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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 제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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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1,489회 작성일 21-02-2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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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정은 퇴근길에 올랐다. 날씨로 보아서는 외투계절이 되였지만 아직 그는 엷은 곤색사지의 코트를 입었고 머리는 중절모를 눌러썼다. 늘 발끝을 내려다보며 걷기에 습관이 되여있던 그가 오늘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게 된것은 오늘 하루동안에 몇가지 사업을 무리없이 매듭을 지을수 있었기때문이다. 우선 100년사상사총화과제인 《공산당선언》에 대한 연구발취를 끝낸것이고 다음에는 《근로자》편집부에서 륜독을 의뢰해온 론문 하나를 거뜬히 읽어치웠던것이다.

그는 뻐스를 타지 않고 또 걷기로 하였다. 칠성문고개를 넘으면 고작해야 한 40분 걸리나마나한 거리인데도 대체로 차에 오르게 되군하였다.

나이들면서부터 게으름과의 투쟁을 하기는 한다는것인데 좀체로 그에 대한 성과를 기대할수 없었다.

해가 지자 날씨는 몹시 쌀쌀해졌다. 가방을 든 손이 시릴 정도였지만 염낭에 들어있는 장갑을 꺼내지 않았다. 이제 집에 가면 누가 글을 봐달라고 와있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러루한 내용의 편지가 기다리고있을것이였다.

생활이란 항상 변화무쌍한것이여서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것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서 걱정거리이던 외동딸을 내놓기로 하고보니 얼마동안은 별로 속쓸 일이 없게 되였다. 그러고보니 현재 집필중에 있는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당의 령도적역할》이 문제였다.

한 절반까지는 이전처럼 거침없이 써낼수 있었다. 하지만 70% 정도 나가서는 완전히 지지부진인것이다. 그러고보니 결국 문학작품으로 말하면 절정장면을 만들어낼수 없으니 그 결과는 뻔한것이 아닌가. 어떤 때는 두 토끼를 쫓다가 하나도 잡아내지 못하는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재 형편으로써는 어느 하나도 차요시할수 없었다.

100년사상사총화는 더 말할것도 없고 과학사업에 대한 한생의 총화라고 보는 론문도 역시 그러하였다. 어쨌든 곡절이 있고 노력이 들뿐이지 되기야 되겠지…

모란봉기슭에 위치하다보니 아빠트는 조용한 편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하얀 앞치마를 두른 안해가 가방과 모자를 받아들고 앞서는데 엄한정은 두번째 방문을 열어보는것이였다. 그 방에는 언제나 늦게 들어오기마련인 창전중학교 교원으로 있는 딸 영심이가 벌써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다.

코트를 받아 옷걸개에 걸고있는 안해에게 《왜 저러고있나. 보기흉측하군그래. 젊은게.》 하고 낯을 찡그리였다.

《그걸 누가 알아요. 아픈가 해도 아니래 무슨 일이 있나 해도 아니래, 자기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나요.》

《허어, 참.》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대야 누구를 놀래울만한 일이 생길수는 없었다.

세수를 하고 거울에 마주서니 누가 놀려주면서 말한 《전면후퇴형》 번대머리가 이제는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눈시울에는 가느다란 실주름이 몇겹이나 돌아가 정기가 없어보이였다. 습관적으로 머리빗을 집어들었지만 숱이 없어서 손댈 여지가 없었다.

《글쎄 말을 해야 알게 아니냐. 네가 그러고있으니 집안이 산란해 지잖니…》

안해의 푸념소리가 들려왔다. 가정의 분위기를 능숙하게 조절해가는 안해가 이쯤하면 거기에 무슨 까닭이 있을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한정은 그런 사말사에 상관하거나 끼여들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새도 없었다.

그는 저녁상을 물리고나서 래일의 준비에 빈틈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선언》을 펼치고 탁상등을 켰다. 한시간이상 책상을 마주하고있었지만 웬일인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계속 아래방에 신경이 쏠리였다. 무슨 말인지 알수는 없지만 에미는 따지고 딸년은 강하게 반발하는것 같았다. 그런대로 엄한정은 무관심이라는 만능의 방패를 내대고 글읽기를 계속하였다.

밤 10시가 넘었을가 한데 문이 방싯이 열리더니 만사에 용의주도한 안해가 눈물이 글썽해서 들어섰다.

《여보, 방해될것 같아 참고참다가 의논해보려고 해요. 저애 일이 야단났군요.》

《뭔데 그렇게 신중하오?》

《정말 이건 신중한 문제야요. 아버지가 알가봐 벌써 한 닷새전부터 아이기색이 이상한걸 그럭저럭 숨겨왔는데 더 묻어두지 못하게 됐나봐요.》

《서론은 그만하고.》

《이런 땐 귀담아들어줘요. 제발.》

《아니 아직 꼭지도 떼지 않고 걸고들기부터 하니까. 나 참.》

담배꽁초를 재털이에 꾸겨박고 의자를 삑 돌려놓는다.

《뭐요, 도대체 계집애 하나가 집안을 계속 휘저어놓으니까 이건.》

《저애 말을 들으면 남자쪽에서 무슨 곡절이 있는것 같다는거야요.》

《곡절? 무슨 곡절. 연극, 연출이나 하는 청년에게 곡절이란 도대체 뭐요.》

《글쎄 그걸 대라구 아무리 달구어도 말은 않고 콜짝콜짝 짜기만 하니까 애간장이 타서 숯이 되지요.》

《알만하오. 사랑에는 곡절이 있는 법이요. 그 과정에 차츰 융착돼서 나중에는 어느게 어느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되는건데 내버려두오.》

《아니야요. 내버려둘 정도는 지났어요. 그러단 아이가 머리가 돌든지 무슨 일이 날것 같아요.》

《위협이군…》

엄한정은 다시 책상을 향해 돌아앉더니 《방해하지 마오, 제발.》 하고 머리를 흔든다.

언제나 양순하기만 하던 안해가 발끈 성을 내였다. 제딴에는 딸애의 운명문제라고 보는데 이렇게까지 무관심할수가 있느냐는것이다.

《여보! 당신은 이집의 세대주가 아니나요. 지나가던 손님이래두 같이 걱정을 하겠는데 이렇게까지 무정할수가 있어요.》

천식증때문에 겉늙어보이는 안해의 눈에서 번개불이 번쩍하였다. 한생 같이 살아오면서도 이런 분격은 몇번 본것 같지 않았다.

《이거야 정말 머리가 쑤셔서 뭘 해내겠소. 나더러 도대체 어쩌라는거요.》

그는 책을 밀어놓고 안해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이건 귀신한테 홀린것처럼 뭐가뭔지 알기나 해야 손을 쓰지. 그래 그 사람이 어쨌다는거요. 저쪽령감이 한사코 매달린것도 있지만 나도 형걸이가 똑똑해 짝이 됨직하다고 보았으니까 그런건데 지금에 와서 안되겠다는거요. 안되겠으면 말라고 하오. 뭐가 무섭소.》

《왜 자꾸 고함을 쳐요. 옆에서 들으면 싸우는줄 알겠수다. 형걸이와 사이가 맞지 않아서가 아니예요.》

《그럼 뭐요. 남녀혼약문제인데 둘이 마음에 맞으면 다지 그외 뭐가 또 있소. 도대체!》

《에그, 나도 모르겠수다. 이건 차근차근 들어보고 판단하는것이 아니라 왝왝 고함부터 치니까.》

《야! 영심아!》

엄한정은 방문을 열어제끼며 또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되자 차라리 잘 되였다고 보았는지 안해는 급히 달려나가 딸의 팔을 부축해서 아버지앞으로 끌어왔다.

《그래 무슨 일이 있다는거냐. 말해봐라.》

엄한정은 한껏 자제력을 발휘해서 온건하게 물었다. 그렇지만 영심이는 이미 각오가 돼있어서 입을 딱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하라는데, 혼자만 그러지 말고. 싫다는거냐?》

그래도 전혀 반응이 없다. 이렇게 되자 안해가 참아내지 못하였다.

《야, 영심아! 형걸이가 싫다니… 싫으면 관두자꾸나.》

《아니예요.》

영심이는 지혜로우면서도 우아한 눈을 들어 아버지를 한번 쳐다보더니 눈덕을 내리깔고 더이상 말이 없다.

《그러면 도대체 뭐냐?》

엄한정은 차츰 울기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담배가치를 끼운 손가락이 부르르 떨기까지 하였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에 영심이는 흩어진 옷자락을 바로잡고나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 걱정을 끼쳐 안됐습니다. 사실그대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한 보름전에 형걸동무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우리 연극극장이 좀 복잡하게 되였다, 그중에서도 이 형걸이가 주목대상이다, 아무래도 무사할것 같지 못해,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둘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던것으로 백지화하자, 이것은 영심이를 위해 그렇게 하는것이니 오해하지 말라, 이외 더 깊은 내용은 말할수 없으니 그리 알라, 이렇게 말했어요…》

울음이 터져 말을 못하고 한옆으로 돌아앉는다.

《직장일이 복잡하다 해서 파혼하자는게 말이 되니?》 말이 시작되고보니 안해가 더 조급해난 모양이다. 《얘 똑똑히 말해라. 직장이 복잡하다는건 구실이구 딴 녀자가 있는게 아니냐?》

이밖에도 모녀간에는 많은 말이 오갔지만 엄한정은 한마디도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생각되는바가 있었다. 자그마한 남녀간의 의견차이가 그 어떤 큰 사건을 안고있을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딸애의 심리를 움직여서 해결될 일이 아닐것이다.

《그만하자. 내 좀 알아보마. 내려가 자거라.》

모녀가 물러난 다음 엄한정은 쓴입을 다시며 다시 책상을 향해 돌아앉았다.

《엄선생 계시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였다.

화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나 문가로 나서는데 그앞에 안경을 번뜩이면서 키가 껑충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것은 방금전까지 말밥에 올랐던 형걸의 아버지 리기찬이였다. 술내가 물컥 풍기였다.

역해하는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리기찬은 고개를 돌리고 외투를 벗어걸더니 《내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 한잔 했수다. 량해하시오.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건 절대로 아니구요.》 하면서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근시경에 안개가 뽀얗게 서리였는데 그것을 닦을념도 안하고 이쪽저쪽 염낭을 들추어 담배부터 찾는다.

그럴수록 정신이 더 맑아진 엄한정은 담배갑과 성냥을 밀어놓으며 한밤중에 급습이 웬일이냐고 물었다.

《한밤중에 왜 왔는가, 사돈이… 아니, 아니, 사돈은 사돈인데 그것이 계속 될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일화로 남겠는지 그건 아직 모르지. 하여간 약혼한 신랑측 세대주 리기찬이 신부측 엄한정과 담판을 하러 왔소이다. 아니 담판이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어떤 출로가 있는가 의논한다고 해야지. 일종의 협상이지요. 자 이제는 용무를 말할만합니까?》

리기찬은 약간한 술기운을 핑게로 말하기 매우 난처한것을 어렵지 않게 터놓으려 했던것 같은데 정신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멀쩡한것 같았다.

《자! 어느 누군가 말한것처럼 인생이란 하고싶은것을 하지 못하는 반면에 하기 싫은것을 해야만 하는것이라고 하였는데 우리에게 그것이 그대로 적용될수 있겠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리기찬은 자기 본성대로 서두를 한발이나 되게 늘어놓는데 입에 물었던 담배가 떨어져 방바닥에 굴고있는것도 모를만치 흥분되여있었다.

《자! 인생철학은 그렇고 빨리 본론을 말하시오.》

엄한정은 담배가치를 집어서 재털이에 던져넣고 계속하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도대체 형걸에게.》

《아! 이것을 설명하자면 인생문제강의를 몇시간은 해야 하는데요. 엄선생에게 그런 인내력이 있는가요. 절대로 그렇게 못할겁니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아이 형걸이는 이제 사회적으로 매장될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매장, 알지요? 땅에 묻히는것 말입니다. 이것은 거의 확정적입니다. 그러니 이 리기찬이 바빠날수밖에요.》

시작부터가 끔찍스러운걸 보면 간단히 풀릴 문제가 아닌것 같아 엄한정은 한껏 정신을 긴장시켰다.

《한마디로 말하면 연극 <일편단심>이 말썽을 일으킨것 같습니다.》

리기찬이 눈치를 보아가며 문제의 첫 뚜껑을 열어제끼였다.

《그래서요. 연극이 말썽인데 그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겁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요.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한심하게 얽혀있습니다. 알고보니 <일편단심>은 중앙당 박부위원장이 관계하는 작품이랍니다. 그런데 그 일이 여사치 않자 연출가를 보충하려고 하는데 우리 형걸이가 적임자로 걸려들었다는군요. 하루는 연극단단장이 우리 형걸이를 불러 동무가 오늘부터 <일편단심>을 맡아해보라 그랬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걸 거절했답니다. 그래서 말썽이 일어났는데…》

《그러면 이제라도 그 작품을 하겠다고 맡아나서면 될게 아닙니까.》

《바로 그게 문제지요.》 하고나서 리기찬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였다.

《작품이 한심해서 우리 형걸이는 맡을수 없다는겁니다. 맡아놓고 망태기를 치는 날이면 그 책임이 다 자기한테 돌아온다는거지요. 작품이 잘 안될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답니다.》

《그걸 꼭 형걸이가 해야 할 리유는 뭡니까.》

《본래 담당한 연출가는 나이 먹었고 극작술이 낡아서 신진을 하나 붙여 꼭 걸작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속심이랍니다.》

《한심한 판이군.》

《그런데 문제가 복잡한건 선전부 전상환부부장 있잖습니까. 그부부장이 우리 형걸이한테 꼭 시키자고 한다는겁니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우리 애한테 동정을 가지고 말한답니다.》

《전상환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별치 않은 일이 빌빌 꾀여돌아가면서 일이 복잡하게 되였지요. 우리 형걸이는 죽으면 죽었지 의지를 굽힐수 없다는겁니다. 형걸이는 연출가를 그만두고 로동자가 되겠다고까지 야단을 치고있지요. 예술가적량심을 위해서 압력과 제재를 결연히 받아안겠다는겁니다. 판이 이렇게 되였으니 이 집과 약혼한것도 백지화하자고 나옵니다.》

《아!》

엄한정은 책상모서리를 붙잡고 몸을 떨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리기찬은 상의를 벗어서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담배 한가치를 또 입에 물었다. 손이 떨려 제대로 불도 붙이지 못하여 여러번 헛손질을 한뒤에야 겨우 성공하였다.

엄한정은 숨을 죽이고 앉아서 그 자그마한 생활세부밑에 이토록 크고 엄청난 사건이 깔려있다는것이 도저히 믿을래야 믿을수가 없었다.

더구나 믿어지지 않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예술은 강요에 의해 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그것으로 해서 매장이요, 제재요 하고있는것이다.

예술은 예술로, 과학은 과학으로 극복되고 해결되여야 한다는것은 상식의 상식인데 그것이 어떻게 되여 사람들을 그토록 괴롭히게 되는것인가? 이와 같이 론리를 추구하기 시작한 엄한정은 목이 타들고 온몸이 그 무슨 당해낼수 없는 무게에 지지눌리우는것 같아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말을 중단하고 엄한정은 얼굴이 새까맣게 질려있는 리기찬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리기찬은 이쪽 물음에 대답은 고사하고 마치 실신한 사람처럼 연기가 피여오르고있는 담배가치를 주물러 가루가 날만치 부서뜨리고있었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할말도 없거니와 말해보았대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것을 서로 잘 알고있는것이다. 모녀가 마주앉아 울고있는지, 아니면 두 세대주가 혹시 좋은 수를 생각해내고있으려니 해서 그런지 아래방에서는 전혀 인기척이 없다.

포연탄우속을 뚫고 전쟁 3년간의 불길을 헤쳐온 로병 엄한정은 자기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능해졌는가 저주하였다. 직장에 일이 복잡해졌기때문에 파혼한다는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해서 될대로 되라 하고 방임할수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엄한정은 심리적사다리를 한칸씩 한칸씩 톺아올라갔다. 그리하여 끝내 도달한것이 이 사태를 당조직에 보고하고 그에 대한 판단과 대책에 기대를 가지는외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여기까지 사색을 끌어올리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엄한정은 빚어세운것처럼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는 리기찬을 향해 나직이 말을 건늬였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 대낮처럼 밝은 로동당시대에 이런 부정적인 현상을 묵과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무감각상태에 빠졌던 리기찬의 눈이 이글이글 타는 숯덩이처럼 되여 이쪽을 노려보고있다.

《무슨 결심?》

《조직에 보고.》

《무슨 조직?》

《중앙당 조직부에.》

《뭐요? 중앙당 조직부?》

《그렇소.》

《아, 참 가련하군. 당신은 학술에서도 <원문대로> 그 모양이더니 생활에서도 역시 그렇구만.》

리기찬은 기운차게 들어올리였던 팔을 맥없이 떨구며 입을 벌리였다. 너무나 기대에 어긋나 놀랍다는 기색이다. 그러나 엄한정은 자기의 결심을 조금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이 사태를 그냥 그대로 보고할테요.》

《하하하.》

리기찬은 고개를 뒤로 제치며 어깨를 야단스럽게 흔들어댔다. 리지적이고 영민한 그의 눈은 정신착란자에게서나 볼수 있는 그런 공허하고 허탈한것이였다. 마치 실성한 사람같이 너털웃음을 제지시키지는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였다. 한쪽은 진지하고 한쪽은 야유하고있는 극단한 두 감정은 도저히 융합될수가 없었다.

이때 엄한정의 뇌리에번개불처럼 번뜩이는 한줄기 섬광이 지나갔다.이것은 분명히 감각적이고 본능적이였지만 그래도 부정해낼수 없는 하나의 확신이며 기대였다. 그의 눈앞에 친애하는김정일동지의 근엄한 영상이 나타난것이다. 항상 그러하신것처럼 미소를 짓고계시였다.

그이의 그 미소, 신념이 생기고 의지가 생기고 기대와 희망이 생기는 그 미소였다. 그 순간 엄한정의 온몸에는 신심과 용기가 물결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그렇게 자리잡았는지 알수 없지만 그이를 뵈옵거나 그이의 영상을 그려보는 그것만으로도 무슨 문제에서나 신심이 생기고 그것은 곧 자부심과 용기로 변하군하였던것이다.

공산주의운동과 관련한 사상리론문제에서도 그렇고 당안에 나타난 이러저러한 편향을 종합분석하고 대책을 세우시는것을 보면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불길과 같은것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온갖 부정의와 불의를 태워버리는 정의의 불길이였다.

이 불길이 타오르고있는 한 무서울것이 없었다.

한편 리기찬은 자기식대로 엄한정을 바라보고있었다. 전혀 미지의 세계에 훌쩍 끌어들이고보니 어리둥절해진 그 얼굴도 볼만하지만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엄한정의 시선이 가련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평온해지고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충격도 없었던듯 이전 모습으로 되돌아간것이 자못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리선생!》 하고 엄한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만하면 용무가 끝났수다.) 하는 식으로 웃옷을 걸치고있는 리기찬에게 말을 걸었다.

《내 결심은 확고합니다. 당중앙에 실태를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겠는지 아니면 불리하게 되겠는지 그것은 알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우리대로 아전인수격일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녀들문제는 그대로 두고봅시다. 흔들리지 말고말입니다.》

《엄선생!》

리기찬은 팔을 내저었다.

《놔두시오. 운명에 맡깁시다. 그게 상책입니다. 엄선생은 어떤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특별히 달라질것도 없고 기대할만한것도 없을겁니다. 밤도 깊었는데 오늘은 이만합시다. 래일은 항상 오늘보다 현명하다지 않습니까. 래일 또 생각하기로 하구요.》

리기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드는데 초인종소리가 났다. 복도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형걸이의 목소리였다.

《허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군.》 하고 리기찬이 방문을 나서면서 《야 형걸아, 네 문제는 다 해결이다. 완전무결하게.》 하고 웨치듯 말했다.

그러거나말거나 형걸은 아버지쪽에 대고 눈을 흘기였다. 맨머리바람에 잠바를 걸친 그는 엄한정에게 묵례를 하고나서 영심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기세로 보아 단둘이 무슨 결판을 내보자는 속심인것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바에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당사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좀더 나누는것이 어떻습니까.》

엄한정은 리기찬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그만하면 된것 같은데 정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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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리기찬은 영심이 방에 들어가 형걸이와 영심이를 데리고 서재로 나왔다.

《량쪽에 둘씩이니 여기에 다 털어놓고 이야기해보자. 우리 둘이는…》

그는 엄한정과 자기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대체로 의견이 합치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일체 변동이 없다는 립장이다.》

《아버지!》 하고 형걸이 고개를 들고 첫끝에 앉은 자기 아버지와 그다음에 엄한정 그리고 자기 왼쪽자리에 다가앉은 영심이를 차례로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그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립장입니까. 그리고 이 문제는 영심이와 나외에 그 누구도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이 문제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운명문제로 걸려있는지 모르기때문에 그럴수 있습니다. 제발 좀 간섭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니 넌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거냐, 응? 넌 나이 젊었으니까 뭐나 다 쉽게만 생각하는데 인생이란 그런게 아니야.》

《글쎄 저두 어르신네들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히 변동이 있다 없다 그렇게 처리할것이 못됩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있니. 우리도 앞뒤를 재고 아래우를 다 보고 그러는거야.》

《그런데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게 그게 말이 됩니까?》

형걸은 너무 답답해서 뜨개옷 샤쯔의 목줄을 잡아당겨 한껏 늘궈놓고나서 말을 계속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리형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단장은 나더러 래일 떠나 제철소로 가서 용해공으로 일하라고 합니다. 로동단련을 해서 버릇을 뗀다는것입니다.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그때는 적을 떼서 먼데로 보내겠다는겁니다.

백암림산에 가서 아주 벌목공이 될것이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이 곡절을 아무 죄도 없는 여기 영심동무한테까지 들씌워놓을수가 없잖습니까.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전 체면을 차리자는것도 아니고 그 무슨 리득을 보자는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리해해주지 못하는 아버님이라면 그건 너무 무정하지 않습니까. 제말이 틀립니까. 말씀 좀 해주십시오.》

《글쎄 어서 다 털어놓고 말을 해라. 연출을 맡는다 못맡는다 하는것만으루 그렇게 재능있다는 네가 연출을 그만두고 로동단련을 한다, 약혼한걸 파혼하겠다 어쩐다 하는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 말이다.》

《이건 사람이 미치든지 일이 나겠군.》

형걸은 가슴을 움켜잡고 와들와들 떤다. 가슴에 품고 혼자 묵새기고말자던것이 더 큰 말썽을 일으키게 된것이다.

《에익, 참!》

형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자기 아버지켠에 대고 실토정을 한다.

《혼자만 알고말자던것인데 이건 정말… 그럼 제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며칠전부터 나를 놓고 사상투쟁이 시작되였습니다. 말썽으로 된것은 역시 <일편단심>을 맡으라는 조직의 지시를 거절한것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상적으로 분석되면서 소위 <창작의 자유>를 주장한다는것으로 되였습니다. 수정주의사상이 표현되였다는거지요. 그래도 완강히 뻗대니까 이번에는 대학다닐 때 쓴 졸업작품까지 문제로 되였습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만행을 진하게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자연주의이고 염전사상을 고취한것으로 되였다는겁니다.

그것은 그때 얼마간 얘기되다가 말았던것인데 오늘에 와서 다시 새롭게 문제거리로 되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문제가 제기됐는지 아십니까? 아! 이건 정말.》

《말해라 말해.》

리기찬은 퍼렇게 질린 얼굴을 들고 마깝잖은 시선으로 아들을 다그어댄다.

《아, 이것만은…》

《어서 말해라!》

《말하지요.》

형걸은 어깨가 축 처지며 맥없이 대답을 한다.

그는 천천히 뒤를 이어대였다.

《여태 난 그런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1962년인가 63년에 아버지 론문이 어느 월간지에 실렸답니다. 그것이 결국은 대안체계와 모순되고 수정주의와 통하는 견해라고 합니다. 그래 본인의 자유주의와 가정의 나쁜 영향이 결합되여 오늘과 같은 비당적현상이 나오게 되였다는겁니다.

자! 보십시오. 판이 이렇게 번져가고있는데 제가 이제 어떻게 견디여냅니까. 내가 더 완강히 나가면 이제 어떤 <죄상>이 더 첨부되겠는지 알수 없습니다. 최상의 방도는 군말없이 접수하고 물러나는겁니다. 리해되십니까?》

무릎우에 놓인 주먹이 우들우들 떨릴만치 그는 흥분되여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기분과는 정반대라고 할만치 랭랭해있는것은 엄한정이였다. 그는 내심으로 가볼데를 다 가보았고 예측과 가상으로 온갖 경우를 다 들추어보고 체험해보았기때문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리기찬은 자기 아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었고 또 그것을 계속 주장하였기때문에 《자! 보시오. 당사자가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어쩌면 좋겠소.》 하는 식으로 천천히 담배만 피우고있었다.

《아! 참말 상상을 초월하는구만…》 하고 엄한정이 말을 떼자 숨을 죽이고 분위기를 지키고만있던 영심이 《흑》 하고 흐느끼였다.

그렇게 되자 엄한정은 상체를 뒤로 제끼며 의자등받이에 기대면서 긴 한숨을 내쉬였다. 옹송그리고 앉아 울고있는 딸애가 무척 가련해보이였다.

뭐니뭐니해도 영심이만큼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것이였다. 엄한정은 딸애를 향하여 나직이 말하였다.

《너희들 말대로 우리야 부모이다뿐이지 직접 당사자야 아니지. 그러나 다 있는 자리에서 네가 말해보아라. 너는 벌써 오래전부터 알고있어서 생각을 많이 해봤겠으니까.》

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영심이는 헉헉 숨을 들이그으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모두 영심이쪽을 지켜보고있다가 일제히 긴 한숨을 내쉬였다. 방안은 정적에 눌리고말았다. 그때 영심이는 얼굴을 가리웠던 손을 내리고 나직이 그러나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저는 교육자입니다. 어린 학생들앞에서 저는 매일이다싶이 사람은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의는 꼭 이긴다고 가르치고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이제와서 이것과 달리 말하고 달리 행동할수 있겠습니까.

저는 형걸동무를 믿습니다. 형걸동무가 옳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두려운것이 없습니다. 정의는 이깁니다. 꼭 이깁니다.》

영심이는 참고참았던 울분을 단꺼번에 다 쏟아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운이 진해서 앞으로 내들었던 손이 차츰 처져내리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것처럼 머리를 숙이면서 흐득흐득 어깨를 떨었다.

《아! 철부지들이니까 말이 통해야지.》

리기찬은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옷걸개에서 외투를 벗기였다. 그렇게 되자 엄한정이 따라나갔다.

《우리는 우리대로 같고 당신네는 당신네대로 같고…》

씹어뱉듯이 리기찬이 이런 말을 남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리기찬은 그길로 허담의 집으로 찾아갔다.

허담은 해방직후 대학 특설반때 리기찬에게서 배운적이 있었다. 대학을 마친후에도 계속 허담은 리기찬을 스승으로 존대하였다. 그는 중앙당에서 허담이 전상환과 같은 과장급으로 있었기때문에 서로 통할수도 있다고 보았다. 어쨌든 중요한 고리는 전상환부부장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를 허담은 능히 리해시킬수도 있을것이였다.

엄한정은 침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웠다. 옆방에서는 리기찬이 《철부지들》이라고 한 그들이 시간가는줄 모르고 옥신각신하고있었다.

(쟈들의 운명이 이제 어떻게 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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