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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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6
(2)
《홍선생!》 최일이가 울기가 오른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도 빨리 큰 공장도 세우고 광산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철길도 놓고 해서 부국강병을 이룩해야겠는데 조정의 백관들은 상기도 태평성대의 꿈에 취해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니요!》
홍역관은 자기와 뜻이 맞는 최일이가 만족스럽고 장해보였다.
《최도고, 생각을 잘했소. 도고도 이제는 대도고라 불리우는 부자가 됐으니 장사로 번 돈을 기업에 투자할 때가 되였소. 사실말이지 저 미국이 오늘처럼 번성하게 된것도 따지고보면 록펠러와 같은 석유왕이나 모르간같은 강철왕, 듀폰과 같은 화약왕들이 있기때문이요. 그리고 덕국(도이췰란드)의 군수업이 장성하게 된것도 크루프와 같은 강철콘체론이 있기때문이고 지어 일본이 동양의 강국으로 부상하고있는것도 정부가 미쯔이나 미쯔비시와 같은 재벌들을 육성했기때문이요》
홍역관의 말을 들은 최일은 흥분되여 그의 손을 덥석 쥐였다.
《옳소이다. 듣자니 일본의 신흥재벌인 미쯔비시는 순전히 정부의 뒤받침으로 몇십년어간에 오늘같은 세계적인 재벌로 되였다고 합디다. 그리구 지금 일본내각의 내무경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그 미쯔비시재벌의 최고고문이라고 하던가… 홍선생, 나를 좀 도와주시오. 우리에게도 나라의 경제를 뒤받침해줄 든든한 재벌들이 있어야 할게 아니요, 예? 홍선생!》
홍역관은 최일의 말이 백번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보다는 그의 왕성한 기업의욕이 마음에 들었다. 부국이 되려면 부력이 있어야 한다는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였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자기야 량반축에도 못드는 중인이고 더구나 이제는 역관도 못하고 의관노릇으로 호구지책을 하는 형편에…
《홍선생, 왜 말이 없소?》
최일이가 안타까움에 잠겨 부르짖었다.
홍역관은 미안스러운 웃음을 띄였다.
《재력도 권세도 없는 내가 최도고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안타까워서 그러오.》
《아따, 조정의 중신들과 맺은 줄이 상기도 빨래줄같은데.》
《모르는 소리, 내가 김옥균이네와 관계가 있다고 그들이 곁이나 주는줄 아오? 그건 그렇고, 그래 새로 벌리려는 일은 뭐요?》
《금광이요!》 최일의 눈은 열기로 번뜩였다.
《충청도 직산에 좋은 금맥이 나졌는데 거기에 돈을 댈가 하오.》
《직산금광이란 말이지. 나도 말을 들었소.》
최일의 의기와 열기에 감염된 홍역관도 저으기 흥분했다.
《나도 힘써보리다. 물론 김홍집이같은 대감들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민중전이요. 나라의 대소정사는 모두 중전마마를 통해서 처결되는것만큼 그분의 재단을 받아야 하오.》
《그야 그럴테지요. 무슨 방법이 없을가요?》
《구중궁궐속에 계시는 지엄한분이라…》
홍역관은 다시 난색을 지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아정은 방금전에 사랑방에서 들은 최도고의 말이 머리속에서 윙윙거려 마음을 종잡을수 없었다. 정말 류학을 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지금 우리 나라에 와서 민중전의 전속의사가 된 호르똔도 미국녀인이고 우리 나라 각지를 탐방하고있는 영국왕실지리학회 학자인 이사벨라도 처녀가 아닌가. 자기가 그들보다 못한것이 뭣이란 말인가. 자기도 밤새워 공부하여 꼭 성공할것 같았다. 의학이든, 물리학이든, 교사든…그 어느 분야를 선택해도 좋다. 그 학문이 내 나라에 기여하고 세상에 기여하게 된다면 자기, 아정이는 참말로 이 땅에 태여난 보람이 있을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언젠가 몰래 읽어본 《구약성서》의 한 대목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것이다.》
그렇다. 노력하자. 피타게 공부하자. 그러면 소원이 성취될것이다.
아정은 불현듯 가슴속에 스며드는 크나큰 환희를 뿌듯이 느꼈다. 이런 희망, 이런 열망은 그가 어제오늘에 비로소 고안해낸 생각이 아니였다. 녀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니, 학교를 다니던 그 학창시절부터 아정은 이런 뜻을 품고 꾸준히 공부하였다.
문득 뻐꾹시계가 또다시 울었다. 그 소리에 신기루와 같은 상념에서 깨여난 아정은 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여전히 밝았다. 아정은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것만 같았다. 가슴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아정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까부터 수틀을 펼쳐놓았으나 심정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수놓이란 재예와 함께 침착하고 찬찬하고 꼼꼼한 품성을 길러주기에 어느 집들에서나 딸들에게 반드시 배워주기마련이다. 아정은 수놓이에서도 남다른 재능이 있어 그의 수예품들은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솔거가 그린 황룡사벽의 늙은 소나무처럼 생동하고 아름다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군 하였다. 그는 수틀에 마주앉으면 시간가는줄 몰랐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리속은 물론이고 송학을 수놓고있는 수틀우에도 계원사에서 상면한 총각의 모습만이 어룽거렸다. 그러던 아정의 뇌리에 문뜩 표범처럼 날래고 결패스러운 태봉이란 그 광대가 떠올랐다. 아정은 온몸이 소름끼치듯 오싹해지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더구나 오늘 밤에 살인나지 않도록 잘 조처하라고 자기에게 신칙하던 처녀사당의 말이 상기되자 더는 자리에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아정은 황급히 수틀을 치우고 일어났다. 홰대에서 장옷을 벗겨들었다가 그대로 걸어두고말았다. 다른 나라 녀자들은 그러지 않는데 왜 우리 나라 녀자들만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낡은 인습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는 우정 더 장옷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와 다툼질할 때가 많았다.
아정이가 방문을 여니 아래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정아, 어데 가려니?》
《예, 잠간 나갔다와요.》
《쓸치마를 꼭 쓰고 나가거라.》
그 말에는 대척없이 문을 닫고말았다.
골목의 굴뚝들에서 연기가 오르는것으로 보아 다저녁때였다. 종종걸음치다싶이 하여 종각앞공지에 이른 아정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날도 어둡지 않았는데 병무가 벌써 나와있을리가 없었다. 한지에 그대로 서있을수가 없어 그는 종각곁의 골목쪽으로 걸어가 어느 집의 처마밑에 들어섰다. 저쯤에 종각이 보였다. 그는 여기서 병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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