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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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5
(1)
서울종로의 종각앞공지에서 정월대보름명절놀이가 벌어지고있었다.
집으로 오던길에 홍아정과 엄병무도 구경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틈에 끼여들었다.
녀인들모두가 장옷이나 쓸치마로 얼굴을 가리우고 눈만 빠금히 내놓고있었는데 홀로 장옷도 쓰지 않고 얼굴을 환하게 드러내놓은 아정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희한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난하는 축들도 있었다. 남녀유별이라 아직 봉건이 심한 때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머리에는 복건을 쓰고 솜을 두고 누빈 두루마기를 입고나선 병무도 한다하는 량반세가집도련님행색이다.
공지에서는 전라도광대패가 놀아대고있었다.
명절비음을 한 숱한 사람들이 담을 쌓고 그것을 구경하고있었다. 맨앞에는 박쥐저고리(색동저고리)를 입고 조바위를 쓰고 당혜를 신은 녀자애들과 전복에 복건을 쓰고 태사혜를 신은 사내아이들이 줄느런히 앉아있었고 그뒤에는 중치막이나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들이 서있는데 그들도 신분구별이 엄격하여 선비는 푸른빛이요. 평민은 흰빛이였다.
그리고 이런 장소에는 좀체로 나타나지 않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실띠를 띤 량반관료들이며 심의에 큰 띠를 띠고 복건을 쓴 점잖은 유생들도 끼워있었다. 년중 큰 명절이라 녀인들도 많았는데 치마저고리에 행주치마를 걸친 려염집아낙네들은 물론 삼회장저고리에 털배자를 입고 조바위나 남바위를 쓰고 손에는 털토시를 낀 량반대가집 귀부인들도 보였다. 그들은 대개 사람들 뒤전 멀리에 서있었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흥겨워했다. 해정술에 낯색이 불카해진 사내들이 껄껄 웃기도 했다.
이런 놀이판이면 응당 나타나기마련인 장사치들의 싸구려소리도 제법 높다.
《싸구려. 깨엿이요, 깨엿.》
《자, 군밤이요, 군밤. 어서 싸구려.》
왜놈장사군들도 뒤질세라 소리친다.
《모찌(일본떡), 모찌, 맛이나 좋소다.》
《히로시마 미깡(귤), 미깡…》
지금 반반하게 닦아놓은 공지에서는 초록색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은 우에 자주바탕의 사로 만든 쾌자를 입고 꿩깃을 꽂은 전립을 쓴 사당들이 량손에 칼을 갈라잡고 《강강수월래》의 음악에 맞추어 절칵절칵 검기무를 추고있었다. 명절비음을 한 구경군들도 볼만 하지만 울긋불긋한 광대들의 현혹적인 차림새는 더욱 미관이요 경관이요 장관이였다.
어린 소녀들과 젊은 처녀들은 물론 모든 녀인들이 음악반주에 맞추어 손벽을 치면서 《강강수월래》의 노래를 불렀다.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달떠온다 달떠온다
동해동천에 달떠온다
《강강수월래》는 지난 임진왜란때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인민들의 애국심과 행복에 대한 지향을 반영하여 부른 민요로서 삼남지방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우고있었다.
이제는 흥취가 고조되여 녀인들뿐아니라 남정들도 걸걸한 소리로 노래에 합세하였다.
호미 쥐면 농군이요
총을 메면 수군일세
강강수월래
...
흥겹고도 경쾌한 노래가락과 씩씩하고도 절도있는 춤가락에 사람들은 얼친 모양인데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는 구경군들도 있었다.
춤을 끝낸 사당들이 림시로 쳐놓은 막뒤로 사라지자 초록석죽화전복을 입고 어리광대의 표식인 금초관을 쓴 키가 작달막한 사내가 재주넘기를 하며 공지복판으로 나왔다.
그의 우습강스러운 거동과 익살스러운 언변이 또한 사람들의 흥취를 돋군다.
《다음은 전라도의 특기인 마상재를 보시겠소이다. 하오나 담이 작은 사람은 아시예 볼 생각을 마시오. 그리구 앞으로 조여들지들 마시오. 말발굽에 채일수 있소이다. 자, 그럼 손에 땀들을 쥐여봅시다. 거사 천태봉!》
어리광대가 입에 손가락을 넣고 《휘익-》휘파람을 불자 늘씬한 공골말을 탄 젊은 거사 천태봉이가 공지에 나왔다. 그는 융복에 속하는 남천릭을 입었는데 진홍관대를 띠고 사동개, 화동개, 환도를 허리의 뒤와 옆에 차고 머리에는 붉은 대갓에 공작깃을 꽂아쓰고 발에는 흑화를 신고있었다.
광대패에서 녀광대는 사당이라 했고 남자광대는 거사라고 했다.
태봉이가 우묵한 눈확속의 매눈처럼 예리한 눈에 긴장한 빛을 띠우며 말의 배허벅을 걷어차자 공골말은 공지를 원을 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말우에서 태봉이는 곧추 일어서기도 하고 배밑에 난짝 들어붙기도 하며 온갖 재주를 다 부렸다. 그때마다 관중들은《어이쿠》, 《저런!》하고 탄성을 지르군 했다.
드디여 태봉은 공지에 말을 세웠다.
어리광대가 또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특기중의 특기를 보시겠소이다. 재삼재사 말씀드리지만 담이 작은 사람은 가시든지 눈을 감고계시든지 하시오. 까무러치는것까지는 침으로 고칠수 있으나 그보다 더한 일이 생기면 야단이외다.》 그가 사설을 늘어놓는 사이 광대들이 한쪽가녁에 문짝만 한 널판자를 세워놓더니 그앞에 붉은 치마에 황초삼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젊고 예쁜 사당을 세우는것이였다. 도대체 어쩌자는건가? 사람들은 변옥절이라고 하는 각시사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공골말이 다시금 원을 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어리광대가 한손을 힘있게 쳐들며 웨쳤다.
《비수던지기!-》
태봉이가 굽을 놓고 달리는 말등에 우뚝 일어섰다. 그는 허리춤에서 비수들을 뽑아들었다.
병무도 아정이도 아니, 관객모두가 숨을 죽였다. 성냥을 그어대면 당장 불이 확 일듯싶은 긴장으로 팽배해진 분위기가 공지에 꽉 들어찼다.
드디여 태봉이가 널판자앞에 세운 사당 옥절이를 향해 비수 하나를 뿌려던졌다.
《휙-》하는 소리와 함께 화관을 얹은 옥절의 머리정수리 바로 우에 비수가 푹 꽂혔다.
관객속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굽을 놓고 달리는 말우에서 태봉이가 또 비수를 던진다.
이번엔 옥절의 귀우에 꽂힌다.
또다시 날아가는 비수, 옥절의 얼굴옆에 꽂혀 부르르 떠는 비수…
그러나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앞을 주시하고있는 옥절은 침착하고도 태연한 자세였다.
사람들속에서 아우성, 비명 지어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터져나왔다.
너무 가슴이 떨려 아정이도 이미 눈을 감아버린지 오랬다. 잠시후 살며시 눈을 뜨고보니 젊은 사당의 몸을 따라가며 비수들이 주런이 박혀있지 않는가! 아정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병무를 훔쳐보았다. 그런데 입을 꾹 다문 병무는 두눈을 쪼프리고 마상의 광대만 지켜보고있었다.
드디여 비수던지기가 끝났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안도의 숨소리들이 길게 뿜어나왔다.
《아이쿠, 간이 콩알만 하게 졸아들었구먼.》
《에이, 십년감수했수다.》하는 소리들과 함께 땅에 풀썩풀썩 주저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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