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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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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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는 이때까지도 낮에 대원군한테서 당한 치욕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고 명성황후 또한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덤덤히 앉아있기만 하였다.
한동안 씨근거리던 민승호가 드디여 활이야 살이야 내쏘기 시작했다.
《대원위 그 량반이 너무하다는 말이외다. 나한테 매부벌이 되고 더우기 중전께 시아버지벌이니 이젠 사돈간인데 그런 처지에서 아, 소인을 만사람앞에서 망신 주다니 이게 어디 될 말이웨까. 안하무인도 유만부동이지 허참… 그러니 만사람들한테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나요. 량반유생들이 그토록 반대하는 〈서원〉을 끝끝내 철페하고 호포법을 억지다짐으로 내려먹이지 않나, 〈원납전〉이다, 〈통문세〉다 해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니 그들도 앙앙불락하고있소이다. 게다가 쇄국을 한답시고 나라의 대문을 땅땅 닫아매고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니 뭍으론 기차가 달리고 바다로는 함선이 달리는 개명천지에서 어디 통할 일이웨까. 옹고집에 찰완고가 어디 며칠이나 견디나 보자는거외다.》
민승호의 말은 전혀 틀리는 소리가 아니였다.
퇴페해진 나라의 왕권과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리하응은 《페정쇄신》이란 명목밑에 여러가지 봉건적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봉건제도의 부패성을 《제거》하고 나라의 위기를 수습하여 조선봉건왕조통치제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가 실시한 모든 정책들은 근대화를 지향하는 당시의 시대적요구에 비추어볼 때 매우 뒤떨어지고 보수적인 정책이였으며 위기에 다달은 봉건제도를 《구원》해보려는 일시적인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조치들은 극도로 문란해진 봉건제도를 바로잡고 민족적위기를 막아보려고 한 점에서 당시로서는 일정하게나마 긍정적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오이다.》
심각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한 민승호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민승호가 명성황후에게 대원군을 비난하는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병조판서 민승호와 대사성 조녕하는 둘 다 명성황후의 측근, 심복들이였다. 그런데 얼마전에 조녕하는 부산왜관에 와있는 일본의 현지 사환군 모리야마와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왜인들은 일본을 눈아래로 깔보는 완고한 쇄국주의자인 대원군을 그대로 두고는 그식이 장식이라 언제 가야 조선을 뚫고들어갈수 없다는것을 알고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를 조선정계에서 제거해야겠다고 작정하였다. 마침 고종왕도 이제는 나이가 되였고 명성황후 역시 총명하니 그들이 친정할수 있지 않는가. 게다가 고종은 성미가 유순하다고 하니 비교적 쉽게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할수도 있었다. 이렇게 타산한 왜인들은 대원군의 반대파, 명성황후의 지지파들을 내세워 대원군을 섭정의 자리에서 내쫓을 꿍꿍이를 벌리고 그 과업을 태정관정부의 수반인 태정대신 산죠가 직접 조선에서 활동하고있는 모리야마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모리야마는 금전과 권모술수로 조녕하를 매수하여 그로 하여금 명성황후의 양오래비인 민승호를 꼬드기게 하였던것이다.
민승호의 수상쩍은 거동에 명성황후도 저으기 긴장되여 그를 쳐다보았다.
민승호는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원위가 중전마마를 페비시키려 한다는 말도 떠돌고있소이다.》
《무어라? 페비?!》
명성황후는 앉은벼락이라도 맞은듯 자세가 대뜸 굳어지고 눈동자가 갈팡거렸다. 가슴속에서 억장이 무너지는듯 하여 숨쉬기조차 가빴다.
그러는 명성황후의 기색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민승호는 붙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낮으나 열띤 소리를 계속 내뱉았다.
《대원위로서는 그러기가 십상이지요. 게다가 인현왕후의 경우도 있지 않소이까. 아마… 더우기 중전께선 영특하고 지혜로와…》
명성황후의 귀에는 민승호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눈앞도 뿌잇해지면서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그의 말이 청천벽력같은 소리이긴 했으나 어찌보면 명성황후자신이 이미전부터 남모르는 불안속에 위구를 느끼던 말이기도 했다. 왕비로 간택되여 대궐에 들어온지 5년세월이 지났으나 자기는 아직 왕위를 계승할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있었다.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항간의 려염집아낙네들조차 시집에서 쫓겨나는 일곱가지 죄악중에 아들을 낳지 못하는것이 첫손가락에 꼽히는데 하물며 왕가의 지어미된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물이 있어야 배가 뜨고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딴다고 지아비인 고종이 자기에게 곁을 주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았는가. 다행히 얼마전부터 고종의 마음이 변해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왕자를 언제 보게 될지 기약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는 양오라비 민승호가 까밝혀 말하지는 않아도 바로 이것을 우려하여 하는 소리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오라버님, 어찌했으면 좋겠소?》
구원을 청하는 명성황후의 눈빛은 애소로 떨리고있었다.
승호는 이미 결심이 확고한듯 서슴없이 대꾸했다.
《선손을 써야지요 》
《어떻게?》
민승호는 다시금 좌우를 둘러보고나서 입을 열었다.
《국왕의 친정을 등대고 대원위를 대궐에서 내쫓아야 하오이다.》
《예?!…》
너무도 놀라운 소리여서 명성황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감마마의 보령(나이)이 벌써 스물을 넘기지 않았소이까? 일이 제대로 되자면 이미전에 친정을 했어야지요.》
그제야 민승호의 말이 리해가 되여 명성황후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렇다, 절대군주인 국왕의 나이 이제는 스물이 되였으니 응당 대권을 틀어쥐고 친히 국정을 다스려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도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아직도 섭정을 한다는것은 언어도단이 아닐수 없었다. 아니, 어불성설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상감마마가 친정을 한다면 자기를 페비시키려는(아직은 사실여부가 확실치 않긴 해도) 대원군의 음모도 저지시킬수 있을것이 아닌가. 그리고 고종이 친정하게 된다면 성미가 유약한 그는 불피코 안해인 자기더러 곁에서 보필해주기를 바랄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왕비의 자격으로 대원군대신 섭정의 자리에 오르게 될것이 아닌가. 아, 그때가 오면… 명성황후의 가슴은 크나큰 정치적야심으로 세차게 고패쳤다.
그런데 호랑이같은 대원군이 순순히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할것인가. 그리고 성정이 유순한 고종이 감히 대원군과 맞서 싸울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명성황후는 다시금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런데 대원위대감이 순순히 물러나려 할가요?》
《우리의 힘을 키우면 되오이다. 우리 민씨척족과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중전마마의 주위에 묶어세우면 되오이다.》
이번에도 민승호는 서슴없이 대척했다. 보아하니 그는 이 일에 대해 평소에 생각을 많이한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그는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의 덕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병조판서란 고관대작이 되여 벼슬의 맛, 권세의 맛을 보게 되자 점점 야심이 커져 이제는 대원군을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할 꿈을 꾸고있었던것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명성황후의 눈에서 범상치 않은 빛이 번뜩였다. 그는 민승호의 말이 충분히 리해되였을뿐아니라 전적으로 공감되였다. 자기 주위에 민씨들과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묶어세운다면 참말이지 무서울것이 무엇이겠는가. 더우기 대원군은 지나친 독단과 전횡으로 하여 조정에서는 물론 항간에서조차 민심을 잃고있다. 그리고 명성황후, 이제는 자기도 대궐에 갓 들어와 어리둥절해하던 촌닭이 아니였다. 여러해동안의 궁중생활에 그는 나이 들고 키도 자랐을뿐아니라 담도 커지고 세상리치도 환히 꿰뚫게 되였다. 더우기 많은 책을 읽는 과정에 동서고금의 흥망사며 권모술수, 제인지책과 같은 정계의 흑막에 대해서도 깊이 파악하고있었다. 햇병아리가 자라 암닭 아니, 독수리가 된셈이였다.
대원군이 념려하던바대로 명성황후는 암고양이가 아니라 암범이였다. 그 암범이 지금껏 부드러운 털속에 감추고있던 날카로운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고있었다. 이후로 명성황후는 고종을 움직여 자기네 민씨일족과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중요벼슬자리에 박아넣기 시작하였다.
대원군대신 자기가 섭정하려는 명성황후의 야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불타올랐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 불리우는 서양의 강대국도 빅토리아녀왕이 통치하고있고 크나큰 대청제국도 서태후가 섭정하고있지 않는가. 그런데 조선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명성황후의 야심은 점점 자라올라 이제는 거의 기정사실처럼 그에게 여겨졌다.
다망한 국사에 볶이우던 대원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뿐만아니라 며느리의 일가사람들이 조정의 관직에 들어앉는것을 자기의 체면에 부합되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다.
어지간히 지반을 닦아놓은 명성황후는 이제는 고종의 친정을 선포할 그날 아니, 자기가 섭정의 자리에 들어앉을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예상외로 너무도 빨리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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