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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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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854회 작성일 23-08-2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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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회

제 2 편

21


장자강발전소건설사무소 지배인이 리성조를 흔들어 깨웠다. 죽을 지경으로 피곤했던 리성조는 그의 말소리에서보다 안타까운 손짓으로 먼저 전화가 왔다는것을 어슴푸레 짐작했다.

《일어나우. 얼뜬 일어나라니까. 내각부수상 김책동지시오.》

리성조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지배인이 그에게 송수화기를 끄당겨주었다.

《어서 받소. 젠장!… 여보, 정신차리라니까. 김책부수상동지가 기다리시오!》

별안간 리성조는 침대우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나무의자들을 한데 겹친 침대가 기우뚱거렸다. 낡은 군대모포가 흘러내리고 머리맡에 놓았던 책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나서 송수화기를 넘겨받았다.

《기사장 리성조입니다.》

《나 김책이요. 쉬는걸 깨운게 아니요?…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부수상동지, 전…》 그는 지배인쪽을 향해 지금 몇시나 됐는가고 눈짓했다. 이제야 고작 10시 20분이라고 지배인이 입놀림으로 대주었다. 《전 아직…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부수상동지, 솔직히 말해 그만 정신없이 잠들었댔습니다.》

《수력발전전망계획은 어떻게 됐소?》

《다 끝냈습니다.》

사실 그때문에 며칠을 꼬박 밝혀온 그였다.

《수고했소. 기사장동무, 이거 내가 너무 무리하게 일을 시킨게 아니요?》

《아닙니다. 부수상동지, 지금이 어느때라고…》

《그럼 설계도면을 가지고 떠날 준비를 하시오. 아직 그곳에 차가 가지 않았소?… 음, 이제 갈거요. 래일아침 내각청사에서 만납시다. 기사장동무의 숙식조건은 그 차를 타고간 사람이 다 조직해줄거요.》

김책은 송수화기를 놓았다. 수화구에서 울리는 덜컥 소리와 함께 뒤에 잇닿은 전류 흐르는 소리로 미루어 그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김책이 래일아침에 만나자고 하는 그것이였다. 내각에서라면 기다리겠다고 할것이였으나 차를 보내면서도 래일아침으로 미루는것은 어덴가 먼곳에서 전화를 걸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리성조는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한쪽구석에 놓인 바께쯔물을 떠서 급히 세수를 했다. 그가 지배인과 함께 일하고 자고 먹던 사무실 바닥이 온통 물로 질벅해졌다. 별반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이건만 그는 조급해했다. 녀교원의 첫 강의, 시험비행사의 첫 리륙, 신인배우의 첫 출연이나 병사의 첫 출전이 그러하듯이 그는 자기가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전쟁때문에 일시 중지되였던 여러 대상의 발전소건설방안을 이제 검토받게 되리라는것으로 몹시 흥분했던것이다. 늙수그레한 지배인이 그에게 수건을 내밀어주었다.

《소환이요?》

《글쎄요.》

《흠- 홀애비생활에 서로 정들가 하니 또 훌쩍 가버리는건가?…》

《원 걱정두, 이제 홀애비들살림을 더 멋지게 해봅시다. 내가 전기를 떠나서 가면 어데루 가겠다구 그러시오?》

이미 그사이 친숙해진 두사람은 서로 소리내여 웃어댔다. 전쟁의 제일 어려운 때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발전소건설에 어깨를 들이민 두사람이였다.

리성조는 말코지에 걸린 자기의 단벌옷과 코트를 입었다. 가스등불빛을 등지고 창문유리에 제 모습을 비쳐보려 하다가 그만두고말았다.

(내각에서 계획을 검토하는것일가? 아니면 혹시?!…)

그러자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맹중리에 가서 송전작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친히 전화를 거시여 그의 성공을 축하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었다. 《고생이 많았겠소. 성조동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 말밖에 해줄것이 없는데 량해해주시오.》

봄시위같이 세찬 격정이 그때 그의 가슴에 소용돌이쳐흐르고있었다.

《장군님! 저에겐 그이상 더 큰 표창이 없습니다! 아무 일이든 또 맡겨주십시오. 힘자라는껏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장군님! 이제는 산도 떠옮길 힘이 솟습니다!》

《좋소. 그러리라고 믿었소.》

그이께서는 군수공장들에 걸려있던 난문제를 풀었으니 이제부터는 전후 수력발전총계획을 완성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리성조는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있었다.

《왜 그러오?》하고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장군님!… 너무 뜻밖에… 아름차서 그만…》

《성조동무, 우린 아직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헤쳐가야 하겠지만 래일의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고 더 빨리, 더 좋게 건설하기 위한 대책을 미리 세워야 하오. 그때에 가서 또 전기가 걸리면 어떻게 하겠소. 기사장동무를 또 어데 들여보내여 전기를 끌어오라고 할수도 없지 않소!》

그이께서 웃으시였다. 리성조 역시 그 호탕한 웃음에 이끌려 따라웃었다.

《동력문제는 전후복구건설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오. 통이 크게 전후수력발전전망계획을 작성해보시오.》

《알겠습니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믿소. 성조동무, 잘해보시오.》

그때 리성조는 자기가 운명의 전환점에, 분수령에 올라섰음을 느꼈다. 불현듯 초인간적인 힘으로 기적을 향해 내닫고싶은 욕망을 걷잡을길 없었다.

하여 그는 잠도 휴식도 다 잊고 일에 몰두하였다.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유능한 설계일군들, 건설전문가들과 함께 대규모의 수력발전소건설을 예견한 총발전계획을 작성하였다. 이제 이것을 장군님께서 친히 보아주실것이다!…

난로안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있었다. 탁탁 불꽃을 튀기는 소리, 부글부글 진액이 끓어번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는 책상우에 도면을 펴놓았다.

…승용차의 경적소리가 울린것은 그로부터 얼마후의 일이였다. 도면두루말이를 안고 달려나간 리성조는 차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보고 우뚝 멎어섰다. 뜻밖에도 그는 병기생산국 서병호국장이였다.

《오래간만이요. 기사장동무, 내가 모시러 왔소!》

그는 앞좌석을 가리키며 웃어보였으나 리성조는 말없이 뒤좌석쪽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서국장은 그의 곁에 자리잡았다. 한동안 이런저런 인사말들에 마지 못해 대꾸하던 리성조는 코트깃을 올린채 덤덤히 어둠에 잠긴 황량한 산기슭을 내다보았다. 웬일인지 그는 대범하고도 사나운 정열을 가진 서국장앞에서 주눅이 들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군 했고 그것이 비위에 거슬렸다. 딱히 찍어 말할수 없는것이지만 체소하고 병약해보이는 그의 몸 어데선가 로동의 체취와 모루를 때리는 메질소리같은 금속성이 날카롭게 울리는듯싶었다.

날씨는 뼈속까지 얼어드는듯 맵짰고 밤길은 험하였다. 낡은 《월리쓰》는 차체에서 끊임없이 삐걱소리를 내면서 돌멩이를 타고넘을 때에도 요란스레 들추군 했다. 오랜 시간의 침묵이 있은 후 승용차가 넓은 신작로에 나섰을 때에야 서국장이 또 입을 열었다.

《기사장동무, 그새 정말 수고가 많았소. 그런데 난… 분별없이 날뛰기만 하면서 일을 쓰게 못했소. 이제 와선 정말 생각되는바가 많소.》

리성조는 잠자코 있었다. 그것이 진정어린 후회인지 아니면 성실성의 외피로 감싼 넉두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란스레 한숨을 내뿜던 서병호가 그의 무릎에 옹이 박힌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왜 말이 없소. 기사장동무? 나때문에 부인까지도 집을 나갔으니…》

《그 일은 건드리지 마시오!》

어리무던한 리성조로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였다. 서병호는 조심스럽게 그를 곁눈질했다.

《좋소. 그만둡시다. 그렇지만 기사장동무, 모든것이 원인과 결과의 자연스러운 련관속에 놓여있는만큼 나는 지난날의 과오를 돌이켜보면서…》

리성조가 그의 말허리를 꺾었다.

《국장동무! 그런 얘길 왜 나한테 하는겁니까?》

《그럼 기사장동무 생각엔 어떻게 하는게 좋음직하오?》

《나같으면…》

리성조는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기의 속생각을 털어놓는다면 그가 혹시 지난날에 대한 앙갚음처럼 여길가봐 주저한것이였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서병호는 무척 대범한 편이였다.

《원, 인테리들이란!… 뭘 그리 오밀조밀하는거요. 툭 털어놓고 얘기하구려.》

《그럽시다.》 리성조는 한쪽구석으로 약간 몸을 돌렸다. 《나같으면… 그 사업을 직접 맡아보는 김책부수상동지한테 찾아갔겠습니다. 찾아가서 정식… 제기했을겁니다.》

《무엇을? 뭘 제기한단말이요?》

《해임시켜달라는 제기지요.》

《그건 왜?!》

《글쎄요.》 리성조는 추운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국장동무가 더 잘 알고있을텐데… 그런것까지 나한테 묻습니까?》

《?!…》

이번엔 침묵이 오래 계속되였다. 웬일인지 리성조는 숨이 답답해지고 시간마저 한정없이 느린것처럼 생각되였다. 두눈가까이 손목시계를 가져다대고 겨우 문자판을 가늠해보니 출발한지 15분도 되나마나했다. 그때 서병호가 또 그의 무릎을 짚었다.

《고맙소. 기사장동무, 솔직히 말해줘서…》

《?!…》

《나도 그렇게 생각했댔소. 기사장동무처럼 그렇게 생각하구… 제기를 했소. 그런데 이틀후 김책부수상동지가 벼락같이 나를 호출하더니만… 호되게 책망하는게 아니겠소. 정말이지 또한번 진땀을 뺐소. 그분의 말이… 장군님께서 보고를 받으시고 대단히 노하셨다는거요!…》 무릎을 짚고있는 그의 손바닥이 떨리는듯 했다. 목소리도 떨렸다. 《장군님께서는 어쩌면 그 동무가 그렇게 옹졸할수 있는가, 지금 나라가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고있는 때 과오가 있었다 해서 스스로 못하겠다고 물러서는것이 말이 되는가! 혁명이 어려운 때 못하겠다고 물러서면 파멸의 길로 굴러떨어질수밖에 없다! 라고 하셨다는거요.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과오는 있을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제때에 깨닫고 바로잡는것이다, 자기의 과오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현명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동무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 비록 과오는 있었지만 그 동무에게 헌신분투하는 열정이 있다, 이것이 귀중하다, 일단 혁명의 길에 나선이상, 반당분자가 아닌이상 우리는 끝까지 손잡고 가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오.》 그는 부지중 목구멍에서 흐느낌소리처럼 새여나오는것을 삼키며 부르짖었다. 《나는 다시 태여났소. 나뿐만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여나고있는것이겠소. 기사장동무, 그렇지 않소? 기사장동무 역시 그 품속에서 새 인간으로 다시 태여난게 아니란말이요?!》

리성조는 어느결에 그의 손을 힘껏 부여잡고있었다. 발전소건설사무소에서 열띤 흥분속에 더듬던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였다. 우리는 다시 태여났다!…

두사람은 이윽토록 손을 맞잡고있었다. 승용차는 목적한 곳에 이미 들어서고있었다.

얼마후 강계시 연풍동의 림시 내각청사 기요실에 도면과 문건들을 맡기고 나온 리성조는 서국장의 안내로 숙소인 서산동의 《영일려관》까지 다시 차를 타고갔다. 차에서 내리면서 서병호가 말했다.

《나는 다시 560호공장에 가봐야 하오.》

리성조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 밤중으로 또?…》

《일없소. 걱정마오.》 서병호는 청높은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아직 이래뵈도 구형강처럼 단단하오.》

《…》

리성조는 덤덤히 서있었다. 처음으로 그를 향해 정깊은 목소리로 좀 쉬고 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서국장이 또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껏 아껴둔 말이 있는데… 기사장동무, 따님 소식을 들은적이 있소?… 그럴테지, 이 전쟁통에 어데서 들어보았겠소. 기사장동무의 따님이 최현군단장의 담당간호장이라누만!》

《예?…》

리성조는 서국장이 그걸 어떻게 알랴 하는 생각에 머리를 기웃거렸다.

《왜 믿어지질 않아서 그러오?》 서국장이 또 토막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을 믿소. 따님 이름이 리숙이 아니요?… 그것보오. 지금 적후에 있소. 최현군단장이 장군님께 올리는 전투상보끝에 적구에 들어가 전기를 끌어온 전기기술자의 따님이 지금 저와 같이 있습니다.- 하고 적어넣었다는거요.》

《아니 그럼?!…》

《어디 그뿐인줄 아오? 최현군단장은 이제 적후투쟁을 끝내고 장군님을 찾아뵈올 땐 꼭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지 않소. 장군님께서 몹시 기뻐하셨다고 김책부수상동지가 말해주더군. 그러면서 동무를 만나면 꼭 잊지 말고 전해주라고 했소!》

《! !…》

리성조는 웃는지 우는지 알수 없게 입을 벙글써 하고 서서 후들후들 떨고있었다. 웬일인지 그냥 몸이 떨리고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이 세상 제일 귀한 자기의 사랑, 예쁘고 정답고 들끓는 사랑을 지닌 사랑하는 딸 리숙!… 네가 살아있구나. 살아있을뿐아니라 이 아버지의 사랑도 미치지 못할 큰 사랑에 받들려있구나!… 눈에서 눈물이 끓었다. 그는 서병호국장이 어깨를 잡아 당길 때까지 계속 그렇게 서있었다.

《자, 추운데 안에 들어가보오.》 서국장이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요. 려관에 들어가면 기사장동물 기다리는 사람이 있소.》

그는 여전히 얼떠름해있는 리성조를 문앞에까지 들여세운후 군대식으로 한손을 들어 인사하며 돌아갔다. 차에 올라 문을 닫기전에 그는 다시한번 손을 내저었다. 이어 차는 떠났다. 희미한 불빛에 비추인 지푸라기들이 눈가루와 뒤섞여 비비 꼬이며 사라졌다.


접수실의 온돌방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눈두덩까지 머리수건을 눌러쓴 장영실, 까만 비로도치마저고리우에 허름한 솜옷을 걸치고있었다.

려관주인은 리성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말없이 버티고있는것을 보자 우정 너스레를 떨었다.

《아, 내각에서 잘 모시라던 그분이였구려, 저리 가십시다. 선생방은 맨끝에 준비해놓았수다.》

그때에야 장영실이 머리를 들었다. 그는 리성조가 온다는것을 미리 알고있은것 같았다. 조심히 주의깊게 그를 보고있었다. 별안간 리성조는 심장이 아프게 죄여드는것을 느꼈다.

《어서 가십시다.》 려관주인이 또 말했다. 《불도 때놓구 이부자리도 새것으로 준비해놓았수다.》

《…》

리성조는 여전히 얼어붙은듯 서있었다. 장영실도 무릎을 짚고 허리를 폈으나 리성조의 괴이한 표정에 어찌할바를 몰라 주춤거렸다. 려관주인은 그들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요란스럽게 헛기침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안녕하세요?》 먼저 장영실이 떨리는 목소리를 짜냈다. 《그새 몹시 축가셨군요.》

《…》

여전히 리성조는 입을 열지 못했다. 가슴은 후둑후둑 아프게 뛰놀고 머리속도 헝클어져 뒤죽박죽이였다. 웬일인지 숨을 들이그을 때에조차 속이 뜨끔뜨끔해나군 했다.

《왜 말이 없으세요? 그동안 제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것도 묻지 않는군요.》 장영실이 눈을 내려깔며 말했다. 입술을 깨물고 가볍게 한숨을 내긋고 여전혀 아릿다운 얼굴을 찡그리며 또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말해드리죠. 전… 친정으로 갈가 했댔어요. 이 전쟁을 피해서… 가고싶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들쓰고있는 그 오명과 굴욕도 피해서… 멀리 달아나려 했어요.》

그러니 그 녀자는 자기의 과거를 찾아 헤맨것이다. 사람들이야 피흘리며 싸우든말든 자기의 헛된 꿈이 자란 그 아늑한 과거에로 도피하려 한것이였다.

리성조는 첫 순간의 충격에서 벗어나 차츰 랭정하게 자신을 다잡을수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장영실이 말을 이었다.

《난생처음…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어요.》

그때 처음으로 리성조가 입을 열었다. 랭랭한 어조였다. 《어떻게 찾아왔소?》

장영실은 놀란듯 했다. 어깨를 옴츠리며 죽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뭐 찾아오면 안되나요?》

《안되긴?!… 당신은 집을 나갈 때에도 뭐 나더러 물어보고 나갔소?》

《노하셨군요. 무척…》

리성조는 머리를 흔들었다. 노하다니!… 그것을 단순히 노했다는 말로 표현하는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에는 노한다는것이 없다. 너무 아픔이 커서 증오할수는 있을지언정 노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잠시 둘은 말없이 덤덤히 있었다. 이 침묵의 괴로움을 참다 못해 장영실이 우정 밝은 어조로 례사롭게 말했다.

《어제 서국장동지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더군요. 당신이 큰 과업을 받았다는 소식이랑 다 알려주면서… 전후 수력발전총계획도를 거의 마무리짓는다면서 그 사람도 기뻐하더군요. 참, 소식을 들었어요? 리숙이, 우리 숙이가…》

리성조는 흠칫했다. 그 충격이 어찌도 컸던지 장영실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리성조는 한손을 뻗쳐 벽을 짚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버티고 서있었다. 서국장이 알려주던 그 말이 귀전에 쟁쟁했다. 우리 리숙이 최현군단장과 같이 있다. 적후투쟁을 끝내고 장군님을 찾아뵈올 때 같이 온다. 장군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셨다!… 헌데 그 소식을 지금 장영실이 또 외우고있다.

리성조는 무엇인가 뜨끔하니 깨무는것 같은 가슴을 한손으로 더듬어 눌렀다. 피흘려 싸워 오늘의 이 기쁨을, 상봉의 기쁨을 가져오고있는 우리 리숙이 이것을 알면 무어라 할가. 우리의 상봉에 이 녀자가 끼여들 자격이 있을가? 리숙이 그걸 허용할수 있을가?… 그는 타는듯 터갈라드는 입술을 추기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한테… 그리도 중요한… 그게… 그다지나…》

말이 되지 않았다. 격앙된 심정에 가슴속에서 눈보라가 일고있었다. 듣다 못해 장영실이 물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거예요. 예?》

《당신이야 이 전쟁에…》 리성조는 헐떡이였다. 그러면서도 모지름을 쓰며 기어이 하던 말을 이어갔다. 《땀 한방울 바치지 않았는데… 우리 그애가 알면… 뭐라겠소.》

《그래도 전… 당신의 안해이고 또… 리숙이 어머니죠.》

《얼마전까진 그랬었지, 하지만 인젠 아니요!》

《뭐예요?…》

장영실은 뛰쳐 일어났다. 별안간 두손으로 가슴을 부여잡더니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였다. 한순간 무엇인가 찾는듯 두리번거리더니 풀어진 머리수건을 다시 동였다. 그리고는 똑바로 리성조를 바라보았다. 타는듯 한 마지막 기대, 두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다시 말해보세요.》 그 녀자는 겨우 속삭이고있었다. 《그러니 인젠… 다 끝장이란 말예요?》

《그렇소!》

장영실은 비틀거렸다. 출입문쪽으로 걸음을 내짚었다. 한손으로 입을 싸쥐고 다른 한손으로 문고리를 더듬어 잡았다. 문이 버글써 열리면서 찬바람이 휙- 쓸어들었다. 그러자 그 녀자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그 흐느낌소리에 리성조는 견딜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참았다. 자기의 모진 마음이 어디서 오는것인지도 모르며 입술을 꽉 악물고있었다.

마침내 장영실이 머리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그 얼굴을 리성조는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그 녀자는 흐느낌소리와 더불어 이렇게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저를 사랑하죠? 예?…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 말이… 옳을수도 있소.》

《그리구 당신은… 나를 기다렸지요?》

《그렇소.》

리성조는 괴롭게 신음소리를 냈다. 처음으로 그는 모든것을 다 털어놓고 말해주고싶은 생각이 났다.

《기다렸소.》하고 그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기다려도 무척 애태우며… 기다렸소. 인입선공사장에 나가있을 때… 특히 밤중이면 20리나 되는 그 집으로 돌아가보군 했소. 오늘 가면… 당신이 있을거라고, 오늘은 돌아와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발이 얼고 기진맥진해서 비틀거리면서도 매일… 가보군 했소. 그러나… 당신은 없고 싸늘한 빈 방만… 난 불도 없이… 누워서 또 기다렸소. 이따금… 남의 발자국소리에도 소스라쳐 놀라서 깨여나군 했드랬소. 하지만 문을 열어보면… 발자국은 지나가군 했소. 어데선가 밤교대를 마친 사람들이 서로 다정히 말을 주고받으며 지나갈 때마다 더욱 마음이 괴로왔소. 하루는 주인집의 나어린 처녀애가 〈아저씨, 추운데 들어가 계셔요. 암만 기다려두… 오지 않아요.〉하고 말해서야 나는 명백히 깨달았소. 모든 사람이 다 알고있는것을 나만은 모르고있었구나 하고 말이요. 과거는 돌아오지 않소. 당신과의 생활은 벌써 흘러간 과거에 속하는것이였단말이요. 래일에로 이어지지 않는, 영영 가버리고만 과거였소. 가만있소. 내 말을 막지 마오. 그때… 내가 무엇을 바랐는지,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댔는지 아마 당신은… 상상도 못할거요. 그날부터 나는 더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결심했소. 아니, 결심한게 아니라… 더 기다릴 리유도 없는것이였지. 나의 생활에서 제일 어려웠던 때, 가장 사랑이 필요했던 그때 당신은 멀리 가있었소. 그저 곁에만 있어주어도 힘이 되였을 그때에도 당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소.》

《그래서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어요.》

《미련한체하지 마오. 령리한 당신이 내 말을 리해하지 못할리 없소.》

《난… 앞날이 믿어지질 않았어요. 그래서 떠난 길이… 이렇게 오기까지 힘들었어요. 하지만… 돌아왔어요. 전쟁을 겪으면서… 난 처음으로 자신을 모질게 책망했어요!》

리성조는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고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눈먼 인정에 끌리는 자신을 다잡고있었다.

《하지만… 인젠 늦었소. 얼마전 내가 적후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가능했었지만.》

《알겠어요. 당신만 가슴이 아팠단말이지요. 당신만 새 생활을 찾았단말이지요!… 아니, 나도 체험했어요. 그리구 새 생활을… 새로운 눈으로 보았어요. 사람들이 싸우는걸 보면서… 어른들이구 아이들이구 다 하나같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억척스레 싸우는걸 보면서… 제자신을 돌아봤어요. 그래요! 그 사람들속에서 가련한 내 모습을 발견했어요. 은연중 나를 구원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래서 남들처럼… 일도 했어요. 길닦이도 하구 다리놓는데도 나가있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건… 지난날의 허물을 감싸려는게 아니예요. 변명두 아니구요. 당신은 생활을 잘 몰라요. 녀자들에 대해선 더욱 그렇구… 녀자들이 새로와진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마 당신은 영원히 모를거예요!》

그 녀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바라보면서 리성조는 사뭇 놀랐다. 확실히 지금 눈앞에 있는 그 녀자는 전날의 장영실이 아니였다. 과연 이 전쟁이 변형을 모를듯싶던 저 녀자의 심장마저 세차게 흔들어놓은것일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손끝을 떨고있는 녀자를 지켜보느라니 입안이 타드는듯 했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를 입고있는 그의 심장은 돌처럼 굳어져서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는 소란스럽게 한숨을 내지었다. 그렇다. 사랑은 다시 오지 않을것이다. 전날의 사랑은 애달픈 여운만 남기고 영영 가버렸다. 그 녀자는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안고왔지만 사랑은 되살리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과거속으로, 이미 리성조가 영원히 결별해버린 그 과거속으로 잦아들었다.

리성조는 벽을 짚으며 밖으로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억눌린 흐느낌도, 숨소리도 없는 무거운 적막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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