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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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6
(1)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있는 아정은 몹시도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이다. 그는 지금 날이 어두워지기만 기다리는중이였다. 그래야 종각으로 나가 병무더러 광대인 태봉이와 싸우지 않도록 말릴수 있기때문이였다. 병무의 집을 모르니 그렇게 할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문득 《뻐꾹.》하고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란 아정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벽시계의 웃머리에서 튀여나온 뻐꾹새가 세번 울었다. 그러니 3시, 아직도 한낮이다.
《빨리 어두워져야 종각으로 나가볼텐데…》
아정은 한숨처럼 조용히 뇌였다.
이때 아래방에서 그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정아, 뭘하니?》
어머니가 불안해하는 제 심정을 아는것 같아 아정은 얼른 머리를 매만지고나서 사이방문을 열었다.
《아니, 방에 있으면서도 기척이 없었느냐?》
가볍게 지청구를 한 어머니가 다시 부드럽게 일렀다.
《사랑방에 최도고어른께서 오셨다. 어서 건너가 인사를 드려라.》
《그래요?》
일순 반가와하는 기색이 아정의 얼굴에 떠올랐다. 최도고란 자기 아버지가 사역원훈도(외국어통역원양성기관의 하급관리.)를 할 때부터 자별한 사이로 지내는 최일이란 사람인데 아버지가 통역관으로 일본으로 건너다닐 때에 따라다니며 장사물계를 배우더니 이제는 한양은 물론 조선적으로 손꼽히는 도고(갑부)가 되였다. 의리심이 깊은 그는 홍역관을 스승이나 형님처럼 섬기면서 아정이네 집에 쌀이나 땔감 같은것을 푼푼히 대주군 하였다. 그래서 아정이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귀인처럼 대하였다.
아정이가 사랑방에 들어가니 회색깁바지저고리를 입은 키가 후리후리한 아버지와 역시 흰깁옷을 입은 최도고가 명절교자상을 가운데놓고 마주앉아있었다.
《아저씨, 문안절 받으세요.》
이렇게 말한 아정이가 한쪽무릎을 세우고 나부시 절을 하자 호인형인 최도고의 입이 당장 헤벌쭉해졌다.
아정이가 최도고의 놋잔에 술을 따르자 그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홍선생, 금년엔 아정이를 출가시켜야 하지 않겠소? 생선과 딸은 끼고있으면 안된다는 말 모르시우?》
《그래야 할가분데 애가 어디 말을 들어야 말이지. 자기는 꼭 학문을 배워 세계적인 녀의나 녀학자가 되여 나라를 빛내겠다는구려. 꿈에 네뚜리같은 소리지.》
홍역관은 입맛을 다시였다. 홍역관의 이름은 홍학규인데 역관으로 오래 있다보니 홍역관이란 말이 이름처럼 되여버렸다. 학식이 많고 점잖은 그에 대한 친근감으로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는 개항 이후로 점점 강화되는 왜놈들의 침탈로 나라의 형세가 기우는것을 보고는 왜말을 배운것을 수치로 여기고 회한하면서 지금은 역관노릇을 그만둔 사람이였다.
최일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정이 생각이 기특하외다. 홍선생, 아정이 뜻이 정녕 그렇다면 우리 이 애를 류학보냅시다. 알겠소, 우리 아정이가 이제 참말로 나라를 위하는 대학자가 되겠는지 말이요.》
《에에, 꿈같은 소리, 나도 그런 생각이 없진 않소만 학비를 어떻게 당한단 말이요. 게다가 아직 우리 조선서야…》
《개화했다는 홍선생도 그런 말씀을 하시오? 지금 세상에 유명짜한 녀류명사들이 얼마나 많소. 우리 조선에도 응당 있어야 하오. 학비는 내가 대겠으니 걱정마시우. 그리구 신랑감도 고릅시다. 인물곱겠다, 똑똑하겠다, 재주 또한 비상한 아정이같은 규수는 한양은 물론 세상천지를 뒤져도 없습니다. 길일을 택해 성사시킵시다.》
최도고의 말에 얼굴이 활딱 붉어진 아정은 《아이참, 아저씨두…》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였다.
밖으로 나가는 아정의 뒤모습을 이윽히 바라보던 최일이가 반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정인 개명한 규수외다. 모두가 빨리 저렇게 개명해야 할텐데…》
홍아정의 성장에는 아버지 못지 않게 장사군인 최일의 관심과 도움이 자못 컸다. 홍역관의 영향으로 남먼저 개화한 그는 녀자를 천시하고 지어 교육조차 시키지 않는 사회풍조에 반발하는 사람이였다.
하기에 그는 아정이가 신식녀학교인 리화학당에 다니는것을 적극 장려했고 그런 심정으로 리화학당에 적지 않은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었다.
이어 최일이가 화제를 돌렸다.
《홍선생, 내 오늘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 찾아왔소이다.》 그는 홍역관에게 권연을 권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김홍집대감에게 다리를 좀 놓아주시오.》
《김홍집대감?》
홍역관은 김홍집이 제2차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그의 통역관으로 동행하였으며 그 과정에 그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았다.
《조정의 중신들중에 나라의 개화문명에 관심이 큰 사람이야 그래두 김홍집대감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를 통해 내 상업자금을 기업으로 전환시키려는 생각이외다.》
《음.》
홍역관도 생각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원래 그는 같은 역관인 오경석과 함께 외국으로 다니면서 서양문물과 접촉하는 과정에 우리 나라도 빨리 근대화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개화의 선구자였다. 하기에 오경석이나 중인인 류홍기의 영향으로 개화파의 령수가 되여 갑신정변을 단행한 김옥균이와도 자별한 사이였다. 나라의 모든것을 근대적, 부르죠아적기초우에서 변혁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자는것이 바로 이들, 개화운동가들의 사상이였다. 10년전인 갑신년에 홍역관이 일본에 가있지 않았더라면 그도 김옥균이와 손잡고 정변에 참가하였을것이다. 다행히 개화파들에 대한 류혈적인 탄압에서 벗어나고 또 지금 역관노릇도 그만두었지만 그는 지금도 나라의 부국강병에 대한 지향만은 버리지 않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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