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가풍을 국풍으로 이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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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의 가풍을 국풍으로 이어가리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촌늙은이들이였지만 진정을 말하건대 나는 그분들의 견결한 혁명정신에 탄복하였고 거기서 커다란 고무를 받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할아버님이신 김보현선생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유서깊은 만경대를 찾은 우리는 강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였다.
어느해인가 외국의 기자들이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날 그들은 수수하고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시는 김보현선생님의 모습을 뵈옵고나서 정말 상상외이다, 나라가 해방된지도 5년이 되는데 이렇게 소박하게 생활하시니 너무도 감동된다, 또 할아버님의 강직하신 모습에 만경대일가분들을 혁명가로 키우신 그분의 애국의 넋이 어려와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수령도 많지만 김일성장군님의 가정과 같이 혁명적이고 인민적인 가정은 처음 본다라고 한결같이 격정을 터뜨렸다고 한다.
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경대고향집의 사립문앞에 서니 남자는 전장에서 싸우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시면서 집안식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떳떳이 살도록 교양하시고 일가분들을 혁명의 길로 떠나보내시던 김보현선생님의 근엄하신 모습이 우리의 눈앞에 삼삼히 어려왔다.
아드님들과 손자분들을 곁에 두고싶으신 마음도 없지 않으시였지만 일가분들모두를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 내세우신 김보현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어떤 지론이 자리잡고있었던가.
봉건통치배들의 착취와 압박이 중첩되던 시기인 1871년 8월 19일 만경대에서 탄생하시여 너무도 일찌기 아버님을 여의시고 오막살이산당집 한채와 피눈물나는 소작살이를 넘겨받으신 김보현선생님께서는 당대사회의 갖은 고초를 다 겪지 않으면 안되시였다.
아침일찌기 일어나 밭에 나가시였다가는 달을 이고서 돌아오군 하시였고 또 밤이면 밤대로 쉬지 못하시고 등잔불밑에서 새끼도 꼬시고 멍석도 트시였으며 짚신도 삼으시였다.
그토록 어렵게 사시였지만 김보현선생님께서는 조국과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일가분들을 혁명의 길에 서슴없이 내세우시였다.
칼을 든 원쑤들과는 칼로 맞서야 한다!
돈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인덕이 없으면 살수 없다!
이것이 한가정의 아버지, 할아버지이기 전에 자손들을 어엿한 혁명가로 내세우신 김보현선생님의 지론이였다.
하기에 김형직선생님께서 적들에게 또다시 체포되시였다는 소식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리신 나이에 광복의 천리길에 나서실 때에도 아버지가 령어의 몸이 되였는데 이제는 네가 나설 차례가 되였다고, 어서 떠나라고 지지해주신것 아니랴.
아직은 나어린 손자분을 그것도 추운 겨울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는 길에 서슴없이 떠나보낸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우기 김보현선생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손자분을 더없이 사랑하시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김보현선생님의 애정은 손자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참된 혁명가로 키우시려는 뜨거운 정이였다.
그후에도 김보현선생님께서는 일제놈들의 탄압과 온갖 고초를 다 이겨내시며 꿋꿋이 살아오시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력이 날로 커가는데 당황망조한 일제는 온갖 술책을 다하였다.
순사놈들이 늘 당번을 서며 집을 감시하였고 어떤 때에는 일가분들에게 행패질까지 하였다.
하루는 놈들이 만경대고향집에 기여들어 돈뭉치를 내놓으며 회유하려고 하였다. 원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치밀어오르신 김보현선생님께서는 이 천하에 고현놈들, 그래 우리 보고 제 손자의 목숨을 돈과 바꾸라는거냐, 그런 개수작질은 싹 걷어치우고 당장 물러가라고 불호령을 내리시였다.
간고하고도 준엄했던 항일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할아버님을 비롯한 만경대일가분들의 애국적지조와 투쟁소식에서 크나큰 고무를 받으시였고 조국해방의 의지를 더욱 굳히시며 투쟁의 길을 억세게 걸어나가시였다.
20년만에 고향 만경대를 찾으시여 나이 서른살이 넘도록 효도를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김보현선생님께서는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하다가 못한 조선독립을 해냈으면 그게 효도지 그보다 큰 효도가 어디 있겠는가고, 나라와 백성을 잘 돌보면 그게 효도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바로 조국에 대한 이처럼 열렬한 사랑을 지닌분이시기에 한생 그 어떤 특전, 특혜도 바라지 않으시고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위업, 애국위업을 열렬히 받드는것을 자신의 둘도 없는 본분으로 여기시며 근면하게 생활해오시였던것이다.
해방후 남북련석회의의 대표로 평양에 왔던 김구가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는 년로하신 몸으로 농사를 짓고계시는분이 다름아닌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할아버님이시라는것을 알고 너무도 놀라와 김보현선생님께 손자분을 한 나라의 수령으로 두신분이 왜 이렇게 험한 일을 아직도 하고계십니까라고 말씀드리였다.
그때 김보현선생님께서는 내 손자는 그렇지만 나는 농민인즉 예로부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농사를 잘 지어야 그가 보는 나라의 정치도 잘될것이 아닌가고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김보현선생님의 생애는 애국, 애족, 애민의 한생으로 온 겨레의 심장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우리는 김보현선생님의 반신상앞에서 그이의 고귀한 생애를 돌이켜보며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만경대가문의 애국의 가풍을 국풍으로 꿋꿋이 이어나가는 이 나라의 참된 애국자가 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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