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생을 《평양처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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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생을 《평양처녀》로
해마다 10월 15일이 오면 나의 가슴속에는 우리 대흥국수집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을 모시였던 못 잊을 그날의 감격이 어제일이런듯 그득히 차오른다. 그러면서 10대의 단발머리처녀로 수도 평양에서 여기 대흥땅으로 탄원진출하여 흘러온 30여년의 인생길이 돌이켜진다.
당의 축복속에, 온 나라의 관심과 기대속에 나를 비롯한 우리 평양처녀들이 대흥땅으로 달려나간것은 1990년 8월이였다.
수도 평양을 떠날 때까지만 하여도 나의 가슴속에는 여기 대흥땅에서 청춘의 꿈과 리상을 꽃피울 열망이 꽉 차있었다.
하지만 솔직한 말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도착하고보니 그 흥분과 열기는 불안과 우려로 바뀌였다.
해발 천수백m가 넘는 하늘아래 첫 일터, 한여름이라지만 때없이 찬바람이 불고 어떤 곳에는 눈까지 쌓여있었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뿐이여서 적막감에 휩싸이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이제라도 다시 평양으로 돌아갈가, 내가 여기서 꽤 견딜수 있을가.
늘 자식을 위해 왼심을 쓰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지고 불밝은 우리 집 창가가 별빛에 선히 어려오군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의 이 나약해진 마음을 다잡아준것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우리를 아시고 온 나라가 지켜본다는 자각이였다.
그러던 주체100(2011)년 10월 15일 나는 대흥청년영웅광산을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을 우리 대흥국수집에서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봉사활동정형과 봉사기록장을 보아주신 어버이장군님께서는 대흥국수집봉사기록장을 보니 전쟁로병들과 영예군인, 로력혁신자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과 부모없는 제대군인들의 결혼식상을 차려준 장면을 찍은 사진도 있는데 정말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뜬김서린 주방칸과 일일창고에 들리시여서는 국수집운영에 필요한 원자재준비를 잘하고있는 우리들의 일솜씨를 칭찬해주시였고 과일물을 비롯한 음료들을 보시면서 모두 광산에서 자체로 만든것이라는데 대동강과일종합가공공장 제품들이 왔다 울고가겠다고 정을 담아 치하해주신 어버이장군님.
만족하신 시선으로 국수집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흥국수집에서 로동계급과 인민들에 대한 봉사활동을 잘하고있는것을 보니 자신의 마음도 기쁘다고 한없는 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이때 한 일군으로부터 이곳 국수집료리사들의 대부분이 청년들을 대흥땅으로 부르는 당의 호소를 받들고 수십년전에 이곳으로 탄원한 녀성들이고 그들중에는 수도 평양에서 탄원한 동무들도 여러명 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장군님께서는 평양에서 이 광산으로 탄원해온 동무들은 온 나라가 다 아는 평양처녀들이라고 하시며 정말 용타고 치하하시였다.
어버이장군님께서 한없는 정을 담아 불러주신 《평양처녀들》, 이 부르심속에는 다 자란 자식을 두고 그처럼 대견해하고 기뻐하며 내세워주고싶어하시는 어버이의 웅심깊은 마음이 담겨져있었고 나서자란 고향땅을 뒤에 두고 떠나온 처녀시절 그때처럼 변함없이 당의 뜻을 받들어 한생을 빛내이기를 바라시는 그이의 크나큰 믿음이 깃들어있었다.
그후 우리모두는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꿈만같은 평양견학의 나날을 보내게 되였으며 어버이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눈물속에 《아버지장군님 고맙습니다》의 노래도 부르는 한생의 제일 큰 영광도 받아안게 되였다.
이렇듯 끝까지 곧바로 걸어온 그 길이 곧 영광의 길, 행복넘친 길이였다.
어느덧 내 나이 쉰고개를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평양처녀》, 영원한 청춘으로 살고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선택한 이 길을 흔들림없이 끝까지 갈 때 행복이 온다.
끝까지 한길을 걸어야 한다는것, 바로 이것이 지금도 나의 심장에서 고동치는 맹세이다.
대흥국수집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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