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련재 《너를 사랑하기에》 제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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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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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혜경이 선철이와 함께 입원실에 들어왔다. 주승혁은 순간 신선한 바람이 불어들어온것처럼 상쾌한감을 느끼였다.
《혜경이, 네가 어떻게 왔니?》 승혁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선철선생 어머님이 입원했다길래 모두 얼마나 힘드실가 하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강혜경은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리였다.
《고맙구나, 다 일이 바쁘겠는데… 여보, 당신 혜경이를 알지? 강영식동무의 딸이야.》
승혁이가 소개의 말을 하려는데 백영희는 다정한 웃음을 띠우고 손을 저었다.
《알아요, 내가 왜 강혜경을 모르겠어요.》
영희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것은 아마도 남편 주승혁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 스스로 찾아가서 빵을 대접하려고 했던 그 일일것이다.
《넌 어쩌면 그리도 마음이 곱단 말이냐.》
안해가 하는 말을 들으며 승혁은 흐뭇한 심정으로 혜경을 보았다. 보건대 혜경은 우리 시대 청춘들의 리상형이라고 할수 있었다. 당의 호소에 민감하게 반응할줄 알고 전공분야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진취적이고 정의감이 강하며 동시에 인정도 깊은 처녀… 어찌된 일인지 승혁은 혜경의 모든것이 흠뻑 마음에 들었다. 지금 승혁은 자기자신은 이젠 늙어서 쓰러져가는 고목과도 같은 존재로 느끼면서 싱싱하게 곧게 자라는 수삼나무와도 같은 혜경의 존재가 몹시도 부러웠고 또 어쩌면 동경하게도 되는것이였다. 하여 이 처녀의 모든것을 지켜주고싶은 강한 욕망을 품게 되였다. 그러나 어떻게 지켜주어야 하겠는지는 그자신도 모르고있었다.
혜경의 곁에서 미끈한 체격의 아들 선철이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있었는데 그 미소는 마치 밝은빛이런듯 어둡게 떠돌던 근심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얼굴을 환히 물들이고있었다.
혜경에 비하면 아들은 적극성이 부족한것저럼 생각된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의사를 지향한것이 그때문이 아니겠는가.
요사이 자꾸만 마음이 씌여지는 최성복은 또 어떤가. 그녀석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나약하다.
《여보, 내 좀 나갔다 오겠소.》
승혁은 혜경에게 앉았다가 가라는 말을 하고 입원실밖으로 나갔다.
그는 흥덕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화상을 입은 안해는 자주 속옷들을 갈아입어야 하였는데 승혁은 자기 손으로 그 속옷들을 사주고싶었다.
승혁은 오래간만에 시장구경을 한다. 직장장을 할 때는 이러저러한 필요로 시장에 왔던적이 있었으나 해임된 후로는 어쩐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시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흐른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승혁은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을 돌아보다가 자기를 부르는 그 어떤 목소리를 듣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득히 먼것 같기도 하고 지척인것 같기도 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카바이드전기로가 웅웅거리는 소리같기도 하고 알데히드생산공정이 돌아가는 소리같기도 한 그 소리… 그것은 비날론이라는 생명체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생명체가 마치 엄마를 부르듯이 찾는 소리였다.
《나를 버리고 어디를 헤매는거예요?》
그것은 승혁의 심장에만 감득되는 소리였다.
승혁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 시각 알데히드생산공정에서 무슨 사고라도 터지는것만 같은 환각에 사로잡히게 되였다.
그는 멍하니 서서 자기의 곁을 스쳐지나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 심각한 얼굴, 초조한 얼굴들을 보았다. 문득 그는 자기가 그 어떤 다른 세계, 있어서는 안될 세계에 있는것처럼 느껴졌다.
(저기서… 나의 생명이 부르고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 명수도 있고 기술자들도 있고 기능공들도 있지 않는가. 모액이 튀여나온것도 희생적으로 막아냈다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자기의 아픈 마음을 위안하면서 걸어갔다.
(그러나 빨리 거기로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안해는 이겨낼수 있을것이다.)
승혁이가 이것저것 속옷들을 집어들며 값을 묻자 매대녀인들이 깔깔거렸다.
《이 아버님 신통히 젊은 녀자들이 좋아할것들만 골라내누나.》
《며느리에게 주려고 하나요, 딸에게 주려고 하나요?》
《무슨 소릴 하니? 며느리나 딸에게 그런걸 사주는 남자도 있나? 아마 젊은 색시일거야. 아버님, 혹시 장가드는게 아니예요?》
시장녀인들이 놀려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승혁은 성이 난것처럼 얼굴을 찌프리고있다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알기는 잘들 아오. 내 안해에게 사주는거요. 조강지처란 말이요.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란 말을 아나? 고생을 함께 한 처를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는 소리요.》
순간 녀인들은 어리둥절한듯 서로 보다가 다시 삐쭉삐쭉 웃음을 머금는다. 승혁이가 물건들을 사서 비닐구럭에 넣어들고 매대를 떠나는데 뒤에서 말소리들이 그냥 들려온다.
《정말 괜찮구나. 요새 저 아버님같은 사람 드문데…》
《나도 저런 남자를 남편으로 섬겼으면… 딱소리 나누나.》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 호호…》
문득 승혁은 안해와 살면서 처음으로 그를 위해 옷을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내가 얼마나 안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지 저들이 알게 뭐람. 그런데도 뭐 딱소리가 난다구? 참새처럼 재잘대기는…)
승혁이가 입원실에 돌아오니 강혜경은 이미 돌아갔다. 승혁은 안해의 머리맡에 속옷들을 꺼내놓았다. 영희의 얼굴에 놀라움이 비끼였다.
《남자가 이런것들을 사기가 멋하지 않았어요?》
《아니, 시장녀자들이 어찌나 날 칭찬하는지 자랑스럽기만 하더군, 허허.》
그다음 승혁은 더 말을 하지 않고 가늘게 한숨을 쉬였다.
《선철이 아버지, 안색이 좋질 않군요. 아마 공장일이 잘 안되는 모양이지요?》
《그저 그러루하게 진척되기야 하겠지.》
영희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어서 공장에 나가봐요. 선철이 아버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다 알아요. 당신 마음이야 늘 공장에, 합성직장에 가있지요.》
승혁은 왜선지 눈굽이 축축해지는것만 같았다. 안해가 고마왔다. 그 녀자는 그의 마음속을 속속들이 헤아려보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영희의 손을 꼭 잡았다.
《됐어요, 내 걱정은 말아요. 여기 선철이도 있고 간호원들도 있지 않나요.》
《고맙소. 난 정말 바늘방석에 앉은것만 같은 심정이였소. 12년만에 합성직장이 돌아가는 시각인데…》
《알아요. 어서빨리 가보라요.》
승혁이가 일어서는데 박춘섭이 들어섰다. 춘섭은 붕대를 감은 영희의 얼굴을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였다.
《네가 이 지경이 될줄은 몰랐구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춘섭의 두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히였다. 승혁은 춘섭의 영희에 대한 정이 보통 깊지 않음을 다시금 깊이 느끼였다.
《오빠, 일없어요. 다 낫게 된대요.》 영희는 웃어보이였다.
《그렇게 된다면야 오죽 좋겠니.》
춘섭은 승혁에게 말을 건네였다.
《자넨 어디 가려나?》
《공장에 나가려던 참이요.》
《공장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소.》
《음-》 춘섭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아마 그럴거요. 자네가 영희의 곁을 지킨단들 뭐 신통한 대책을 세울건 없을거고… 하지만 현장에선 자네의 기술이 필요하거던.》
춘섭은 감심하는 빛이 어린 눈길을 승혁에게 주었다가 말하였다.
《좀 기다리오, 나와 같이 가자구.》
춘섭은 영희의 머리맡에 앉아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치료를 잘 받아야 한다고 거듭 당부를 하더니 일어섰다.
병원밖으로 나오니 저녁녘이 다 되였다. 춘섭은 승용차를 타고 함께 가자고 했으나 승혁은 자전거가 있다면서 사양하였다.
《그럼 저녁도 되였는데 오래간만에 식사나 같이하자구.》
춘섭은 병원가까이의 식당으로 승혁을 이끌었다. 승혁은 춘섭이가 무엇인가 자기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들이 들어간 크지 않은 식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춘섭과 승혁은 한식탁을 차지하고 식사를 청하였다.
춘섭은 술병을 기울여 두개의 잔에 부었다.
《한잔 들지.》
《내가 술을 끊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조금 해보지.》
승혁은 술잔을 밀어놓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비날론이 나올 때까지 안 마셔.》
《좌우간 그 성격엔 탄복하지 않을수 없군.》
춘섭은 감탄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데 승혁은 머리속에 1년전의 마전유원지를 떠올리고있었다.
(우리가 해수욕을 하면서 즐길 때 장군님께선 삼복철강행군을 하시였지. 우리 비날론공장을 찾으시여 비날론을 되살릴데 대하여 절절하게 말씀하시던 그이의 야전복은 땀으로 젖어있었어. 그 소식을 듣고 죄스럽던 그 심정을 어떻게 자네가 알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난 결코 술을 다시 마실수가 없어.)
혼자서 술을 좀 마신 춘섭이가 탄식조로 말하였다.
《영희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왜 그렇게 일이 꼬이기만 하는지…》
《날 동정하는건가?》
《동정이라구?》 춘섭은 불만기가 어린 표정으로 승혁을 보았다.
《동정하는게 아니고 이 가슴이 아파서 그래.》 춘섭은 자기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네같은 사람도 다 과오를 범하니 세상일은 참 모르겠거던. 결국 직장장직에서 해임되였지. 그때문에 우리 영희는 마음고생을 또 얼마나 했고…》
《내가 부실한 놈이지. 내게 영희를 맡겼는데 미안하게 됐소.》
승혁은 진심으로 춘섭에게 사죄하는 심정이 되였다. 그러면서도 굴욕감이 속을 뒤집어놓는것만 같아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과오를 범하게 된 추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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