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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를 통해 본 세계적인 유전학자 계응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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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775회 작성일 20-12-0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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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유전학자 계응상 선생의 일대기에 관하여 조선의 오늘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 과학으로 조국의 존엄을 떨친 계응상 선생은 과연 어떤 분인가. 올려진 기사를 그대로 게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일화를 통해 본 세계적인 유전학자 계응상 (1)

위대한수령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인민이낳은세계적유전학자이며육종학자인계응상선생도민족적자존심이남달리강하고과학적신념이뚜렷한사람이였습니다.》

공화국의 자랑스러운 력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사람들속에는 과학으로 조국의 존엄을 떨친 계응상선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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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첫 박사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전 및 잠학자로 삶을 빛내인 계응상선생.

이제 우리는 계응상선생이 남긴 일화를 통하여 순탄치 않은 그의 생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100점만점으로 중학교에 입학한 화전민의 아들


1893년 12월 27일 평안북도 정주시 석산리의 화전민의 가정에서 태여난 계응상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배움에 대한 욕망으로 가슴 불태웠다.

계응상선생이 일곱살났을 때였다.

뒤산에서 소를 먹이던 그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놓아먹이던 소가 남의 집 보리밭에 들어가 파릇파릇 돋아나던 봄보리를 적지않게 축낸것으로 하여 소동이 일어났다.

성이 독같이 오른 아버지가 물푸레나무회초리를 꺾어들고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들이 서당에 갔다는것을 알고 고개너머 웃마을로 찾아갔던 아버지는 서당의 퇴마루에 무릎을 꿇고앉아 문짬으로 울려나오는 글읽는 소리를 받아외우고있는 어린 계응상선생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턱방아를 찧으며 동냥글을 외우는데 어찌나 열성이였던지 그는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선것도 감감 모르고있었다.

아버지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물러났다.

아들의 향학열에 감복한 아버지는 째지게 가난한 살림이였지만 다음날부터 그를 서당으로 보내였다.

계응상선생은 서당출입을 한지 한주일도 채 되지 않아 《천자》를 뗐다.

그는 가마밑을 긁어 멀건 죽물을 타서 먹대용으로 썼고 넙적한 나무잎을 펴서 망돌에 지질러놓았다가 그우에 풀대로 만든 붓으로 글을 썼다.

그것도 없을 때에는 자그마한 모래함을 만들어놓고 그우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는 지우고 또 글을 쓰고는 지웠다.

이렇게 직심스럽게 공부를 한 그는 서울에 올라가 전과목 100점 만점으로 보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일화를 통해 본 세계적인 유전학자 계응상 (2)

일생을 누에연구에 바치게 한 계기


서울에 있는 보성중학교에 입학한 계응상은 고학으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는 속에서도 시간을 아껴가며 지식을 쌓아나갔다.

생물학에 커다란 관심을 둔 그는 하루수업이 끝난 후에도 동식물표본을 만들기도 하고 개구리로부터 시작해서 흰쥐, 토끼 등을 해부하고 현미경으로 동식물조직편들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그러다나니 그는 늘 밤이 깊도록 학교에 남아있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어느해 여름방학때 그는 한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학생과 함께 강화도에 간 일이 있었다.

강화도의 농가들에서는 누에를 많이 치고있었다. 그런데 그때 넉잠을 자고난 누에들이 갑자기 진물을 줄줄 흘리며 모조리 죽어가고있었다.

죽은 누에를 삼태기로 쓸어내던 한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와서 병든 누에를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함께 간 학생은 자기네는 그런것과는 인연이 없는 학생이라고 하였지만 계응상은 무작정 그 녀인을 따라나섰다.

병든 누에들을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해부를 해보았지만 발병원인을 찾지 못한 그는 죽은 누에며 누에알들을 싸가지고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와 끼니도 잊고 현미경앞에 붙어앉았다. 진지한 관찰끝에 누에알들이 세균에 오염되였다는것을 확인한 그는 서둘러 강화도에 다시 내려가 이러한 사실을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병균이 없는 누에알을 사다쓰게 하였으며 병균이 있는 알을 팔아먹은 종란장경영자들한테서 배상금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누에를 치는 사람들을 얼마간 도와줄수 있게 된것이 그는 무등 기뻤다.

후날 계응상선생이 다름아닌 누에를 연구하는 학문에 일생을 고스란히 바치게 된것은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기쁘게 해주고싶은 심정이 크게 작용했던것이다. (계속)


일화를 통해 본 세계적인 유전학자 계응상 (3)

유전의 비밀을 탐구하는 무서운 정열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4월부터 오산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던 계응상선생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안고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당시 유전학은 아직 유년기에 있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유전의 법칙들을 리용하여 누에치기에서 1대잡종체계를 도입하였다.

계응상선생은 누에를 출발재료로 실험에 전념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의 비밀들을 새롭게 밝히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백종의 누에품종을 모조리 수집해가지고 그것을 지배하는 유전의 조화를 완전히 해명하여 조선의 기후풍토에 알맞는 새로운 누에품종을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스스로 엄격한 계률을 정하고 최대한의 시간을 짜내여 학업에 열중하였다.

하숙집에서부터 대학에 오가는 30분동안에도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4년동안에 영어, 도이췰란드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빈궁속에서도 그는 오직 학업에만 전심하였다.

계응상선생은 하숙집주인에게 대학공부를 하는 4년동안에 고향에서 오는 일체 모든 우편물을 건사했다가 졸업하는 때에 내여줄것을 부탁하고 언제 한번 거기에 눈을 팔지 않았다.

참으로 그의 일거일동은 시간표에 의하여 1분1초도 틀림없이 정시정각으로 달리는 렬차와 같았다.

그는 새벽 5시에 깨여나고 밤 1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며 엎드리거나 기대거나 누워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것을 허용하지 않고 반드시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아서 공부하였다.

그는 오랜 시간의 현미경작업으로 인한 눈의 피로를 푸는 그 짧은 시간마저 아까워 손으로 다른 조작을 하군 하였다.

계응상선생의 지도교원이였고 한때 세계유전학회 부회장을 한바 있는 일본인교수는 동료들에게 자기에게는 제자가 한사람반이 있는데 그 한사람은 계응상이고 반은 일본인학생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일본인제자가 일본유전학회의 거두로 된 사실에 비추어볼 때 계응상선생의 과학적재능과 특출한 실력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었는가를 잘 알수 있다. (계속)


일화를 통해 본 세계적인 유전학자 계응상(4)

나라없는 과학자의 설음


대학을 졸업한 후 계응상선생은 유전학, 생리학 및 해부학부문에 대한 5편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론문들은 당시 실험담당자였던 일본인의 이름으로 도이췰란드어로 출판되였다.

이러한 사실앞에서 식민지지식인의 설음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비로소 자립적으로 기어이 조선의 새로운 누에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한 연구사업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는 대학연구원을 졸업하자 일본의 유전학발전을 위해 한몫하라며 달콤한 말로 회유기만하는 대학측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1930년 4월 중국 광동성 광주시 중산대학 농학교수로 있으면서 누에육종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 10여종의 우량한 누에품종을 육성하였으며 8건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계응상선생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대학에서 연구사업을 할수 없게 되자 윁남과 홍콩을 비롯한 여러곳을 방황하면서 연구사업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나라없는 과학자의 설음을 더욱 뼈아프게 절감하였을뿐이였다.

하여 그는 그동안 자기가 육종한 누에품종들을 소중히 보관해가지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타향살이에서 돌아오는 그를 맞아준것은 반가운 가족이나 친지들이 아니라 쇠고랑이였다.

일제경찰은 중국에서 반일운동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그를 감옥에 감금하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있은 몇달동안에 피타는 탐구의 노력이 깃든 누에품종들은 모두 죽어버리였다.

그때 그는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되여버린 자기의 처지에서 일제에 의해 겪는 민족수난의 쓰라린 비애를 보다 더 가슴사무치게 느끼였다.

감옥에서 놓여나온 그는 일제가 권유하는 원종장 기술주임자리를 차버리고 경기도 수원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사고 거기에서 살면서 누에연구를 계속하였다.

1943년 여름 마침내 그는 고치가 크고 생활력이 강한 새 품종의 뽕누에를 육종해냈으며 그것을 《국잠 43호》라고 불렀다.

그해 겨울 그는 자기의 10여년동안의 누에실험자료를 집대성한 론문 《뽕누에의 고치색 및 알형의 유전에 관한 연구》를 집필하였다. 이 론문은 심사자 전원의 찬성으로 심의되여 그에게 농학박사칭호를 주기로 결정하였으나 그것은 본인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후 조국은 해방되였으나 외세가 강점한 남조선에서 그의 정신적방황은 계속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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