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통일운동의 큰별이 지다. 노길남 박사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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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대표이자 미주 통일운동의 큰별 노길남 박사님께서
평생 분단된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민족언론인으로 헌신한 노길남박사(민족통신대표)께서 지난 3월20일경 감기 몸살기운이있어 집에서 자가치료를 하다가 체온이 올라가고 호흡이곤란하여 그렌델지역 병원으로 옮겨 중환자실에 입원치료를 받던중 4월 25 일 오후 5시41분에 향년 76세로 운명했다.
고인 노길남박사는 1944년4월3일 강원도 강능에서 출생, 1971년, 연세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졸업, 재학시절 학생운동에참여 박정희군사정권반대투쟁, 학교영자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1973년 도미 텍사스주립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일보 미주지사기자, 코리안스트릿저널 편집장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남북화해와 협력을지원하며, 뿌리지 편집장, 라디오코리아 앵커등 언론분야에종사하다가 1980년 광주항쟁시기부터 미국 동포사회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1987년 민족문제연구 민족지도자 양성후원단체 한민족연구회를조직하고,
1999년 민족통신창간하여 남과북을 하나의 조국으로간주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편집방향으로 운영하는 자주언론의 대표겸 편집인으로 활동 ,
조국통일범민족연합결성에참여 재미본부위원, 6.15 해외측위원회발족에참여 미주위원회위원과, 2018년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회정치학 박사학위수여, 북부조국 75회방문 취재하며 북부조국바로알리기운동 전개등 민족언론인으로 민족민주운동과 분단된 조국통일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운명하기전, 마지막 노박사님과는 병원측에서 화상으로 연결해주어 가족과함께 병상에 ‘조용히 눈감고’ 있는 노박사님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해야만 했다. 눈물이 앞서 무슨말을 했는지…
‘그렇게 염원하시던 조국통일을 못보고 노박사님이 먼저가시여 가슴이 메어집니다. 해외 통일운동에 지도자며 큰기둥이었는데 미주통일운동에 큰손실입니다. 남아있는 우리들이 대를이어 가겠습니다. 민족통신은 후대들이 열심히 하고있으며 남은 가족도 걱정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노박사님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라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고 노길남박사의 삶은 , 오직 분단된 조국통일위해 본인의 직장 경제 가정까지 모두 뒤에두고 정의와 진실로 책임과 활동으로 실천한 지식인이다.
그토록 바라던 통일도 보지못하고 세상을 하직(영면)하고 말았다. 가슴을 친다.
해외 재미 통일운동 동포 양심언론 민족에 큰손실이며 앞으로 할일이 산적한데 누가 어떻게 감당할것인지…조국의자주 평화통일위해 한평생 추구한 그 고귀한 애국정신 민족통일운동사에 영원히 살아 빛날것이며 못다한 통일염원 우리몫이 되었다.
장례식은 따로하지않고 추모모임만 가족위주로 갖기로했다.
유족으로 고인의부인 노경숙 여사와 슬하에 두딸 진, 영 ,과 3 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
미국 서부시간으로 2020년 4월 25일 오후 5시 41분에 서거하였습니다.
노길남 박사님은 지난 1달여 동안 코로나 19 증세로 고생하시다 입원하여 치료중이었는데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하였습니다.
노 박사님은 지난 20년 동안 민족통신을 이끌어 오시면서 북부조국의 진실을 온 세상에 알리는 큰 일을 해오셨습니다.
노길남 박사님을 잃은 것은 미국과 해외 통일운동에 있어 너무도 큰 상실이며, 슬프고 아픈 일입니다.
노길남 박사님은 조국통일을 꿈꾸는 모든 남 북 해외의 동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며, 못다하신 통일운동을 이어가는 통일운동가들을 통하여 영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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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노길남박사(민족통신대표) 4월25일 운명
평생 분단된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민족언론인으로 헌신한 노길남박사(민족통신대표)께서 지난 3월20일경 감기 몸살기운이있어 집에서 자가치료를 하다가 증상이 악화되어 그렌델지역 병원으로 옮겨 입원치료를 받던중 4월25 일 오후 5 시 41분에 향년 76세로 운명했다. [민족통신 편집실] [로스엔젤레스= 민족통신 손세영/김백호 운영위원]
[부고] 노길남박사(민족통신대표) 4월25일 운명
생전의 노길남 박사
평생 분단된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민족언론인으로 헌신한 노길남박사(민족통신대표)께서 지난 3월20일경 감기 몸살기운이있어 집에서 자가치료를 하다가 체온이 올라가고 호흡이곤란하여 그렌델지역 병원으로 옮겨 중환자실에 입원치료를 받던중 4월 25 일 오후 5시41분에 향년 76세로 운명했다.
고인 노길남박사는 1944년4월3일 강원도 강능에서 출생, 1971년, 연세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졸업, 재학시절 학생운동에참여 박정희군사정권반대투쟁, 학교영자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1973년 도미 텍사스주립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일보 미주지사기자, 코리안스트릿저널 편집장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남북화해와 협력을지원하며, 뿌리지 편집장, 라디오코리아 앵커등 언론분야에종사하다가 1980년 광주항쟁시기부터 미국 동포사회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1987년 민족문제연구 민족지도자 양성후원단체 한민족연구회를조직하고,
1999년 민족통신창간하여 남과북을 하나의 조국으로간주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편집방향으로 운영하는 자주언론의 대표겸 편집인으로 활동 ,
조국통일범민족연합결성에참여 재미본부위원, 6.15 해외측위원회발족에참여 미주위원회위원과, 2018년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회정치학 박사학위수여, 북부조국 75회방문 취재하며 북부조국바로알리기운동 전개등 민족언론인으로 민족민주운동과 분단된 조국통일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운명하기전, 마지막 노박사님과는 병원측에서 화상으로 연결해주어 가족과함께 병상에 ‘조용히 눈감고’ 있는 노박사님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해야만 했다. 눈물이 앞서 무슨말을 했는지…
‘그렇게 염원하시던 조국통일을 못보고 노박사님이 먼저가시여 가슴이 메어집니다. 해외 통일운동에 지도자며 큰기둥이었는데 미주통일운동에 큰손실입니다. 남아있는 우리들이 대를이어 가겠습니다. 민족통신은 후대들이 열심히 하고있으며 남은 가족도 걱정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노박사님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라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고 노길남박사의 삶은 , 오직 분단된 조국통일위해 본인의 직장 경제 가정까지 모두 뒤에두고 정의와 진실로 책임과 활동으로 실천한 지식인이다.
그토록 바라던 통일도 보지못하고 세상을 하직(영면)하고 말았다. 가슴을 친다.
해외 재미 통일운동 동포 양심언론 민족에 큰손실이며 앞으로 할일이 산적한데 누가 어떻게 감당할것인지…조국의자주 평화통일위해 한평생 추구한 그 고귀한 애국정신 민족통일운동사에 영원히 살아 빛날것이며 못다한 통일염원 우리몫이 되었다.
장례식은 따로하지않고 추모모임만 가족위주로 갖기로했다.
유족으로 고인의부인 노경숙 여사와 슬하에 두딸 진, 영 ,과 3 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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