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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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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767회 작성일 23-12-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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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제 3 장

거마리

1


연회를 끝낸 명성황후는 외국의 래빈들과 함께 향원정으로 가기 위해 회랑을 걸어가고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초롱불을 든 시녀들이 길을 밝히고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회랑의 처마며 곳곳에 각이한 형태와 색갈의 초롱과 등롱들을 매달아놓아 궁성은 휘황하고 찬란하였다.

《날씨도 푸근한데 달맞이시간까지 향원정에서 이야기합시다.》

왕비전하, 귀중한 시간을 내주시여 참말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명성황후의 곁에서 걸어가던 영국공사 오코너의 부인이 진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내 말이 지루하지 않은 모양인데 다행입니다.》

명성황후의 말끝에 나쯔미가 얼른 대척했다.

《정말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전하께선 이야기도 참 재미있게 하십니다.》

나쯔미에게 흘낏 눈길을 던진 명성황후는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나와 대원위대감과의 관계는 집안망신이여서 말하고싶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이 다 알고있는 일이고 또 앞으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몰라 제위들의 량해를 미리 구할 심산으로 터놓았습니다. 대원위대감께선 이젠 세파도 겪을대로 겪은데다 보령도 많으시여 매사에 극력 자중하고계십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대원군은 어금이 없는 사자라고 하더군요.》

손타크가 명성황후의 기색을 살피며 하는 말이였다.

《그건 그분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일행은 향원정에 이르렀다. 향원정에도 등롱들을 매달아놓아 보기에 황홀하였다.

향원정의 의자에는 미리 담요를 깔아놓아 폭신한데다가 앞에는 숯불이 이글거리는 청동화로들이 놓여있어 겨울밤이건만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또 탁자에는 여러가지 다과들이 놓여있었는데 궁녀들이 식을세라 더운 차며 커피를 연방 날라왔다.

달맞이후에는 제위들에게 우리 전라도사당패의 놀이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명성황후가 달이 솟기를 기다리는 래빈들에게 자랑삼아 이렇게 말했다.

《사당패의 놀이판?》

영국공사 오코너의 부인이 의문스러운 소리를 했다.

알렌이 그에게 너그럽게 설명해주었다.

오코너 부인, 조선의 사당패란 유럽의 집시들처럼 이곳저곳으로 방랑하며 공연활동을 벌리는 단체입니다.》

《아, 그래요. 흥미있겠군요.》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명성황후는 조상궁을 불러 빨리 진령군한테 가서 전라도사당패의 놀이준비가 어떻게 되였는가 알아보라고 분부했다.

조상궁이 급한 걸음을 옮기는것을 보고야 명성황후는 래빈들한테 눈길을 주었다.

어느덧 대보름달이 솟을 시각이 되여 사위가 숨죽은듯 고요해졌다. 불현듯 동녘하늘이 새벽처럼 훤해지더니 처음엔 록원의 잔나무가지들이, 다음엔 굵은 가지와 줄기들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미구에 류달리 크고 둥그런 금황색달이 사위를 밝게 비치며 나무우듬지우로 찬란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솟는 달을 탄상하는 명성황후는 물론 외국손님들의 입에서도 저도 모르는새 탄성들이 흘러나왔다.

감상적인 처녀인 이사벨라가 두손을 맞잡으며 감탄했다.

《조선의 달맞이명절은 정말 황홀합니다.》

로씨야공사 웨벨의 부인도 못내 감동에 겨워 말했다.

《우리 로씨야의 부활절도 큰 명절이지만 이처럼 이채롭지는 못합니다.》

중천으로 솟아오르는 대보름달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명성황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월대보름명절은 년초에 맞이하므로 년중 으뜸가는 명절이라해서 상원절이라고 한답니다.》

《봄을 예고하는 신년의 달맞이명절… 참말 뜻깊은 명절입니다.》

이사벨라가 다시금 찬탄했다.

《저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며 자기가 바라는바를 빌면 년중소원이 성취된다고들 합니다.》

명성황후가 웃으며 하는 말에 나쯔미가 발라맞추듯 제꺽 대척했다.

《저는 전하께서 무병장수하시기만을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난 여러분들모두가 일년내내 건강하며 우리 조선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전하, 부디 행복하십시오.》

외국래빈들이 이구동성으로 명성황후의 행복을 축원하였다.

이럴즈음에 조상궁을 따라 숨가삐 뛰여온 진령군이 분내를 풍기며 명성황후의 귀바투 입을 대고 걱정어린 소리로 수군거렸다.

《저 곤전마마, 큰일 났나이다.》

《…》

전라도사당패의 놀이는… 하지 못할것 같나이다.》

《무어라?!》

대뜸 눈살이 꼿꼿해진 명성황후는 불시에 큰소리를 쳤다.

《저, 광대패에서 제일 볼만한 재간둥이들인 거사와 사당이 별안간 종적을 감추어버려서…》

겁에 질린 진령군은 말도 제대로 번지지 못했다.

《응, 이게 무슨 망신이냐?!… 아침같이 한 약속을 저녁에 뒤집다니!》

《곤전마마… 쇤네가… 죽을 죄를 저질렀나이다.》

진령군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네 목숨으로 풀 일이냐! 내가 이제 외국사람들에게 무어라 말한단 말이냐!》

곤전마마!…》

진령군은 풀썩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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