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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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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120회 작성일 23-10-1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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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3

(2)


그들이 계원사뜨락에 올라가자 뜻밖에도 가마 두채와 교군들 그리고 짐군들이 있었다.

마침 법무승이 불당에 대고 소리치고있었다.

《대궐에서 진령군대감과 조상궁께서 나오셨소이다.》

법당(불교의식을 벌리는 방.)이며 판도방(불교를 공부하는 방.) 문들이 벌컥벌컥 열리더니 주지를 비롯한 여러 중들이 허겁지겁 뛰여나왔다.

흰장미가 수북한 늙은 주지가 진령군의 가마곁에 다가가 공손히 여쭈었다.

《원로에 수고로이 오셨소이다.》

그제야 가마문이 들리며 진령군이 땅에 발을 짚었다. 나이지숙한 조상궁도 가마에서 나왔다.

성불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합장례불하는 주지에게 진령군도 두손바닥을 붙였다 뗐다.

성불하시오, 관세음보살.》

법당쪽으로 걸어간 진령군과 조상궁은 높은 돌층계우에 덮인 얼음버캐와 눈을 근심스럽게 바라볼뿐 오를념을 못했다.

그들을 부축할 녀인이란 아정이 자기 하나뿐이여서 그는 서둘러 돌층계쪽으로 걸어갔으나 진령군곁에는 다가서고싶지 않아 조상궁쪽에 가붙어섰다.

상궁님, 소녀가 부축해드리겠나이다.》

늙은 조상궁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요. 저 미끄러운 얼음이…》

그의 우려를 알아차린 아정은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하고는 어디론가 뛰여갔다.

잠시후 소금바가지를 들고온 아정이가 돌계단의 얼음버캐에 소금을 뿌리기 시작했다.

조상궁은 물론 진령군과 여느 중들도 그의 거동을 의아쩍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돌계단에 땅땅 얼어붙었던 얼음들이 녹아버리는것이 아닌가.

엄병무(청년의 이름이였다.)도 아정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정이가 조상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젠 올라가십시다.》

아정이의 부축을 받으며 돌계단을 올라가는 조상궁의 뒤를 따라 진령군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기보다 조상궁을 더 섬기는 아정이를 아니꼽살스러운 눈길로 흘겨보군 하였다. 자기는 가슴에 쌍학흉배를 붙인 1품관이고 조상궁은 쌍봉흉배를 단 5품녀관이니 응당 지체높은 자기부터 모셔야 할것이 아닌가.

아정의 부축을 받으며 돌층계를 다 올라선 조상궁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고맙소. 한데 규수는 어데서 사는 뉘댁의 따님이시오?》

《소녀는 안국동에 있는 홍역관의 딸이옵니다.》

아정의 공손한 대답에 곁에 있던 진령군이 낯색이 쌀쌀해서 빈정거렸다.

《역관?… 그러니 중인이군.》

조상궁이 그런데 재예는 뉘게서 배웠는가고 여전히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소녀 중전마마께서 편액을 하사하신 리화학당을 다녔소이다.》

리화학당이란 선교의사로 서울에 온 스크랜튼이란 미국녀인이 9년전에 세운 녀학교였다. 여기서는 조선소녀들에게 영어며 종교, 현대지식을 배워주었다. 그런데 리화(배꽃)란 학당의 이름은 명성황후가 지어주었고 또 편액까지 자기가 써서 내려보내주었던것이다.

《오, 그랬군. 어쩐지…》

조상궁이 감동되여 머리를 끄덕거렸다.

병무도 놀라며 례사롭지 않은 아정의 모습을 다시금 그윽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진령군과 조상궁, 스님들이 들어간 법당에서 목탁과 광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정구업진언 외우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

법당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정이에게 병무가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우리 집도 안국동에 있는데 가실 때 동행하지 않겠소?》

아정이에게 반해버린 병무는 그와 헤여지고싶지 않아 이런 말을 했다.

주저하는 아정이를 보고 병무가 비위살스럽게 한마디 더했다.

《아따, 내가 하인처럼 뒤에서 따르면 되지 않겠소이까?》

그제야 아정이도 방싯 웃었다. 뇌살시키는듯한 처녀의 그 웃음에 병무는 세상이 록두알만 해졌다.

례불을 끝낸 진령군과 조상궁이 법당에서 나왔다.

그런데 저쪽모통이에 서있던 젊은 중이 진령군에게 흘깃흘깃 눈길을 주군 하였다.

그를 본 진령군이 조상궁에게 여느때 달리 은근스럽게 말하였다.

조상궁, 나는 전라도광대들에게 들릴 일도 있고 하니 먼저 가보게.》

《네.》

머리숙여 대답한 조상궁은 젊은 중쪽으로 걸어가는 진령군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계원사뒤의 음침한 곳에 외따로 떨어져 암자가 있었다. 예전엔 녀승들이 거처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빈집으로 퇴색한지 오랬다.

젊은 중의 안내를 받아 암자에 이른 진령군은 사위를 둘러보고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중이 밖에서 망을 보았다.

좁고 음침한 암자에서는 일본랑인(무직자) 오까모도 류노스께가 진령군을 기다리고있었다.

일본내각 외무대신 무쯔 무네미쯔의 심복으로서 서울에 있는 일본거류민들의 우두머리노릇을 하고있는 오까모도는 40대의 사나이였다. 거의 모든 일본인들이 장발의 서양식하이칼라머리를 하였으나 유독 오까모도만은 짧게 깎은 상고식머리를 하고있었는데 그것이 탐탁한 체구며 날카로운 눈초리, 꾹 다문 얇은 입술과 어울려 매우 날파람스럽고도 흉맹스러워보였다.

음충스런 표정으로 잠시 진령군을 바라보던 오까모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새 소식이 없소?》

오까모도의 물음에 진령군이 목소리를 죽여 수군거렸다.

《지금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이 터졌어요. 오늘 새벽에 전라감사의 장계가 올라왔어요.》

진령군의 말에 오까모도는 대뜸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웠다.

《언제?》

《며칠 되였다나봐요.》

《사실인가!》

《그 일때문에 오늘은 명절날인데도 상감이하 원로중신들이 회임을 했어요.》

《요시(좋다)!》

오까모도는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그의 눈빛이 별안간 류다른 광택으로 번쩍거렸다.

《민란의 추이를 제때제때에 통보하시오.》

오까모도의 거동과 말투에서 그 어떤 위협기와 강박감을 느낀 진령군은 얼른 대척했다.

《알겠어요.》

진령군이 오까모도의, 일본놈들의 간세(첩자)가 된것은 얼마전부터였다. 물욕이 강한 진령군의 성미를 알게 된 오까모도는 그에게 여러가지 귀한 물건과 돈을 안겨주면서 일본의 강대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로대국 청나라도 우습게 여기는 일본이 함선 하나 변변한것이 없는 조선을 먹어치우는것은 시일문제이니 조선이 망한 다음에 진령군은 누구에게 의지하여 살아가겠는가, 그때도 명성황후에게 의지하겠는가.

그랬어도 망설이는 진령군에게 오까모도는 최후타격을 가했다. 서민들은 물론 조정의 량반관료들도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는 진령군은 언제 동포들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의 보호를 받으면 살수 있을뿐만아니라 부귀영화 누릴수 있다는 오까모도의 말에 진령군은 간이 한줌만 하게 졸아드는듯싶었다. 작년 7월에도 이전 정언(임금에게 충고를 주는 사간원의 정6품벼슬아치.) 안효제란 사람이 궁중의 부패타락한 정사를 신랄히 단죄하고 궁중부패의 상징인 진령군을 시급히 처단할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나섰는데 이 사실을 상기한 진령군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마지막깃털 하나가 말잔등을 부러뜨린다고 그는 끝내 오까모도에게 기울어지고말았다.

이리하여 진령군 박소사는 명성황후와 오까모도사이에서 두길보기를 하게 되였다.

오까모도가 진령군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한것은 그가 명성황후의 신임과 총애를 받는 무당, 점쟁이이므로 그를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자료를 손쉽게 장악할수 있다고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 게다가 진령군은 물욕이 강하고 속이 검은 협잡군이였다. 오까모도의 타산은 틀리지 않았으니 늘 명성황후의 측근에서 맴도는 진령군을 통해 그는 조선왕후 명성황후며 조선정부의 동태를 제때에 알수 있었다.

오까모도가 음험하게 뇌까렸다.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시오. 특히 그와 외국사람들의 접촉에 대해 철저히 살펴야겠소. 그러니 각별히 눈을 밝혀야 하오.》

오까모도의 공갈하는듯한 말에 진령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유, 무서워요.》

《나는 전라도민란에 대해 외무대신에게 시급히 보고하여야겠기에 먼저 자리를 뜨겠소.》

자리에서 일어서는 오까모도를 진령군은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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