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회)
제 6 장
8
(1)
주승혁은 집에 누워있었으나 결코 마음이 편안할수가 없었다. 그는 혜경이가 설계를 끝내였고 설계도면이 제관직장에 넘어갔음을 알게 되였다.
(공장에 나가야지. 안정을 해도 공장에 나가야 해. 그런데 이 몸으로 어떻게 나간담. 자전거를 탈수도 없고 걸어나갈수도 없으니…)
승혁은 생각을 굴리다가 한명산기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승용차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리라 작정하였다.
《선철이 아버지, 지금 공장에 나가려고 벼르는게 아니예요?》 영희가 무슨 낌새를 채고 다가앉는다.
승혁은 영희의 얼굴을 다정하게 여겨보았다.
《당신은 속이지 못하겠구만. 그건 어떻게 알았소?》
《내가 당신과 한두해 살았다고 그걸 몰라요. 당신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속을 썩이는게 심상치 않더군요. 하지만 이번엔 안돼요. 아직 안정치료를 받아야 걸을수 있단 말이예요. 제몸을 보고 덤벼야지.》
《그래서 내 승용차를 부르자는거요.》
《어이구, 제가 뭐 그리 대단해서…》 영희는 코웃음을 쳤다. 《사람 웃기지 말아요. 제 푼수를 보라요. 직장장직에서도 떨어진 주제에…》
승혁은 너그럽게 웃었다. 아낙네들의 투정에는 대범해야 함을 생활체험을 통하여 이미 터득했다.
《정 승용차수준이 안된다면 손달구지라도 타고가야지. 당신이 좀 손달구지를 끌어다주구려.》
《말같지 않은 소린 하지도 말아요.》 하고 영희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승혁은 안해의 그 손을 꼭 잡아쥐였다.
《여보, 지금 모든 사람들이 하루빨리 비날론을 뽑아내자고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일하고있소. 혜경이가 설계를 끝냈다는데 빨리 전기가열기를 만들어 성공시켜야지.》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요. 그러나 몸이 성해야 할게 아니예요. 나도 속이 타요. 나도 당신 간호때문에 집에 붙들려있는게 좋은줄 알아요. 개건공사장에 나가 삽질이라도 좀 해야 속이 편하단 말이예요.》 영희가 손을 뽑으려 하였으나 승혁은 더욱더 꼭 잡았다.
《그럼 우리 함께 공장으로 나가는게 어떻소? 나 좋고 당신 좋고…》
승혁은 어언간에 눈물이 글썽해있는 영희에게 롱조로 계속하였다.
《로친네, 내 일하다 죽으면 관에다 술을 넣지 말고 초산비닐 한병을 넣어주구려. 초산비닐을 다 뽑아내면 난 그만이요. 그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해내겠지. 그래서 비날론이 쏟아진다면 내 인생도 허무하지는 않단 말이요.》 승혁은 허허 웃었다.
영희의 머리속에는 며칠전 돼지를 손달구지에 싣고 공장으로 갔다가 박춘섭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춘섭은 선철이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가 자기보다 난 사람이라고 했었다. 여전히 춘섭을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고있는 영희는 그가 공연히 객적은 소리를 하는것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영희는 춘섭이가 진실을 말한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그처럼 비날론을 애지중지하면서 자기의 심혼을 다 쏟아붓는 이런 사람이 훌륭하지 않으면 누가 훌륭할것인가.
그런데 섭섭한건 많은 사람들이 남편의 우점을 잘 보지 못하는것이다. 영희는 자기 남편이 많은 경우에 그저 성격이 급하고 고집스럽고 시끄러운 사람으로 평가되고있는듯싶어 서글프기도 했다.
이때 밖에서 승용차의 경적소리가 울리였다. 승혁은 깜짝 놀라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문밖에 승용차가 멎어서있고 신명욱책임비서가 벌써 식료품이 든 구럭을 들고 걸어들어오고있었다.
《저것 보오. 책임비서동지가 왔구만. 날 태워가자고 오지 않았나 말이요.》 승혁은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정말?》 영희는 두손을 가슴에 가져다대며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래도 책임비서가 알아주고 춘섭이가 인정해주면 그만이 아닌가고 생각하면서 그 녀자는 달려나갔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명욱은 영희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하였다.
《어떻게 찾아오다니요? 주동무가 쓰러졌다는데 내가 오지 않으면 어쩐단 말입니까.》
명욱은 식료품이 든 구럭을 영희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주동무, 몸이 어떻소? 뭐 밤에 자전거를 타고가다가 넘어졌다면서? 애들처럼 그게 뭐요. 창피하구만.》 신명욱책임비서가 시물거렸다.
《예, 아직 자전거타는게 서툰 모양입니다.》
《엎어진김에 쉬여간다는데 몸을 푹 쉬여야겠소.》
《아닙니다. 내 막 공장에 나가자고 하던 참이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책임비서동지가 오는군요. 나갈 일이 걱정이였는데… 절 좀 태워다 주십시오.》
《아니, 정신이 있소? 몸에 붕대를 감은 환자를 데려내왔다면 사람들이 이 책임비서를 뭐로 보겠소.》 명욱이 놀라서 몸을 뒤로 제치였다. 《별사람 다 보겠구만.》
《책임비서동지.》
《됐소, 됐소. 주동무가 다 나은 다음엔 내 차를 보내겠소. 그때 승용차를 타고 나오란 말이요. 오늘은 내 병문안을 왔으니 날 딱하게 달구지 말기요.》
《책임비서동지.》 승혁은 한무릎 앞으로 다가앉았다.
《안된다니까.》 명욱은 두말말라는듯 손을 내저었다.
《이거 섭섭하구만요.》 승혁은 볼부은 소리를 했다. 《비날론공장에서 함께 늙어오는 처지에 이렇게도 내 사정을 봐주지 못하겠는가요. 내가 한창 총각시절에 합성직장 초급사로청(당시) 부위원장을 할 때 책임비서동지는 련합사로청 일군이였댔지요. 그때부터 내 사정을 잘 봐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성쌓고 남은 돌이라는거요?》
《자 이런,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군.》 명욱은 껄껄 웃었다.
《책임비서동지, 내가 빨리 회복되는 길은 공장에 나가 카바이드굴뚝의 연기냄새도 맡고 용접불꽃도 보고 합성탑과 정류탑을 보면서 생활하는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속이 타서 심화병에 걸릴겁니다.》
명욱은 한숨을 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