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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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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413회 작성일 20-07-1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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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습한 골짜기와 강쪽에서 피여오른 엷은 안개는 누르끼레한 달빛이 물들어 너울마냥 흐느적거리면서 거리바닥에 밀려들었다. 안개는 건물들과 아빠트벽들에 부딪치면서 우로 솟기도 하고 사방 넓게 퍼지면서 창문들의 전등빛과 장식등을 희미하게 가리우고 도시의 공간을 마음대로 차지하였다.

승용차는 전조등을 켜고 안개로 축축히 젖은 도로를 미속으로 달렸다.

도당책임비서 석태진은 뒤좌석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 어디 맥주집이 있지 않소?》

《예, 조금 가면 됩니다.》

운전사는 얼마안가서 길옆의 파아란 장식등으로 된 《청량음료》간판이 붙은 건물을 가리켜보였다.

《시내에서 그중 큰 맥주집입니다.》

《차를 세우오.》

석태진은 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들이 많이 모이는 맥주집에 들려 사람들의 가식없는 솔직한 이야기도 들어보고 생활형편을 알고싶었다.

그는 이 도시에 세번째로 왔다.

처음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의 재진격을 앞두고 그가 속한 사단이 머물렀을 때이고 두번째는 10년전 60년대 초에 당중앙위원회 검열소조를 책임지고 한달가량 있었다.

운전사는 체소한 몸집에 네알단추짜리 수수한 평상복을 입은 간부라기보다 보통 로동자맛이 더 나는 석태진을 따라오며 걱정스레 말했다.

《책임비서동지, 요즘 맥주집풍이 좋지 못합니다.》

《젊은애들이 더러 갈갠다지… 동문 돌아가보오.》

간살폭이 넓은 창유리로 짙은 담배연기속에 맥주고뿌를 마주하고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적은편이였다.

석태진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혼탁된 공기에 어지간히 숨이 막혔다. 피로가 밴 로동생활의 체취, 경쟁적으로 피워대는것 같은 담배연기, 시큼들크무레한 이 고장 생맥주냄새가 집안에 꽉 찼다.

석태진은 출납에서 여느 손님들과 같이 차례를 기다려 맥주표를 떼가지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같이 마십시다.》

그의 말에 겉으로나마 반겨 응대하는 청년들은 없었다. 오히려 자기들의 식탁에 불청객이 끼웠다는 맞갖지 않아하는 표정으로 식탁의 웃쪽자리에 검붉은 격자무늬샤쯔를 입고 틀지게 앉은 청년의 눈치를 살폈다.

어깨가 쩍 버그러지고 볼편에 허물자리가 있는 그 청년은 곁눈으로 석태진을 훑어보고나서 눈을 꾹 감았다. 빈 자리가 없어 앉은, 별로 볼품없는 손님이니 쫓아버리지 말라는 암시같았다.

접대원처녀가 식탁에 맥주거품이 넘어나는 고뿌들을 날라다놓자 청년들은 석태진을 관심밖에 던지고 맥주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접대원처녀는 장작개비같은 마른명태를 한아름 식탁에 내려놓고는 석태진의 맥주표를 미처 보지 못했는지 건너편 식탁손님들한테로 훌쩍 가버렸다.

석태진은 클클해서 우선 시원하게 한조끼 걸치고싶었지만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막내>, <털본> 결석이야?》

맥주고뿌를 그러쥔 격자무늬샤쯔가 얼굴이 귀염상스레 생기고 몸이 호리호리한 청년에게 걸써 눈총을 던졌다.

《둘째형님 색시 선 본대요.》

《오라지 않아 개암밭에 갈 할망구가 손자욕심은 제길.》

태진은 식탁에 둘러앉은 청년들의 팔목부위에 하나같이 자그마한 망치를 입묵한것을 보았다. 《막내》의 팔목입묵은 망치자루가 별스레 길어진데다 새긴지 오래되지 않은지 피부에 푸르스름한 색소가 채 물들지 못하고있었다.

밤알을 문것처럼 볼에 살이 많고 뚱뚱한 청년이 입술에 묻은 맥주를 손으로 훔치고나서 격자무늬샤쯔의 비위를 맞추려했다.

《창범형님, 저…》

《<안테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데.》

격자무늬샤쯔가 눈알을 부라렸다.

《안테나》는 대번에 자라목이 되여 쑥 들어갔다.

《무슨 소식이야?》

격자무늬샤쯔는 시답지 않아하며 석태진의 가까이에 앉은 《막내》한테 턱짓했다.

《야, 우리만 마시겠니. 저 손님한테도 드려.》

《막내》가 제꺽 맥주 두조끼를 석태진앞에 끌어다놓았다.

《고맙소.》

《첫째형님.》

《안테나》가 볼을 실룩거리며 목을 뽑아들었다.

《도당책임비서가 새로 왔다지요?》

격자무늬샤쯔는 고뿌에서 입을 떼지 않고 단숨에 쭉 들이키고는 바사지게 탕 놓았다.

《자식! 언제 왔게. 이전 도당책임비서는 종파물을 먹은 사람이야. 끝내 고치지 못해 떨어졌지. 중앙당에 있던 사람이 왔어.》

《성미가 보통 아니라지요?》

《안테나》는 그냥 입을 놀렸다.

《부정따위는 사정없이 후려친다고 해. 우리같은 <새비>들은 일없어. 간부들이 혼쌀날거야.》

자무늬샤쯔는 마른명태를 허리꺾어가지고 껍질을 발가 정신없이 먹어대는 《막내》를 흘겨보았다.

《<막내>, 굶었어?》

《아니요. 아버지가 찾아올가봐 그래요.》

《정찰병령감이 붙잡아가기 전에 미리 먹어준다? 괜찮아. 속궁냥이 빠른걸. 하지만 오늘 저녁은 일없어. 내 아까 저녁에 보니까 령감이 탄실은 손달구지를 혼자 끌구오느라 땀을 뻘뻘 흘리지 않겠어.》

《그래서요?》

《막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좀 도와줄라니까 대뜸 골살을 찡그리구서 <우리 순봉인 어디 갔어?>하구 역증내는거 아니겠어. 그래 <걔가 뭐 내 꼬랑지라구 달구다니겠어요. 몰라요.>하구는 돌따서구말았지.》

《막내》는 새김질하다 놀랜 송아지마냥 입안에 뭉그려 씹던 마른명태를 꿀꺽 삼키고는 불안스레 창밖을 보았다.

격자무늬샤쯔는 피씩 웃었다.

《겁쟁이같으니. 령감이 맥나서 널 찾아다니지 못해. 맘 놓구 기타나 한곡 타라.》

그제야 막내는 쑥스러운지 입맛을 다시고는 구석에 세워놓은 기타를 집어들었다.

익숙한 솜씨로 기타의 음향통을 그러안고 오른손가락이 자유롭게 줄을 튕겨 첫 음정을 뽑아내자 《막내》의 얼굴에서 불안감이나 열적은 빛이 싹 사라졌다.

 

해님은 내 삶에

빛을 주려고

이 세상 험한 길

다 헤쳐왔네

한시도 한시도

쉬임이 없이

 

석태진은 웃몸을 흔들며 열정적으로 기타줄을 튕기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 어린 청년의 음악적재능을 놀랍게 지켜보았다.

 

별님은 내 앞길

밝게 비치려

긴긴날 모은 빛

다 뿌려주네

그 열정 그 열정

아낌이 없이

 

격자무늬샤쯔는 눈을 꾹 감고있었고 패거리의 청년들은 맥주마시는것조차 잊고 《막내》의 노래를 듣고있었다. 건너편 식탁들에서도 귀를 기울이고 관심의 눈길을 떼지 못했다. 랑만에 차고 유쾌함에 들뜬 청년의 애된 노래소리와 세련된 기타소리는 식탁의 청년들에게서 거칠고 방자한 기분을 대번에 날려보내였다. 음악의 본래의 고유한 속성인 순수함과 고상하고도 아름다운 향취는 그가 누구건, 어떤 분위기에서건 변할수 없는것 같았다.

《막내》는 마감소절을 채 끝내지 않고 불시에 기타줄에 손을 덮었다.

《맥주나 마시자요.》

《왜 그만뒀어? 더 쳐라.》

격자무늬샤쯔가 아쉬운듯 눈을 떴다. 강압스런 표정은 조금도 없고 퍼그나 온화한 낯빛이였다.

《예감이 좋지 않아요. 아버지가 올것 같은게.》

《막내》는 시답잖은 기색이였다.

《자식두, 제가 무슨 예언자라구. 기타치기 싫으니까 그러지.》

격자무늬샤쯔는 웃어넘기고 패거리의 재간둥이한테 껍질이 노랗게 마른 명태를 골라주었다.

《첫째형님, 도당책임비서한테 딸이 있대요.》

《안테나》가 또 말을 꺼냈다.

《외동딸이야.》

격자무늬샤쯔는 다 알고있다는듯 대수롭지 않게 내뱉았다.

《곱게 생겼대요?》

《막내》가 껴들었다.

석태진은 흥미진진해서 듣다 못해 웃음이 나와 슬며시 맥주고뿌를 입에 대였다.

격자무늬샤쯔는 힐쭉 웃으며 마른명태를 북 찢었다.

《자식, 별난데 다 관심을 뻗치는구나. 고우면 어찌겠니. 옛날말루 그런 신분이 높은 집 따님이 너같은걸 외눈으로나 볼것 같애?》

《내가 뭘 못났다구 그래요?》

《막내》가 불끈해서 대들었으나 격자무늬샤쯔는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우리 <막내>가 수리공아들만 아니라면 한번 련애치게 맞세워보는건데.》

석태진은 반쯤 마신 맥주조끼를 식탁에 소리나게 내려놓고 말했다.

《동문 관점이 틀렸구만. 난 수리공로동자의 아들도 당당하게 책임비서딸과 련애할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렇잖구요. 우리 사회에서 무슨 신분차이가 있다구.》

《막내》가 맞장구를 쳤다.

격자무늬샤쯔는 눈살을 찌프리고 석태진을 건너다보았다.

보매 나이지숙하고 어지간히 점잖아보이는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는것 같았다.

손님의 호방스런 태도에 성을 내고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손님은 괜히 참견이요. 제 딸이 아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말할수 있을거요.》

석태진은 자신을 드러내고싶지 않아 응대하지 않고 씁쓸히 담배갑을 꺼내 한대 물고 청년들쪽에 밀어놓았다.

안피우는 젊은이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담배갑은 《안테나》의 손을 거쳐 격자무늬샤쯔한테로 갔다.

그가 먼저 한대 물자 다들 한가치씩 꺼냈는데 《막내》는 그닥 자신없는지 담배갑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였다.

석태진은 라이타를 켜서 담배불을 붙였다.

《거 라이타가 신형이구만요. 한번 써봅시다.》

격자무늬샤쯔가 청해서 석태진은 식탁너머로 라이타를 집어던졌다. 격자무늬샤쯔는 라이타를 솜씨있게 받아 저와 동무들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는 욕심나는지 돌려줄념을 않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손님은 차림새에 비해 담배구 라이타구 다 좋구만요. 출장 오셨는가요?》

《이고장 토배기는 아니요.》

《술나누면 초면에도 친구된다는데 라이탈 기념으로 내게 주지 않겠습니까?》

《맘에 들면 가지라구.》

석태진은 흔연히 응낙했다.

격자무늬샤쯔는 마그네트라이타를 기분좋게 훌 불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손님은 괜찮은데요.》

《그까짓 라이타 하나 가지고 뭘 그러나.》

석태진은 접대원처녀가 뒤늦게 가져온 맥주조끼들을 청년들쪽에 밀어놓아주었다.

《그래 창범동문 어느 공장에서 일하오?》

《아 이거 손님, 난 신원을 캐는건 딱 질색입니다.》

《막내》가 담배연기에 사레들려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기침을 깇었다.

《방금전엔 친구라더니 대범하지 못하구만.》

격자무늬샤쯔는 음험한 눈길로 석태진을 건너다보았다.

《사람의 질적평가는 함부로 내리는게 아닙니다. 난 두달전에 직장사로청위원장이 회의에서 날더러 망나니니, 부랑자니 하면서 출맹주겠다구 고아대는 바람에 턱주가리를 한대 쥐여박구 나왔습니다. 그래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사로청조직책임자를 손찌검하면 되나?》

《어찌겠습니까. 감정이 앞서구 주먹이 가까운걸.》

《그래 무직인가?》

《그렇다구 할수 있지요.》

《두달씩이나 일하지 않고 조직생활도 안하구 논다는건 좋지 않은데.》

《뭐 굶어죽지 않는데 바쁠것 있나요. 차차 직장을 구하지요.》

《여기 자주 오오?》

《맥주를 번지문야 잠이 오나요.》

격자무늬샤쯔는 구운 가재처럼 벌기우리해진 얼굴을 쳐들고 패거리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코집을 찡긋해보였다.

석태진은 맥주에 청춘이 절고 무위도식하는 그 생활을 인생으로 아는 이 방자스런 청년이 혐오스러웠다.

《동무네같은 젊은 사람들은 맥주집보다 책을 읽거나 야간대학에 가구 체육관에 다니는게 더 좋지 않을가?》

눈매가 사나와진 격자무늬샤쯔는 입에 문 담배꽁초를 씹어뱉더니 자기앞의 맥주고뿌를 와락 밀어놓았다.

맥주조끼가 쟁가당 부딪치고 엎어지면서 식탁에 맥주가 쏟뜨러졌다.

《손님은 누굴 교양하자는거요?! 주제넘게스리! 남이 무직이든 맥주를 마시든 무슨 상관이요! 제돈내고 제입으로 마시는데 참견마시라요. 우린 이 생활이 좋단말이요!》

석태진은 버르장머리없고 라태한 격자무늬샤쯔를 혼쌀내주고싶어 속이 불끈거렸지만 참을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참에 언제 나타났는지 체구가 듬직한 사람이 뚱보와 《막내》사이를 우악스레 비집고앉았다.

기름때절은 모자를 쓴 그 사람은 우선 다짜고짜 《막내》의 허리괴춤을 끌어잡더니 솜씨있게 비닐혁띠를 뽑아내였다.

《막내》는 별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하는데 동무들앞에서 예언자라도 된것처럼 애써 태연한 얼굴표정을 지었지만 수치스러운 절망감은 감추지 못했다.

석태진은 저으기 놀래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옛시절의 젊음이 자취없이 사라지고 밭고랑주름이 덮였지만 낯익은 얼굴인것이였다. 별로 기억을 들출것도 없었다. 너무도 친근했고 생사를 같이해온 그를 순간에 알아본 석태진은 다만 자기가 잘못 보지 않는가 하고 주저할뿐이였다.

(채혁이!… 자넨 몰라보게 늙었구만.)

《창범아, 넌 또 잘난체 연설이야?!》

그 사람은 자기의 애숭이《포로》를 거들떠보지 않고 격자무늬샤쯔를 비웃듯 눈도끼질했다.

격자무늬샤쯔는 어째선지 아무 대꾸도 못하고 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뭐, 공장에서 쫓겨나구두 이 생활이 좋다구? 조상덕에 호강질하는 건달군녀석같으니! 공장사람들이 널 두구 다들 분개해한다.》

《아버지…》

《막내》가 한손으로 바지괴춤을 잡고서 울상이 되여 말리려들었으나 그 사람은 억센 팔로 아들을 가볍게 떠박질렀다.

《창범아, 넌 내 견습공이 되지 않은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그랬더라면 네가 망나니짓을 못하게 주리갱이를 트는건데.》

《수리공동지, 이거 위협이… 상관질이 너무 과하시군요. 난 지금 동지가 내 기능공이 되지 않은걸 행복스레 여깁니다.》

격자무늬샤쯔는 별로 주눅이 들어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석태진은 채혁이 돌덩이같은 큰 주먹을 어루만지며 가까스로 분노를 참는것을 보았다. 전쟁시기에 굳어진 사단정찰소대장의 침착성과 자제력이 그대로 살아있는것이 기뻤다.

석태진은 팔을 뻗쳐 맥주조끼를 그의 앞에 놓았으나 채혁은 석태진을 애당초 창범이네 패당으로 여겼는지 얼핏 곁눈질했을뿐 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좋아! 밸대로 살라구. 걱정없을테지. 죄를 지으면 또 아버지가 구원해줄테니까. 그렇지만 우리 순봉인 건드리지 말라구. 너희 무리에서 빼놓으란말이다.》

《걱정마시라요. 난 댁의 <막내>를 끈매달고 다니지 않아요. 제 좋아서 제 다리로 우리한테 휩쓸리는걸요.》

채혁은 절망에 싸여있는 아들의 팔목을 잡아비틀어 입묵한것을 창범에게 내보였다.

《이건 누가 새겨줬어? 흠, 너희들 다같이 망치를 입묵했구나! 한패거리라는거지. 외곡해도 분수가 있지. 쇠망치는 신성한 로동계급을 상징하구 근면한 로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표징이다. 너희들같은 건달뱅이들은 몸에 지닐 자격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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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석태진은 맥주고뿌로 식탁을 두드렸다.

《채혁동무!》

채혁이 놀래서 얼굴을 돌렸다. 이마의 주름살이 의혹으로 깊숙이 패이더니 고통과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이 차츰 부드러워졌다. 그다음엔 기쁨으로 번쩍 빛났다.

《정치부사단장동지!》

《정찰소대장동무!》

석태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채혁은 저는 다리를 가지고 다급히 식탁을 빙 에돌아왔다.

두사람의 네손이 한덩어리로 뭉쳐졌다. 준엄한 시절에 맺어진 옛정이 폭포줄기마냥 쏟아졌다.

《이게 얼마만이요?! 양덕의 전상자병원에서 헤여진지…》

《스무해라는 세월이… 난 부사단장동지를 겨우 알아봤습니다.》

《동문 예가 고향이지?》

《부사단장동지는 평양에 있는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로…》

식탁의 청년들은 물론 옆식탁에서까지 사람들이 그들의 상봉을 흥미있게 쳐다보았다.

석태진은 채혁의 손에서 혁띠를 뺏아 엉거주춤해 서있는 순봉에게 넘겨주었다.

《막내가 엄마를 닮은게군.》

석태진은 빙긋이 웃으며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순봉의 처녀애처럼 상큼하게 생긴 코날을 꽉 집었다놓았다. 그리고 식탁의 누구에게라없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만들 마시고 헤여지지. 젊은 사람들이 맥주집에 오래 앉아있는건 좋지 않아.》

《낡은 세대는 물러가십시오. 우리 젊은 세대는 좀 마시고 놀아야겠습니다.》

창범의 독살스러운 비양조의 응수에 석태진은 어이없어 채혁을 마주보았다. 모욕감이 잔등을 지지고 온몸을 태웠으나 참았다.

그는 금시 무슨 일을 칠듯 두눈에 불이 펄 이는 채혁을 옛 상관의 엄한 눈길로 달래고 소매자락을 잡아끌며 오히려 쫓기듯 맥주집을 나섰다.

두사람은 포석길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옛 전우간의 상봉의 기쁨은 재불처럼 사그러지고 무거운 침묵이 서렸다.

석태진은 맥주집에서 청년들의 생활의 한 측면을 실감하게 되였고 옛전우와 아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료량없이 맥주집에 들어간것을 후회했다. 도당책임비서가 아니라 청춘도 목숨도 서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수백만 전 세대중의 일개 병사, 공민으로서 당한 모욕, 상처입은 아픈 가슴을 달랠길 없어 괴로와하는것이였다.

그는 총포탄이 처절히 울부짖는 싸움터에서 흘러간 자기의 젊은시절을 추억했다.

재더미로 된 조국땅, 반토굴집!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쟁에서 남은 젊음과 의지와 뼈힘을 바쳐 번듯한 집도 공장도 학교도… 건설하던 그 간고한 시기를 돌이켜보았다.

전 세대가 그렇게 피를 바쳐 승리한 땅에서, 투쟁과 건설과 창조를 행복으로 여기며 마련해준 요람에서 버젓이, 편안히, 풍청거리면서 바로 그 세대를 모욕하다니?

얼마나 불손하고 배은망덕한짓인가.

낡은 세대라구? 자기들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데 방해가 된다는거지?

그것을 어찌 한 부랑자녀석의 객기어린 말로 스쳐지날수 있겠는가.

저따위 젊은 건달뱅이들이 아무 근심걱정없이 먹고 살고 거리에서 방자하게 굴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젠 나이가 많지만 자기가 건설하고 창조한것을 지킬줄 알며 어떤 젊은이들한테 사회의 소중한 정신물질적재부를 어떻게 물려주어야 하는가를 알고있다.

《정치부사단장동지… 자식 하나 온전히 건사하지 못해 정말 부끄럽습니다.》

《…》

《출장 오셨겠지요?…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이쪽길로 가야 합니다.》

석태진은 종시 아픈 가슴을 달래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끝내 다리를 저는구만.》

《이만해도 다행이지요.》

《집에는 누가 있소?》

《마누라가 혼자 있습니다.》

《채혁동문 아들이 둘이였지?》

《전쟁때야 그랬지요. 지금 큰아들 학봉인 우리가 싸우던 사단에서 중대장을 하구…》

《대를 이었구만. 잘했소. 둘째는?》

《김책공대 졸업반입니다.》

《순봉인 전후에 태여났구만.》

《막내라구 어자어자했더니 영 시라소니가 돼버렸습니다.》

《어느 공장에서 일하오?》

《종합기계공장입니다. 내가 데리고있는데 어디 통 일에 재미를 붙여야말이지요. 정치부사단장동지, 려관에 갈것 있습니까. 우리 집이 널직합니다.》

《고맙소. 후에 가보지. 밤도 늦었는데 인츰 공장에 전화를 할테니 일요일에 순봉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오오.》

《아니 그럼?》

《그렇게 됐소. 내 도당에서 일하오. 자주 만나기요. 참 아까 순봉이네 패거리두목말이요.》

《창범이말입니까?》

《그 녀석은 뉘집 아들이요?》

《도안전국장의 아들입니다. 외아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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