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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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작성일 23-12-25 01:01 조회 2,531 댓글 0본문
(제 37 회)
제 3 장
거마리
3
(2)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권벽이가 또 주머니에서 대통과 담배쌈지를 꺼내면서 태봉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임자, 그날 있은 일을 좀 자상히 말하게.》
《말해야 그렇지요.》
《나는 점귀신이라는 탁풍우도 우습게 아는 사람이니 내 신통력을 믿어 손해 없을걸세. 그러니 묻는 말에 거짓없이 답변하게.》
권벽은 담배 한모금을 빨아 후 내불고나서 태봉이에게 신중하게 물었다.
담배질군인 그는 손가락은 물론 수염까지 담배진이 올라 꿀색처럼 누르끼레하였다.
《어데서 포교들한테 걸렸다구?》
《종각마당옆이지요》
《거긴 왜 갔다구?》
《싸우려구요.》
태봉의 대답은 데퉁스러웠다.
《누구와?》
《웬 고라리생원같은 량반자식하구요.》
《고라리생원같다면야 임자와 싸우려 했겠나?》
《예, 실은 만만찮게 생긴 녀석이예요.》
《거짓없이 대답하라구 하지 않았나? 건 그렇구, 그 젊은 량반이 나오지 않았단 말이지.》
《겁에 질렸던 모양이죠.》
《아니, 좀 차근차근 생각하세. 그가 임자보다 먼저 나왔을 경우도 있지 않나?》
《글쎄요》
《그가 왜놈들을 때렸을수도 있지.》
《글쎄…》
《아무리 간특한 왜놈들일지언정 아니 맞은 매를 맞았다고 고변할리는 없을테니 말일세.》
《…》
태봉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담배를 다 피우고난 동소임은 대통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수인들을 측은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우리 심심한데 말요기나 할가?》
아는것이 많은데다 입심이 좋은 그의 곁으로 수인들이 희색을 띄우고 슬근슬근 다가앉았다.
《자네들 한양팔경을 알고있나?》
동소임이 웃으며 묻는 말에 수인들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서로 얼굴을 돌아볼뿐 누구도 대꾸를 못했다.
《관동팔경이나 관서팔경이란 말은 들었어두 한양팔경이란 말은 금시초문일테지?》
수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소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꼽을테니 잘들 듣게.》 동소임은 손가락을 꼽으며 계속했다.
《한양팔경은 첫째로 구중궁궐 열두대문속에 들어앉아 녀인의 손으로 삼천리강토를 쥐락펴락하는 중전마마 명성황후, 둘째로 구름재의 운현궁에서 불같은 한숨만 내쉬는 섭정국태공을 하던 흥선대원군 리하웅대감, 셋째로 갑신정변을 〈삼일천하〉로 끝마치고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 령수 김옥균대감, 넷째로 나라의 개화문명을 위해 부심하는 혁신관료 판중추부사 김홍집대감, 다섯째로 명성황후의 개인무당인 요물 진령군 박소사, 여섯째로 우리 조정에 감놔라 배놔라 호령질군인 청국장수 원세개, 일곱째로 남산 왜성대의 일본공사관, 여덟째로 정동의 미국공사관. 어떤가, 그럴듯하지?》
동소임의 말에 수인들은 난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더니 수인들중에서 중년의 사나이가 동소임에게 고개를 쳐들었다.
《관서팔경이나 관동팔경은 산천경들인데 동소임의 한양팔경은 인물경들입니다요.》
그러자 먹물깨나 먹음직해보이는 다른 사나이가 간참했다.
《우리 한양은 나라의 도읍이요. 서울인데 의당 인물경이여야지.》
또 한 수인이 끼여들었다.
《그런데 왜성대의 일본공사관이나 정동의 미국공사관만은 산천경입니다요?》
그 말에 동소임은 성을 내듯 버럭 소리쳤다.
《왜놈이나 미국놈들은 다 우리 나라를 먹으려는 그놈이 그놈이므로 공사관만 꼽으면 돼!》
《동소임, 이달 열흘째 남도에서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전봉준선생두 마땅히 팔경에 넣어야지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며 동소임을 쳐다보자 다른 수인이 그에게 얼른 대꾸했다.
《그가 어디 한양사람인가, 전라도지.》
《참, 전라도 개똥쇠들중에두 인걸이 있네그려.》
수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자 동소임이 생각깊은 표정으로 또 주머니에서 대통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수인들은 다시금 호기심으로 눈빛을 빛내며 동소임을 쳐다보았다. 다문박식한 그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새로 끄집어내기를 바라면서.
《이자도 전봉준대장이 추켜든 〈척왜〉에 대한 말이 나왔지만 저 왜놈들은 우리 조선사람들 덕에 사람구실을 하게 됐다네.》
동소임은 입에 문 대통에 불을 붙이고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좀전에 《한양팔경》에 대해 말할적에는 그의 얼굴에 얼마간 능청스러운 기색이 떠있었으나 이번에는 자못 진지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저 왜놈들은 천수백년전까지 농사도 지을줄 모르고 짐승도 기를줄 모르는 단지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나무열매나 주어먹는 족속들이였지. 그러던 놈들이 우리 조선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사람들이 섬나라에 건너가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부터 벼농사가 시작되고 농쟁기 쓸줄도 알게 되고 집이며 옷이며 음식도 알게 되여 비로소 사람다운 체모를 갖추게 되였다네. 내 우스운 애기를 하나 하지. 짐승가죽으로 부끄러운 곳이나 겨우 가리우고 다니던 왜놈들에게 우리 나라에서 의복일습을 보내주었는데 거기에 있는 버선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기웃거리던 놈들이 그것을 머리쓰개인줄로 알고 발에 신는 버선을 머리에 쓰고 다녔다지 않나. 그래서 옛적 왜인들의 모자가 앞이 삐죽이 나온것이 흡사 거꾸로 쓴 버선과 모양새가 같다네.》
그의 말에 수인들은 모두 웃었으나 동소임자신은 여전히 신중한 기색으로 말을 계속했다.
《섬나라에 건너간 조선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왜놈들도 조선말을 본따서 자기네 마을을 〈무라〉라고 했고 조선사람들이 고을을 이루고 살 때에는 역시 조선말을 본따서 고을을 〈고흐리〉라고 했다네. 조선말이 왜나라말에 흘러들어간것이 수두룩하지. 어디 그뿐인줄 아나. 나라를 다스리는 법, 가죽이기는 법, 종이며 먹을 만드는 법, 어느것이나 우리한테서 배우지 않은것이란 없네. 왜인들은 옛적부터 된장을 즐겨먹는데 그것을 〈고마장〉즉 〈고구려장〉이라고 했고 그들이 즐겨 추던 〈구메춤〉도 〈고마춤〉, 다시 말해 고구려무사춤이고 지금도 정창원이란 왜나라창고에는 〈고마요고〉라고 하는 고구려장고가 있고 고마피리가 있다네. 내가 하는 말은 죄다 〈일본서기〉란 왜국의 옛 력사책에 그대로 적혀있는것일세.
한마디로 물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듯이 발전된 우리의 문물이 일본에 전해져 그네들이 개명하게 된거지. 그래서 옛적엔 왜인들이 우리 조선을 부형의 나라라고 흠탄하고 승모했지.
그런데 이런 왜놈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은혜를 원쑤로 갚는다고 우리 나라를 먹겠다고 불악귀같이 날뛰고있으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동소임은 말하는 사이 절로 죽어버린 대통의 담배를 바닥에 대고 탁탁 털었다.
태봉은 동소임의 사람됨됨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마음이 더욱 끌리면서 그에게 머리가 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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