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8. 지리산 뱀사골 함박골의 박영발 비트를 회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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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3-06-20 02:43 조회 5,642 댓글 0본문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8
지리산 뱀사골 함박골의 박영발 비트를 회고해 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지금 조성되고 있는 정세는 미제와 그 주구 윤석렬 패거리들은 무력을 총 동원하여 북침 전쟁 연습에 최후 발악하고 있다. 언제 또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와중에 2023년 6월 17일 비트를 찾아 가자는 젊은 친구들의 요구를 받아서 찾게 되었다.
조성봉 감독의 진달래산천팀은 전적지 기행일정을 변경해서 잡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필자가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위험이 뒤따르리란 염려 때문에 마지막 기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특별히 잡은 것이다.
2) 비트를 발견하게 된 사연
전남 나주군 다도면이 고향인 박남진 선생은 전남 도당 선전부 출판과에서 근무하다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선생은 비트에서 3일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위치를 대강 짐작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나온 후부터 전적지 답사 사업이 할발하게 전개되었다.
2003년 11월 초순에 건강들이 좀 나아져서 박남진 선생, 정관호선생, 손영심여사, 조감독님 일행이 필자와 같이 지리산 뱀사골 산장에 머물면서 함박골에 와 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되돌아가 뱀사골 산장에서 1박했다. 뱀사골 산장은 그 후에 패쇄되어 오늘에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신으로 남아 지금 6.15 쉼터라고 이름부친 위쪽으로 큰 암 바위를 해질녘까지 탐사했으나 찾지 못하고 산장에서 1박하고 모두 하산했다.
귀가 한 후 뱀사골 5만분지 일 지도를 사서 공부한 후 다시 2004년 2월 15일에 비트를 찾기 위해 조감독님, 광주의 박동기님, 기세문님. 라승아님. 필자 5명이 답사하였다.
함박골 6.15쉼터에서 조감독님을 비롯한 4명은 개울가 왼쪽편을 더듬어 큰 바위를 찾아 보기로 하고, 필자는 단신으로 개울 건너 우측편을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필자는 개울 건너편 쪽에서 더듬어 내려가는데 개울가 편편한 곳에서 큰 구들장 트를 발견한 후 다시 돌아 올라 가다 큰 암 바위를 발견하고 그 밑에 구들장트를 발견했다.
이 근방임을 짐작하고 풀뿌리 나무를 잡고 기어오르는데 지금 동굴입구 경사진 곳에 손에 밧테리하나가 잡히길래 손가락으로 파 보니 밧테리 다 쓴 것을 묻어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아래 옆을 보니 동굴이 있음을 발견했다.
얼마나 기뻣는지 모르겠다. 해는 넘어가는데 아무리 동료들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다시 올라오는데 박남진 동지가 말씀했던 쐐밭을 발견하고 6.15쉼터까지 왔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한참 동무들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짊어진 것도 없이 맨 몸이었다.
단신으로 어두컴컴해서 출발하여 9시경에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다.
관리사무소에 찾아가서 이런 사람이라고 하니 수고 했다 하면서 먹을 것을 준다. 사실 나는 목이 타서 물부터 달라고 했다.
관리소에서는 서울에서 제기한 조난신고를 받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차 마침 잘 찾아왔다 하면서 친절하게 대접한다.
먼저간 일행들은 쉼터로 되돌아오지 않고 그길로 뱀사골 골짝으로 내려가 구례읍에서 저녁을 먹는 중 내 전화를 받고 조성봉감독님이 차를 몰고 산장까지 와서 구례읍 식당에서 합류했던 것이다.
이 동무들은 나를 산 타는데 토끼와 같으니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힘들어서 쉼터로 올라오지 않고 그냥 뱀사골로 내려 갔다고 했다.
서울의 손영심누나는 염려가 되어 노고단산장에 조난신고를 한 것이었다.
3) 2004년 2월24일 광주의 시민의 소리 신문사에서 신문사 기념일도 되고 해서 동굴기사를 내기 위하여 모 기자와 같이 눈이 많이 와서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눈발을 헤치고 비트를 찾아가 동굴 내부를 두루 살펴 보았다.
동굴에서 나오는 통로도 아취형으로 되어 있어 기어 엎드려서 바깥에 나오기도 한다.
그후 여러번 찾아갔는데 남원 경찰서 형사들도 찾아가 보기도 했다한다.
동굴 올라가는 사다리도 두 번째나 조성봉감독님과 같이 톱과 대못 망치를 가지고 가서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의 사다리다. 잡목나무를 베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오래갈 것 같다.
3) 쉼터에서 15분정도 내려가면 동굴이 나오는데 그 길은 필자가 동굴을 찾았던 길이었다. 지금은 동굴가는 등산길이 되어 찾기 쉽다.
그 후에 찾는 사람들이 동굴속 남은 잔해들을 한두개씩 가져가면 안된다 해서 감독님과 상의해서 박동기선생을 통해 거두어 전남대학교에 비장해 놓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조감독님과 필자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그후 얼마 세월이 흘러 지금 묘향암 주지 스님이 동굴안을 깨끗이 청소하여 암자로 쓰기로 한다는 조감독님의 전갈을 받고 상의하여 전적지 기념지로 살리기 위해서 암자로 쓰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해서 접고 있는 것이다.
4) 박영발 동지는 경북 봉화 출신이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전평 책임자이며 중앙위원으로서 모스코바 공산대학 재학중 위대한 조국전쟁 때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박우연동지는 충남 도당위원장으로, 방준표동지는 전북도당위원장으로, 박영발동지는 전남도당위윈장으로 임명을 받고 부임하였다.
5) 박영발 동지는 일제 때 항일 투쟁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많이 당해 잘 걸어다니기에는 몹시 불편을 느꼈다.
그래서 재산시 땅굴아지트가 필요했고, 적들이 산에서 공세를 취할 때는 땅굴에서 사업을 조직 지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서실장격인 김정태동지는 언제나 땅굴트에 있을 때는 주변을 떠나지 않고 밤이면 식사와 주위 적정상황과 연락업무를 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결사옹위했던 것이다. 그는 그후 공세가 끝난 후 1952년도에 당 직속부대인 전남연대가 조직되어 연대장으로 투쟁하다가 백운산 진상골에서 보급사업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적들의 매복에 걸려 희생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박영발 동지는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백운산에 박영발 비트가 여러개 있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 그중 한곳은 51년 동기공세 때 사용한 곳으로, 한번 들어갔다 살아나온 곳은 처음이다.
그래서 박영발동지는 빨찌산 묶기 투쟁 지도는 오래 할 수 없다는 것이 었다..
박영발동지는 1953년 5월에 제 5지구당 상임부위원장으로 된 다음 전남도당 부위원장인 김선우동지가 위원장으로 승계되고 빨찌산 총사령관도 부사령인 오금일동지에게 내주고 도당 위원장만 하다가 1954년 4월5일에 백운산 원능선에서 희생 당함으로서 전남빨찌산의 조직적인 투쟁은 종막을 고하는 아픈 역사 기록을 남기었다.
6) 제 5지구당은 경남 전남 전북도 3개 도당 지도부였으나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과 선 연결이 안 되어 실제 중앙당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 박헌영 리승엽 도당들의 미제의 고용간첩이 적발되어 그들의 지도를 받았던 제 5지구당은 자진 조직위를 열어 해체되었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당중앙은 제5지구당을 해체하지 말고 계속 사업하라는 지시문을 가지고 전북도당에 나타났지만 전북도당은 그 지시문을 조사하는 기간에 이미 당이 해체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왜 지구당은 도당보다 상급 당인데 사전에 제5지구당에 보고하지 않았는가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영발동지는 이현상동지와 함께 간부 5명이 평당원으로 나아 앉아 있었기 때문에 1953년 9월 8일에 백운산에서 김선우 위원장동지를 보위하고 섬진강을 건너 문수골 구례군당트에서 하루 밤을 자고 빗점골 제5지구당 트에 도착해서 하루밤을 잤다.
9월 17일에 박영발 동지를 모시고 지금 삼도봉 (당시는 토끼봉이라했음)밑에 임시 아지트를 쓰고 있었다. 그후 보위대동지들의 탐사작업에 의해서 동굴을 발견하고 아지트를 옮기었다.
7) 천연동굴안은 첫째간에 평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일하고 자고 했다. 둘째간은 무전실로 썼던 것이다.
사실 “조국출판사“란 이름으로 당중앙의 모든 지시문을 받을 수는 있으나 선 연결이 없어 보낼 수는 없었다.
실제 5지구당 역할을 수행했다.
그 동굴안에는 김호일 무전사와 리정례여성 동무 기요원과 박갑서 의사와 보위 총책인 전남도당 간부부장했던 강경구동지 외 연락병동지를 비롯한 수명이 있었던 동굴이다.
당시에는 강경구동지와 위원장 연락병 동지를 비롯한 기타 동지는 사업 차 나가 있었다.
노고단 전투에서 중상을 당한 박갑서 의사는 적들의 족적이 좁아오는 관계로 오래 동굴을 쓸 수 없어 다른 곳을 알아 보는 참이었다.
그 때 박갑서 의사는 동굴을 옮길 때 중상당한 자기를 없애 버리고 가지 않을까 해서 이왕에 죽게 되면 같이 죽자하는 폐배적 불합리한 심리상태가 발동하여 보초보는 순간에 박영발위원장을 비롯한 첫째 트에 있던 동지들을 사살하자 무전실에 있었던 리정례동지는 수류탄을 던저 박갑서를 사살하고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자기도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그 후 사업나갔던 동지들이 들어와 보고 참상을 알았던 것이다.(1954년 2월 21일)
이행년 동지가 주치의였으나 53년 8월에 5지구당 해체 문건을 지참하고 백운산 전남도당으로 오다가 한순애 골에서 적들의 매복에 걸려 희생을 당하여 박갑서 의사가 대신했던 것이다.
첫눈이 왔을 때 족적이 나면 그후에 눈이 와 족적을 메꾸지만 눈이 녹을 때는 첫 눈때 족적이 남는다.
그래서 1954년 3월 19일에 적들이 수색하여 들어오는데 족적이 남아 있어 족적따라 동굴에 들어가 보고 참상을 발견하고 박영발동지시신을 산래면 학교로 이동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2010년대에 조성봉감독에게 알아보라고 부탁했지만 주위 사람들도 모른다 해서 지금껏 시신은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9) 박영발동지는 다리를 잘 못쓰는 데 위장까지 나빠 약으로 살다시피 하고 밥은 조금 들지만 건강 상태는 아주 허약 하였다.
그러나 말은 헛된 말이 없어 마치 나무에 못을 박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간단 명료 하였다. 품성은 고매한 성격에 항상 동지적 친밀감을 갖고 있어 다른 간부들도 존경하는 맘을 갖고 절대로 배후에서 비난하는 말을 들어본적 없다.
그리고 수령 당 인민과는 전일적인 단일체제가 된다는 신념을 같고 충성을 마지막까지 다 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평화로운 조건속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지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박영발동지 혁명열사는 조선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고 한다.
원리원칙이 철저하고 수령님과 당 인민들을 위하여 충성을 다 했던 박영발동지를 천만번 회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모택동의 자유주의 배격 11훈에 ”당내 일인의 적은 당외 100만의 적보다 위험하다“란 것을 항상 상기를 해 본다.
동굴의 참사는 적들이 이용할 수 있다 해서 발설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광주시민의 신문에 대서특필 되어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정관호선생은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그 참상을 책에 기록을 안했다.
진달래 산천팀은 언제나 박영발비트를 찾을 때마다 추모제를 지내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박영발 동지여,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후대들에게 맡기고 조국통일의 길 위해 영생하기를 바랍니다.
2023년 6월 12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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