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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6. 다이야몬드 잔혹사를 안고있는 시에라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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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2-04-25 02:15 조회 6,09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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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야몬드 잔혹사를 안고있는 시에라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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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류태영 박사


아프리카대륙의 서부 대서양연안에 자리잡고있으면서 기네, 리베리아와 국경을 접하고있는 시에라레온은 면적이 7만 1 740㎢이고 인구는 약 600만명으로 추산한다.

시에라레온에는 15개의 원주민종족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종족은 불롬족, 로코족, 템네족, 림아족, 수수족, 플라니족, 멘데족 그리고 코노족들이다.

한편 시에라레온에는 원주민외에 18세기말에 외부에서 들어와 정착한 아프리카흑인들의 공동체가 또 하나 있는데 이를 크레올족이라 부른다.

이들의 조상들은 원래 미국과 영국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해방》된 흑인들로서 강제로 시에라레온으로 끌려와 집단적으로 정착되게 되였다.

크레올족은 주로 시에라레온의 수도인 프리타운에 살고있는데 지난 기간 원주민과 크레올족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쟁과 고질적인 내전이 계속되여왔다. 그 싹을 심어놓은 장본인은 바로 미국과 영국이라고 시에라레온의 력사는 말해주고있다.

 

시에라레온의 간추린 력사

 

시에라레온의 력사를 보면 B. C. 500년경부터 원주민이 거주하였으며 불롬족과 멘데족, 템네족과 플라니족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부족사회를 지배하였다.

15세기말 시에라레온에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유럽인은 뽀르뚜갈인이였다. 시에라레온에 요새를 구축한 뽀르뚜갈은 상아를 비롯한 희귀한 자원들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시작하였다.

뽀르뚜갈의 뒤를 이어 네데를란드와 프랑스도 시에라레온에 발을 들여놓고 저들의 리익을 챙기였다.

뒤늦게 이 지역에서의 식민지쟁탈전에 뛰여든 영국은 제일먼저 노예무역에 앞장섰다. 영국은 약삭바르게 시에라레온뿐만아니라 요르코섬과 분드섬까지 점령하여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6~17세기에 영국은 200만명의 노예들을 수출하였는데 당시 영국의 국가수입의 3분의 1이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인것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미국과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법적으로 페지됨으로써 《해방》된 노예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였다.

영국은 시에라레온의 프리타운에 《해방》된 흑인노예들을 강제로 정착시키였으며 1818년에 황금해안과 서아프리카전역을 통치하는 영국총독부를 내오고 그 총본부를 프리타운에 세웠다.

한편 프리타운에 정착한 크레올족공동체는 시에라레온에서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생활하고있었으며 오래동안 미국과 영국식생활풍조에서 살아온 이들은 자연히 본토의 원주민들과 이질감을 느끼게 되였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의 통치로부터 시에라레온의 독립을 성취하려는 열망은 원주민이건 크레올족이건 다를바 없었다.

하여 2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원주민뿐만아니라 크레올족의 공동체도 다같이 시에라레온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1935년에 시에라레온력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에라레온에서 세계최대의 거대한 다이야몬드매장지가 발견된것이였다.

영국은 발견된 다이야몬드의 채굴권을 독점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영국의 거대한 다이야몬드기업체인 드비어스에게 98년간 다이야몬드를 채굴할수 있는 독점권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크레올족공동체출신인 윌리스 죤슨과 크레올족공동체의 후손이며 2세인 브라이트 두사람이 공동으로 시에라레온민족회의(SLNC)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SLNC의 지지세력은 크레올족으로 구성된 프리타운의 크레올족공동체였다.

그런가 하면 1951년에는 원주민출신인 시아카 스티븐스와 밀톤 마르가이 두사람이 공동으로 보수경향의 시에라레온인민당(SLPP)을 창설하였는데 이 조직은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있었다.

그리하여 프리타운 크레올족공동체의 SLNC와 원주민진영의 SLPP는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시에라레온의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을 함께 전개하고있었다.

1955년에 시에라레온에서는 민중봉기가 발생하였으며 두 진영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은 1958년에 투쟁을 보다 효률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두 진영의 운동단체를 모두다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조직인 인민국가당(PNP)을 새로 창설하였다.

PNP의 창설후 독립운동은 더욱 활기있게 벌어졌으며 1961년 4월 27일 시에라레온은 드디여 독립을 쟁취하였다.

PNP의 밀톤 마르가이가 독립한 시에라레온의 초대수상으로 취임하였으며 그의 동생인 알버트 마르가이가 재무장관이 되여 국립은행을 창설하였다. 마르가이형제가 새로 독립한 나라의 요직을 차지한셈이였다.

그런데 함께 PNP를 창설하고 공동으로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한 원주민진영의 시아카 스티븐스는 웬 일인지 갑자기 PNP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새 나라 건설을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시아카 스티븐스의 결별선언은 량편모두에게 충격적이였다.

시아카 스티븐스는 자신의 지지세력인 북부지역의 원주민부족들을 결합하여 전인민회의(APC)를 따로 창설하고 독자적인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던 1964년 초대수상으로 취임하였던 밀톤 마르가이가 갑자기 사망하여 그의 동생인 알버트 마르가이가 제2대수상으로 취임하게 되였다.

그런데 알버트 마르가이는 집권초기부터 고질적인 정권의 부패를 방지하지 못하고 통치력이 무능하여 나라는 곤경에 처하게 되였다.

결국 알버트 마르가이는 1967년에 정국의 불안에 대한 긴급수습책으로 총선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총선결과 북부지역의 원주민부족을 대표하는 시아카 스티븐스의 전인민회의가 66석가운데 32석을 차지하여 대승리를 하였으며 알버트 마르가이 현직수상은 겨우 28석을 차지하였다.

총선에서 완전히 실패한 알버트 마르가이는 집권 3년만에 퇴진하고말았다.

시아카 스티븐스는 1967년에 수상으로 취임하였으며 1971년에는 시에라레온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영국은 시아카 스티븐스의 당선을 극구 찬양해나섰다.

그것은 영국이 1935년에 시에라레온의 무진장한 다이야몬드광산의 채굴권을 드비어스에게 98년간 넘겨주었는데 시아카 스티븐스를 적극 추켜세워주어 그 독점권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차라리 순박하고 무지한 원주민세력이 정권을 잡는 편이 영국으로서는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시아카 스티븐스는 재임기간 독재자로서 악명이 높았으나 영국은 그를 시종 적극 지원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비호와 지원속에 시아카 스티븐스는 18년간이나 집권하고 1985년 11월에 형식적인 선거를 통하여 후임자인 제이. 에쓰. 모모에게 대통령자리를 물려주고는 퇴임하였다.

 

시에라레온에 등장한 불안한 원주민정권

 

모모대통령이 1986년 1월에 시에라레온의 제2대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민중들은 새로우며 평화로운 통치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하지만 모모정권앞에는 풀기 어려운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놓여있었다.

우선 전임자 시아카 스티븐스대통령이 저질러놓은 부족들간의 반목과 적대감을 해결해야 하였다.

스티븐스는 집권기간 자기의 출신족인 림아족과 그 동맹부족인 템네족에게만 특권을 주는 불공정한 정책을 실시해왔다.

이것은 부족들간의 불신의 곬을 너무나도 깊게 만들고있었다.

모모대통령자신도 스티븐스대통령이 조직한 부족당인 APC에 소속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때문에 다른 부족에 속한 민중들이 쉽게 모모대통령의 통치를 따르려고 하지 않은것을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수 있다.

또한 종주국이였던 영국이 간섭과 압력을 일삼으면서 시에라레온의 막대한 다이야몬드를 헐값으로 빼앗아가고있는것도 난문제중의 하나였다.

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것 또한 모모정권을 압박하는 문제들중의 하나였다.

당시 모모정권은 반정부시위를 하고있는 학생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학생들은 오히려 이웃나라인 리베리아를 거점으로 하여 혁명련합전선(RUF)을 창설하여 모모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이 무장투쟁의 총지휘자가 바로 포데이 산코(Foday Sankoh)였다.

포데이 산코가 지휘하는 혁명련합전선은 1991년 3월 23일에 리베리아의 국경을 넘어 시에라레온의 동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공격의 개시가 앞으로 다이야몬드를 놓고 11년동안 계속되는 피터지는 내전의 시작이 될줄을 아무도 예측할수 없었다.

혁명련합전선은 반정부투쟁을 개시한지 한달만에 다이야몬드가 풍부한 광산지역인 이스틴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바빠난것은 모모대통령이 아니라 영국정부와 다이야몬드의 채굴권을 소유하고있는 드비어스기업체였다.

드비어스로 말하면 세계적으로 다이야몬드보급의 80%를 장악하고있으며 다이야몬드원석을 주로 시에라레온에서 획득하여 보급하고있는 기업체이다.

그동안 드비어스는 각이한 세력에게 자금과 무기, 정보와 지어는 고용병들까지 대주며 다이야몬드광산에 대한 채굴에서 독점적리익을 얻어왔다.

드비어스에게는 상대가 정부편이든 반정부편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전이 벌어지든 저들이 제공한 무기가 어떻게 인간살륙에 리용되든 자기의 리익만 보장되면 그만이였다.

이렇게 놓고볼 때 드비어스는 시에라레온에서 10여년동안 계속된 비참한 내전과 직접 련관되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 출현한 원주민출신의 모모정권앞에는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요소들이 쌓여있어 집권앞날을 어둡게 하고있었다.

 

피터지는 내전 10여년과 오늘의 시에라레온

 

모모대통령의 집권후 포데이 산코가 지휘하고있는 RUF는 정부에 정면으로 저항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포데이 산코가 점령하고있는 다이야몬드광산의 리권때문에 오히려 포데이 산코의 RUF를 실질적으로 두둔하면서 드비어스를 통하여 비밀리에 무기까지 제공해주고있었다.

이와 같은 처지에서 모모정권은 1992년 4월 29일 륙군대위 스트라소가 일으킨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붕괴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말았다.

쿠데타에 성공한 스트라소는 곧 국가림시평의회(NPRC)를 조직하고 국가수반으로 등장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그는 전임대통령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독재자가 되여 헌법을 정지시키고 언론과 출판도 제한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포데이 산코와의 대결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취약하여 남부지역에 있는 중요한 다이야몬드광산을 모두 빼앗겼다. 뿐만아니라 수도까지도 RUF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급해난 스트라소대통령은 외국에서 용병을 사들이는 최악의 방법을 택하였다.

영국 등이 제공하고 지원하는 용병은 막강한 화력을 갖춘 군사력으로 포데이 산코세력을 격파하였다.

RUF는 현대적무기로 무장한 용병과의 고전을 치르게 되였으며 내전은 장기전의 국면에 들어가게 되였다.

내전의 장기화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것은 무고한 시에라레온민중들이였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또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10여년동안이나 벌어진 싸움의 희생자들이였다.

나라의 위기상황이 점점 험악해지자 스트라소는 RUF지도자 포데이 산코와 휴전협정을 교섭하려 하였다.

그런데 1996년 1월에 휴전협정교섭을 반대해온 비오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트라소대통령은 축출당하게 되였다.

그 후임으로는 1996년 3월에 치르어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테쟌 카바흐가 되였다.

시에라레온의 제4대대통령으로 올라선 테쟌 카바흐는 유엔에서 20여년을 근무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서 친서방경향이 매우 강하였다고 한다.

테쟌 카바흐대통령이 집권한 후 RUF의 반정부투쟁은 전보다 더 치렬하게 벌어져 량편에서 사상자가 련속 생겨나고 또다시 방화와 략탈행위들이 발생하게 되였다.

그러던중 1999년 7월 7일에 유엔의 중재로 카바흐대통령과 산코의 RUF사이에 거국내각을 조직하며 포데이 산코를 부대통령으로 그리고 RUF성원 2~3명을 거국내각에 임명할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중재로 합의한 거국내각조직은 분명히 미, 영이 합작한 사기극이였다.

유엔은 RUF의 무장해제를 감시하기 위하여 1만 3 000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다이야몬드광산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유엔군이 다이야몬드광산을 감시하게 하였다.

미국과 영국에 기만당하였다는것을 깨달은 포데이 산코는 2000년 5월 500명의 유엔감시병을 인질로 붙잡고 유엔의 불공정한 처사에 항의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은것이였다.

영국의 블래어는 즉시 공수부대를 급파하여 포데이 산코를 체포하였다.

포데이 산코가 체포되자 친서방성향의 테쟌 카바흐대통령진영은 온통 축제분위기를 띠였다.

유엔을 앞세운 미국과 영국의 시에라레온의 다이야몬드탈취작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였던것이다.

이러한 시에라레온의 내전력사를 두고 세계의 량심적언론들은 《다이야몬드의 잔혹사》이라고 일제히 비판한다.

사실 내전기간 시에라레온에서는 막대한 량의 다이야몬드가 서방으로 흘러들어갔고 그로부터 벌어들이는 돈도 대단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시에라레온민중의 삶의 복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오직 서방렬강들의 다이야몬드를 위한 대리전에 필요한 무기를 사는데 소모되였다.

그 무기들은 강대국들이 부추기는 약소민족들간의 전쟁, 제 동족끼리 싸우는 분쟁 그리고 한나라안에서 부족들간의 분쟁에 리용되였다.

결국 서방의 조장과 부추김때문에 이와 같은 전쟁과 분쟁이 끝없이 계속되여온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던 바로 그날에 공교롭게도 런던에서 세계최대의 다이야몬드재벌 드비어스의 공보담당자와 알 카에다조직이 다이야몬드거래와 관련한 면담을 하고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이 그를 립증해주고있다.

1996년에 집권하여 11년동안이나 시에라레온의 《다이야몬드의 잔혹사》의 한복판에 서서 시종일관 미국과 영국을 편드는 정책을 실시해온 테쟌 카바흐대통령은 2007년 8월에 은퇴하였다.

2007년 9월 17일에 어니스트 코로마가 시에라레온의 제5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취임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깊은 언명을 하였다.

《나는 시에라레온의 귀중한 자원을 지금껏 잘못 처리해 망쳐놓은 과거의 력사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 우리는 너무 오래동안 수난의 력사를 참았다.》

그가 언명한 귀중한 자원은 물론 다이야몬드를 뜻하며 수난의 력사는 미국과 영국의 다이야몬드착취력사를 뜻한다.

코로마대통령이 과거 시에라레온민중의 저주의 대상으로 되여온 다이야몬드를 시에라레온민중을 위한 축복의 다이야몬드로 변하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서 제국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다이야몬드가 영원하다.》고 떠벌이면서 강탈행위를 일삼는 탐욕적인 드비어스가 존재하는 한 시에라레온에서 다이야몬드를 놓고 벌어지는 피터지는 내전은 종식될수 없을것이다.

시에라레온의 수난의 력사가 이를 말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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