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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푸른산악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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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420회 작성일 20-04-28 22:04

본문

01.jpg

9

 

 

골짜기는 조용하였다.

여기저기 널린 집들의 강대통굴뚝들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여올랐다.

철규는 전쟁전에 옆채를 크게 늘구어 들썩히 커보이는 자기 집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는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였다.

(다들 무사한가 보구나.)

그는 포판우에 비끄러 맨 건빵꾸레미를 만져보고 험한 산길을 오는 도중에 잃어버릴가봐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군공메달과 국기훈장 3급을 꺼내여 앞가슴에 정히 달았다.

그리고는 소의 뒤덜미를 가볍게 쓸어만지고 코투레의 고삐를 바싹 끄당겨잡았다. 겨울나이용 화목을 끌어내리던 가파로운 비탈길에 들어서자 소는 고개를 외로 꼬며 앞다리를 뻗쳤다. 철규는 입술을 사려물며 자작나무회초리를 휘둘렀다.

《이랴!》

채찍이 날아들자 소는 움찔하며 발을 내짚었다.

두 눈을 잔뜩 부릅뜬것이 채찍질에 노한듯 하다.

철규는 지금까지 채찍질이란 거의 하지 않았거니와 이와 같은 길은 피했다. 산길에 익숙되지 못한 소여서 자칫 잘못하면 발을 접지르거나 넘어질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이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설사 발목을 접지른다 해도 집의 소로 바꾸면 그만인것이다.

한초가 새로왔다. 집을 보게 되니 그 마음이 더욱 급해진것이다.

철규는 양덕고개밑의 포집결소에서 하루를 지체했다.

도로경무관들한테 걸려들어 그 포집결소라는 곳에 가니 해당 지시가 있을 때가지 눌러있으라는것이였다. 포의 조준선상태도 검열하고 목적지까지의 도로상태도 알아본 다음 승인여부가 결정된다는것이였다.

기가 막힌 일이였다. 하는수없이 그곳에 나온 전선사령부의 중좌까지 만났다.

철규로부터 자초지종의 설명(물론 특수임무와 관련된 비밀만은 제외하고)을 듣고난 중좌는 그한테만은 특수취급을 할테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자기 결심만으로는 할수 없으니 해당 상급에 문의한다는것이였다.

그런데 그 《잠시》와 《문의》가 밤이 깊어질 때까지 끌었다.

기다리다 못해 자정도 지나 반토굴안의 새초더미우에 벌렁 나가 누웠을 때 비상소집을 알리는 따발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철규는 그 어떤 특공대의 침입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 비슷한 처지에서 누워있던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달려나갔다.

거기서 그는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웨치는 최현군단장의 노성을 듣게 되였다.

그앞에서는 전선사령부의 중좌가 사시나무떨듯 하고있었다.

《…넌 도대체 어떤 녀석이냐. 포를 내가지 않는건 반동이란 말이다. 반동!》

얼굴의 비물을 훔치며 하는 최현의 말에 중좌는 꿈쩍 소리도 못냈다.

좀 있어 중좌가 뛰여다니고 포차들이 부르렁거렸으며 활기찬 전사들의 목소리가 골바닥을 꽉 메웠다.

철규는 평소엔 만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최현군단장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최현은 풍친 승용차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있었는데 그때까지 분기를 누르지 못하고 례의 그 중좌를 닦아세우고있었다. 철규가 반가운 나머지 《군단장동지!》하고 그간 사연을 더듬으며 울먹거리자 최현은 《꼴 좋다.》 하고는 이제 당장 떠나라고 호령을 했다. 그리고는 소잔등에 포를 싣는 일까지 거들어주며 도착한 즉시 자기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했다.

알고보니 중좌도 《반동》은 아니였다. 그는 최현에게 《군단장동지, 저도 여기 있는것이 징역살이 맞잡이였습니다.》하며 기뻐하는 기색이였고 철규가 떠날 때는 도중식사에 보탬하라고 건빵꾸레미까지 안겨주었다.…

《용타, 용타. 그렇지.》

골바닥까지 무사히 내려온 철규는 땀내가 물씬 풍기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소잔등에 내배인 땀도 닦아주었다. 그런데 발구길에 들어설 때까지 마을은 기척없이 조용하였다. 외간사람과 소가 나타났으면 산짐승사냥에 이골이 난 마을개들이 분주스럽게 《영접곡》을 불어대며 달려들겠는데 개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흠. 복더위때문이겠지.)

동리집들에서도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중낮의 무더위를 피해 다들 한숨 쉬는것 같았다.

철규는 상상해보던것과는 너무나 달리 호젓한 바람에 어지간히 서운했다. 집문앞에 이르니 추녀밑에 매달린 빨간 고추꿰미가 물밀듯 한 기쁨을 몰아왔다.

《으험.》

그는 가볍게 기침을 깇고 지나가던 길손인양 점잖게 물었다.

《주인님 계십니까?》

노루발손잡이가 달린 중문이 뻐글써 열리며 구레나릇이 귀밑에까지 드리운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엉?》

아버지의 두눈이 흡뜨듯 커지는것을 본 철규는 지금까지 오며 머리속에 꾸몄던 《연극》대본을 집어치우고 날듯이 토방으로 뛰여올랐다.

《아버지!》

《어-엉?》

아버지는 또다시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멍하니 보다가 화닥닥 문을 열어제끼며 맞받아 달려나왔다. 아버지는 잠뱅이바람에 우에는 실오래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이게 철규 아니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그래 잘 있었다. 으흠.》

아버지는 철규를 와락 끌어안을듯 하다가 그의 가슴팍에 단 훈장과 어깨의 별을 보더니 처져내린 잠뱅이를 황급히 추어올려 끈을 고쳐매며 엄한 소리로 《여보!》하고 찾았다.

부엌쪽에서 뭔가 쟁그랑하고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을뿐 더는 기척이 없었다.

《제길- 저건 뭘하고있나.》

성미 급한 아버지는 부엌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순간 철규는 엎질러 깨여진 가시물버치앞에서 오그린 가슴을 두손으로 붙안고 앉아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풍만난 사람처럼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있었다.

《허, 에미가 네 소리에 기혼을 했구나.》

씽하고 부엌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동이의 물을 한바가지 떠서 철규가 미처 말릴사이없이 어머니의 머리에 좌라락 들부었다.

《어머니!》

철규가 어머니를 안아 부둥켜세우자 《철규야!》하며 어머니의 잔약한 팔이 울장대를 싸잡은 나팔꽃순처럼 철규의 목을 그러안았다.

《네가… 네가… 살아있었구나.》

《편지를 못받았습니까?》

《못 받긴, 그저 녀자란 저런 법이다.》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소리에 그제야 어머니는 기운을 회복한듯 도정신한 눈길로 철규의 얼굴을 삼키듯 보다가 《흑.》하는 흐느낌을 터치며 철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경련하듯 떠는 어머니의 어깨를 어루쓰다듬는 철규의 가슴도 젖어들며 목이 메여올랐다.

《젠장, 애가 점심도 못먹었겠는데 해종일 그러고있겠소.?》

또다시 윽박지르듯 하는 아버지의 말에 철규의 팔에서 풀려나온 어머니는 물기가 그렁한 눈에 애잔한 웃음을 보이며 섰다가 《에그, 정말, 이 정신봐라.》하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닭장쪽에서 꼬꼬댁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머니!》

철규가 닭잡이를 그만두게 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틀진 소리로 나무랐다.

《사내란 저런 일에 참견하는 법이 아니다.》

《오래 있을 시간이 없어 그래요. 한데 철옥이는 학교에 갔습니까?》

《학교는 웬걸, 지금 썩어 진 잠을 자고있단다.》

아버지가 안방과 이어진 문을 열어젖히자 방구석쪽에 먹다만 감자를 한손에 움켜쥔 동생이 정신없이 곯아떨어져있는것이 보였다. 그 아래쪽에는 아버지가 누웠던듯싶은 구겨진 담요와 베개가 보였다.

《저… 어데 몸이 편치 않은데가 있지 않습니까?》

철규는 전에 없던 일로 시퍼런 대낮에 담요까지 깔아놓은것이 미심쩍어 근심어린 눈길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앓기나 새나. 어제밤 도찬다리가 폭격맞은통에 죄다 글루 가서 밤을 밝혔다. 네 동생까지 따라 나섰다가 저렇게 곯아떨어졌구나.》

《그래서 마을이 조용했군요. 한데 철옥이야 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늦게 본 막냉이라 덮어놓고 감싸주는 아버지의 처사가 그릇된것 같아 한마디 하자 아버지는 자못 자랑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기 후방일에 통 캄캄이구나. 다리나 길이 끊어지면 학교선생과 애들까지 다 복구작업에 나간다. 한데 넌 어떻게 일루 왔냐.》

《어떻게는, 대포를 진 소가 와있수다.》

닭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들어오던 어머니가 한마디 하는 말에 밖을 내다본 아버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철규도 이제까지 소에 대해서는 전혀 잊은것을 생각하며 밖을 내다보니 소는 울밑 채마전에 심은 쑥갓이며 부루따위를 널름널름 훑어삼키고있었다.

《저런.》

철규가 박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아버지의 드센 손이 그를 막았다.

《그만 둬라.》

아버지는 흥미진진한 눈길로 소와 등에 진 포를 보다가 감탄한 소리로 혀를 찼다.

《허, 소가 대포를 지다니. 이건 난생 처음 보는 일이다. 그러니 넌 대포를 수송하는중이겠다?!》

《네, 근데 저건 대포가 아니라 박격포라고 합니다.》

《박격포건 뭐건 큰것이니 대포라 해도 무관하다. 한데 포를 소로 나른다는게 참 희한스러운 일이구나.》

《저건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아주신거구 길마대랑 장군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것입니다.》

《뭐라구… 장군님께서라구?!》

철규는 북받쳐오르는 긍지와 흥분을 누르기 어려웠다.

《네, 전 이번에 장군님을 뵈옵고 여기로 오는 길입니다.》

《아니, 네가… 그게 진짜 소리냐?》

《그렇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라구 감히 그런 일까지 거짓소릴 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이번 길에 아버지와 어머니도 만나 자신의 인사까지 전하라고 하시며 3년전 일루 오셨을 때 아버지를 만나셨던 일까지 회상하시였습니다. 그리구 이곳 동리사람들의 생활형편까지 걱정해주셨습니다.》

《가만.》

아버지의 구레나룻이 떨렸다.

《여보, 북이 어데 있소?》

어머니에게 호령하듯 물을 때 흡떠진 눈에서 빛줄기가 이는것 같았다. 아버지와 다름없이 입이 항 벌어져있던 어머니가 놀랜 소리를 쳤다.

《갑자기 북은 해서 뭣한다는거요?》

《이런 답답이라구. 다른 사람들도 들어야 할것이 아니야.》

《저 웃방 뒤주우에 있수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기 바쁘게 먼지발을 닦을새도 없이 안방을 거쳐 웃방으로 달려올라갔다. 그런중에도 철옥이의 궁둥이를 호되게 차 깨워일으키는것은 잊지 않았다.

철옥이가 《아구구.》 하고 두 눈을 비비며 일어설 때 벌써 아버지는 노루몰이사냥때 쓰던 북채를 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구, 저이가 미치지 않았나.》

잠뱅이바람의 벌거벗은 몸으로 달려나가는 아버지를 아연실색하여 보던 어머니는 철규의 손목을 꼭 잡고 장군님을 만나뵈온게 진짜 사실이냐고 은근히 묻는것이였다.

《네, 정말이구 말구요.》

철규는 두 눈을 비비던 동생이 올롱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것을 알고 급급히 장화를 벗기 시작하였다. 밖에서는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집집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대는 아버지의 굵진 고함소리가 울렸다.

《철옥아, 넌 뭘하고 있니. 형님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철규가 두번째 장화를 벗을 때 《형!》하는 다기찬 소리와 함께 말큰한 두 팔이 철규의 목을 휘감았다. 젖비린내 비슷한 따스한 입김이 그의 코언저리를 시큰하게 하였다. 잠시후 그의 집 안팎은 동리로인들로부터 까까중이들까지 모여 무슨 공회당처럼 붐비였다. 닭알꾸레미며 쌀되박을 들고 나타나는 녀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철규가 은연중 기다리는 미순이만은 보이지 않았다.

철규는 아쉬움을 누르지 못한채 최고사령관동지를 뵙고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물끓듯 하던 술렁임이 멎고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 들었다.

때로 아버지가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러니 산길을 오르내릴 때 소엉덩뼈를 찌르리라는것까지 알아보셨다는것이지.》

《네. 제가 만든 길마대는 곧은백이였거든요. 한데 장군님께선 그런것까지 미리 내다보시고 친히 마련하신…  량끝을 휘게 한 바로 저 포신옆에 붙은 물푸레대입니다.》

《여보게 적은이, 우리도 그런건 생각 못할테지.》

아버지가 곁사람의 옆구리를 찌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심한 소리를 내였다.

《우리 장군님께서야 천하사를 도통하신분이 아닙니까. 그 전번일루 오셨을 때도 하루갈이에서 두- 서너섬나는 조나 메밀따위에 붙어사는 우리들에게 다수확종곡인 강냉이나 감자를 주작으로 심게 하신것만 봐도 어떻습니까. 그통에… 우리가… 낟알을 더미로 쌓고…》

《그뿐이요. 우리한테 소금 귀한것을 아시고-》

《그 얘기는 후로 하고 철규소리를 마저 들읍시다.》

아버지의 말에 철규가 다시 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때 철규가 기다리던 미순이 소리없이 울안으로 들어섰다. 연미색저고리에 쪽빛치마를 받쳐 입고 알릴듯말듯 화장한것이 알렸다.

(저때문에 늦었구나.)

미순은 모여앉은 사람들과 (거개가 일나갈 때의 옷차림이였다.) 자기의 차림이 튀여나는것에 생각이 갔던지 쑥스럽게 눈길을 내리깔며 울장밑에 앉았다.

철규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두근두근한중에 불쑥 치받쳐오르는 환희와 열정의 분출을 느끼며 자기로서도 놀라울 정도의 멋진 열번을 토했다.

《저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우리의 위대한 최고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뵈옵고 그이의 신심넘친 말씀을 들으며 전쟁승리를 다시금 굳게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여러분, 태양이 있어 만물이 삶을 누리는것이고 태양빛이 있어 어둠이 물러가는 법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심으로써 미제침략자들과 15개 추종국가졸개들이 제 아무리 기를 쓰고 덤벼든다 해도 우리의 용감한 인민군대는 적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조국의 자유독립을 기어기 지켜내고 말것입니다.》

왁자그르 박수가 터져나왔다. 부엌칸에서 동자질을 하던 녀인들의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울려왔다.

《철옥이 엄마, 철규가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하우?!》

《군대에 가더니 영 딴 사람이 됐수다.》

《군관이 아니요. 하기야 원래부터 똑똑했지.》

철규는 얼굴이 달아오르는중에 미순이를 (미순이는 고개를 떨군채 상긋이 웃고있었다.)흘끔 보며 말을 이었다.

《뿐아니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곳에 오셨던 일을 말씀하시며 적후투쟁에서 이곳 인민들이 인민군대를 도와 잘 싸웠다고, 여러분들을 만나면 자신의 감사와 문안의 말씀을 꼭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은 여기서 또다시 끊어지게 되였다.

몇사람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는통에 모두가 두 팔을 쳐들고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웨쳤다. 지난 기간 민주선전실에서 가끔 있던 행사때보다 더 우렁찬 함성이였다. 철규의 아버지 김만산은 눈에 그득히 고인 눈물을 닦으며 철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속해라.》

《전… 인차 전선으로 가게 됩니다.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강도왜적을 쳐부시고 오늘날 적들이 그이의 성함만 들어도 벌벌 떠는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을 최고사령관으로 모시고 여러분과 같은 훌륭한 후방인민들의 지원의 손길이 있기에 언제 한번 락심하거나 흔들린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장군님께 <장군님, 전선에 있는 저의 소대의 이름으로 원쑤들을 꼭 타승하겠다는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대견한 웃음을 지으시며 자신께서는 바로 동무들과 인민을 믿으시기에 승리를 확신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철규야!》

아버지는 만사람이 지켜본다는것도 아랑곳않고 벌떡 일어나 그의 잔등을 그러안고 쇠메같은 손으로 뒤잔등을 들이쳤다.

《옳다. 옳은 말이다! 네가 잘 말씀 올렸다.》

또다시 박수가 터져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질려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져나온 철규는 어린 시절부터 정든 마을어른들의 모습을 둘러보다가 차렷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저는 끝으로 전체 동리어른들께서 장군님의 뜻을 높이 받들고 전쟁승리를 위한 식량증산에 모든 힘을 기울여달라는것을 부탁합니다. 저 역시 이 즉시로 전선에 나가 장군님의 믿음과 여러분들의 기대대로 잘 싸울것이라는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철규는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집안팎은 삽시에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부엌칸에 있던 어머니의 해쓱하게 질린 얼굴이 철규의 시선을 동여매였다.

《이 즉시라면 언제냐?》

아버지가 대통꼭지에 담배를 채우며 물었다.

《범바위골을 넘어야 하니만치 한시간으로는 떠나야 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갑자기 주름살이 늘어났다. 대통을 빠느라 훌쭉해 진 볼에는 여러겹의 주름살이 둥근테처럼 새겨졌고 수북한 눈섭아래의 눈이 침침히 흐려졌다.

《홰대를 켜들고 가면 밤에도 넘을수 있을텐데. 총도 있겠다…》

웃집의 《적은이》가 내비치는 말에 철규는 숙여지는 미순이의 얼굴에 눈주다가 얼른 대답했다.

《범바위골도 그렇지만 저는 계속 산길로 가야 하니만치 시간을 앞당길수록 좋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왔는데!》

《적은이》가 재차 하는 말에 아버지가 무뚝뚝한 소리로 퉁을 먹였다.

《군대가 일구이언하게 하면 쓰나. 전장에 갈 일이 급할텐데 그럼 차비를 해야겠다.》

아버지의 말에는 집사람들만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 비쳐졌고 철규 역시 그걸 바랐으나 누구 하나 일어설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누군가를 찾는듯 하다가 철규의 눈길이 자주 가던 미순이를 보며 천연한 태도로 말했다.

《저기 미순이만 왔는데 미순의 모친을 만나고 떠나도록 해야겠다. 미순의 모친두 전날밤 다리공사에 갔다가 그만 허리를 풀쳤다. 가서 병문안도 하고 인사도 하고 오렴. 》

《네.》

철규는 아버지의 처사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미순이와 철규의 사이가 남같지 않음을 아는 마을사람들은 여느 때 같으면 실없는 롱담 같은것을 몇마디 하겠지만 다들 정색한 얼굴들로 철규가 나갈 자리를 틔워주었다.

철규는 반쯤 돌아서있는 미순이의 날씬한 자태에 벌써부터 가슴이 널뛰듯 하였다. 화끈 단 얼굴로 장화를 꿰신던 그는 때마침 떠오른 생각으로 《바쁜 처지》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아버지, 우리 집 소가 산길을 잘 걷지요?》

《그야… 그랬지, 한데 건 왜 묻니?》

철규는 울밑의 남새를 죄 없애버린 소가 집안사람들의 동정을 멀뚱히 살피는것을 보며 말했다.

《저 소는 먹성에 비해선 힘을 쓰지 못합니다. 평지소여서인지 우리 고장 소보다 산길도 잘 타지 못하고… 그리고 예까지 오느라 여간만 기운을 빼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무슨 사설이 그리 기니, 한데 우리 집 소는 없다.

후퇴때 미국놈들이 잡아먹었다.》 대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소만 아니라 동리개들까지 죄다 쏴버린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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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랬군요.》

철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를 바꾸지 못하게 된것도 문제려니와 소가 없이 앞으로 집안농사를 어떻게 짓는단 말인가.

《저… 우리 집 소를 쓰면 안될가요?》

뜻밖의 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미순이의 눈길이 자기에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닿아있는것을 보았다.

울기차 거멓게 질렸던 아버지의 얼굴이 느슨히 풀렸다. 굵진 눈섭밑의 부엉이눈같이 감사납던 눈에 따스한 빛이 피여오른다.

《미순아 고맙다. 그럼 네 어머니하구 잘 의논해서 바꾸도록 하자.》

철규와 미순이가 울밖에 나섰을 때는 천을봉쪽에 자리잡았던 해가 한마장 서쪽으로 내려앉는 시각이였다.

《어머니가 몹시 다치셨소?》

《아니, 심하지 않아요. 며칠 침을 맞으면 나을것이라고 했어요.》

발기우리하게 타는 얼굴과 새별같은 눈에서는 고요한 기쁨이 사품치고있었다.

철규는 그러한 미순이를 보기가 괴로왔다.

(그 일을 알면… 아니, 안돼.)

한동안 침묵속에 걸었다.

어둑할 정도의 짙은 그늘에 휩싸인 골안엔 시내물소리만이 높다. 길길이 자란 산버들과 어릴적부터 보아온 둥근 집채같은 바위돌뒤에서는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는듯만 싶다.

《전선에서 몹시 힘들테지요?》

미순이가 기다리기에 지친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선》이라는 소리에 철규는 가슴이 흠칫한 속에 서둘러 대답했다.

《별로… 그저 그렇소. 참 동문 리민청사업을 보면서 자위대일까지 한다니… 몹시 바쁘겠구만. 농사도 그렇고.》

《저 역시 그저 그래요.》

미순의 눈에서 정겨운 웃음이 방긋 빛났다. 철규는 그의 눈에서 약간의 비양거림을 보았다. 마치나 《그렇게밖에 말 못해요.》하는 뜻같다. 그로 하여 철규는 더욱 마음 허둥이는 속에 《참》소리를 되풀이하며 다시 물었다.

《참, 동무네는 어떻게 소를 잃지 않았소?》

《전 유격대로 갈 때 소를 가지고 갔어요.》

《우리 아버지도 유격대에 갔댔다던데-》

《아버님은 소비조합상품을 가지러 갔다가 그만 놈들과 부닥치는 바람에… 그렇게 되였어요.》

《그렇군.》

《저… 오빠편지엔 동무와 한부대에 있다고 썼던데…》

《응, 한부대지. 근데 동문 미국놈을 죽여봤소?》

철규의 동문서답의 말에 미순은 의아한 눈길로 스쳐보고는 새침한 얼굴로 돌아갔다.

《총은 한방도 쏴보지 못했어요. 차례지지도 않았거니와 전 취사일을 보았으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철규는 몇번 돌에 걷어채이며 이마로 줄져내리는 땀을 닦았다.

(말해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원망할테지.)

철규는 미순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얼결에 따라멈춰섰다.

《다 왔어요.》

철규는 그제야 미순이네 집 울앞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의 말투도 말투거니와 얕잡아보는듯 한 눈길에 움찔했던 그는 삽짝문에 다가서는 미순의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잠간》

철규는 숨이 가빠 올랐다. 미순의 두 눈이 올롱해졌다가 얼굴이 삽시에 고추빛으로 물들었다.

《왜 그래요?》

《좀 할 말이 있소.》

《별난 말을 하려면 어머니앞에서 하세요.》

미순이의 눈에는 겁기가 흐리고 봉긋한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철규는 아연해졌다.

철규와 미순은 이미 소꿉놀이시절에 《약혼》한 사이로 되여있었다. 철규의 아버지와 미순의 아버지가 본인들의 장래의사여부는 아랑곳없이 노루피를 뒤섞은 술사발을 맞쪼으며 굳게 《약조》한것이였다.

철규와 미순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된것은 광복되기 한해전인 어느 봄날이였다.

그때 마을에서는 철규의 아버지와 미순의 어머니가 서로 《정분》이 났다고 구구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그럴만도 하였다. 인물도 고운데다가 미순이가 아홉살 잡히던 해에 남편을 잃은 미순의 어머니는 농사일로부터 집안의 크고작은 모든 일에서 철규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런면에서 철규아버지는 제 집일보다 미순이네 집일에 더 극성스러웠다고 할 정도였다.

씨붙임때나 가을걷이때면 미순이네 집에서 한잔 걸치고 나온 철규의 아버지 김만산이 거들지게 뽑는 《석탄 백탄 타는데…》 하는 노래가 온 산골안을 뒤흔들고 삽짝문짬으로 그의 거동을 지켜보는 아낙네들은 입술을 삐죽이군 하였다.

그날도 철규아버지는 미순이네 부대기밭을 해종일 뚜지고 집에는 늦게 들어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떠도는 소문에는 귀를 틀어막은듯 했던 안존한 어머니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철규를 밖으로 내쫓더니 아버지와 마주앉아 오래도록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규는 지레짐작으로 그 까닭을 어렴풋이 점쳐보며 문귀짬에 귀를 대고 오가는 말을 도적질해 들었으나 이따금 《음, 그래》 《그럴테지.》하는 아버지의 틀진 소리만은 알아들을수있었다. 그런데 불시에 《고현년들!》하는 쇠메치듯 하는 아버지의 노성과 함께 문짝이 콱 열리며 북과 북채를 든 아버지가 맨발바람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문짝에 부딪친 이마를 싸쥐고있는 철규는 아랑곳도 않고 사방을 두릿거리다가 눈 바투있는 마른 솔단을 보더니 부엌의 광솔불을 들고나와 그 솔단에 놓았다.

마른 솔에 솨- 하고 불길이 일자 철규 아버지는 흔들린 사람처럼 북을 울리며 《메톨이(메돼지)다! 메톨이다!》 하고 마을길을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였다.

그러자 겨릅등을 끈 집들에서까지 아이어른할것없이 뛰쳐나오고 저마끔 어데 있는가고 떠들썩했다. 창대와 몽둥이를 들고 나온 어른들과 불안어린 눈길로 여기저기를 휘살피는 녀인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된 철규의 아버지는 《우리 집이요. 우리 집에들 다 와주시오.》하고 누구도 되돌아설수 없게 위엄찬 소리로 말했다.

마을의 첫째가는 힘장사고 성미가 드세기로 소문난 아버지의 그런 위엄찬 말때문인지 호기심에서였는지 아이어른 할것없이 모두가 그의 집 울안에 모여들었을 때 김만산은 활활 타오르는 솔단불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였다.

《동리 어른들과 아주머님네들, 내가 오늘 여러 이웃들을 찾은것은 메톨이 아니라 메톨보다 더 무섭고 간활한 좀생같은 소리때문입니다. 지금 동리에서는 나와 미순이 모친과 어찌어찌한다고 말들이 있다는데… 그래… 이것을 좀 보시우다.》

김만산의 손에는 커다란 저고리가 기폭처럼 펼쳐졌다. 분명 흰 저고리였건만 등판과 소매자락은 거맸고 마구 찢겨져 너덜거리는 옷이였다.

《여러분네들, 여섯해전에 미순의 부친과 내가 범을 만났고 그 범때문에 미순의 부친이 돌아간것을 잘 알것입니다. 한데 여적까지 내가 채 말을 안했지만 미순의 부친이 잘못된것은 나때문이우다. 범바위골 매바위산에 가서 삼을 찾다 오는 길에 <따웅!> 소리를 들었지요. 내가 먼저 봤수다. 만약을 생각해 창대는 들고갔지만 너무나도 큰 범이라 나는 나무뒤에 숨기부터 하는데 그놈이 곧장 나한테 날아듭디다. 다 됐구나 하고 창대를 내뻗치는데 그놈의 창이 나무넌출에 걸렸수다. 그래 무슨 소리를 내질렀는데 한발 뒤섰던 미순이 부친이 나를 막았수다.

그때까지도 나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람과 호랭이가 하나로 엉켜 딩구는것을 보기만 했수다.

<여보게 만산이!>

나는 미순이 부친이 내지르는 이 소리를 듣고서야 기운을 모았수다. 창날루 호랭이의 대가리를 꿰질러 쓸어눕혔을 때는 미순이 부친이 마지막숨을 몰아쉬고있었수다.

그 형님은 마지막말루 집사람들을 부탁했구 나는 그 앞에 꿇어앉아 맹세했수다.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미순의 모친과 미순의 남매를 내가 맡아 돌보겠노라구… 그런데 무슨 입들이, 무슨 입심들이 그렇습니까?… 자 이걸 또 보시우다.》

철규의 아버지는 담배쌈지를 넣어두었던 돌찌주머니에서 참지 한장을 꺼내들었다.

《이건 내가 미순의 부친과 <약조>한 문서올시다. 우리 집 철규와 미순이를 부부로 맺자고 한 사주단자지요. 자 보시우다. 이 글은 철규의 사주고 이 벌건 자국은 나와 미순의 부친의 지장이우다.

그래 떠나간 사람의 마지막부탁을 실행하는것이… 그래 사돈지간이 된 사이에서 돕는것이 바람질이란 말이요? 엉, 말해보시우다. 말해보란 말이우다.》

철규는 아버지한테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았다. 무섭게 질린 검붉은 얼굴전체가 눈물로 번들거렸다. 마음 헤픈 녀인들은 여기저기서 쿨쩍거렸다.

이후부터 마을에서는 《정분》소리가 싹 없어졌다.

혹간 아이들속에서 《꼬마신랑》과 《꼬마신부》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이 나오면 미순의 오빠와 철규의 주먹에 된경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고 미순이 역시 아버지를 일찍 여윈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이 여간만 성미가 만만치 않아 그런 소리를 끄집어내는 처녀애들을 알기만 하면 눈물이 날 때까지 호되게 윽박지르군 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하여 철규와 미순의 사이에는 어성버성한 간격이 생기게 되였다.

그들은 만나도 서로 외면한채 지나쳤고 광복후 읍에 있는 성인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따로따로 걷군 하였다. 하지만 미순의 오빠가 보안간부훈련소에 가고 철규가 리민청사업을 맡게 되면서부터 그들사이의 외견상 간격은 훨씬 좁아졌다. 남들이 볼 때면 더없이 정답게 말을 주고 받기도 하고 우스개소리도 나누게 되였으며 읍이나 아래동네에 갈 때면 남들이 알아도 꺼릴바 없다는 태도로 나란히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으스름한 밤이나 호젓한 숲속을 단둘이 걸을 때면 그들은 다같이 벙어리가 되고말았다.

이로 하여 그들 두 사람은 다같이 안타까움을 느꼈으나 그뒤 철규가 농업전문학교에 가고 이따금 방학때나 오군 하는 이 《도회지학생》에게 골안 거의 모든 처녀들이 은근한 추파의 눈길을 던지게 되자 미순은 더더욱 왼골로 나갔다.

그를 만나도 쌀쌀히 인사나 하고 스쳐가는것이였다. 그때마다 철규는 이름할수 없는 실망과 모욕감속에 속을 앓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응당 그래야 한다고 해야 할지 전쟁이 일어 철규가 군대입대차로 집에 들렸을 때 미순의 태도가 일변하였다.

온 마을어른들이 다래술을 마실 때 미순은 시종 울안팎을 에돌았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온 철규를 보자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나 좀 만나요.…》하는 말로 철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들은 밤새도록 산골안을 헤매다가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서 마지막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그때도 특별한 말은 없었다. 잘 있소, 몸 무사해요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철규는 새처럼 할싹이는 처녀의 가쁜 숨결에 가슴 비틀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그의 손목을 더욱 꽉 틀어잡았다.

《미순이의 생각은 알겠소.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청을 드릴 자격이 없소.

난 동무와 집에 죄를 지었소. 우리 아버지처럼.》

《아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처녀의 살눈섭이 바르르 떨었다.

《어쩔수 없는 일이였소.》

철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눈앞에는 가슴치며 웨치던 련락병 리수복의 눈물진 모습이 방불히 살아올랐다.

포병정찰수로 입대하였던 철규가 6개월짜리 군관강습을 마치고 박격포소대장으로 임명되여 간곳은 운명의 묘한 인연에서였는지 미순의 오빠가 중대장으로 있는 보병대대였다. 단순한 동향관계만이 아닌 그들의 친교는 온 대대의 부러움을 자아내게 하였고 전장에서의 우정이 어떤 힘을 내는가를 잘 아는 지휘관들은 미순이네 오빠의 중대에 박격포지원이 필요할 때마다 철규네를 그리로 보내군 하였다. 미순이 오빠네중대가 대우산릉선의 돌출부에서 적의 두개 대대의 공격을 물리치는 싸움을 벌릴 때도 철규네는 그들의 뒤계선에서 지원사격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로 철규는 모든 박격포들을 뒤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되였다.

전투가 한창 치렬한 때라 철규로서는 떠날수 없었다. 하여 그는 적의 돌격이 좌절된 다음 떠나겠다고 했으나 재차 전해온 명령은 엄격하였다. 적의 포화력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무조건 철수하라는 명령이였다.

철규는 피눈물을 삼키며 거기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자기들의 철수로 하여 주밋거리며 달려들던 적의 산병선이 삽시에 미순이 오빠네의 중대참호를 휩쓸리라는것과 총탁과 총창에 의한 백열전이 벌어진 끝에 미순의 오빠가 희생되리라는것까지는 몰랐다. 그는 다음날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였다.

대대부로 왔던 리수복이 그를 찾아와 가렬처절한 전투와 미순이 오빠의 장렬한 최후를 말해줬던것이다. 그때는 철수과정에 덮쳐든 비행대의 폭격에 박격포전체를 잃어버린 철규네가 포의 철수명령을 기계적으로 집행한 지휘관들이 황영학련대장한테서 엄한 추궁을 받았음을 알고 가슴아픈 통탄속에 모지름쓰고있을 때였다.…

해는 여전히 한곳에 머물러있었고 그늘진 골안에서는 《꾸국》 《꾸국》 하는 뻐꾸기의 청승맞은 울음이 울려왔다.

《…일인즉 그렇게 되였으니… 모든것은… 내탓이라고 해도… 틀린 소리가 아니요.》

철규는 리수복이한테서 받았던 미순이 오빠의 시계를 팔목에서 풀어내렸다.

《이걸… 건사하오. 오빠거요.》

《네?!-》

미순은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는 전혀 낯선 사람을 보듯 철규를 멍청하니 보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는 미순의 어깨는 폭풍만난 잔솔마냥 파도쳤다.

철규는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다 숙성한 처녀의 몸을 껴안아 일으킬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을수도 없었다.

《미순동무, 난… 시간이… 없소.》

그의 나직한 말에 미순은 비칠하며 일어섰다.

모름지기 전쟁이 일이나 처음 입었을 연미색저고리의 붉은 옷고름으로 함초롬히 괴인 눈물을 닦은 미순은 손에 든 시계를 그냥 내밀고 선 철규를 소리없이 시계를 받아들었다.

순간 철규는 이상스러운 정도의 허전함을 느꼈다. 자기 몸의 살점 하나가 떨어져 나간것 같기도 하고 미순이와 이어진 줄 하나가 툭 끊어져나가는것만 같은감을 받았다.

미순은 손수건을 꺼내 시계를 꼬깃꼬깃 싸쥐고는 울먹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에겐… 오빠말을 하지 말아주세요.》

철규는 미순이네 집에 들어가 10분도 못되여 돌아나왔다.

그의 뒤잔등에는 땀이 축축히 내돋았다. 외양간에서 소를 끌어 내기도 어려웠거니와 그보다는 미순이의 지어낸 《연기》와 그 《연기》에 고스란히 속아넘어가는 미순의 어머니를 그냥 보고있기가 괴로왔기때문이였다.

오빠의 《소식》과 철규의 《위훈》을 마구 꾸며 말하던 미순은 철규의 손에 끌린 소가 《음메-》소리를 지르며 뒤돌아볼 때야 입을 다물고 어머니 모르게 눈물을 닦았다.

미순이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집 큰 사람이 소를 보면 무척 좋아할거네.》하면서 소잔등에 붙은 짚검불을 뜯어내며 삽짝문까지 따라나왔다.

집에 오니 마을의 좌상어른들은 그대로 눌러앉아있었다. 웃방에까지 비좁게 앉은 그들앞에는 나물무침과 계란이며 지짐따위들이 줄느런히 놓여있었다.

놀라운것은 아버지의 옷차림이였다.

이 무더운 복철에 흰 공단저고리에 쥐색비단조끼를 덧입고 있었던것이다.

《어서 올라와 앉게.》

여러 사람들의 손에 끌리고 밀치우며 아버지의 앞에 가앉자 아버지는 《너때문에 다들 목젖이 비틀리게 됐다.》고 껄껄 웃더니 물방울이 번지르르 맺힌 오지단지에서 말간 술을 표주박으로 가득히 펐다.

《자, 시작들 합세다.》

아버지는 매 사람앞에 놓인 사기술잔이며 놋보시기에 그 술을 붓기 시작하였다.

《제가 하지요.》

《아니, 넌 꼼짝 말고 있거라.》

모든 사람들에게 술을 붓고 난 아버지는 철규의 앞에 놓인 종지발에도 술을 부었다.

《아버지, 전 못합니다.》

《요것두 못하면 그게 무슨 사내냐. 넌 오늘 내 아들로가 아니라 군대대표로 받는거다.》

아버지는 종지발이 넘치게 술을 부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콱 찔렀다.

《아버지, 근데 이 술은 어디서 났습니까. 전시에는 술을 못 빚게 되였는데-》

《네 잔치술로 쓰자고 이태전에 땅에 묻었던거다.》

아버지는 술보시기를 들고 한동안 엄엄한 눈길로 철규를 보다가 약간 갈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네들, 난 이 술을 전쟁이 끝난 날 마시기루 했는데… 이렇게 앞당겼수다. 자, 전쟁승리를 위해 한모금씩들 합시다.》

철규는 맹물을 삼키듯 술을 마셨다.

《더 달라니?》

《네.》

《그래라. 이 김만산의 아들은 한동이 술쯤엔 끄떡도 말아야 된다.》

김만산은 말은 이렇게 했으나 두종발이째의 술을 비우고난 철규에게 다들 한잔씩 더 안기려 하자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손을 저었다.

《그건 후날로 미룹시다. 이앤 이제 전선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전선》이라는 소리는 잔치집으로 될번 한 분위기를 고즈넉한 정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때까지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소리없이 철규옆에 와앉아 떡짝을 쥐여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철규는 어머니의 손이 까맣게 타고 손톱이 무질러진것을 아프게 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찹쌀이 다 있습니까?》

《동리에서들 모아온거다.》

어머니 역시 속삭임조로 말했다. 모자간의 대화를 엿듣던 김만산이 철학가도 무색할 정도의 심각한 어투로 말을 뗐다.

《철규야, 여기 근심은 말아라. 후퇴때 놈들은 이 골안도 참빗질하듯 하며 먹을것, 쓸것 다 가져갔지만… 이렇게 살고있고 또 살아갈거다. 지금 동리에서는 누룩짝을 삶아 먹는다.》

만산은 벽에 걸린 시계를 언뜻 보더니 다시 심각한 얼굴로 돌아갔다.

《네가 이제 전선에 가면 알려주거라. 놈들은 후퇴때 후방가족과 당원가족들은 죄다 저 마석천모래판에 생매장을 했다. 그리구 13살난 아이가 소년단 분단장을 했다고 수류탄뢰관을 입에 물려놓고… 터쳐죽였다.》

밥상이 드르릉 했다. 철규아버지의 드센 손이 밥상을 쳤던것이다.

《이 원쑤를 잊어서는 안된다. 알겠냐?》

《네.》

《그리고 말이다.》

김만산은 눈을 뚝 부릅뜨고 철규를 마주 보다가 조끼를 바로 잡고 의젓한 자세를 취했다.

《날 자세히 보거라. 이 옷이 무슨 옷인지 알겠지?》

《거야 잘 알지요.》

철규는 빙긋 웃었다.

김만산의 눈섭이 이지러졌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걸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철규의 대답에 김만산은 고개를 몇번 끄덕이고는 훌쩍 일어나 웃방으로 올라갔다.

《왜서들 가만 있소. 실컷들 드시우다.》

김만산은 그 말을 하며 엉거주춤 꿇어앉아 입었던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그 비단옷은 48년 9월 이 골안에 오셨다가 떠나가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천으로 지은것이였다. 매 세대당 식구수에 맞춰 보내주신 그 천들은 이 고장사람들이 난생처음 만지게 된 비단들이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이 고장사람들에게 귀물처럼 되여있던 소금까지 보내주셨다. …

본래의 베돌찌와 베바지차림으로 아래방으로 내려선 만산은 수저들을 놓으려는 늙은이들에게 계속 자시라고 하고는 철옥이며 아이들이 몰켜서있는 마당구석으로 나갔다. 철규가 온 덕에 떡짝 하나씩을 든 아이들이 멍석우에 부려놓은 박격포를 놓고 재잘거리는것을 참새 쫓듯 몰아낸 만산은 미순이네 소를 끌어다 세우고 미리 준비한듯 싶은 덕석을 올려놓았다.

철규는 《한시간안으로》떠나겠다고 한 자기의 말에 1분도 드팀이 있을세라 서두는 아버지의 처사가 눈물이 날만치 고마왔다. 철규와 여러 사람이 손붙여 포판, 포가, 포신순서로 길마짐을 다 하고났을 때 김만산은 너도 나도 함께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떼여놓고 옆집 《적은이》와 길바램에 나섰다.

철규는 얼근이 취한 늙은이와 포옹에 포옹을 거듭한 끝에 음식꾸레미를 싸든 어머니와 2∼3분간 마주섰다가 소를 몰고 동구길로 빠져나가는 아버지를 다 쫓아갔다. 그의 출발시간을 기다렸던듯 집들마다에서 마을녀인들이 뛰쳐나와 포판우에 올려놓은 음식보따리에 뭔가 찔러넣기도 하고 잘 싸우라, 몸조심하라 떠들썩하는데 개중에는 어머니처럼 눈물이 글썽해 치마폭으로 얼굴을 감싸는 녀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날 때가지 미순이가 보이지 않는것이 철규의 마음을 흐리게 했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구나… 어머니한테 사실을 말하고 함께 붙안고 울고있을지도 몰라.)

어깨맥이 풀렸다.

《이쪽 길로 가겠지?》

먼발치에서 웨치는 아버지의 말에 철규는 소스라치듯 마음을 다 잡고 구보로 달렸다. 아버지는 철규의 뒤를 다쫓아오는 철옥에게 눈을 부라려 보이고는 떡갈, 솔, 참나무따위들이 빼곡한 재등을 묵연히 바라보고있었다.

그 재등까지는 알릴락말락 소로길이 나있었다. 해방전 이곳 사람들이 약초나 산짐승 같은것을 어물이나 소금과 바꾸러 안변쪽으로 드나들며 생겨난 길이다.

아버지가 미순이 아버지의 시신을 메고온것도 이 길이다.

해방후에는 군소비조합이 생겨난통에 이 길을 쓰지 않다싶이 되였다.

《아지미.》

철옥의 기쁨찬 소리에 고개를 돌린 철규는 길녘의 물황철나무뒤에 선 미순을 보게 되였다. 철규는 전선의 피가 심장으로 모여드는듯 한 숨가쁨을 느꼈다.

《어떻게?…》

철규는 말하고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물음인가.

《저…》

미순은 철옥이와 아버지쪽을 얼핏 보고는 가슴팍에 안고있던 흰 무명보꾸레미를 그에게 내밀었다.

철규는 받아야 될지 그만 둬야 할지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보고 있다는것을 알고 허세를 보였다.

《원 일없소. 먹을건 쉬고 남을 정도이니까.》

미순의 눈빛이 흐려지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어머니가 보내시는거예요.》

미순은 뭔가 더 말할듯 하다가 보꾸레미를 철옥에게 안기고 돌아서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철규는 《잘 가요.》라는 말은 분명 들은듯 했으나 그에 맞는 인사말은 못했다.

만산은 철옥이가 가지고 온 보꾸레미를 포판우에 비끄러매고는 풀기없는 철규의 얼굴을 마뜩지 않게 보며 한마디 내쏘았다.

《전문학교글까지 배웠다는게 고작 인사법이 그게 다냐?》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산군 접경인 저두봉기슭에까지 와서야 되돌아섰다.

《후방걱정은 조금도 말거라.》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인사말이였다.

새날이 휘연히 밝을 때 고산에 도착한 철규는 군단후방처의 대피소에 어둘녘까지 있다가 철령을 넘어가는 차에 포와 함께 올랐다. 소는 후방처 군관한테 넘겨주면서 혹시 기회가 있으면 미순이네 집에 보내게끔 주소까지 밝혀줬으나 후방처군관은 도저히 불가능할 일이라고 하면서 령수증을 해주는것으로 처리를 마쳤다.

철령을 넘을 때 야간폭격기에 걸려들번 했다. 비행사들이 소경이 돼버렸는지 기총소사 한번 당하지 않았고 금강교를 거쳐 직동령에 올랐을 때 원거리포탄 몇방이 날아왔으나 차도 사람도 전혀 상하지 않았다. 청송리에 있는 사단지휘부의 포병부사단장을 만나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포병부사단장은 그가 온 로정을 백지도에 그려 놓고 련대까지 가는 차편에 포를 싣게 하였다.

철규는 여기서 불암산계선에 있던 련대지휘부가 1211고지뒤 매봉골짜기에 옮겨왔다는것을 알았다. 전선의 이동과 련대지휘부에 도착했을 때 황영학련대장이 전선사령부 군사재판소에 불려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그의 마음은 자못 뒤숭숭하고 불안스러웠다. 그러나 대대에 와 그리운 전우들을 만나게 되자 그러한 시름겨운 생각은 한결 덜어졌다. 그가 가져온 《후방지원물자》를 놓고 떠들썩할 때 미순이가 준 보따리에서 시계와 편지쪽지가 나타났다.

그 편지쪽지를 먼저 발견한 2소대장이 온 중대가 다 듣게 독보를 했다.

《철규동무, 몸 무사히 잘 싸워주세요. 미순 어머니.》

짤막한 편지글에서 《미순 어머니》가 한바탕 웃음띤 론쟁을 불러일으켰다. 철규로서는 미순이와 어머니의 공동명의로 된 편지라고 생각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철규를 미순의 아버지로 규정해버렸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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