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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제 1장 1.우리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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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005회 작성일 15-03-02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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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1. 우리 가정


나의 생애는 조선의 근대력사에서 민족수난의 비극이 가장 암담하게 중첩되던 1910년대로부터 시작되였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기 전에 우리 나라는 벌써 일본의 독점적인 식민지가 되였다. 황제의 통치권은 《한일합병》조약과 함께 일본천황에게로 모조리 넘어갔고 이 나라 백성들은 《총독제령》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판노예가 되였다. 유구한 력사와 풍요한 자연부원과 수려한 산천경개를 자랑하는 이 강토는 일본제군화와 대포바퀴밑에서 짓이겨졌다.

민중은 국권을 강탈당한 슬픔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있던 이 땅의 초야와 지붕밑에서 수많은 충신들과 유생들이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름없는 백정까지도 칠성판에 오른 국운을 통탄하며 죽음으로써 치욕의 《한일합병》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경찰들과 일반문관들은 말할것도 없고 보통학교 훈도들까지 금테를 두른 양복을 입고 정모를 쓰고 칼을 차고 다니는 야만적인 헌병경찰제도가 수립되였다. 천황의 칙령에 따라 총독은 조선에서 륙해군의 통솔권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귀와 입을 틀어막고 수족을 얽어맬수 있는 무제한한 권한을 가지였다. 조선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정치단체들과 학술단체들은 해산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조선의 애국자들은 구류장과 감옥에서 연덩어리가 달린 소가죽채찍에 얻어맞았다. 도꾸가와막부시대의 고문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교형리들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조선사람의 살을 마구 지지였다.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총독제령》에 의해 조선사람의 흰옷마저 먹물을 들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의 재벌들은 무슨 《회사령》이니, 조사령이니 하는 법령들의 그늘밑에서 우리 조국의 보화와 재부들을 무데기로 실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지난날 식민지로 있었던 나라들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다른 민족의 말과 성까지 빼앗고 밥그릇까지 략탈해간 그렇게 지독한 제국주의는 보지 못하였다.


당시의 조선은 말그대로 사람못살 생지옥이였다. 조선사람들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았다. 《… 일본은 모든 새로운 발명들과 순전한 아세아식고문을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야수성으로 조선을 략탈하고있으며 그를 계속 략탈하기 위하여 싸울것이다.》라고 한 레닌의 지적은 아주 타당하고 정확한것이다.


내가 성장하던 그 시기는 다른 대륙들에서도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각축전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때였다. 내가 태여난 그해에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복잡한 사건들이 련달아 일어났다. 바로 그해에 미해병대가 온두라스에 상륙하였다. 프랑스는 마로끄를 자기의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이딸리아는 토이기의 로토스섬을 점령하였다.


국내에서는 《토지조사령》이 발표되여 민심을 뒤숭숭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나는 어수선한 동란의 시대에 태여나 불우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시대상은 나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한테서 우리 나라의 망국사를 들은 다음부터 봉건통치배들을 몹시 원망하였으며 피눈물을 머금고 나라의 자주권을 찾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남들이 군함과 기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칠 때 우리 나라의 봉건통치배들은 갓쓰고 하늘소 타고 음풍영월로 수백년세월을 헛되게 보냈다. 그러다가 동서방의 침략세력이 함대를 끌고 접어들자 그렇게도 완고하게 닫아매였던 쇄국의 문을 열어놓았다. 봉건왕조는 외세가 마음대로 롱락하는 리권쟁탈의 흥정판으로 되였다.


력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그러다나니 오늘 친일파가 득세하면 일본군대가 왕궁을 지키고 래일 친로파가 득세하면 로씨야군대가 임금을 호위하고 모레 친청파가 득세하면 청나라 군대가 대궐의 파수를 서는판이였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비가 궁궐안에서 외국테로단의 칼에 맞아죽고(1895년 《을미사변》) 왕이라는것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동안이나 갇혀있는가 하면(1896년 《아관파천》) 임금의 당아버지가 외국에 랍치되여가서 귀양살이를 하여도 오히려 사죄를 해야 되는 판국이였다.

왕궁을 지키는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


무변광대한 이 세계에서 가정이란 하나의 작은 물방울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물방울도 세계의 한 부분이며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수가 없다. 조선을 망국의 비운속에 몰아넣은 근대력사의 파도는 우리 가정에도 사정없이 쓸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 사람들은 그 위협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족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폭풍속에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였다.


우리 가문은 김계상할아버지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것은 증조할아버지( 김응우 )대부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평양 중성리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평양에 사는 지주 리평택의 묘지를 보아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채 얻어가지고 1860년대에 만경대로 이사해왔다.


만경대는 산천경개가 매우 아름다운 고장이다. 우리 집옆에 있는 산을 남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마루에 올라가 대동강쪽을 굽어보면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것 같다. 타고장의 부자들과 벼슬아치들이 만경대일대의 산들을 경쟁적으로 사가지고 조상의 묘를 많이 쓴것도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탐냈기때문이였다. 만경대에는 평안감사의 묘도 있었다.


대대로 소작살이를 하다나니 우리 집안은 매우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다가 3대를 두고 외독자로 내려오던 우리 가문이 할아버지( 김보현 )대에 와서는 아들딸 6형제를 보게 되여 열명 가까운 대식구로 불어났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나 자손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보려고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남들이 다 자는 이른새벽에도 쉬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진거름을 모았다. 밤이 되면 등잔불밑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멍석을 틀었다.


할머니( 리보익 )도 밤마다 물레질을 하였다.

어머니( 강반석 )는 삼촌어머니(현양신)와 고모들(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을 데리고 낮에는 밭에서 종일 김을 매고 밤에는 무명낳이를 하였다.

집사정이 하도 어려우니 큰삼촌(김형록)은 9살에 천자를 좀 배우고는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온 가정이 달라붙어 기를 쓰고 일했지만 늘 죽도 변변히 우리지 못하였다. 껍질도 벗기지 않은 수수로 타개죽을 쑤어먹군 하였는데 목안이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니 과일이나 고기 같은것은 생각할수도 없었다. 한번은 내 목에 화기가 났는데 그때 할머니가 어디서 돼지고기를 얻어왔다. 그 고기를 먹고 화기가 뚝 떨어졌다. 그후부터 나는 고기를 먹고싶으면 화기가 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내가 만경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우리 할머니는 늘 집에 시계가 없는것을 한탄하였다. 할머니는 물욕이 없는분이였지만 남의 집에 걸려있는 벽시계만은 몹시 부러워하였다. 우리 이웃에 벽시계가 있는 집이 한집 있었다.


할머니가 그 집 벽시계를 부러워하기 시작한것은 우리 아버지가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고 한다. 집에 시계가 없었으므로 할머니는 매번 쪽잠을 주무시다가 첫 새벽에 일어나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가늠하고는 서둘러 조반을 짓군 하였다. 만경대에서 숭실중학교까지 30리길이니 조반을 일찍 짓지 않으면 지각을 할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한밤중에 밥을 지어놓고도 등교시간이 되였는지 안되였는지 알수 없어 몇시간씩 잠을 못자고 부뚜막에서 동창만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뒤집에 가서 몇시나 되였는지 알아보구 오렴.》하고 분부하였다.


어머니는 뒤집에 가서도 주인을 깨우기 미안하여 뜨락에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밖에 쪼그리고앉아 시계종이 땡땡소리를 낼 때까지 기다리군 하였다. 그러다가 시계종이 울리면 집에 돌아와 할머니에게 시간을 알려드리군 하였다.


내가 팔도구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삼촌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면서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큰아버지가 먼길을 통학하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성주는 칠골외가에 가있게 된다니 학교가 가까워서 좋겠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해방될 때까지 할머니가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벽시계를 끝내 사다걸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비록 죽물을 우리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혈육이나 이웃간에 서로 도와주고 받들어주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돈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인덕이 없으면 살수 없느니라.》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이런 훈계를 하였다. 이것이 곧 우리 가정의 철학이기도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새것에 민감하고 향학열이 높았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도 늘 정규학교에 가고싶어하였다.


《헤그밀사사건》이 있은 그해 여름 슬매부락에서는 순화, 추자, 칠골, 신흥 네개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련합운동회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날 순화학교 선수로 운동회에 참가하여 철봉, 씨름, 달리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종목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데 높이뛰기에서만은 첫자리를 다른 학교 선수에게 빼앗기였다. 가름대에 머리태가 걸리는 바람에 실수를 하였기때문이였다.

운동회가 끝난 다음 아버지는 학교뒤산에 올라가 그 머리태를 뭉청 잘라버리였다. 수백년을 두고 내려오는 낡은 인습을 무시하고 부모의 허락도 없이 머리태를 잘라버린다는것이 그때로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할아버지는 큰 변이 났다고 야단을 하였다. 원래 우리 집안사람들이 대가 셌다.

아버지는 그날 할아버지가 무서워 집에도 못들어오고 울바자밖에서 서성거리였는데 증조할머니가 뒤문으로 데려다가 밥을 주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장손으로서 각별히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숭실중학교에 들어갈수 있은것도 증조할머니의 덕이라고 늘 말씀하였다. 증조할머니가 보현할아버지를 설복하여 아버지를 신식학교에 다닐수 있게 해주었다. 봉건이 심했던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할아버지네 세대는 신식학교는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숭실중학교에 입학한것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1911년) 봄이였다. 당시는 개화의 첫 시기여서 량반들도 학교공부를 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우리 집같이 타개죽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집에서 자손들을 중학교에까지 보낸다는것은 대단히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 당시 숭실중학교의 월사금이 2원이였다고 한다. 그 2원을 벌려고 어머니는 순화강에 나가 가막조개까지 주어다 팔았다. 할아버지는 참외를 심고 할머니는 열무농사를 하고 열다섯살밖에 안되였던 큰삼촌조차도 형님의 학비를 보탠다고 짚신삼이를 하였다.


아버지자신도 학비를 벌려고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학교당국이 운영하는 실습장에서 해가 질녘까지 고된 로동을 하였다. 그런후에 학교도서관에서 몇시간씩 책을 읽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와 한두시간 쪽잠에 들었다가는 다시 학교로 가군 하였다.


이처럼 우리 가정은 그 당시 조선의 어느 농촌, 어느 고을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이였다. 남들보다 별로 표가 나는것도 없고 특이한 점도 찾아볼수 없는 가난한 가정이였다.


그렇지만 조국과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나 아낌없이 몸을 내대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의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였으나 나라와 향토를 열렬히 사랑하는분이였다.


미제침략선 《샤만》호가 대동강을 거슬러올라와 두루섬에 정박하고있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집집에 있는 바줄을 다 모아 강건너 곤유섬과 만경봉사이에 겹겹이 건너지르고 돌을 굴리면서 해적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샤만》호가 양각도밑에까지 기여들어 대포와 총을 쏘아대면서 시민들을 살해하고 재물들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그달음으로 평양성에 들어갔다. 그때 성안사람들은 관군과 함께 나무단을 가득 실은 매생이 여러척을 련결시켜 불을 지르고 《샤만》호쪽으로 띄워내려보내여 배도 해적들도 모조리 수장해버리였는데 증조할아버지도 여기서 한몫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샤만》호가 격침된 다음에는 미제침략자들이 또 군함 《쉐난도아》호를 끌고 대동강하구에까지 기여들어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하였다. 만경대인민들은 《쉐난도아》호가 침입하였을 때에도 의병을 뭇고 조국방위에 한사람같이 궐기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남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집안식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떳떳이 살도록 교양하였으며 자손들을 혁명투쟁에 아낌없이 내세웠다.


할머니도 자식들에게 대바르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한때 일본사람들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을 하느라고 엄동설한에 할머니를 데려다가 만주산야로 끌고다니면서 별고생을 다 시킨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적들을 노복처럼 호령하면서 혁명가의 어머니, 혁명가의 할머니답게 굳세고 당당하게 처신하였다.


나의 외할아버지( 강돈욱 )는 고향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을 공부시키면서 일생을 후대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쳐온 열렬한 애국자, 교육자의 한사람이였으며 맏외삼촌( 강진석 )도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나선 애국자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부터 애국의 넋을 깊이 간직하도록 꾸준히 교양하였으며 그런 지향과 념원으로부터 내 이름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성주》라고 지어주었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두 동생을 데리고 집오래에 삼형제를 상징하여 백양나무 세그루를 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경대에는 백양나무라는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날 두 동생에게 백양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라고 하면서 우리 형제들도 그와 같이 씩씩하게 자라 나라를 독립시키고 잘 살아보자고 말씀하였다.


그후에 아버지는 혁명을 위하여 만경대를 떠났고 뒤따라 작은삼촌( 김형권 )도 싸움의 길에 나섰다.


만경대고향집에는 큰삼촌 한분만 남았지만 백양나무는 세 그루 다 잘 자라 큰 나무가 되였다. 그 그늘이 지경을 넘어 지주의 밭에까지 드리워지게 되였다. 지주는 밭에 그늘이 지면 소출이 떨어진다고 하면서 남의 집 백양나무를 사정없이 찍어버리였다. 그래도 말 한마디 할수 없는 무도한 세월이였다.


나라가 해방된 다음 집에 와서 그 말을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깨끗한 꿈이 생각나서 참으로 분하였다.

분한 일이 어찌 그뿐이였겠는가.

우리 고향집앞에는 내가 어린 시절에 동무들을 데리고 자주 올라가 놀던 들메나무가 여러그루 있었다. 역시 20년만에 집에 돌아와보니 그중 집 가까이 있던 들메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큰삼촌이 그 나무를 찍어버렸다고 하였다. 듣고보니 거기에도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내가 산에서 싸울 때 아마 경찰놈들이 무던히도 우리 집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을 감시하느라고 대평주재소 순사들이 늘 당번을 섰다. 대평과 만경대는 좀 떨어져있었으므로 여름에는 그 들메나무밑이 그자들의 출장소 같이 되였다. 그 그늘에 앉아 심심하면 동네사람들을 불러다 문초도 하고 부채질을 하며 낮잠도 잤다. 어떤 때에는 닭을 잡아다가 술추렴도 하고 할아버지나 큰삼촌에게 행패질도 하였다.


하루는 그렇게도 무던하던 큰삼촌이 도끼를 둘러메고 나와 단숨에 그 나무를 찍어버렸는데 할아버지는 말릴 생각도 나지 않더라고 하였다.

《삼간집이 다 타도 빈대죽는걸 보니 씨원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할아버지의 말씀에 나도 쓸쓸하게 웃었다.


혁명하는 자손들을 두다나니 우리 조부모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그처럼 모진 시련과 박해속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절개를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잘 싸웠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왜정말기에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지만 나의 조부모님들은 거기에도 응하지 않았다. 우리 고향에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지 않고 끝까지 버티여낸것은 우리 집 하나밖에 없었다.


그밖의 사람들은 다 성을 고치였다. 성을 고치지 않으면 일본관청이 도시에서 배급조차 주지 않았기때문에 살아나가기가 곤난하였다.


형록삼촌은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는다고 매도 여러번 맞았고 주재소의 호출도 여러번 받았다.

순사가 나서서 《오늘부터 너는 김형록이 아니다. 네 이름이 뭐냐?》하고 물으면 삼촌은 《김형록이외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순사가 달려들어 귀뺨을 때리였다.

《다시 말해봐. 이름이 뭐야?》하고 또 물어도 변함없이 《김형록이외다.》하고 대답하였다.

순사는 처음보다 더 아프게 따귀를 쳤다. 김형록이라는 대답 한마디에 주먹이 한대씩 안겨졌지만 삼촌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는 삼촌에게 이름을 일본말로 고치지 않은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지금 성주가 왜놈들과 싸우고있는데 네가 이름을 일본말로 고치면 되겠느냐, 맞아죽으면 맞아죽었지 절대로 이름을 일본말로 고쳐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였다.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가운데서 조국으로 돌아온것은 나 하나뿐이였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아버지는 이역에서 32살에 세상을 떠났다. 남자의 나이 32살이면 한창시절이다. 장례가 끝난 다음 고향에서 할머니가 들어와 무송 양지촌에 있는 아버지의 묘앞에서 목놓아울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6년후에는 또 어머니가 안도에서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유격대에 들어가 총을 잡고 싸우던 동생 철주마저 전사하였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으므로 동생은 유해조차 건지지 못하였다.


몇해후에는 마포형무소에서 장기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던 작은삼촌이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시신을 찾아가라는 통지를 받고도 돈이 없어 찾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작은삼촌의 유골은 마포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히였다.


끌끌하던 자손들이 스무해사이에 다들 이렇게 낯선 산천에 한줌 흙으로 뿔뿔이 흩어져 널리였다.


해방이 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사립문밖에서 나를 부둥켜안고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 같이 오면 못쓴다더냐!》 하며 내 가슴을 두드리였다.

할머니의 심정이 그처럼 비통할진대 만리타향에 무주고혼이 되여 누워있는 선친들의 유해마저 모시지 못하고 고향집 사립문에 홀몸으로 들어선 내 마음이야 어떠했겠는가.


나는 그때무터 남의 집 사립문에 들어설적마다 이 사립문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몇이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일가 하는 생각을 하군 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사립문들에는 눈물에 젖은 리별의 사연이 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혈육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이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과 형제자매들이 조국광복의 제단에 생명을 바치였다. 우리 민족이 피와 눈물과 한숨의 바다를 넘어 포연탄우를 헤치며 조국을 찾는데는 실로 서른여섯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리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혈전의 서른여섯해였다. 그러나 그런 혈전과 희생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의 조국을 상상이나 할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기는 지금도 치욕스러운 노예살이가 계속되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세기로 되였을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촌늙은이들이였지만 진정을 말하건대 나는 그분들의 견결한 혁명정신에 탄복하였고 거기서 커다란 고무를 받았다.

말이 쉽지 자식들을 키워 고스란히 혁명의 길에 내세우고 그에 뒤따르는 갖은 고초와 시련을 묵묵히 견디면서 자손들의 뒤를 꾸준히 받쳐준다는것이 한두번의 전투나 몇년간의 감옥살이에 비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일가가 당한 이러한 불행과 고초는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이 당한 불행과 고초의 한 축도에 지나지 않는다. 수십수백만의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학정밑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불타죽고 맞아죽었다.


나라가 망하면 산천도 사람도 결코 편안할수가 없다. 망한 나라의 지붕밑에서는 나라를 판 값으로 호의호식하는 매국노들도 발편잠을 자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은 설사 살아있어도 상가집 개만 못하고 산천은 설사 지경이 남아있어도 제 모습을 보존하기 어렵다.

이런 리치를 먼저 깨닫는 사람을 선각자라고 하며 와신상담하면서 나라의 비운을 가시려고 애쓰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하며 제 한몸을 불태워 진리를 밝히고 만민을 불러일으켜 불의의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을 혁명가라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서 1894년 7월 10일에 만경대에서 탄생하여 1926년 6월 5일 망국의 심야에 한을 품고 돌아갈 때까지 일생을 혁명에 바친분이였다.


나는 아버지 김형직의 맏아들로 망국 이태후인 임자년(1912년) 4월 15일에 만경대에서 태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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