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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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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189회 작성일 23-10-1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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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3

(1)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계곡으로 흐르는 찬물에 배추를 씻던 홍아정은 가끔 산중턱의 계원사쪽으로 눈길을 주군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함지에 담은 배추를 다듬군 하였다.

손도 볼도 빨갛게 얼었으나 아정은 배추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가을에 아정이가 움속에 보관한 배추는 아직 어찌나 싱싱한지 방금 밭에서 캐온듯싶었다.

겉잎을 뜯어버린 하얀 배추속은 처녀의 살결처럼 희고 정갈했다.

별안간 휙휙 바람소리가 나며 눈가루가 날렸다. 누군가 나무가지를 잡고 날아다니더니 아정의 앞에 뚝 떨어져내렸다.

온몸에 흰눈을 뒤집어쓴, 보매 젊은이같은 사람을 보고 아정은 진정 까무라치게 놀랐다.

《아이 깜짝이야! 사람이요, 귀신이요?!》

그 말에는 대꾸없이 젊은이는 시조라도 읊조리듯 넉살좋게 시까스르는것이였다.

《배추 씻는 그 아가씨

겉대나 떡잎은 다 제치고

속에나 속대를 나를 주오》

어처구니없는 속에서도 아정은 웃음이 나갔다. 그런데 어느새 머리며 옷에서 눈가루를 다 털어버린 젊은이의 용모는 참으로 준수하였다. 장난꾸러기같지도 않고 더구나 불량기라군 조금도 없는 그의 모습을 할끔 훔쳐본 아정의 입에서도 저도 몰래 시조조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보던 님이라고

속에나 속대를 달라시오》

그러자 젊은이의 대꾸가 또 걸작이다.

《인제 보면 초면이요

이따 보면 구면이지》

시작한바치고는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아정이도 또 대척을 했다.

《초면 구면은 다 그만두고

부모님 무서워 못 주겠소》

생면부지의 젊은 사람과 이런 수작을 한 아정은 그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아미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아정이보다 총각이 더 점직해하는것이 아닌가. 아마도 처녀의 미모와 당돌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버린지도 모를 일이였다. 실상 순박한 젊은이는 아정이앞에서 몸둘바를 몰라했다.

처음엔 그저 용모가 단아한 처녀라고 여겼는데 다시금 찬찬히 보니 그는 어쩐지 속세의 인간같지 않았다. 미인도나 비천도(녀인이 하늘로 날아가는 불교그림.)에서나 볼수 있는 미녀라 할가. 백옥같은 살결에 붓으로 그은듯한 가는 눈섭이며 영채로운 눈빛, 맹주(맹산)먹처럼 까맣고 윤기흐르는 태머리는 그저 곱다는 범상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리지적이고도 우아한 모색이였다. 연두빛깃에 자지삼회장을 대고 자지고름을 맨 저고리우에는 팔배에 소매없는 남색털배자를 입은것이 여간만 맵시있지 않았다. 무릎을 휩싸고 앉은 다홍색치마단끝으로 흰 버선에 신은 수를 놓은 당혜의 신코가 살짝 엿보였다. 어느모로 보든지 고명한 집안의 규수가 분명했다.

그는 두손을 모두어잡으며 어줍게 사과하였다.

《아가씨, 초면에 실없이 굴어 죄송하기 그지없소이다. 하 적적한 빙천설지에서 선녀같은 아가씨를 문득 대하고보니 저도 모르게 망발을 했소이다.》

할 말이 없는 아정은 쭈그리고앉아 그저 배추만 씻었다. 그는 부끄러움으로 귀뿌리뿐만아니라 하얀 목덜미까지 익은 꽈리마냥 새빨갰다.

젊은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작은보름이여서 약밥과 함께 검정나물을 먹어야 하는데 아가씬 햇배추를 다듬고있소이다.》

정월대보름은 보통 이틀을 명절로 삼았는데 대보름의 전날인 열나흘을 작은보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날에는 검정나물이라고 하여 고사리며 두릅과 같은 묵은 나물을 먹어야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하였다.

《신선한 배추가 있는데 굳이 묵은 나물을 먹겠나요.》

아정은 고개도 들지 않고 고운 소리로 대꾸했다.

말문이 막힌 젊은이는 사이를 두었다가 또 말을 걸었다.

《아가씬 대보름불경 드리러 왔소이까?》

그러자 아정의 입에서는 돌연 꿰진 소리가 튀여나왔다.

《흥, 불경… 흙으로 빚은 부처 개떡같사와요.》

젊은이는 놀라는 기색이였다.

《보아하니 아가씬 개명한분이시구려.… 하오면?》

《우리 어머님대신 시주왔소이다.》

젊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활기를 띠였다.

감사덕분에 비장이 호사라구 오늘부터 부처님덕에 내가 배터지게 됐소이다.》

젊은이의 씨원씨원한 성미에 아정은 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던 아정은 불현듯 그의 정체에 호기심을 느끼고 영준해보이는 젊은이의 모습을 은근살짝 훔쳐보았다.

《도련님은 예서 뭘하시오이까? 스님같지는 않고…》

《도를 닦지요.》

《예, 그러니 가람에서 과거급제공부를 하시는 량반댁도련님이시군요.》

젊은이가 코웃음을 쳤다.

《량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반이외다.》

《무반은 뭐 량반이 아닌가요?》

문존무비, 문관만 존대하고 무관을 천시하는 이 세상에서 무반이야 량반대접을 못 받지요. 하오나 군사가 있어야 나라를 지키는 법, 그래서 시생은 이 산속에서 무예를 닦고있소이다.》

잠시 말을 끊은 젊은이는 주먹을 흔들며 격동된 어조로 시조를 외웠다.


흉중에 피가 뛰고

벽상에 칼이 운다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을 하여라


젊은이의 담찬 기상과 억센 기백에 아정은 무척 감동되였다. 그러나…

《아이참, 내 정신두.》

아정은 그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나서 배추함지를 들고 총총히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뒤에서 젊은이가 그에게 소리쳤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우.》

눈덮인 바위등에 힘겹게 올라서는 아정을 미타하게 바라보던 젊은이가 그만 달려가 그의 함지를 빼앗아들었다.

아정은 저고리고름을 입에 문채 헌걸차게 걷는 그의 뒤모습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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