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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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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590회 작성일 20-07-1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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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시행정위원장 서정환은 어슬무렵에 청사를 나섰다.

차고에서 기다리던 운전사가 이전 행정위원장이 타던 《갱생》차를 몰아 가까이 대였으나 서정환은 면구해서 손을 내저었다.

옹근 하루낮에 걸쳐 사업을 인계받고서 부서책임자들과 낯을 익힐겸 간단히 협의회를 마친 그였지만 좀처럼 시행정위원장이라는 새 직무에 익숙할수 없었다.

아직도 먼 산골군농기구공장의 썰렁한 단조작업장, 강철 단냄새와 쇠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톤반짜리 공기함마앞에 서있는 심정이다.

공기함마는 숨가삐 오르내리며 쉬쿵거리다가 모루우의 단쇠를 면바로 쾅쾅 내리찍는다. 집게를 잡은 손에 닿는 충격은 어깨뼈를 부스러뜨릴듯 하고 얻어맞은 단 쇠덩어리에서 떨어진 쇠찌에 신발천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마쳐온다.

서정환은 60년대 말에 큰 군수공장의 지배인으로 일하다가 해임되여 그 농기구공장의 단조공이 되였다.

젊은 시절의 간고한 로동생활체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정신육체적부담이 둔중한 쇠덩이처럼 내리누르는 힘겨운 단조공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을것이다. 쇠덩이를 달궈 때려내는 단조작업은 젊은 사람들이 해볼만 한 일이지만 나이 쉰고개에 이른 정환에게는 무리한 직업이였다.

7년전 여름날, 석연치 않은 해임리유로 하여 억울함과 반발심이 가슴을 뒤끓게 하였고 좌절감에 피눈물을 삼키였지만 그는 차례진 단조쇠집게를 마땅한것으로 틀어잡았다.

지배인자리도 당이 준 직무이고 단조공도 당이 맡긴 초소라고 생각했다.

그래 7년세월 어느 하루 소금땀이 속적삼을 즐펀히 적시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이겨내였고 나중엔 단조일에 습관될수 있었으나 마음속에 낀 먹구름만은 가시지 못했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서정환동무에 대해 말씀이 계셨습니다.》

새로 부임된 도당책임비서의 묵직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리고 그 일군이 앞상을 에돌아와서 손을 꽉 잡아주며 일을 많이 해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신임에 보답하자고 고무해줄 때 서정환은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해빛이 가슴속 하늘에 낀 먹구름을 날려버리고 활짝 비쳐든 그 순간 정환은 기쁨에 취하여 몸을 비칠거렸다.

서정환은 지금도 자신의 운명에 차례진 변화를 믿기 힘들어했다. 그는 가로수가 늘어선 포석길로 이전 행정위원장의 집을 찾아가고있었다. 인제는 그의 집이였다. 안해는 화물자동차에 이사짐을 싣고 낮에 도착했을것이다.

길 량켠에 산간도시답게 그닥 높지 않은 아빠트들이 보기 좋게 늘어섰다. 타일을 붙인 건물벽에는 붉은색으로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고 쓴 대형구호가 걸려 저녁 어스름속에 빛나고있었다.

가로수들에서 때 이르게 황이 들어 떨어진 나무잎사귀들을 간간히 날리며 차들이 분주히 달려갔다.

퇴근길에 오른 청년들이 유쾌한 말을 주고받으며 그의 옷자락을 스치고 길이 좁다하게 지나갔다.

저만치 앞에서 웬 사람이 무연탄을 가득 실은 손달구지를 힘겹게 끌고가고있었다. 무연탄 중량에 눌린 바퀴가 삐걱거리는게 금시 빠질것 같았다.

언덕배기밑에 이르자 손달구지임자는 힘을 쓰느라 새우처럼 등을 꼬부리고 손달구지채를 끌어당겼다. 손달구지는 더디게 올라갔다.

서정환이 손달구지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손달구지가 쉽게 오르자 주인이 고마운 낯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기름때에 절은 모자옆으로 재빛의 머리칼이 성깔사납게 삐여져나왔으나 눈빛은 온화하고 굵은 주름살이 미간에 박힌 순박해보이는 얼굴이였다.

《숨돌리지 말구 어서 올라갑시다.》

서정환은 시원히 이르고 탄이 꺼멓게 묻은 손에 힘을 주어 손달구지를 밀었다. 손달구지는 한참만에 언덕배기에 올라서고야말았다.

서정환은 허리를 펴고 탄가루묻은 손을 털었다.

《이거 어디 나들이가는분을 수골 시켰구만요.》

손달구지임자는 땀에 젖은 이마의 모자채양을 손등으로 밀어올리며 미안쩍어했다.

서정환은 푸수하게 웃으며 흰샤쯔에 넥타이를 받쳐입은 자기의 양복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도당책임비서방에 가느라 정말 몇해만에 차려입은 양복이였다.

《써레기라도 한대 피우시겠소?》

손달구지임자가 방수포로 만든 담배쌈지를 꺼내들자 서정환은 사양 않고 신문지를 오린 담배말지를 집어들었다.

그가 탄묻은 손으로 솜씨있게 마라초를 한대 말아물자 손달구지임자는 저으기 놀라와하더니 웃주머니에서 투박하게 생긴 휘발유라이타를 꺼내 철컥 소리나게 불을 켜주었다.

《담배맛이 좋군요. 집에서 심은겁니까?》

《무산독초씨를 가져다 심은건데 풍토탓인지 본산치보다는 썩 못합니다.》

《탄은 어데서 가져옵니까?》

《화물역 저탄장에서 한줌한줌 쓸어모았습지요.》

《저탄장에 무연탄이 없지요?》

《휑뎅그렁한게 바람에 날릴것도 없지요. 야단났수다. 오래잖아 나무잎이 떨어지구 북관땅인 우리 고장은 가을꼬리없이 겨울추위가 닥치는데 공장두 집두… 사람사는 도시가 탄이 없으문 어떻거겠소.》

서정환은 시행정위원장직무의 현실감과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아까 부서책임자들협의회에서 시내연료사정은 점찍고 넘어간 문제이지만 거리에서 직접 당하니 더욱 절박성을 띠고 안겨오는것이였다.

《우리 고장에 탄이 나지 않으니 어떻거겠습니까. 가을전에 빨리 기차방통과 화물자동차들을 동원해서 평남도탄광들에 가 실어와야지요.》

서정환은 자기 말이 변명 절반에 시행정위원회사업을 인계받으면서 파악한 일반적인 대책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다른 말을 할수가 없었다.

《손님은 구태의연한 일본새밖에 모르는 시행정위원회간부같이 말을 하누만. 우리 도시간부들은 존엄두 인격두 없는 사람들이 태반인것 같소. 제걸 가지구 제 살림 꾸릴줄 모른단말이요.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해마다 안일하게 국가의 공급지령장을 받아가지구 다른 지방에 가서 머리를 숙이구 탄을 달라겠소.》

소달구지임자는 마라초끝을 힘껏 빨고는 길섶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더 이야기할 흥심이 없는듯 돌아서서 손달구지채를 우쩍우쩍 끌었다.

서정환은 그가 왼쪽다리를 약간 저는것을 보았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도 손달구지를 성한사람 못지 않게 끌고갔다.

서정환은 따라가 도와주고싶었지만 그가 쏟아던진 랭혹한 비판에 속이 얼얼해서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서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손달구지는 단층사택 골목길로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정환은 손달구지임자와 통성을 하지 못했다는 막연한 후회감이 들었다. 그 사람의 무랍없는 말속에는 시의 연료실태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있었고 일군들의 정신상태와 일본새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었다.

정환은 비난조가 강한 시내 한 평범한 주민의 그 원칙적인 의견이 새 직무를 받아안은 자기에게 절실히 해당되는것으로 받아들였다.

시행정위원회 협의회에서는 서로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두리뭉실한 대책안밖에 누구도 그런 종래의 사업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부정을 하지 않았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에 한한 문제가 아니라 의견자체의 객관성, 옳고 그름에 주의를 돌려야 하며 귀를 기울이고 응해야 하는것이다.

서정환은 잊어버릴번 했던 지난날 지배인시절의 복잡하고도 분망했던 사업의 타성을 되찾은감을 느꼈다. 과거에 대한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규모가 비할바없이 큰 새로운 사업의 주인으로 되였다는 자부심을 배태한 압박감이였다.

그는 변화된 자기의 처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하고서 저녁생활의 활기로 가득찬 거리를 둘러보았다. 낯선 도시이고 처음보는 아빠트들이 늘어선 거리지만 퍼그나 친숙하고 정답게 보였고 이 도시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졌다는 강렬한 의무감이 젖어들었다.

이전 행정위원장이 살던 집은 아빠트거리끝에서 강변쪽으로 조금 벗어나서 나지막한 둔덕에 자리잡고있었다.

둥근 쌍고리무늬를 장식한 세멘트담장을 낮게 둘러친 집이였다. 뜨락에 철이 지나 시들어가는 다리아와 국화가 어설피 남아있는 꽃밭과 배추포기들이 드문히 박힌 여라문평의 남새밭이 있었다.

서정환이 마당에 들어서자 어느새 기척을 알아챈 안해 순녀가 마주 달려나왔다.

옷장속에 아껴두었던 감자주빛쟈케트를 입은 안해의 얼굴은 기쁨에 젖어 빛을 받은 달처럼 환하게 생기를 띤것이 사라진 젊음이 되살아난듯싶었다. 어스름속에서도 엿보이는 관자노리어방의 희끗한 머리칼과 눈귀의 주름살만 아니라면 순녀의 얼굴에서 마음고생으로 서리맞은 지난날 음영의 자취를 알아보지 못할번 하였다. 기쁨과 행복의 충격이 사람을 이렇게 변모시키는것을 보면 인간의 외형의 미는 언제든지 내부의 정신적활성에 바탕을 두는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여보, 왜 그러고 섰어요. 집이 좋지요?》

순녀의 행복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는 불현듯 정환에게 아득히 흘러간, 그래서 잊혀졌던 신혼시절의 안해의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상기시켰다.

어느날,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직장장이 된 정환은 숙달되지 않은 틀진 거동을 애써 나타내며 지금처럼 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과장된 위엄은 순녀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울리지 않는군요. 관료주의자연기를 맡은 배우같아요.》

순녀는 가방을 받으며 나직한 말로 정환의 몸가짐을 나무랬지만 어쩐지 무슨 말을 더할듯 하면서도 못하고 서있었다.

조금 멋적었던 젊은 직장장은 순박한 남편의 본래자세를 바로잡았다.

《무슨 일이요? 응! 내 당신앞에서 다신 이런 겉치레를 안하겠소.》

《직장로동자들앞에서 그러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이봐요… 저…》

《어서 말하오.》

《우린… 아이가…》

체내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부끄러움과 모성애의 짜릿한 기쁨에 떨리는 안해의 부드러운 그 목소리를 어찌 잊을수 있으랴.

그러나 순녀는 불행하게도 석달이 못가서 병으로 류산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자기의 피를 나눠준 자식을 가져볼 행복을 지니지 못했다.

순녀는 그때 참혹한 고통과 절망을 체험하고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목소리마저 달라졌다.

세월의 흐름속에 그런 목소리에도 습관되였던 정환은 새집마당에서 그전날의 애틋한 음성이 되살아난듯 한 안해의 젊어진 얼굴을 보니 이름할수 없는 착잡한 기쁨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것은 안해의 밝아진 얼굴과 온갖 시름이 풀린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부드러워진 목소리에서 받은 인상일뿐이지 결코 흘러간 시간과 젊음을 되살리지는 못하는것이다.

안해는 분명히 운명의 전환으로 차례진 도소재지이주와 아늑한 집과 그늘없는 새 생활을 앞두고 흥분하고 환희에 싸여있는것이다.

《왜 그러고 서고만 있어요?》

《음, 집이 우리 둘이 살기엔 너무 크구만.》

《여보, 우릴 쫓은 이전 도당책임비서도 떨어졌다지요?》

《이보우. 새집에 와서 묵은 상처는 헤집지 말기요. 이제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해 뭘하겠소. 과거는 아프기만 하지. 오늘과 래일에 살기요. 시행정위원회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요.》

《과거가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추억만 가져온다고 잊는다면 래일도 바로 건설할수 없을거예요. 과거와 오늘과 래일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잎새처럼 하나의 유기체라고 생각해요.》

서정환은 순녀의 세파겪은 랭정한 낯빛에서 그의 말이 어떤 유식에서가 아니라 뼈저린 인생체험에서 얻어진 결구의 토로임을 알고는 침묵을 지켰다.

자기때문에 본의아니게 수년간 고생을 해온 안해를 그런 별치 않은 론쟁으로 노엽히고싶지 않은것이였다.

당을 뒤에서 해치지 못해 여러가지로 책동한 그따위 인간들에 대한 안해의 의분은 당연하였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녀인의 상처는 더 쓰리고 아물기 어려운 모양이다.

《세상살이를 보면 정의와 부정의, 가짜와 진짜가 알아볼수 없게 복잡하게 얽힌것 같아도 돌과 보석처럼 분명히 갈라지는거요. 물은 곬을 따라 흐르고 죄는 지은대로 가기마련이지. 맘을 넓게 가지오. 다른게 없소. 그저 우리 운명을 구원해준 당에 어떻게 하면 보답하겠는가 하는것만 생각하면 되는거요.》

서정환의 호방스런 말에 순녀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요. 나도 할바를 알아요. 근데 이게 뭐예요? 장난군애처럼 손이 어지럽군요.》

《탄이 묻었소.》

《가만 있으라요. 물을 떠내올게.》

순녀는 남편의 양복을 벗겨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서정환은 새집들이한 신랑같은 즐거운 기분에 휩싸여 널직한 퇴마루에 앉았다.

담장너머 멀찌감치 보이는 거리쪽에서 저녁소음이 들려오고 금시 켜진듯싶은 가로등들이 어둠속에 반짝거렸다.

검푸른 하늘에 군데군데 널려있는 구름덩이를 헤집고 열사흘달이 기웃이 얼굴을 내밀었다. 불행했던 인간의 운명변화를 못내 기이하게 여기는듯, 축복해주는듯 줄곧 떠나지 않고 서정환을 향해 금실같은 아름다운 빛을 뿌린다.

달빛의 여광에 도시를 둘러싼 검은 산들의 들쑹날쑹한 륜곽이 선명히 드러나고 그우에 떠있는 엷은 구름장들은 은회색을 띠였다.

눈앞에 펼쳐진 밤의 풍경, 거풍을 잘하지 못한 새집의 야릇한 냄새, 석탄내와 내내가 섞여 흘러오는 도시의 저녁공기, 간간이 들리는 차소음… 변화된 환경은 생소하고 익숙되지 못한것이였지만 서정환의 마음속에 정다운 감정, 새 생활에 대한 기쁨과 의욕, 충동적인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담장문을 삐긋이 열고 마당에 슬그머니 들어섰다.

날이 어두워서 트렁크를 든 그 사람이 주춤주춤 걸어와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안고 섰을 때에야 정환은 자기 눈을 의심하며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죄를 지은 사람마냥 어깨죽지를 처뜨린 그 사람은 황급히 트렁크를 땅에 놓더니 깊숙이 허리굽혀 인사를 했다.

《아버지… 그동안 몸 건강하셨습니까?》

《!…》

서정환은 등골로 전류라도 흐르는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굳어졌다. 놀라움과 기쁨은 순간이고 그렇게 잊으려 했던 가슴속의 상처를 마구 칼질하며 잠재한 분노가 서서히 끓어올랐다.

어찌 아버지가 애지중지 길러온 자식을 몰라보랴! 그 아들이 7년만에 가정에 돌아왔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아니, 그저 잠시 양부모를 찾아보려 하는지 아주 돌아왔는지 그것은 모른다.

《어떻게 왔느냐?》

아버지로서 한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겁고 랭담하다 못해 어딘가 매섭기까지 한 물음이 서정환의 입에서 튀여나왔다.

아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기라도 해야겠지만 조금도 그러고싶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을 못했다.

서정환은 아들이 집을 떠날 때, 자기와 결별할 때 옷가지를 싸넣어가지고 갔던 그 낯익은 구식트렁크를 보고 아들이 집에서 아주 살 작정을 하고왔음을 짐작했다. 분노가 더 솟구쳤다.

(배은망덕한 녀석같으니. 그래도 아버지라구, 집이라구 기여들어?!)

서정환은 7년간 쌓였던 고통과 울분, 격노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오를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참았다.

《어이구, 이게 누구냐?!》

부엌문가에서 안해의 놀램과 기쁨에 찬 부르짖음이 들리고 물담긴 비닐소랭이가 땅바닥에 나딩굴었다.

《재영이구나!》

순녀는 비명지르듯 웨치며 허둥지둥 달려왔다.

《어머니!》

《네가 돌아왔구나! 내 아들이…》

순녀는 목메여 울먹이며 아들을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머리며 얼굴이며 어깨를 마구 쓸어본다.

《에구, 수염까지 돋구. 다 컸구나. 몰라보겠다. 어른이 됐어. 그래 고모네 집에서 어떻게 지냈니?》

재영은 순녀의 애무에 덩지 큰 몸을 맡긴채 잠자코 고개를 떨구고 서있었다.

서정환은 정신없이 기뻐하는 안해의 목소리를 귀결에 들으면서 퇴마루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지치고 맥이 빠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의 폭발적인 사랑앞에서 그의 분노는 열이 떨어지고 무색해졌다.

정환은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였다. 아들의 배신, 무참히 짓밟힌 가정륜리로 하여 절망과 슬픔에 휩싸이고 인생에 대한 혐오와 허무로 어찌할바를 모르던 그때의 광경이 되살아올랐다.

…군수공장 지배인 서정환의 집밖에서는 먼 산간군에 이사짐 싣고갈 화물자동차가 서있고 로동자들 몇사람이 묵묵히 꾸린 짐들을 방안에서 날라내왔다.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농기구공장 로동자라는 배치장이 서정환의 심장을 얼어들게 했지만 그는 거의나 무의식적인, 경황없는 손놀림으로 짐을 꾸렸다. 인생이란 평탄한 길이 아니다. 올리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으며 때로는 가시덤불을 헤쳐야 하며 높다란 벼랑을 마주할수도 있다. 절망에 싸여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것이 인생의 원리이며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것이 인간의 본능인것이다.

《넌 왜 짐싸는걸 좀 돕기라도 하지 않고 그러구 있느냐?》

서정환은 아까부터 문설주에 기대서서 말 한마디 않고있는 재영에게 물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아들, 대학입학원서도 쓴 아들이였지만 아버지의 해임으로 앞길이 막혔다. 이제 산간군에 가서 공장에서 로동을 하든지, 농촌일을 하든지 해야만 한다. 저희 중학동무들앞에서 괴로울테지만 어찌겠는가.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데 화를 복으로 만들면 되지 않는가.

정환은 아들의 심리를 제나름으로 더듬으면서 다른 위로를 못했다.

《아버지… 난 집을 나갈가 합니다.》

《나가다니?!》

정환은 아들이 불쑥 내던진 말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놀라서 일손을 놓았다.

《난 촌에 가지 않겠습니다.》

《촌이라구 못 살 곳이 아니다.》

《그래서가 아니예요.》

《이건 가구싶으면 가구 싫으면 그만두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네와 헤여지면 되겠지요?》

《뭐라구? 우리하구… 영 갈라진단말이냐?》

《리해해주세요. 고모가 그러는데 이런 때 양부모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요.》

정환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아찔해나고 눈앞이 뿌잇해졌다. 한참만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재영이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가슴아픈 진실을 결산지어야 하는 준엄한 순간이 닥쳐왔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어떻게 벗어나보려고, 돌처럼 된 아들의 맘을 돌려세워보려고 허둥댔다.

《어쩌면 네가 그런 무서운 궁리를… 우린 널 다섯살때부터 여태 키우지 않았니. 재영아, 너의 엄마는 외로워… 가슴이 터져 죽을게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어찌겠어요. 난 친고모네 집에 가 살겠어요. 나삐 생각말고 아들을 잊어주십시오.》

정환은 유약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렸다. 남의 아들, 자기 피를 나눠준 친자식이 아니니 결국 어려운 때에 양부모를 버리는구나 하는 인간륜리의 모진 갈래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좋다. 네가 그렇게 결심했으면 가거라. 날개죽지가 다 자랐으니 어미새를 거들떠보지 않는것도 세상리치지. 그러나 어데가도 사람은 의리를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부모님이 저를 키워준 은혜는 이담에 꼭 갚겠어요.》

서정환은 치받치는 분노로 억이 막혔다. 주먹으로 이 얄미운 녀석을 한대 후려치고싶은것을 가까스로 눌렀다.

자래운 정이 그의 온몸 혈관마다에서 소리나도록 차겁게 빠져나갔다. 그는 무섭게 랭담해져 남이 된 아들을 쏘아보았다.

《은혜따위의 낱말을 가지구 모욕하지 말아라. 난 내리사랑만을 알지 올리사랑은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하물며 피줄이 다른 너한테서겠느냐?! 의리를 꼬물만큼도 모르는 배신자같은 녀석! 어서 네짐을 싸라!》

정환은 그중 좋은 트렁크를 아들의 발치에 밀어던졌다.

재영은 성난 애숭이수닭마냥 꼿꼿해서 맞섰다.

《난 아버지를 배신하는게 아니라 아버지의 사상과 헤여지는겁니다. 난 죄없이 아버지와 같이 이런 수치스러운 정치적처벌을 받을수 없어요.》

《내 사상이 어떻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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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정환은 뼈처럼 목안에 걸린 말을 더 끄집어내지 못하고 등받이나무걸상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키브스를 한것처럼 답답해나고 손가락들이 경련을 일며 가드라듦을 느꼈다.

남편의 심장질환을 제 몸처럼 잘 알고있는 순녀가 제때에 달려들어와 구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것이다.

 

《아버지, 그동안 무척 고생 많으셨지요…》

서정환은 재영의 자책에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귀결에 들으며 고통스러운 추억에서 깨여났다.

퇴마루앞에 서있는 아들은 분명 7년전 문설주에 기대여섰던 아들, 아버지와 사상과 피줄이 다르다고 부르짖던 그 아들이였다.

그의 격노와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심중의 번뇌를 짐작하고있는 순녀는 다시는 아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듯 팔이 자라는껏 재영을 그러안고서 남편의 용서를 기다리고있었다.

눈물과 자애와 행복한 웃음으로 범벅이 된 어머니의 얼굴, 아들의 침중한 모습은 어쩐지 조화를 이루어 마치 그 어떤 기념사진을 찍는 극적순간을 방불케 하였다.

《그래, 어떻게 왔다구?》

서정환은 용서를 바라는 안해의 절절한 심정, 자식없는 녀인의 무분별하다 할 정도의 뜨거운 애정세계에 빠지지 않으려고 매정스레 다시금 물었다.

안해는 주저하고 자신심 없어하는 아들을 등뒤에서 밀어세웠다.

《아버지… 절 용서해주십시오.》

《뭘 용서하라는거냐? 넌 나의 어지러운 사상과 결별하구 본래 피줄을 따라가지 않았느냐? 넌 잘못한게 없다.》

《전 그때… 처벌받은 아버지를… 사실… 믿을수 없었습니다.》

《인제는 회복되구 출세해서 믿을수 있다는거냐?… 어리석은놈의 자식! 당표를 멘 내 사상은 변한적이 없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도 당과 숨결을 달리한적이 없단말이다. 넌 아버지를 잘못 봤다. 진짜 자식의 눈으로가 아니라 제 리해관계에 맞춰보았을테니까.》

《아버지, 사실 그런게 아니라…》

《변명일랑 싹 걷어치워! 넌 나이를 먹어가지고 나타났는데 그때보다 자존심이 없구나. 날 더는 아버지라구 하지 말아. 나한텐 너같은 아들이 없다.》

순녀가 황망히 나섰다. 그는 재영을 안심시키듯 어루만졌다놓고 퇴마루에 다가섰다.

《이봐요. 그만 성을 가라앉히세요. 재영일 받아주자요. 애가 잘못했다고 하잖아요.》

서정환은 애원에 찬 안해의 얼굴에 낀 잔주름과 희끗이 센 머리를 서글픈 눈길로 보았다. 아들이 그때 결별하지 않았더라면 먼 산골에서 안해는 그토록 모진 맘고생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고도 이제 와서는 한번의 상봉으로 죄다 용서해준다. 지난날의 회계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더해진듯싶다.

그러고보면 데려다 기른 자식이라도 안해와 자기의 사랑은 질적으로 다르다. 안해의 사랑은 포옹이 넓고 변함없이 뜨겁지만 자기의 사랑은 랭담하고 편벽하다.

서정환은 그것을 알고있었고 자식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자기 심중의 분출을 삭일수도 타협할수도 없음을 알고있었다.

《당신은 공연히 날 설복하려드는구만. 자식이 잘못했다고 비는데 차던질 부모가 어디 있겠소. 그러나 저앤 우리와 남이요. 저애자신이 그걸 이미전에 우리에게 랭철히 인식시켰지. 세월이 흘러서 옛 상처는 아물기도 했겠지만 피줄은 달라지지 않소. 그렇소. 난 그걸 뒤늦게나마 깨달았소. 짐승도 한번 덫에 걸렸던 길로는 다니지 않는다오. 난 다시는 제 피줄이 아닌 자식은 기르지 않겠소.》

서정환은 퇴마루밑에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버리고 방안에 들어가버렸다.

그 딱딱한 참나무걸상에 앉기 바쁘게 순녀가 따라들어왔다. 흥분한 안해의 얼굴엔 안타까움과 노염이 짙게 서리여있었다.

《당신은 아까 나더러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 생활을 해나가자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 재영이의 잘못이 과거가 아닌가요? 자식일인데 왜 용서할수 없다는거예요. 피줄이 무슨 상관인가요. 자식없는 내가 정을 쏟아붓고 넋을 태워 길렀는데.》

《과거를 잊어버리는것도… 넋을 태운것도… 다 옳소. 그러나 사람의 정은 피줄을 이기지 못하오. 당신은 뼈저리게 체험하고도 그러누만. 우리가 재영이와 사는건 혈연적으로 타협할수 없는 륜리문제요. 감정상문제구. 난 거치장스러울 땐 헌신짝처럼 차던지고 필요할 땐 부모라고 기여드는 자식이 눈에 불이 인단말이요!》

마당에서 널판으로 된 담장문이 쾅 닫기는 소리가 났다.

순녀는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귀를 강구더니 무언가 예감한듯 다급히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부엌과 방안에서 쏟아진 불빛에 환히 밝아진 마당에는 아들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재영아!-》

순녀는 황황히 소리쳐 부르며 담장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허공에서 안해의 목메인 부르짖음이 가늘게 메아리쳐왔다.

《어데 있니- 재영아-》

안해의 피타는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가지 말어라!》

어둠속을 무작정 헤매면서 찾아대는 순녀의 어머니정에 주린 애끓는 목소리에 서정환의 가슴은 칼로 찌르는듯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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