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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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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3,144회 작성일 23-08-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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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제 1 편

19


어느덧 산과 들은 울긋불긋 가을철단장을 끝내고있었고 먼 남쪽과 북쪽에서는 철새들이 날아가고 날아왔다.

락동강기슭에서 떠난 인민군주력부대들도 퇴색하는 산발을 타고 38°선부근에 이르렀다. 팔공산을 떠나 오대산, 태백산을 거쳐오는 부대도 있었고 가야산, 속리산을 떠나 어언 림진강에 이른 부대들도 있었다.

적들도 역시 38°선이북에 대한 대규모적인 침공에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전쟁의 열점은 38°선을 가운데 두고 무섭게 가열되고있었다.

기나긴 민족분렬의 수난을 지켜온 38°선!… 원래 이것은 《국경》으로 설정된것이 아니다. 1945년 8월 10일이였다. 그날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하겠다는것을 련합국정부들에 통보하였다. 그러자 일본관동군이 적어도 몇달은 쏘련군과 싸우리라 믿고있던 미국정부는 몹시 당황해했다. 예상했던것보다 사태가 빨리 도래했던것이다. 트루맨은 특히 조선반도문제로 초조해했다. 당시 만주에는 쏘련군, 중국에는 장개석군이, 동남아시아에는 미, 영군 등 각기 해당한 련합군이 있었으며 일본본토에는 미군이 주둔할 작정이였으므로 조선반도만이 공백이였다. 더우기 여기서는 무조건 항복이후에도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저항하기로 결의한 조선군관구 제17방면군 등의 일본군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들의 무장해제를 누가 맡겠는가를 시급히 결정해야 했다. 즉 누가 조선반도를 차지하겠는가를 결정해야 하는것이다.

1945년 8월 10일, 아침 일찌기 트루맨은 국무장관 번즈, 륙군장관 스팀손, 해군장관 니 미츠를 불러 비상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먼저 김일성장군 령도하의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이 조국해방작전준비를 완료하고 국경연선으로 진출하고있는 사정이 커다란 우려속에 검토되였다. 자칫하다가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처럼 빨찌산들이 자기 조국의 수도를 해방할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미국이 개입할 그 어떤 명분도 없게 될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또 쏘련군대가 만주에서 물밀듯이 남하하는 사정도 불안스러운 일이였다. 시간을 놓치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극동의 조선반도를 공산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떠맡길수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비상회의는 일본군의 항복을 《북부조선에서 받》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조선북방》을 어디로 정하겠는가가 문제였다. 리유가 있어야 했던것이다. 하는수 없이 트루맨은 《3부조정위원회》가 대안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령했다. 《3부조정위원회》는 국무성, 륙군성, 해군성의 장관들로 이루어져있다. 여기에 국무차관 러스크까지 참가하여 조선반도의 북위 38°선이남을 일본대본영륙군이 관할하고있었던만큼 대본영륙군의 항복을 저들이 받는것으로 하여 38°선 이남을 차지하자는 모의를 했다. 그것은 당시 조선중부 이북의 군관구는 관동군의 지휘하에 있었고 관동군은 쏘련군대의 작전대상인 반면에 조선중부 이남의 일본 제17방면군은 미군의 작전대상인 대본영륙군야전부대이기때문이였다.

38°선 이남을 차지하려는 미국의 이 계획은 또한 당시 미군의 태평양륙군주력이 필리핀에 있고 조선에서 제일 가까운 미제24군단도 오끼나와에 있으므로 일본과 동시에 조선반도를 관리할만 한 병력의 여유가 없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그리하여 38°선을 경계로 하여 일본군무장을 해제하자는 대안은 트루맨의 비준을 받고 쏘련정부에 통고되였다. 그때 미국은 쏘련이 전략적고려에 의하여 더 남하할것을 완강히 요구하리라고 생각했으므로 몹시 불안해하고있었다. 하지만 쏘련은 미국과의 교섭에서 앞으로 받아내야 할 정치적문제들을 고려하여 이 제의에 간단히 동의해버렸다.

이렇게 되여 조선반도의 순수 지리학적위도선에 지나지 않던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쏘미량군관할구역의 경계선으로 그어진것이 한달후인 9월 7일 미제침략군의 선발대가, 다음날엔 오끼나와에 있던 미제24군단의 2개 사단이 악명높은 하지중장의 지휘하에 상륙하면서부터 군사, 정치적분계선으로 고착되고 3 000만 조선민족도 북에 900만, 남에 2 100만명으로 갈라졌다. 민족분렬의 가슴아픈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처음은 그저 논가운데로 뻗어간 도로상에 하나의 쇠사슬을 늘이고 나무로 대충 만든 초소가 하나 세워지던것이 나라를 가르고 민족을 갈라놓았다. 또 여기서 미제침략자들은 참혹한 전쟁을 도발하였고 지금은 이 분계선을 땅크로 짓뭉개며 전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미친듯 침공을 다그치고있다.

극적인 1950년 10월의 사변들은 이렇게 38°선을 넘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적들은 평양에로의 접근로들에서 특히 미친듯이 공격을 다그쳤다. 미제8군의 기간을 이루는 미1군단 관하 미제1해병사단, 영제27려단, 미제24보병사단, 괴뢰군1보병사단 등이 이 방향에 집중되였다. 조선중부와 동부에서는 괴뢰군 2군단과 1군단이 각기 양덕과 원산을 목표로 전진하였고 인천상륙작전부대였던 미10군단은 원산상륙을 준비하고있었다.

맥아더는 추호도 승리를 의심치 않고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어언 륙상부대만해도 미군 12만 5 200명, 괴뢰군 10만 2 000명, 영국, 필리핀 등 추종국가군대 2만여명, 합계 24만 7 200명의 미군 괴뢰군 병참부대 11만 9 600명, 미극동공군 3만 7 000명, 미극동해군 5만 9 500명, 총병력 46만 4 300여명에 달하였다. 지난 그 어느 시기에도 맥아더는 이러한 대군을 지휘해본적이 없다. 그는 도꾜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인민군대에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통첩》이였다. 동시에 조선말로 된 성명문 250만매를 38°선과 평양 등의 주요도시들에 살포했다.

력사는 같은 날 베이징에서 발표된 하나의 강경한 성명도 기록하고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외교부장은 그 성명에서 미제의 조선에 대한 비법적인 침략전쟁을 중국인민은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을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다.

놀라운 이 사태발전을 지켜보며 세계는 긴장해졌다. 제3차 세계대전위기설이 나돌았다. 새로운 열핵전쟁에 대한 기사들로 서방세계의 신문, 잡지들은 떠들썩했다. 세계각국의 모든 통신사의 안테나들은 극동에서 울려오는 사소한 음파라도 놓칠세라 고도로 예민해졌다. 수억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조선을 지켜보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적기들의 무차별폭격이 있은 역전광장부근을 돌아보고계시였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전차길에서는 엿가락처럼 휘여든 강철레루가 보도우에까지 삐여져나와있었다. 피빛의 불길이 사방에서 너울거렸다.

그이께서는 페허를 가로질러 가시였다. 화광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시였다. 하지만 아무 말씀도 없이 근엄한 눈길로 가슴아픈 파괴의 정상들을 하나하나 더듬고계시였다.

놈들은 이러한 야만적인 만행으로 우리 인민을 놀래우려고 한다. 전대미문의 무차별폭격으로 우리 인민의 의기를 꺾고 굴복케 하려고 한다. 그래서 매일과 같이 폭격을 들이대고있다.…

사람들이 뛰여다니고 고함을 지르고있었다. 어느 골목길에서는 한 처녀가 거쉰 목소리로 통곡하는 늙은이를 부축해가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걸음을 멈추시였다. 국립인민출판사 인쇄소 근처였다. 바람이 불면서 상공을 뒤덮은 연기와 재티를 몰아왔다.

《인젠 이 대통로에 성한 집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구만!…》

그이께서 하신 말씀이였다. 부관장이 보고드렸다.

《어제도 놈들은 서평양조차장일대와 평천리에 500kg짜리 폭탄과 소이탄 900개를 떨구었습니다. 내각사무국에서 장악한 자료입니다.》

《…》

그이께서는 묵묵히 대동교로타리쪽에서부터 역전광장에 이르는 페허의 참상을 둘러보시였다. 구뎅이들, 철골들이 비쭉비쭉 드러나있는 벽체, 줄이 끊어져드리운 전주대며 아직도 화재의 불길이 날름거리는 지붕들… 그쪽에서 사람들이 불을 끄며 떠들고있었다. 그쪽의 소음때문에 그이께서는 멀지 않은 길건너 전주대우에 올라간 청년이 웨쳐대는 소리를 처음엔 가려듣지 못하시였다.

《저 동무가 뭐라고 소리치오?》

부관장은 귀를 강구다가 길건너로 가려고 했다. 김일성동지께서 그의 팔소매를 잡으시였다.

《가만, 들어보자구.》

청년은 불을 끄며 돌아치는 사람들을 향해 웨치고있었다. 떠들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인제는 청년의 목소리를 가려들으실수 있었다.

《들리지요?… 인젠 됐지요?》

그제서야 그이께서는 청년이 줄이 끊어진 고성기를 이어놓으려 전주대에 올라갔었다는것을 아시게 되였다. 그쪽에서 웅웅하는 잡음에 뒤섞인 방송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사람들은 일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방송원과 외국기자들의 대담이 진행되는것 같았다. 《데일리 워커》지 특파원 워링톤과 프랑스, 중국 등 외국기자들이 미제의 야만적인 폭격만행에 항의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격분에 넘친 어조의 각이한 외국말들이 쏟아져나오고 그를 통역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어 대담이 끝나고 방송원이 무슨 말인가 하더니 음악이 흘러나왔다. 허름한 모자를 뒤통수에 비딱하니 붙여쓴 전주대우의 청년이 또 소리쳤다.

《들어보라요. 〈밭갈이타령〉이 나와요!》

청년은 한손으로 무슨 시늉인가 하고는 다람쥐처럼 날래게 기여내렸다. 사람들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칭찬하는것 같았다. 청년이 큰소리로 무어라고 말하자 둘러섰던 사람들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가까이 다가온 차곁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어느새 부관장이 앞서가 승용차문을 열어드렸다. 그이께서는 다시한번 머리를 돌려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울려오는 그쪽을 바라보시였다.

수도에로의 접근로들에서 전투가 치렬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짐을 싸들고 정든 거리를 떠나가는 이때 사람들이 웃고 고성기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있는것을 무심히 스쳐지나실수 없으시였다.


아 장군님 주신 땅

에루화 데루화 모두다 떨쳐나 밭갈이가세


사람들이 전쟁에 습관되고있다. 승리의 환희도 알고 일시적인 난관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결코 다가오는 시련을 무섭게만 보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용기를 가다듬고 그것을 이겨낼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에 오르시였다. 고성기의 노래소리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귀담아 들으시였다.


민주의 새봄에 만풍년 불러불러


그렇다. 온 나라 전체 인민을 불러 원쑤격멸에 궐기시켜야 한다. 인민은 위대한 힘을 지니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지금 기가 죽어가고있다. 전인민적항쟁으로 적들의 침공을 저지시키고 이 전쟁을 거꾸로 돌려세울수 있다는것을 믿지 못하고있다.

…집무실로 들어가시던 그이께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였다. 부관실 한쪽벽에 붙어있던 조선지도가 보이지 않는것을 발견하신것이였다.

기술서기 오영혜가 그린 지도였다. 다심한 처녀는 매일 최고사령부보도를 들으며 새로 해방된 도시나 마을을 붉은기로 표시하군 했었다. 엊그제는 의정부, 서울, 어제는 수원, 평택, 충주… 나날이 늘어가는 기발을 가리키며 처녀는 기쁨에 넘쳐 부르짖군 했었다.

《장군님! 금방 나온 보도를 들으셨습니까. 조치원을 또 해방했답니다!》

처녀는 마치 자기가 제일 먼저 그 소식을 받은것처럼, 자기만이 알고있는것처럼 뛰여다녔었다. 때로는 그이께서 집무실을 나오실 때를 기다리다가 새로 그려넣은 기발과 지명을 보여드리기까지 했었다.

《장군님! 인젠 부산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그런데 그 지도가 없다. 누군가 그것을 떼여버렸다. 이제는 그것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금은 후퇴하는 때이므로 승리적으로 공격해나가던 시기의 지도가 가슴아픈것으로 느껴지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전인민적항쟁으로 온 나라 방방곡곡에 승리의 기발들을 꽂아야 할게 아닌가 그러므로 더 큰 지도가 있어야 할게 아닌가?!… 그런데 그 지도를 떼여버렸고 다른 지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책상우에 종이를 꺼내놓으시였다. 며칠전부터 줄곧 생각해오신 방송연설원고를 쓰시려는것이였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난 후 두번째로 하시는 방송연설로 될것이다. 첫번째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6월 26일에 있었다. 그날의 연설에서는 미제에 의하여 강요된 이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규정하시고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다 바칠것을 호소하시였다. 그리하여 그이의 호소따라 영용한 우리 인민군대는 반공격에로 넘어가 천리 남진의 길을 헤쳐갔었다.

그러나 오늘 정세는 급변하였다. 우리 조국과 인민앞에 엄중한 위험이 닥쳐와 나날이 커가고있다. 드디여 온 나라 전체 인민이 떨쳐일어나 침략자들과 판가리싸움을 벌릴 때가 도래하였다.

그이께서 힘주어 펜을 달리시였다.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그때 홍명희부수상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후방으로 자리를 옮기기에 앞서 인사를 드리려 찾아온것이였다. 처음으로 그는 아무런 서류도 든것이 없이 빈손으로 그이앞에 나타났다. 장군님께서 떠나시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고 고집해온 그였으나 부득불 인제는 떠나는수밖에 없었다.

《장군님! 만경대학원과 과학, 교육기관 일군들도 다 소개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창백해진 홍명희의 안색을 유심히 바라보시였다.

《잘됐습니다. 그런걸 저는 선생이 너무 지체하신다고 걱정하고있었습니다.》

《저… 실은 상임위원회에서 호위차와 인원을 더 많이 조직해달라고 해서…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운 싸움을 겪고있는 때 정부기관의 인원으로서 경망히 굴면 되겠는가, 전선에서는 지금 보총 한자루가 귀한 때인줄 모르는가 하고 말좀 했더니 좋지 않아하면서도 시골에 있는 촌가에 들려 며칠 치료를 하고 찾아오겠다기에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를 바래주고 오는 길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씀하시였다.

《그래도 요구하는대로 해줄걸 그랬습니다.》

《장군님!》 홍명희는 힘들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눈귀로부터 허연 관자노리쪽으로 잔주름살들이 파문지어갔다. 《저는 장군님께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 황망히 들렸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장군님! 어찌하여 장군님 자제분들은 아직 위험속에 남겨두십니까. 이번에 제가 자제분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장군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요!》

《?!…》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아무말씀도 없이 서계시였다. 홍명희의 그 말은 그이의 마음속에 항시 묵직하게 덩이지어 자리잡고있던 아픔을 상기시키시였다. 이 아픔은 어머니를 잃은 때부터 밤에 홀로 있기 무서워하는 어린 경희와 너무도 이른 나이에 그애의 보호자격이 되여 마음속 슬픔과 고통도 애써 감추며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게 된 그 어리신 아드님에 대한 애틋하고 눈물겨운 사랑에 근원을 둔것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벌써 그이께서는 평소의 밝은 표정을 짓고계시였다.

《념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선생이야 얼마나 큰 중임을 안고 가십니까. 그러니만큼 사업에 지장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제 이미 믿을만 한 사람한테 부탁해놓았습니다.》

《장군님!》

《정말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이께서는 몸을 돌려 탁자앞으로 걸어가시였다. 책상서랍을 열고 그속에서 비로도천에 싼 권총을 꺼내시였다.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다섯간 정도에서는 잘 맞습니다. 보통때는 탄알을 따로 건사해두십시오.》

《장군님! 전…》

《일없습니다. 이걸 가지고계시면 마음이 더 든든해질가 해서 드리는것입니다. 정숙동무가 쓰던 권총입니다.》

《예?!… 그럼… 녀사께서 쓰시던것을 어떻게 제가…》

《어서 받으십시오.》

홍명희는 입술을 실룩거리고있었다. 짧게 비다듬은 코밑수염이 바르르 떨리고있었다. 그이께서 재차 권하시자 옷섶에 손을 문지르고 정히 받아들었다. 비로도천에 싼것을 풀어볼념도 않고 꼭 받들어 쥐고있었다.

《로상에서 적기들의 공습에 주의하셔야겠습니다.》 그이께서 조용히 계속하시였다. 《어련하시겠지만 한번 더 부탁을 드립니다. 림지에 도착하면 내각사업이 중단되지 않도록 많이 힘써주십시오.》

《장군님, 이처럼 불미한 저에게…》

《뭘 그러십니까. 김책동무가 내각사업에서 떠난이래 부담이 많으신줄 알고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몸소 정문에까지 나가시였다.

《선생을 믿습니다. 그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장군님! 저희들은 그저 장군님께서 기체무고하옵기만 바라고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장군님!》

이런 말을 남긴 홍명희를 바래신 후 다시 집무실에 돌아오시였을 때 기다렸던듯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시자 김종항비서(내각사무국 부국장겸임)가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드렸다.

《장군님! 리승기박사의 가족과 실험설비를 무사히 실어보냈습니다. 호위원들도 조직해주었습니다.》

《잘했소.》

《그런데… 장군님께서 알아보라고 하신 전기관리국 기사장 리성조와 계응상선생의 행처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송수화기만 꾹꾹 누르고계시였다. 전기관리국 기사장 리성조가 《도주》한것으로 알려진 이후 계응상박사 역시 행처불명이 되였다. 고정한 그 로인은 원산농업대학의 초청강의때문에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철길이 끊어져 지체되자 시간이 촉박해져 도보로라도 간다면서 차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무려 한주일나마 흘러갔건만 종무소식이였다.

하여 일부 사람들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리성조의 경우처럼 《도주》라고 락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리고는 더이상 알아보지도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전선형편이 어려워지자 많은 일군들은 무엇보다먼저 관심하고 돌봐주어야 할 귀중한 인재들에 대하여 잊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때에 개별적사람들의 운명까지야 어떻게 돌아볼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다른 손에 송수화기를 바꿔드시였다. 애써 흥분을 누르며 말씀하시였다.

《우린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을 더 아끼고 책임지고 돌봐주어야 하오. 그런데 실종된 박사에 대해서도 제때에 보고하지 않고있었으니… 얼마나 엄중한 일이요. 즉시 모든 중앙기관, 대학, 연구집단 특히 유능한 인테리들의 소개정형을 다 장악해야겠소. 대학교원, 학자, 설계가, 작가, 예술인…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소. 그런데 지금은 정세가 위급하다고 내버리고있소. 안되오!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다 데리고 가야 하오. 즉시 대책을 세우시오!…》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흐른뒤에야 그이께서는 펜을 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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