입했다는 류경수장령의 무선보고를 받은 즉시로 이 결심을 채택한것이다.
경비중대는 한개 분대만 남고 비상소집을 하여 배낭을 둘러메였고 통신실에서도 무선기 한대만 남기고 모두 짐을 쌌다. 작전대와 서류함, 침구와 화식기재따위들을 실은 자동차들이 발동을 걸고 부르릉거렸다.
《완전히 명절기분입니다.》
의정부출발을 위해 완전전투복차림으로 어깨띠를 두르고 권총까지 찬 강건이 기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명절이요.》
최용건은 부관이 떠온 바가지의 샘물을 마시며 말했다. 그는 벌써 세번째로 그 물을 찾았다. 흥분때문인지 몹시 갈증을 느꼈던것이다. 그는 물방울이 뚝뚝 돋은 바가지를 들고 잠시 내려다 보다가 웃음어린 눈길을 쳐들었다.
《쪽바가지 빌려차고… 라고 하던 노래구절이 생각나오. 조국잃고 방황하던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노래였소. 그런 민족의 아들들이… 지금 어떻게 싸우고있소?》
최용건은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하다가 그 물을 마저 다 마셔버렸다.
《결국-》
그는 바가지를 부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 새로운 인민들이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이 엄청난 기적을 가져오는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이것을 생각하고있소.》
《52사만 지체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벌써 서울을 해방할수 있었을것입니다.》
강건의 말에 최용건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이로 하여 두사람의 작별은 서먹하게 되였다.
《언제 출발하겠습니까?》
악수를 나눈 강건이 근심스럽게 최용건을 보았다.
《최현의 대답을 듣고 떠나겠소.》
최용건은 최현사단과 동부진출부대들과의 련계때문에 전방지휘소 출발을 늦추고 강건의 일행을 먼저 보내게 된것이다.
대동아전쟁이 막판에 기울어지고 온 나라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걷어들일무렵 서울장안에는 《만냥갑부》를 선전하며 다니는 광산청부업자들이 드문히 나타나 뜨내기인부들을 끌어가군 하였다.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모래치기장에서 푼돈벌이를 하던 운학이도 몇몇 고학생들과 함께 화천 연광산에 와서 한달동안 밀차를 민적이 있었다. 그 반연으로 그는 화천, 춘천 지대를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소요산전투장에 한번 나가본 뒤부터는 아예 지도앞에 붙박혀 점령지대나 그려넣는 《사도공》으로 되고만 림운학은 보위상 부관의 춘천행을 알자 두번다시 없을 이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최용건의 부관은 그곳지대를 손금보듯 한다는 그의 말에는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으나 동행으로 떠나는데는 선선히 동의했다.
그런데 림운학은 최현사단에 올 때까지만도 연광산에서의 인부생활이 자기의 소망을 이루게 될 조건으로 될줄은 몰랐다.
최현의 사단지휘부는 소양강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제방뚝밑에 있었다. 낮사이에 끊임없는 피로전, 화력전으로 적을 들볶은 사단은 밤이 되자 일체 사격을 중지하고있었다. 맞은편 봉의산의 적들도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이따금 탐조등의 시퍼런 불줄기가 강물을 이리저리 빗질하였고 예광탄이 길게 꼬리를 끌며 날았다.
소양교우에는 조명탄이 매여달려있었다. 허연 바가지같은 조명탄이 백광을 뿜다가 꺼져내릴라치면 펑! 하는 소리와 함개 또 다른 조명탄이 떠올라 소양교를 환히 비치였다. 소양교는 온종일 퍼붓는 적의 포사격에 삐야와 골조만이 남아있을뿐이였다. 꼬이고 비틀어진 철근들이 갈비뼈처럼 앙상히 드러나보였다.
최현은 장마통에 떠내려왔을 퍼런 린광이 번뜩이는 버드나무통에 앉아있었다. 류마치스의 동통때문에 자주 다리의 무릎관절을 윽죄여 비틀군 했으나 봉의산쪽에서는 한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발치에는 전화기가 놓여있고 댓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신호총수가 옹크리고앉아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전방지휘소에서 보위상 부관이 도착했다는 말에 최현은 용무만 물었을뿐 만날념을 하지 않았다.
전투전의 엄숙한 정적이 무겁게 깃든 어둠속에서 림운학이와 보위상 부관이 한식경을 기다려있을 때 봉의산 정점에서 붉은 신호탄 세발이 날아올랐다. (이것은 봉의산 배후로 들어간 박로수의 기습대의 전투개시신호였다.) 그러자 최현의 옆에 섰던 신호총수가 재빨리 두발의 흰 신호탄을 쏴올렸다.
아름다운 불꽃처럼 련이어 오르는 그 신호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의 심연속으로 떨어져내릴 때 수천개의 총과 포에서 발사되는 탄환이 날아갔다.
밤은 삽시에 깨여져버렸다. 누기찬 어둠이 꽉 엉켜붙은 공간이 총성과 함성으로 터져나갔다. 봉의산 기슭에 미리 도하하여 접근해있던 한개 련대가 돌격에 일떠서는것까지 지켜본 최현이 보위상 부관을 불렀다.
《수고했소.》
최현은 보위상 부관과 림운학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운학은 《군관 림운학!》 하며 경례를 했으나 너무 긴장한탓도 있겠지만 폭음속에 묻혀 그의 말은 가냘피 울렸고 최현 역시 못알아들었다. 보위상 부관이 참모장에게 이미 말한 보위상의 희망과 물음을 성급히 되풀이할 때 묵묵히 듣기만 하던 최현은 한 군관이 달려오자 용무는 끝났다는 식으로 손을 내밀었다.
《알겠소. 가서 보고하오. 래일 아침전으로 춘천에 들어가겠소. 그리고…》
최현은 부관의 손을 잡은채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마디마디 씹어뱉듯 말했다.
《명령대로, 계획대로 하겠소. 잘 가오.》
그리고는 자기앞에 와선 온몸이 물에 젖은 군관에게 돌아섰다.
《무슨 일이요?》
《자동포가 넘어가자면… 현재의 기자재로는 어림없습니다.》
《이제 그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는가!》
최현은 다급스레 소리를 쳤다.
《다리파괴가 예상보다…》
《뽄똔(중도하창)을 뜯소. 그걸로 련결시켜보오.》
《그걸 생각해봤는데 철관이 없는 상태에선 그걸 다리에 펴놔도 하중에 견뎌 못낼것 같습니다.》
공병과장인듯한 군관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레루면 안됩니까?》
이때까지 최현의 동작 하나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을 바쳐가며 말할 기회를 노리던 림운학은 전투와 관련된 실무적인 문제인것으로 용단을 내려 한걸음 내짚으며 말했다.
《여보, 레루가 어디 있소?》
공병군관은 운학의 팔목을 대뜸 틀어잡고 씨근거리며 단김을 뿜었다.
《30리밖에… 연광산이 있습니다.》
《정말이요?》
《정말입니다.》
《야.》
공병군관은 림운학의 팔목을 힘껏 흔들고는 사단장의 결론을 기다리듯 그의 앞에 차렷하고 섰다.
《그래, 광산이 있지.》
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림운학을 유심히 봤다. 림운학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단장동지, 안녕하십니까. 총참모부 군관 림운학입니다.》
최현은 손에 든 전지로 림운학을 얼핏 비추고는 낮게 한숨을 지었다.
《이렇게 만나는구나.》
《사단장동지, 제가 레루를 구해보겠습니다.》
운학은 다시 없을 이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지금 뭘 하나?》
《…그저 이럭저럭 다닙니다.》
《그럼 안되지.》
자기 말을 나무라는지, 아니면 말그대로를 믿고 책망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보위상 부관이 좋지 않게 생각할수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운학은 다시금 간곡히 말했다.
《사단장동지,… 저에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최현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보위상 부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강건참모장에게 가서 말하오. 사단전투행동의 필요로 이 동물 떨군다고… 수속절차는 서울에 가서 밟기로 하기요. 필요하면 그때 돌려보낸다고 하오.》
이렇게 되여 림운학은 사단장의 직속부관격으로 떨어지게 되였다. 그가 두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아미산광산에 가서 레루를 실어왔을 때는 이미 봉의산을 점령한 사단이 2제대까지 도하를 개시할 때였다. 자동포와 포차들이 도로를 꽉 메워 레루를 실은 자동차가 빠져나갈수 없게 되자 두사람이 하나씩 레루를 메고 달렸다. 다리복구는 새벽녘이 되여 끝났다. 지칠대로 지친 운학이가 지휘부천막을 찾아가니 회의중이였다. 보초는 그 어방에도 접근할수 없게 하였다. 운학은 최현이 밤에 앉았던 구새먹은 나무통에 앉아 레루를 뜯어낼 때 덤벼치면서 찢겨진 바지를 기웠다.
운학은 언젠가 한 항일투사로부터 최현장령은 옷차림이 지저분한것에는 아예 질색이라고 한 이야기를 상기했던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전투구분대의 지휘관으로 갈수 있는 《공작》을 성사시킬것인가를 생각하였다. 봉의산너머 춘천쪽에서는 연신 화광이 뻗쳐올랐고 둔중한 포소리와 함께 저격무기의 세찬 사격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운학은 마지막 바늘뜸을 하고나서 실을 끊다가 발치에 잘게 끊어진 풀잎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것을 보았다. 문득 처음 이리로 왔을 때 고목등걸처럼 앉아 봉의산쪽을 지켜보던 최현의 모습이 살아올랐다.
아바이가 꽤나 속을 썩였구나 하는 생각이 덜미를 쳤다.
풀잎을 매만지던 그는 천막쪽에서 수선거리는 인기척과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다.
최현이 여러명의 군관들과 함께 나오다가 운학이를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 동문 내가 서울까지 책임지고 데려가려는 사람이요.》
최현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운학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운학은 얼굴이 화끈해서 고개를 수그렸다. 자름자름 뜯어널린 풀잎들을 보자 눈언저리가 시큰거렸다. 최현이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싸우고 애쓰는듯만싶었다.
최현은 방금 비상한 결심을 선포하고 나온 뒤끝이였다. 위청의 실패로 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아직껏 별로 은을 내지 못하였다. 봉의산전투만 해도 그랬다. 최현의 예견보다 곱절의 시간을 끈 전투였다. 적들은 봉의산정면전방의 강과 다리, 개활지와 도로를 온종일 포사격으로 누벼댔다. 괴뢰 6사와 8사의 린접점을 꿰뚫고 들어가던 박로수의 우회기습대도 증강된 적의 방어에 부딪쳐 더 멀리 우회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공격주력 역시 정면도하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부득불 소양강을 멀리 하류쪽으로 에돌지 않을수 없었다. 치렬한 화력전으로 적의 시선을 끌면서 한개 련대를 은밀히 우회시켜 강을 도하하여 봉의산기슭에 접근시키는데 한겻한밤이 흘렀다.
참모장이나 작전군관들은 이런 주도세밀한 전투조직에 쾌재를 올렸으나 최현은 조금도 만족할수 없었다.
그에게는 《27일까지!》라는 절대적인 명령기일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위청의 전투실패로 하여 지나가버린 작전날자로 되고말았으나 김일성동지께서 일단 계획하셨던 날자라는것으로 의연히 그에게는 지상의 명령시간으로 굳어져있었다.
그런데 27일까지 서울측방에 도착한다는것은 현재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밤새 봉의산을 마주하고 박로수대대의 진출신호를 기다리면서 최현은 이 27일을 생각하였다.
직선거리로 볼 때 서울은 자동차로 두시간 거리였다. 그러나 봉의산전투식으로 나간다면 열흘이 걸릴지 스무날이 걸릴지 한정없는 거리였다. 하여 최현은 두개 련대로 괴뢰 6사를 압박하면서 한개 련대로는 일행천리전술로 서울동남지구에 진출할 기상천외의 결심을 내렸다. 보병련대를 사단의 포차와 운수차에 분승시켜 기계화보병으로 변신시킨 후 자동포를 앞세워 적구 깊숙이 쳐들어가자는것이였다. 적의 역포위에 걸려들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최현은 코웃음을 쳤다.
《포위에 드는것은 우리가 아니라 적이요. 53사는 벌써 의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그따위놈들이 무슨 담보가 있어 역포위를 시도해.》
이렇게 되여 사단장의 결심은 정식 명령으로 채택된것이다.
춘천의 적을 포위압축한 련대들이 마지막 시가전을 벌릴 때 최현이 직접 이끄는 그 서울포위련대가 출발하였다.
매 차의 운전칸에는 춘천-가평-서울 일대를 알고있는 군인들이 탔다. 차들의 지붕마다에는 경기관총과 고루노바중기가 설치되였다. 맨 선두에는 기병정찰소대가 그다음 자동포가 섰다. 일체 정지상태에서의 전투는 불허되였다.
운학은 도하창을 실은 차에 탔다. 차가 출발할 때 그는 몹시 가슴을 울렁거렸다. 상상도 못한 어마어마한 싸움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거센 흥분이 그를 진정할수 없게 만든것이다.
순조롭게만 된다면 몇시간안에 그는 서울의 삼각산이며 북악산을 볼것이라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