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85. 공인두 선생과 김수평 선생을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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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85
공인두 선생과 김수평 선생을 회고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 불굴의 애국투사인 공인두 선생을 회고한다
공인두동지는 진해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조국통일전선에 투신했다
광복 후 경남 낙동강 동부지구 지구당 위원장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살았다. 필자가 징역사는 과정에 광주에서 살다가 비전향 출옥했다.
출옥후 2개월도 못되어 또다시 감호처분되어 청주보안 감옥에서 같이 살았다.
사는 과정에 비전향 말살을 위한 고문구타 과정에 불치의 암병에 걸리고 말았다.
적들은 제때에 치료를 해주지 않아 다 죽게 되는 과정에 사회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이미 나을 기회를 놓치고 만 나머지 결국 사회 병원에 나가 죽고만 것이다.
이를 우리들에게 감추려 했으나 결국 폭로되고 만 것이다.
당시 사모님은 결혼한지 6개월 동안 같이 살고 투쟁하느라 돌아다녔기 때문에 같이 살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20년 살고 비전향 출옥했을 때에도 2개월만에 감호처분을 받고 재구속될 때 그렇게 빨리 잡아 넣을려면 그렇게 감옥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왜 내 보냈는가하고 잡아가는 경찰을 보고 두 다리를 뻗고 대성 통곡했다는 것을 듣고 적들에게는 인륜 도덕이란 것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었다.
적들은 환자에 대하여 치료는 고사하고 아픈 약점을 이용하여 전향공작의 호기회로 이용하기 때문에 건강이 유지되는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굴의 애국투사이신 공인두 선생이시여!
동지는 가고 없지만 동지의 살아생전의 혁혁한 투쟁의 업적은 우리 후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시신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유분도 남기지 않는 유족들의 맘은 오죽했겠는가를 생각해 볼 때에 적들에 대한 더없는 분노의 감정이 앞을 가립니다.
그후 사모님은 혼자 살다가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지 못하는 아픈 맘을 이해하여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전국묘소답사반이 조직되어 동지들의 묘소를 찾고 있으나 동지의 유분을 뿌린 장소라도 찾아야 되겠다는 일념을 안고 찾아가고 있음을 널리 이해하여 주기바랍니다.
불굴의 애국투사이신 공인두동지시어 !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겪은 적들의 만행은 천추의 한이 되고 있습니다. 동지의 투쟁경력은 잘은 모르나 일찍이 조국전선에서 간부로 지도 투쟁을 혁혁하게 하였던 것은 역사에 기록될 것임은 물론 마지막 다할 때까지 사상을 굽히지 않고 마감했다는 것은 우리 후대들에 귀감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동지의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아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국의 몰염치한 상황이기도 하지만 저희들의 불찰이 크다느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유족들은 동지의 유분조차 남기지 않고 뿌린 것은 백분 이해되나 앞으로 뿌린 곳을 대를 이어서라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공인두선생 동생은 공상두인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않아 부산범민련 위원장인 이성우동지께 주소를 가르쳐 주면서 한번 찾아가보라고 부탁했는데 유분 뿌린 장소라도 알기 위해서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을 받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과거사위원회에 감옥에서 비전향 말살책속에서 희생당한 동지들 중 공인두동지도 공식적인 결정통고를 받아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배상을 받기 위해서 가족에게 상의했으나 이젠 다 포기하고 미련 없이 살겠다고 반대해서 제기하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2022년 11/30일 2023년 9월26일. 필자 올림.
(2) 그리운 김수평 선생을 추모하면서
김수평선생은 여수출신이다
선생은 보성전문학교와 메이지대학 다닐 때 치안유지법에 걸려 제적처분을 당하여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수 치안부장을 하였다 이 때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50년 6.25합법 때는 여수시 인민위원장을 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부인인 정기순님은 여수시 여맹위원장을 하였다.
여수시 인민들의 평은 광복후 여수시 인민위원장, 좌익계 우두머리, 공산당원, 잘생긴 정력가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여수시하면 남태준 동지, 김체윤동지(합법때 광주시당위원장, 입산후는 노령지구당 위원장), 김도금 여성동무( 9.28 후퇴전 여수 블루스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를 잊을 수 없다.
김수평선생은 1953년 9월에 군산에서 체포당하였다.
선생은 1963년에 출옥했다.
그의 부인 정기순님은 1964년도에 체포당하여 3년 형을 살고 출옥했다.
김수평선생은 출옥후 일찍 돌아가시고 정기순님은 2012년도에 돌아가셨다. 살아 있을 때 여수시에서 적들에게 학살당한 동지들과 민간인 묘지를 참배할 때에 정기순님을 뵈옵고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
여수시는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애국봉기가 일어나 학살만행이 너무도 잔인한 곳으로 유명하며 본격적인 빨찌산 투쟁이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백아산 불갑산 회문산 여분산 운장산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등에서 본격적으로 치열하게 전개 되었던 것이다.
그리운 김수평선생과 정기순 부부의 조국과 인민위한, 미제를 구축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투쟁의 혁혁한 공로는 후대들에게 교훈으로 되고 있으며 길이 기리겠으니 이젠 모든 아픈시름을 다 잊으시고 자주통일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위 자료는 공판기록에 의한 것이니 앞으로 더 있으면 첨부할 것임을 참작하기 바랍니다.
유분은 여수 공원묘지에 있다고 합니다.
2023년 9월 2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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