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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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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076회 작성일 20-07-2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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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12

 

순봉은 선반기밑에 뒤엉켜쌓인 쇠밥을 대충 걷어내고 뒤늦게야 작업반휴계실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하루 직심스레 선반기에 달라붙어 씨름질했더니 온몸이 녹작지근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처럼 하기 싫은 일을 했을 때의 괴로운 육체적피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일종의 긍지감과 자부심을 의식하게 하는 달콤한 피로였다.

그는 하얗게 빨아 다린 와이샤쯔를 입고 자주빛넥타이를 매였다.

대학에 간 형이 입던것이긴 하지만 새것이나 다름없는 곤색양복을 걸치고 휴계실 벽거울앞에 섰다.

별안간 그는 자기의 달라진 의젓한 외모앞에서 쑥스러움을 느끼고 돌아섰다.

망나니패거리생활을 끝장내고 새 출발을 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왼심 쓴 차림새였지만 그는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저 부자연스러울뿐이였다.

순봉은 한번도 면도칼을 대지 않아 제법 솜털이 거무스레 돋은 코밑을 매만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공장구내는 퇴근시간이 지나 로동자들의 왕래가 한가로왔다. 그는 일부러 늦장을 부렸다.

공장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새벽출근을 했고 퇴근은 마지막에 하려는것이였다.

수일전에 맥주집에서 벌어진 패싸움소식을 알고있는 공장사람들이 당사자인 그를 만나면 시까스르거나 궁금증을 풀려고 접어드는것이 질색이였다.

순봉은 마치도 변장을 하고 사람들을 피해다니는것 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짚었다.

작업반휴계실 출입문을 나서서 고개를 짓수굿하고 걷다가 현장복도가 끝나는 어방에서 공구쇠가방을 든 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아버지는 고장난 기계수리를 끝낸 모양인지 손과 옷섶에 기름때가 묻어있었다.

《집에 가냐?》

아들에 대한 단속과 불신임, 경계심을 품은 퉁명스런 물음이였지만 대견스러움과 다정함이 여느때없이 진하게 깔려있었다.

의젓하게 차려입은 아들과 함께 퇴근했으면 하는 아버지된 심정까지도 섬세하게 알아차린 순봉이였지만 시뚝스레 대답했다.

《집에 가지 않으문 어데 가겠어요.》

낡은 군대혁띠로 얻어맞은 아픔과 짚신을 신고 걸은 수치감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채혁은 아들의 부르튼 심사는 개의치 않고 따져물었다.

《공장진료소엔 갔댔니?》

《갔… 댔어요.》

순봉은 팔목을 매만지며 거짓말을 했다. 아침에 아버지는 순봉이더러 진료소 외과의사한테 가서 팔목에 새긴 입묵을 지우라고 엄하게 일렀다.

그러나 순봉은 패거리의 상징표식인 《쇠망치》입묵을 진료소사람들한테 내보일수 없었다. 게다가 의사들이 수술칼로 입묵주위의 피부를 두껍게 도려내는것은 질색이였다. 그래 순봉은 강질이 좋은 쇠톱을 끊어 만든 칼을 날이 선들하게 갈아서 슬그머니 입묵을 긁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도 아파서 신음소리를 냈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쑥 나왔다.

칼질한 팔목에 피만 랑자했다. 그는 황급히 헝겊으로 팔목을 처매고는 단념하고말았다.

《첫째형님》이 로동교양소에 가고 쇠망치패거리가 풍지박산이 났는데 입묵따위가 무슨 상관이람. 다시 그런 패에 들지 않음 될게 아닌가.

아들의 말을 곧대로 믿은 채혁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지웠단말이지.… 몹시 아팠지?》

《상처가 오래 갈것 같애요.》

《그럴테지.》

채혁은 만족해서 머리를 끄덕이고 아들과 헤여졌다.

순봉은 수리작업반실쪽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가는 아버지를 불안스레 힐끔 뒤돌아보고는 도망치듯 현장철문을 날래게 빠져나왔다.

공장구내길에서 그와 풋낯이나 아는 완성직장의 쩝쩔한 친구가 얼떠름해서 그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반가이 소리쳤다.

《여 순봉이! 양복차림하구 어딜 가?》

《왜 그래?》

순봉은 반발심을 누르고 마지 못해 멈춰섰다.

《로동교양소 갔다더니?》

《혀때기 함부로 놀리겠어?》

순봉은 창범이 본을 따서 단숨에 잡아먹을듯이 도끼눈을 부라렸다.

《헛소문인가?…》

친구는 엉겁결에 물러나며 얼버무렸다.

순봉은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제풀에 성나서 친구를 내팽개치고 씨엉씨엉 걸었다.

공장정문을 나서는데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인 접수원령감이 도수안경을 코허리에 걸치고 그를 내다보았다.

《순봉이가 마침 나오는구나. 저기 웬 처녀가 아까부터 널 기다린다.》

누르끼레 황이 지는 방울나무밑에 서있던 낯선 처녀가 약간 수집은 미소를 짓고 순봉이한테로 다가왔다.

들국화꽃무늬가 박힌 댕기샤쯔밑에 연보라빛의 통주름치마를 받쳐입은 몸매가 보기 좋은 처녀였다. 퍼진 치마자락이 처녀가 손에 쥔 기타의 음향통을 사르락사르락 슬치였다. 찔레꽃향기라고 꼭 찍어 말하기 어려운 상긋한 체취가 처녀에게서 풍겼다.

순봉은 차림새와 거동이 세련되여보이는 처녀의 미모에 쏠리는 눈길을 잠시 아래로 떨구었다. 오동나무의 원색무늬를 살려 만든 이렇듯 좋은 기타를 처녀가 들고있다는것이 아쉽고 부러웠다.

《순봉동무지요?》

《예… 누군지?》

순봉은 주눅이 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턱을 쳐들었다. 그는 처녀의 정기도는 순진한 검은눈과 꽃잎마냥 생신한 입가에 피여난 귀염스러운 웃음을 보고 생각보다는 어려보인다는것을 알았다. 모름지기 자기 나이와 비슷한것 같았다.

《석화라고 해요.》

말씨는 상냥하고 고왔다. 하지만 귀에 선 이름이다. 어데서 온 멋쟁이처녀일가. 멋쟁이처녀라고 하기에는 순수함과 단정함이 몸에 배고 나이를 초월한 교양이 느껴진다.

《석화? 난 잘 모르겠는데… 가만, 우리 집에 왔던 동무가 아니요?》

《그래요. 갔댔어요.》

처녀의 얼굴에 어색하나 동정의 빛이 짙게 어렸다.

순간 순봉은 뒤통수를 얻어맞은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분명 그 처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봉이가 패싸움건으로 안전부구류장에서 놓여나온 날이였다. 집에 들어선 아버지는 가방을 어머니에게 넘기고 순봉이를 한참 노려보더니 아무말없이 벽에 걸어둔 낡은 군대혁띠를 벗겼다.

여느때 순봉은 낡디낡은 혁띠를 장식품처럼 벽에 걸어두는 아버지의 취미가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언젠가 그 자리에 기타를 걸었더니 아버지는 도로 혁띠를 걸어놓았다.

《웃옷을 벗어라!》

아버지는 천정이 무너지게 소리를 질렀다.

순봉은 아버지말에 순응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반발심으로 웃옷을 벗었다.

아버지가 팔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기타의 굵은 튕김소리같은것이 윙하고 울리더니 가죽혁띠가 런닝그만 입은 순봉의 어깨죽지를 갈겼다.

《아이구!-》

순봉은 저도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플테지. 난 전쟁때 이 혁띠로 허리를 죄이고 원쑤들을 족쳤다. 장차 아들녀석이 기타나 뚱땅거리며 노라리를 부리고 망나니짓을 하라고 락동강진펄을 건느지 않았단말이다.》

순봉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매를 들면 늘 말리고 막아나서던 어머니였건만 어진 눈에 눈물만 흘리고있었다. 군대혁띠가 어깨살가죽이 데인것 같은 아픔이 멎기도 전에 두번째로 후려쳤다.

순봉은 비명을 지른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지고 반발심이 치솟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뭐 벽에 걸린 혁띠가 우습다구? 난 내 공로를 자랑하자는게 아니였다. 난 이 혁띠로 여윈 허리를 졸라매고 재더미를 헤쳐 공장을 일떠세우던 간고한 때를 잊지 말자구 해서였다.》

세번째로 떨어진 혁띠는 어깨죽지를 칼로 저며내는것 같았다.

《네 녀석은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일하기는 고사하구 자기를 위해 일하는것조차 싫어하는 건달뱅이다.》

순봉은 어깨죽지가 쑤시게 아픈것보다도 매와 함께 아버지입에서 잇달아 튀여나오는 《게으름뱅이》나 《기생충》, 《불량배》따위의 낱말을 더 참을수 없어 방문을 걷어차고 뛰쳐나왔다.

그때 마당가에 웬 낯모를 처녀가 섰다가 흠칫 놀라 순봉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정신없이 운동화뒤축을 꺾어신고 내달았다.

《이놈아, 깽깽일 가지구 사라져라!》

문지방에 나선 아버지가 기타를 순봉이한테 활 집어던졌다.

기타는 울바자밑에 엎어둔 김치독에 맞아 음향통이 터지는 소리가 펑하고 났다.

밸이 꼭뒤까지 치민 순봉은 기타를 쥐여 김치독에 쳐서 마저 부셔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봉은 그날 처녀가 성난 아버지의 고함소리며 런닝그바람에 경황없이 달아빼던 자기의 망신스런 몰골을 낱낱이 목격했으리라고 생각하니 단번에 기가 죽었다. 의기소침한 속에서도 호기심이 없지 않았다. 잇달아 이 멋쟁이처녀가 자기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랴 하는 생각에 불끈 밸이 치밀었다. 참자니 짜증이 나고 한시바삐 자리를 피하고싶었다.

《우리 집엔 왜 왔댔는가요?》

《아버지가 보내서요. 우리 아버진 그날 저녁에 옛 전우인 순봉동무아버지와 동무를 집에 꼭 데려오라구 했댔어요.》

《동무아버진 누굽니까?》

《저… 우리 아버진 식당에서 순봉동무랑 같이 맥주를 마셨다고 하던데요.》

순봉은 생각났다. 아버지가 자기 괴춤에서 뽑아낸 비닐혁띠를 돌려준 도량있고 례의밝은 손님, 몸이 갱핏하고 눈매가 날카롭던 아버지의 전우… 정치부사단장이라고 했던가. 제길, 그 사람의 딸이란말인가. 우리 《쇠망치패》를 말짱 알겠구나. 일이 꼬인다는건… 망신스러움이 도가 넘으니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쓴입을 다셨다. 그러나 인격이 만신창이 됐다고 처녀앞에서 주저앉을수는 없었다.

《동무아버진 무슨 일을 합니까?》

제법 큰소리로 물었다.

처녀는 말하기 딱한듯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그저… 사무를 봐요.》

순봉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아버지의 옛 전우의 딸에게 호감이 갔다. 자기의 허물을 죄다 아는데도 비웃으려 하거나 업신여기는 기미조차 나타내지 않고 시종 겸손한 태도를 지어보이는것이였다.

그럴수록 그의 머리속에서 손상당한 명예심이라든가 망신스러움같은 복잡한 생각들이 더욱 뒤엉켜돌면서 간신히 지탱하던 의기를 떨구고 좌절감에 휩싸이게 했다.

《저 순봉동무…》

처녀는 순봉이쪽에 몇걸음 다가왔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딱히 찍어말할수 없는, 상대의 그늘진 심중을 리해하는 동정심같은것이 여린 메아리로 울리고있었다.

《아버진 순봉동무가 기타를 무척 잘 탄다고 하더군요.》

처녀는 조금 주저하면서 손에 들고있던 기타를 순봉이한테 내밀었다.

《이건 내가 타던건데… 받아주세요.》

순봉은 놀라서 한발 물러섰다.

처녀는 그를 안심시키려는듯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말했다.

《난 기타를 잘 타지 못해요. 그리구 처녀애가 기타를 타는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요.》

순봉은 가슴이 뭉클해났다. 처녀의 성의를 동정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도 고마왔다.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기타를 부서뜨린 불행스런 자기 처지를 뜨겁게 생각해주는 처녀를 어떻게 리해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아무리 아버지의 옛 전우의 아들이라도 한낱 거리의 불량배에 불과한 사람을 탓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이리도 관심할수 있단말인가.

얼마간 지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남이 주는, 그것도 처녀가 주는 물건을 의미없이 함부로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뒤틀린 말이 나갔다.

《석화동문 날 동정하는건가요?》

《…》

처녀의 얼굴에서 명랑한 빛이 사라져갔다.

《망나니를 교양하자는건 아니겠지요?》

처녀의 낯빛이 해쓱하니 질렸다.

《사람을 그렇게 모욕하고싶어요? 그래요. 난 주제넘게 동무를 교양하자고 오지는 않았어요. 왜 그런지 동무같은 청년이… 나쁜길에 들어선게…》

처녀는 입술을 깨물고 결연히 다가서더니 음향통이 순봉의 가슴팍에 부딪치게 기타를 콱 안겨주고는 씽 돌아서 갔다. 통주름치마자락이 성난듯 부채살마냥 날리며 찔레꽃향기를 머금은 덧바람을 순봉이한테 끼얹었다.

순봉은 기타를 붙안고 버벙해섰다가 황급히 뛰여가 처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석화동무, 내가… 잘못했습니다.》

순봉은 처녀의 눈에서 금시 쏟아질듯 찰랑거리는 눈물을 보고는 더욱 사죄하고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난… 아버지구 작업반장이구 사로청조직이구 다 교양하자구만 접어드는바람에 심통이 비뚤어졌습니다.》

처녀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남들에게 화를 낼게 아니라 그런 잘못을 빚어낸 자신을 탓해야지요.》

《그야… 그래야지요.》

순봉은 그렇게 인정하고싶은 생각이 없으면서도 처녀의 온화한 태도에 감동되고 또 그가 다시 성을 낼가봐 두려워 수긍했다. 그러고보니 자기 잘못을 대범하게 인정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도 자기가 처녀한테 어떤 요긴한것을 선사하고 아량을 베푼것만 같이 흐뭇한 심정에 휩싸이게 되는것이였다.

그들은 함께 걷자는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서로 바래주려는 마음이 앞서선지 자연히 시내쪽으로 걸음을 같이했다.

순봉은 기타의 모가지를 부여잡고 다른 손은 앞깃을 열어제친 양복주머니에 찌른채 될수록 의젓하게 걸었다. 그는 이런 멋진 처녀를 만나게 되리라는걸 예견이나 한것처럼 아침에 자기를 잘 차려입힌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감사히 생각했다.

처녀는 말없이 다소곳이 걷기만 했다. 그렇다고 따분한감을 느끼는것 같지는 않았다.

순봉은 잔머리칼이 흘러내린 처녀의 하얀 목덜미를 곁눈질해보고서 손가락으로 기타줄을 슬쩍 다쳐 가벼운 소리를 냈다.

《기타가 정말 좋은데요.》

순봉은 고맙다는 뜻을 그 말속에 담았다. 그는 처녀가 침묵할수록 기타를 주게 된 진정한 까닭을 알고싶었다. 아버지들사이의 남다른 우정이 이런 뜻밖의 열매를 가져다주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하긴 그 사람은 맥주집에서 마그네트라이타도 척 내주는걸 보면 도량있고 인정미있고… 한마디로 고마운 사람이다. 그날 자기도 그 사람이 아니였더면 아버지한테 바지혁띠를 뽑힌채 되게 혼쭐이 났을것이다.

시내에 들어서자 길은 소공원을 사이에 두고 두갈래로 갈라졌다.

《석화동무… 내가 동무아버지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해도 될가요?》

《기타때문에요?》

《예.》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탓하기라도 하듯 미간을 쪼프렸다. 선이 곧은 눈섭의 끝초리가 관자노리 웃쪽으로 나래쳐올랐다. 모름지기 선친한테서 물려받았을상싶은 성숙된 그 표정은 처녀의 애된 얼굴에 꽤 어울렸다.

《여직껏 기타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군요. 그렇게 옹졸해가지고 어떻게 패싸움을 했어요?》

순봉은 얼굴이 뜨뜻해났다. 《쇠망치》패에서 막내노릇을 한 자기의 유약한 성격을 처녀가 알아차린듯싶어 당황했다. 그래도 말주변을 세웠다.

《난 처녀한테서 이런걸 받느니 차라리 남한테 주먹질하는것이 훨씬 속이 편하겠습니다.》

처녀는 미간의 주름살을 폈다. 저녁어스름이 처녀의 눈과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 부드러운 색채를 더해주었다.

《저의 아버진 요즘 일이 바빠 밤늦게 집에 들어와요. 내가 말씀드리죠. 순봉동무, 일요일에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집에 꼭 와주세요.》

《아니, 난 아버지하구 같이 가지는 않겠습니다.》

《호, 그럼 따로따로 오세요. 아버진 옛 전우한테 오고 순봉동문 저의 손님으로 오고 그러문 되잖아요.》

처녀는 순봉의 고집스런 성미가 재미있는지 웃었다.

순봉은 어쩌는수없이 벌씬 웃고 손으로 햇수염싹이 내민 코밑을 슬슬 훔쳤다. 어쩐지 이대로 헤여지기 싫었다. 사려깊고 명랑한 처녀의 성품에 감화되고 이끌리는 자신이 놀라왔다.

《석화동무… 저기… 걸상에 좀 앉지 않겠소?》

《그러자요.》

처녀는 선뜻 응낙하고 콩크리트모서리가 깨여진 오래된 걸상우에서 나무잎사귀들을 치웠다. 그리고 순봉의 곁에 조금 사이를 두고앉으며 순봉이자신이 은근히 뽐내고싶어하는 심정을 알아주었다.

《기타를 한곡 타세요.》

순봉은 속으로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못이기는체 열적어하며 기타를 어루만졌다.

《사실 별로 시원히 타지는 못하는데… 하여튼 무슨 곡을 탈가요?》

《저… 기타곡으로는… <청춘은 푸른 숲인가… 꽃인가>하는 그 노래가 좋지 않아요?》

순봉은 반대하고싶었으나 순진하게 원하는 처녀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유독 그 노래를 타라고 하다니.… 곡은 마음에 드는것이였지만 가사를 외울 때면 그에게 무언가 자책감을 느끼게 하는 노래였다.

길쪽으로 자동차가 뜨문히 지나가고 행인 두어명이 사라지자 사위는 그런대로 정적이 깃들었다. 외등이 켜지지 않은 소공원안은 둘레의 엉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지워 벌써 어둑컴컴해졌다.

기타의 소리통과 줄이 순봉의 손에 산산한 느낌을 주었으나 그는 단번에 손을 놀려 웅숭깊은 선률을 살려냈다.

 

청춘은 푸른 숲인가 반짝이는 별인가

인생에 피는 아름다운 꽃인가

봄은 다시 오고 별은 빛을 잃지 않건만

청춘은 밤안개처럼 사라진다네

허나 생을 아낌없이 바칠 때

그대는 세월따라 백발이 되여도

조국은 푸르러 젊어 빛을 뿜으리

 

순봉은 가사의 구절이 어쩐지 자기에게서 줄곧 상냥스레 눈길을 떼지 않는 처녀의 맑은 눈동자속에서 조용히 흘러감을 느꼈다. 지난날 별로 음미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대하던 가사의 뜻이 메아리로 되여 돌아와 그의 녹쓴 량심의 종을 울리고 생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솜씨있게 타는군요. 한번 더 들려줘요. 난 청봉숙영지의 우등불모임때 이 노래를 불렀어요. 후렴이 특히 좋아요. 생을 아낌없이 바칠 때 세월따라 백발이 되여도 조국은 푸르러 젊어진다는것이 얼마나 철학적이예요. 사람은 늙어도 조국은 젊다… 한번 그런 말을 자기걸로 당당히 할수 있게 살고싶어요.》

처녀는 눈을 들어 멀리 재빛음영속에 희미한 륜곽을 던지며 우중충 뻗어간 산들을 바라보았다.

순봉은 기타줄을 두어소절 울리다 멈추고 류달리 감상적인 처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석화동문 평양에서 무슨 학교를 다녔습니까?》

《예술학원을 졸업했어요.》

《성악인가요?》

《기악이예요. 피아노를 배웠어요.》

《그…런가요. 음악대학에 가야겠구만요.》

《아버지도 그래서 날 평양삼촌네 집에 떨궈두려고 했지만 난 그러고싶지 않았어요.》

《이런 산골도시에 와서 뭘 한단말입니까?》

《무슨 직장에든 들어가서 로동을 해보고싶어요. 피아노는 이젠 싫증이 났어요. 건반을 아무리 쳐야 소리는 방안에 울리고 작곡가가 쓴 악보대로인걸요. 작곡가들을… 음악을 경시하고 하찮게 여겨 하는 말이 아니예요. 난 내손으로 로동악보를 쓰고 생활의 피아노를 타고싶어요.》

순봉은 처녀의 얼굴에서 내심을 감추는 감상적인 어떤 분칠이나 겉치레는 찾아볼수 없었다. 오히려 순진하다 할 정도의 무모성이 엿보이는 처녀의 단순한 포부가 그를 감동시켰다.

여느때 같으면 현실에 몸을 잠가보지 못한 책상물림의 이런 연약한 처녀의 가벼운 결심을 변덕이나 어리석음이라고 놀려주거나 비웃었을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벌써 아버지를 따라 걸음을 내짚은상싶은 처녀의 지향과 의지에 엄숙히 공감되고 진실로 믿고싶은것이였다.

순봉은 말없이 기타줄을 건드렸다. 아까 처음 처녀의 겉모습에서 느꼈던 매력과는 다른 정신미가 그의 마음을 끌어잡았다. 그에게 기타를 주던 인정미와는 다른 어떤 고상한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쇠망치패》동무들과 맥주집이나 담장에 걸터앉아서 기타연주나 뽐내던 자신은 아주 보잘것 없는 존재로 부끄럽게 여겨졌다. 음악을 흥미거리로, 생활의 부속물로, 정신적치레거리로 달고다녔다는것이 확연해졌고 그것을 괴롭더라도 쳐녀앞에서 말없이 인정해야 할것 같았다.

순봉은 온 정신을 집중하고 손가락 마디마디 힘을 주어 열정적으로 기타를 탔다. 자기의 연주재능을 그렇게라도 시위함으로써 뒤떨어진 인격을 세우고싶었고 자기도 그처럼 철학성있는 노래에 심취하고있다는것을 보여주고싶었다. 그것은 어리석게 처녀의 환심을 사려는 저속한 심정이 아니라 어쩐지 가사와 선률의 뜻으로 살고싶고, 철없던 지난날과 헤여지고싶은 충동이였다. 어쩌면 순결한 처녀의 정신미를 따라가고싶은 총각의 본성에 가까운 깨끗한 욕망인지도 몰랐다.

재빛어둠이 깃든 소공원의 뒤길에서 인기척이 났다. 두사람중에 키큰 사람이 이쪽을 손짓하며 무언가 말을 하는것 같았다.

그러자 몸집이 실팍한 사람이 위압감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순봉은 불안해서 기타를 멈추었다.

그사람은 걸상에 앉은 처녀총각한테 무례하다 할 정도로 렴치없이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았다.

《알만 한 동무구만. 순봉이가 날쌘데. 멋진 처녈 낚아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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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순봉은 얼굴에 화로를 뒤집어쓴것 같았으나 입술을 깨물고 지그시 앉아서 사로청지도원의 희멀끔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패싸움질하고 돌아앉아서 련애질한다. 괜찮아, 여유있어.》

시사로청지도원은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웃몸을 뒤로 제치였다.

침착히 앉아있던 석화가 순봉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기타를 잡았다.

순봉은 수치와 분노로 온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간듯 기운을 잃었다.

공장에 자주 내려와서는 사로청원들을 무턱대고 닦아세우기만 하는 이 지도원앞에서 어떻게 처신할바를 몰랐다. 나이도 자기보다 곱으로 많으니 《첫째형님》 창범이처럼 분노를 터뜨릴수도 없었다.

《련애질이라구요?!… 내 참, 뭐 련애한다문 범죄라도 되는가요?》

순봉이가 기껏 당돌하게 내뱉은 말이였다.

《허, 이것 봐라. 사로청원의 륜리성품에 어긋나면 범죄나 같지 뭘그래. 우리 시사로청이 동무같은 청년들때문에 망신을 톡톡히 하고 강하게 규률을 세운다는걸 순봉이도 알겠는데. 밤중에 이런 공원에서 안일하게 처녀와 놀아대는건 좋지 않단말이요. 수정주의날라리라는게 뭐 다른건줄 아오?》

시사로청지도원은 날이 시퍼렇게 으름장을 놓고 석화를 향해 물었다.

《처녀동문 어디 있소? 이름이 뭐요?》

순봉은 한순간 지나가는 자동차불빛에 비친 석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것을 보았다.

석화는 기타를 순봉에게 넘겨주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가 만지작거리던 나무잎사귀들이 치마폭에 흩어져내렸다.

《강운학동무, 그만하구 돌려보내지.》

이제껏 공원어구의 나무곁에 서있던 시사로청위원장이 느리게 다가왔다.

순봉은 그제야 기타를 그러안고 일어섰다.

나이지숙한 시사로청위원장은 팔짱을 끼고 서서 말썽군아이를 살펴보는듯 한 좀 너그러운 눈길로 순봉을 훑어보다가 석화쪽에 눈길을 돌렸다.

《아니, 동무가 어떻게 여기 있나?!… 책임비서동지한테 동무를 시사로청에서 쓰겠다구 말씀드렸는데 왜 오지 않소? 사무실에 조용히 앉아 문건같은걸 정리하면 좀 좋을라구.…》

석화는 얼굴을 숙였으나 목소리에는 부끄러운 어조가 조금도 없었다.

《전 어디든 로동현장에서 일하겠습니다.》

《정 그러문 할수 없지. 그렇지만 이런덴 나다니지 말라구.》

《우린 가보겠습니다.》

석화는 한시바삐 자리를 피하고싶어 어정쩡해 서있는 순봉의 팔굽을 잡아끌었다.

분기를 삭이지 못한 순봉은 석화를 따라 마지 못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에서 주고받는 두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위원장동지, 웬 처녑니까?》

《새로 오신 도당책임비서동지의 따님이요. 외동딸이지.》

순봉은 저으기 놀래서 멈춰섰다. 그러나 석화가 《어서 가자요.》하고 속삭이듯 뇌이고 그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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