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12-1. 새 사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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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
1. 새 사단의 탄생
미혼진을 떠날 때의 우리 일행은 20명도 안되였다. 2명의 나어린 전령병과 오백룡을 포함한 10명의 호위성원들, 김산호와 화룡오지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우리를 찾아온 《대통령감》, 이들이 내가 거느린 식솔의 전부였다. 관지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왕청련대의 1개 중대도 북만의 부대들에 합류하기 위하여 의란현방면으로 떠나갔다.
나는 비록 홀가분한 차림으로 길을 떠났으나 오래전부터 품어오던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하여 형언할수 없는 희열을 느끼였다.
(어서 무송땅으로 나가자. 마안산에 가면 2련대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그들을 기둥삼아 무적의 새 사단을 꾸리리라.)
이것이 미혼진을 떠날 때의 나의 심정이였다.
새 사단을 조직하는 문제는 우리 혁명의 주체로선을 관철해나가는데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관건적인 문제였다.
이제는 우리가 조선혁명에 주력하는것을 어느 누구도 감히 시비하거나 훼방해나설수 없게 되였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탐색해왔고 축성해왔던 조선혁명의 궤도우에는 그 어떠한 차단봉도 가로질려있지 않았다.
그 궤도를 따라 곧바로 질주해나가면 조국광복이라는 경축광장에도 가닿게 되고 인민의 나라라는 별천지에도 가닿을수 있었다. 이렇게 하자면 그 궤도우로 달리게 될 든든한 기관차와 차량들을 마련해야 했고 위력한 사령지휘처도 꾸려야 했다.
조선혁명의 선두기관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새로 조직하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이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가 창립하려는 조국광복회는 그 기관차뒤를 따라가는 렬차차량에 비길수 있었다. 미구에 타고앉으려는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사령지휘처라고 할가. 우리는 이러한 과업수행에 지체없이 매진하여야 하였다.
그때 우리가 꾸리려고 구상했던 새 사단은 일제의 군대와 경찰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군사활동만을 벌리는 본래 의미에서의 사단만이 아니였다. 이 사단은 군사활동을 하면서도 우리가 목표로 삼은 백두산에 나가 국내도처에 당조직망도 확대하고 조국광복회나 여러가지 반일조직을 통하여 전민을 반일항전에 집결하고 령도해나가야 할 정치군대로서의 새로운 임무와 면모를 갖추어야 했다. 물론 이런 임무는 다른 사단들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모든 부대들의 앞장에서 선구자적역할을 수행해야 할 주력사단이 있어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주력사단을 조선혁명의 기관차라고 특징지었다.
조선혁명의 기관차역할을 담당수행하여야 할 강유력한 주력부대를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것인가?
나의 의논상대가 되여온 사람들은 대체로 항일련군 각 부대들에 산재해있는 조선청년들을 모조리 불러다 대집단군을 편성해가지고 백두산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군관하의 여러 부대들에서 끌끌한 유격대원들만을 특별히 따로 선발하여 주력부대를 꾸려야 한다고 력설하는 전우들도 있었다. 일리가 있는 안들이였으나 이런 의견의 제창자들은 례외없이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함께 투쟁을 벌리고있는 중국동무들의 운명이나 우리의 공동투쟁의 발전전망 같은것은 안중에 두지 않고있었다. 그들은 사고의 출발점을 주력부대부터 꾸리고 보아야 한다는데 두고있었다. 지금식으로 표현하면 부대본위주의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나는 결국 북만으로 데리고 들어갔던 수백명의 원정대원들을 위하에서 활동하고있는 부대들에 나누어주고 무송땅에 나가 그곳에서 활동하고있다는 2련대사람들을 기본성원으로 하고 여기에 동만일대와 국내의 우수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주력부대를 꾸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리가 미혼진을 떠나올 때 왕덕태는 적들의 목재소를 치고 로획해왔다는 말 스무나문마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공들여 키워온 용사들을 북만사람들에게 다 떼주고 이렇게 홀몸으로 떠나가는 김사령을 보니 미안하기 그지 없소. 사람대신 이 말들이라도 타고 가며 길동무로 삼아주시오. 훈련을 받던 말들 같은데 더러 쓸모가 있을거요.》
우리는 그 말들을 타고 남행길에 올랐다. 행군도상의 어느 휴식참에 그 말들을 세마리나 잃어버린적이 있었다. 제멋대로 새초잎을 뜯어먹게 놔두었더니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청림속으로 종적을 감추어버리였다. 나는 근처에 별다른 적정이 없다는것을 확인하고 전령병에게 공포를 한 둬방 쏘라고 지시하였다. 총소리가 울리자 잃어졌던 세필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곧장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우리는 어느 한 산중에서 이전날의 처창즈유격구인민들을 만난 기회에 그 말들을 역축으로나 쓰라고 넘겨주었다.
북만의 소자지하골짜기로부터 시작하여 소백수골이라고 부르는 우리 나라 북단의 두메에 이를 때까지 반년이상에 걸쳐 진행된 이해의 남하행군에서 제일 많은 곤난을 겪으며 애를 먹은것이 바로 미혼진에서부터 마안산까지의 로상이였다.
인원은 몇명 되지 않는데 도처에서 적들이 나타나 우리의 걸음을 지체시켰다. 우리는 미혼진을 떠난 다음날부터 매일 한두차례씩, 어떤 날은 서너번씩 전투를 치러야 하였다. 적들은 우리에게 때때로 밥을 지어 먹거나 꿰진 옷을 기워 입을만한 겨를도 주지 않았다. 밥은 굶어도 살지만 담배를 굶고는 하루도 못산다는 《대통령감》이 종일토록 대통을 입에 물어보지 못하는 날도 있었으니 적들과의 교전이 어느 정도로 빈번했는가 하는것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밤이 돼야만 으슥한데를 찾아서 가까스로 밥도 지어 먹을수 있었고 젖은 신발도 말려 신을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도 별로 쉬여보지는 못하였다. 인원이 너무 적다나니 보초조직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한 교대에 적어도 문전초 1명, 바닥초 2명, 망원초 2명 정도는 세워야 하는데 부상자와 간호자들을 내놓고나면 교대시켜줄 사람이 모자랐다. 그래서 나도 대원들을 대신하여 여러번 보초를 섰다. 보초소들을 순찰하던 김산호는 어느날밤 립초중인 나를 보고 무슨 큰 변이라도 난것처럼 소동을 피웠다. 사령관이 대원들을 너무 어루만진다는것이였다. 김산호가 그런 투정질을 할 때는 달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붙잡고 사정하였다.
제발 그러지 말고 어린 대원들을 좀 생각해보라.
낮에는 행군과 전투에 지치고 밤에는 밤대로 줄창 보초를 서야 하니 오죽 고단하겠는가. 내가 그들대신 보초를 서준대야 몇밤이나 서주겠는가. 마안산까지만 가닿으면 사람들이 수두룩해질터이니 보초를 대신 서볼 기회도 더는 생기지 않을것이다.
설복을 계속했대야 소용이 없다는것을 알게 된 김산호는 아무 말도 없이 보초소를 떠나가버리였다.
어서 마안산으로 가자!
마안산에 당도하면 무수한 전우들의 포옹과 따스한 안식의 보금자리속에 안겨들것이며 그때면 자연히 그동안 겪어온 간난신고도 끝장이 나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 희망찬 생각이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매일처럼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에 지친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남하행군로정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안도와 무송은 어느 골짜기나 어느 등성이 할것없이 다 낯익은 산천들이였고 일목일초가 깊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고장들이였다. 송강, 흥륭촌, 쓰우리, 소사하, 류가분방, 푸르허, 대전자, 류수하, 남전자, 두지동, 말리허, 내도산 등지는 다 나의 청춘시절과 천갈래, 만갈래의 인연을 맺고있었다. 그 낯익은 산천들을 수년만에 다시 밟아보는 나의 가슴에는 누를길 없는 격정이 갈마들었다.
남하행군길에서 대서북차 서쪽 봉우리에 올랐을 때 불현듯 내앞에는 깊은 감회를 자아내는 희한한 전경이 펼쳐졌다. 봉우리앞에 앉은 자그마한 벽촌은 유격대창건준비를 다그쳐가던 나날에 내가 머슴으로 가장하고 지하공작을 하던 잊을수 없는 마을이였다. 우리가 딛고선 봉우리도 그때 지하조직원들과 함께 발이 닳도록 다니며 모임을 가지던곳이였다. 실로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바위돌 하나도 무심히 대할수 없는 유정한 고장이였다.
흘러간 옛일을 추억하며 련련히 뻗은 남쪽 산봉우리들을 더듬던 나의 시야에는 4년전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했던 소사하등판이 멀리 안겨왔다. 그 등판에서 얼마간 내려가면 양지바른 산기슭에 어머니의 묘소가 있다.
이 걸음으로 옛 발자취가 남아있는 저길을 따라가서 어머니의 묘소에 절이라도 하고 무송행을 하면 어떨가 하는 한가닥의 애틋한 미련이 내 발목을 거머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떼장이 듬성듬성 어설프게 얹혀있는 어머니의 묘에 고별의 눈물을 뿌리고 토기점골을 떠난지도 어언 4년이 되여오고있었다. 4년이면 떼장의 잔디도 어지간히 뿌리를 내렸으리라. 지금쯤은 마른잎새들사이로 고개를 내밀었을지도 모르는 애어린 싹들에 볼을 비비며 지하의 어머니와 잠간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싶은 애끊는 욕망이 불현듯 내 가슴을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일행이 봉우리를 다 내려간줄도 모르고 그냥 등성이에 서있었다.
한식을 앞둔 절기여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렬해졌는지도 모른다. 양지촌의 아버지묘소는 강제하선생네 집안사람들이 한해에 두번씩 찾아가서 제도 지내고 벌초도 한다고 하였는데 토기점골의 어머니묘소는 어떻게 되여가는지…
《장군님, 왜 산을 내리지 않습니까?》
기슭으로 내려가던 최금산이 되돌아와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명상에서 깨여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장군님, 왜 그러십니까? 소사하에 어머니묘소가 있다더니 혹시…》
최금산은 내 귀전에 두손을 오그려붙이고 귀속말로 물었다. 내장까지도 속속들이 투시해보는것 같은 어린 전령병의 놀라운 판단에 나는 자기의 심중을 드러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옳아! 내 방금 어머니생각을 하댔지…》
《그럼 장군님, 산소에 갔다오셔야 하지 않습니까?》
《갔다오고는싶은데 시간이 허락해야지.》
《소사하가 지척인데 시간이 바쁘다고 어머니산소도 찾아보지 않으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토기점골에 가면 동생도 있다는데…》
《설사 시간이 있다고 해도 나는 갈수 없는 몸이야. 어머니가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그것 참 이상합니다. 왜 바라시지 않을가요?》
《우리 어머니는 유언으로 내가 조선을 독립하기전에는 무덤을 파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단다. 내가 지금 토기점골의 산소로 가지 않는건 그 유언을 존중하기때문이지.》
최금산은 그런 말을 듣고도 무엇이 못마땅한지 그냥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무덤에 찾아가신다고 조선독립이 안되겠습니까. 장군님, 유언은 유언이고 한번 다녀오십시오.》
《아니다. 그럴수가 없다. 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효자가 되지 못했다. 돌아가신 다음에라도 효자구실을 하고싶은 심정이니 더 권하지 말아라. 크게 해놓은것도 없이 어머니를 어떻게 찾아간단 말이냐.》
김산호와 오백룡까지 합세해서 소사하행을 권유하였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히 토기점골의 어머니곁에 가있었다.
나는 봉우리를 내리면서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였다.
(어머니, 갈길이 너무도 총총해서 토기점골에는 들리지 못합니다. 사시장철 찬눈과 찬비에 젖고계시는 어머니의 분묘에 흙 한줌 덮어드리지 못하고 풀 한번 깎아드리지 못한채 안도땅을 밟고보니 송구스러운 마음 이를데 없습니다. 그동안 아우들 건사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철주는 지난해에 전사했다는데 그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조선혁명앞에는 창창한 대로가 열려졌습니다. 이제 마안산에 나가면 큼직한 사단을 하나 꾸리자고 합니다. 그 부대를 거느리고 백두산을 타고앉아 본때있는 싸움판을 벌리겠습니다. 나라를 다시 찾지 못하면 어머니의 유언대로 묘소곁에도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기어이 조국을 되찾고 어머니를 만경대로 모셔가겠습니다.)
우리는 마안산으로의 행군을 다그쳤다. 그 마안산행에 걸고있는 우리의 기대는 상당히 컸다. 그러므로 수해속에서 말안장 같이 생긴 산발이 나타났을 때 다들 《마안산이다!》 하고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맨먼저 우리를 맞아준것은 인삼포전이였다.
그 밭머리에 허술한 귀틀집 두채가 있었는데 모두 비여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무렵이 되여서야 깊숙한 골짜기에서 또 한채의 자그마한 귀틀집을 찾아냈다. 두세사람이 숨어사는 그 귀틀집에서 감자를 구워먹고있던 1사 정치주임 김홍범을 만났다.
《2련대는 어디 있습니까?》
《이달초에 교하쪽으로 원정을 가고 없습니다.》
김홍범의 천연스러운 대답이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이 느껴졌다. 2련대가 없다는것은 남호두에서부터 벼르고 또 별러왔던 새로운 주력부대의 조직이 불가능하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믿었던 나무가 거꾸러진셈이였다.
2련대는 독립련대로 활동할 때부터 싸움을 잘하는 《고려홍군》이라고 소문난 순수한 조선인부대들중의 하나였다. 그 련대는 동만의 연길, 왕청, 화룡 등 각 현 유격구들에서 1개 중대씩 선발해다 조직한 부대였다. 대부분의 성원들은 나와 연고가 깊은 사람들이였다. 련대장인 윤창범이나 련대정치위원인 김락천은 두말할것도 없고 권영벽, 김주현, 오중흡, 김평 등 련대의 핵심성원들도 우리가 직접 양성해낸 사람들이였다.
내가 마감으로 2련대전투원들을 만나본것은 1935년 5월, 그들이 나의 부름을 받고 왕청현 당수하자에 왔을 때였다. 10여일 그들과 같이 지내며 학습도 시키고 훈련도 주고 싸움도 시켜보았는데 그들은 내가 데리고있던 부대사람들 못지 않게 발전이 빨랐다. 바로 그들이 처창즈유격구를 최후까지 잘 방비고수하여 《불굴의 처창즈》라는 실화전설을 창조해낸 영웅들이였다.
우리가 제2차북만원정을 떠나고 처창즈유격구가 해산된 다음 2련대는 남만으로 진출했다가 이해초에 안도현 내도산을 거쳐 무송현 마안산으로 이동하였다. 련대는 마안산에 지휘부와 후방기지를 두고 겨울동안 무송지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되여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남호두에서 알게 된 2련대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의 전부였다. 내가 마안산으로 나올 때 북만원정대전원을 남들에게 다 떼준것은 2련대를 접수하면 그것을 모체로 하여 새 사단을 조직할수 있을것이라는 타산을 하였기때문이였다.
《2련대에 보낸 우리의 통신은 받지 못했소?》
나는 미혼진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이곳에 통신원을 파견하여 2련대가 자리를 뜨지 말고 나를 기다리고있으라는 지시를 보냈었다.
《받지 못했습니다. 2련대가 원정을 떠난 다음 여기에는 누구도 왔던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통신원이 중도에서 무슨 불상사를 당한것이 틀림없었다. 설사 그가 무사히 와닿았다 해도 없는 2련대를 만나낼리도 없었을것이다.
《2련대가 교하쪽으로 원정간 목적과 리유는 무엇이요?》
《그건 저도…》
《언제쯤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었소?》
《없었습니다.》
《누가 데리고 갔소?》
《련대장 장전술동무와 련대정치위원 조아범동무입니다.》
《다 원정가고 없으면 마안산에 남은건 동무들뿐이요? 동무들은 여기 남아서 뭘하고있소?》
내가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물었을 때 김홍범의 입에서는 더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저 삼포밀영에 100여명이나 되는 〈민생단〉이 있습니다. 그자들을 감시하느라고 제가 남아있지요.》
《무슨 〈민생단〉이 그렇게 많다는거요? 삼포곁에 있는 귀틀집은 텅 비여있던데.》
《〈민생단〉혐의자들은 지금 림강 마의하쪽으로 식량구하러 가고 없습니다.》
《식량공작을 나갈수 있는 정도라면 무슨 〈민생단〉이겠소?》
《그것들을 굶겨죽일수야 없지 않습니까.》
《〈민생단〉이 확실하다는 무슨 증거라도 있소?》
《증빙문건이 다 붙어있는자들입니다. 자백서, 진술서, 심문조서…》
김홍범은 컴컴한 방구석에서 큼직한 문서보따리를 끌어냈다.
《이게 다 그런 문서들입니다.》
그 《민생단》문서보따리가 2련대사람들을 만나려고 만난을 무릅쓰면서 불원천리하고 달려온 나에게 안겨준 마안산의 첫 대접이였다. 문서보따리가 얼마나 많았던지 방 한칸에 가득차있었다.
떠들썩한 환성과 격정적인 포옹대신에 곰팡이내가 물씬 풍기는 범죄기록뭉테기를 받아안게 된 그 순간 나는 엄청난 기만과 우롱속에 빠져든것 같아 몸이 떨리였다.
《민생단》이라는 말마디만 들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아직도 유격구에서 살판치던 《민생단》마귀가 살아 돌아가며 숱한 사람들을 괴롭히고있단 말인가? 그리고 고물단지 같은 이 문서보따리는 어떻게 되여 여기까지 따라왔는가?
다홍왜와 요영구에서 거듭되는 론쟁이 있었던지도 1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다. 국제당에서 내린 판결이 우리에게 전달된것은 달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판결내용이 여기까지 미처 전달되지 못했을수 있다. 하지만 《민생단》이 허구라는 절규가 동만땅을 진감한지도 오랜 지금에 와서까지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감행되는 광대놀음이 지속되고있다는것은 실로 상상밖이였다.
김락천 같은 사람마저 다 쓰러뜨리고도 무엇이 또 모자라서 100여명이나 되는 생때같은 사람들을 잡으려 드는가?
나는 김산호에게 림강 마의하방면에 지체없이 통신원을 파견하여 그들을 전부 데려오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민생단》문서보따리를 풀어 헤쳐놓고 한장한장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밤잠도 자지 않고 문서장들을 뒤져보았다. 다음날도 계속 뒤지고 또 뒤졌다. 그 문서장들을 뒤져갈수록 나는 차츰 더 깊은 미궁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종이장들에는 누구도 감히 부인할수 없는 어마어마한 죄상들이 너무나도 생동하게 기록되여있었다.
나는 문서장들을 탁 덮어버렸다. 그것을 뒤지는것은 백해무익한짓이였다. 그 종이장들을 믿어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잃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었다. 어떤 잉크나 다 받아들이는 백지장의 글을 믿을수는 없었다.
림강현 마의하쪽에 가있던 《민생단》혐의자들은 우리의 련락을 받자 험준한 룡강산줄기를 넘어 수백리산길을 단 이틀사이에 와닿았다.
《민생단》혐의자들이 삼포밀영귀틀집에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곧 김홍범을 데리고 그들을 찾아갔다.
성에가 하얗게 낀 귀틀집문을 열자 람루하기 이를데없는 사람들이 안에 꽉 들어차있었다. 그것은 정녕 격정도 환성도 눈물도 없는 야릇한 상봉이였다. 나에게 경례를 붙이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보고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쥐죽은듯한 정적과 침묵만이 무겁게 방안을 감돌고있었다. 얼마나 짓눌렸으면 쳐다볼 권리, 인사할 자격마저 잃은것인가. 설사 아무리 중한 죄를 진 사람들이라 한들 저다지도 기가 꺾이고 저다지도 험상스러울수 있는가?
《그동안 동무들의 고생이 막심했겠습니다.》
어쩐지 말이 목에 걸려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동무들을 대하고보니 그동안 모두 안녕했는가 하는 말조차 나오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무들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나는 동무들을 만나고싶어 멀리 북만의 경박호반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그 인사말에 대한 반향은 어느 구석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숨소리, 기침소리하나 없는 침묵뿐이였다. 항일전쟁을 진행해온지 만 4년세월이 되여오지만 대원들이 그런 식으로 나를 맞아준 례는 한번도 없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내가 이리로 온것은 2련대동무들을 만나서 새 부대를 꾸려가지고 백두산에 데리고 나가 싸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정작 여기 와보니 쓸모있다는 사람들은 다 교하쪽에 원정을 가버리고 남아있는것은 몹쓸 사람들뿐이라고 했다.
나는 동무들에게 붙어있는 《민생단》혐의문서장들을 뒤져보았다. 그걸 봐서는 동무들가운데 어느 한사람도 《민생단》이 아닌 사람이 없다. 나는 문서장만 보고 동무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동무들이 제 입으로 하는 말을 들어봐야 정확한 견해를 세울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동무들이 스스로 속심을 툭 털어놓고 얘기해보라. 두려워하지 말고 눈치를 보지도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라.
그렇게 호소하였지만 두텁게 얼어붙어있는 침묵의 얼음장은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았다.
나는 맨 앞자리에 있는 한 청년에게 동무부터 대답해보라, 동무가 《민생단》에 들었다는것이 사실인가고 따져물었다.
그는 머리를 수그린채 주밋거리다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사실입니다.》
나는 그런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눈물을 쏟고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민생단》이 아니라고 절규하기를 기대하였다. 그 청년의 대답은 실망만 자아냈다.
나는 키가 큰 다른 청년에게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그럼 리두수동무가 말해보라. 동무가 〈민생단〉에 들었다는것이 사실인가?》
강원도 춘천출신의 그 젊은 소대장은 일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있는 사람이였다. 리두수의 오른쪽 허벅다리에는 푸릿푸릿한 상처자국이 있었다. 언제인가 내가 어느 전투에서 부상당한 자리인가고 물었더니 개한테 물어뜯기운 자리라고 하였다.
그가 여라문살 되던 해였다고 한다. 노상 죽으로 끼니를 에우고있던 보리고개무렵의 어느날 두수는 한숟갈의 소금조차 없어서 죽가마에 소금을 넣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푸나무 석단을 해지고 장마당으로 내려갔다. 나무 석단을 파니 소금 한되가 되였다. 그는 소금자루를 지게다리꼭대기에 데룽데룽 매달고 의기양양해서 자기 마을로 향했다. 어느 일본인의 집앞을 지날 때 불시에 사나운 세빠드가 그에게 달려들어 허벅다리를 물어메쳤다. 그를 물라고 개를 부추긴 일본인소년은 집안으로 숨어버리고 그 집 출입문에는 안으로 빗장이 질려졌다. 주인집처사에 격분한 목격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진 두수를 업고 경찰서에 몰려가 항의를 하고 고소를 하였다. 살점을 뭉청 뜯기운 허벅다리의 상처는 험상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두수는 난생 처음으로 병원혜택을 입어보면서 거기서 내내 흰쌀밥생활을 하였다. 죽에 신물이 난 더꺼머리소년은 흰쌀밥을 먹는것이 너무 좋아서 상처가 빨리 아물가봐 조마조마해 하였다. 그는 입원생활이 자기자신과 자기 가정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치료비는 개주인이 보상하는줄로만 알고있었다.
얼마후 병원에서는 돈을 물지 않으면 그이상 입원치료를 해줄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치료비는 자그만치 20원이나 되였다. 한달에 20전씩 되는 월사금도 물지 못하여 소학교 1학년에서 석달밖에 공부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 가난뱅이소년의 집에서 20원이나 되는 뭉치돈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리두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들은 번갈아 개주인과 경찰서와 병원에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사정도 하고 항의도 하고 제소도 하였다. 그러나 어디서도 피해자의 하소연과 항의와 제소를 받아주지 않았다. 개한테 물린 책임은 물린 사람에게 있다는것이다. 그네들은 모두가 조선사람의 편을 들어줄수 없는 일본사람들이였다.
결국 리두수는 20원의 빚을 내여 병원에 바쳤다.
그 빚이 새끼를 치며 덧붙고 또 덧붙어서 이태후에는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집을 팔아도 다 갚을수 없으리만치 엄청나게 불어났다.
빚단련때문에 더는 춘천땅에서 살수 없게 된 리두수네 일가는 정든 고향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빚쟁이들은 야밤도주하는 일가족을 20리나 뒤쫓아가서 할머니의 보퉁이속에서 최후의 가산인 명주 한필마저 다 뺏아냈다.
한때는 사랑채와 행랑채까지 달린 팔각기와집에 몇정보의 농토까지 갖추어놓고 뭇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속에 살아왔던 리왕조가문의 후예들은 왕조도 나라도 집도 다 빼앗기고 최후의 천필마저 다 빼앗긴채 순전한 알거지가 되여 류랑의 길에 올랐다.
이국살이를 떠나가는 어린 두수의 가슴에 망국의 설음과 리향의 슬픔을 심어준것은 원산발 청진행 화륜선 식당에서 밥을 날라다주던 접대원들의 구슬픈 목소리였다.
이국살이를 떠나가는 여러분네들의 설음과 슬픔은 구천에 닿고 류랑객들이 흘려온 피눈물은 동해물만 못하지 않지만 한숨과 눈물로는 살길이 열리지 않으니 슬픔을 참아가며 조국의 쌀과 조국의 물로 지은 하직밥들을 잡수시오, 그렇게 여쭈는 접대원의 동정어린 몇마디 말이 소년 리두수의 목을 메게 하였다.
왜놈들때문에 나라도 뺏기고 집도 고향도 다 잃고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온 그의 뇌리속에는 왜놈들과는 절대로 한하늘을 이고 같이 살수 없다는 서리찬 생각이 꽉 들어찼다. 그는 장차 자기가 어른이 되게 되면 조선의 하늘아래에서는 왜놈은 물론, 왜놈들의 개 한마리, 고양이 한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리두수는 어른이 채 되기전에 총을 잡고 유격대오에 들어섰다.
이런 사람이 《민생단》에 들어갈리는 만무한것이다.
그런데 리두수 역시 전사람과 꼭같은 대답을 하였다.
《네, 〈민생단〉에 든것이 사실입니다.》
소왕청 리수구골의 《민생단》감옥에 찾아갔을 때 장포리가 나에게 했던 첫 대답과 같은 소리, 같은 태도였다.
나는 솟구쳐오르는 분기를 억누르며 《민생단》에 들었다면 어떻게 들었는지 만사람앞에서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는 떠듬거리며 자백서와 진술서에 기록되여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였다.
《민생단》에 들게 된 과정 이야기를 하는 리두수의 말은 얼마나 사개가 잘 맞아떨어졌던지 의심할 여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민생단》혐의자들은 모두가 일치하게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나는 인내성을 가지고 재차 리두수에게 물어보았다.
《동무, 동무는 일본사람이 기르는 개때문에 빚도 지고 집도 잃고 고향도 잃었다. 일본사람네 개가 동무의 살점만 물어뜯은것이 아니라 열사람도 넘는 동무네 일가족의 생활도 다 파헤치고 짓뭉개놓았다. 동무는 일본개때문에 개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였다. 그런 동무가 이제 와서는 스스로 원쑤놈들의 품에 안겨 자기 동포들을 잡아먹고 자기 동지들을 물어먹는 미친개노릇을 한다는것인데 과연 그런가? 동무가 적들의 뜨물 한그릇도 얻어먹지 못하면서 적들의 개노릇을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리두수는 눈물만 떨어뜨리며 한마디의 대꾸도 못하였다. 입술을 깨문채 오열로 전신을 떨뿐이였다. 사람을 질식시킬것 같은 오랜 침묵이 계속되였다. 나는 저주스러운 그 귀틀집에서 물러나왔다. 신선한 대기는 차츰 답답하던 가슴도 열어주고 울기도 식혀주었다. 흐리터분하던 머리속이 한결 맑아졌다.
《민생단》혐의자들과의 담화에서 나는 하나의 리해할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형장에 끌려간 우리 투사들은 대부분 중세기의 종교형벌을 방불케 하는 악형을 당하면서도 《모른다!》는 한마디의 말로 자기가 한 일도 안했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결단은 사형선고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공산주의자들앞에서는 안한 일도 했다고 대답하며 아닌것도 그렇다고 진술하고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것이다.
나는 숲속을 거닐며 《민생단》혐의자들이 자살적인 대답을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저 사람들이 모두 《민생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것은 하늘이 땅으로 될수 없고 땅이 하늘로 될수 없는것과 같은 진리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동무들은 《민생단》에 들었다고 말하며 《민생단》책동을 하였다고 저절로 죄를 뒤집어 쓰겠는가?
가야허마을의 박창길소년도, 마촌의 장포리도 이미 자신들이 토설한 허위진술을 사실이라고 우겨댔다. 이런 괴이한 현상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것인가?
《민생단》혐의자라는 올가미에 홀쳐든 첫 순간에는 그들이 모두다 자신이 《민생단》에 든 일이 없었다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 진정, 그 진심의 토로가 그들에게는 더 큰 화를 가져왔다. 진정은 가식으로 인정되고 진심은 기만으로 인정되고 솔직성은 교활성으로 인정되였다. 진정의 고백이 반복될수록 가상적인 죄상은 더욱더 엄중한것으로 확대되고 고문은 정비례로 증대되였다.
야수적인 고문과 번뇌가 극한점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어떠한 이질적변화가 생기겠는가?
몇해동안 한지붕밑에서 동고동락을 해온 혁명동지들한테서 불신을 당하며 학대를 당할바에야 구태여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살려면 총을 집어던지고 산에서 내려가 귀순문서장에 도장을 찍거나 적의 앞잡이가 되여야 하는데 명색이 공산주의자인 우리가 그런 배신이야 어떻게 하겠는가, 처분에 맡기는것이 상책이다 하는식 자포자기상태에 빠질수 있다.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한테서 받는 억울한 오해와 불신, 이것이야말로 100여명의 빨찌산장정들을 극단적인 절망과 자포자기에로 몰아넣은 근원이였다.
돈이나 리윤추구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리념의 공통성에 의해서 사상의리적으로 결합된 혁명가들의 집단에서 믿음은 그 집단의 통일단결과 공고한 발전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생명으로 된다고 말할수 있다. 집단의 매개 성원들은 믿음의 힘에 의하여 동지를 사랑하게 되며 믿음의 힘에 의하여 상급이 하급을 아끼고 하급이 상급을 존대하는 공산주의적의리가 집단을 지배하게 된다.
믿음은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공산주의적인간관계의 출발점으로 되고있다. 우리는 과거에도 믿음이라는 무기로 동지들을 얻고 인민을 묶어세웠으며 오늘도 역시 사랑과 믿음이라는 힘있는 수단으로 우리 사회의 일심단결을 철통같이 유지해가고있다. 집단주의에 기초하고있는 우리 사회에서 믿음은 사회를 떠받들고있는 튼튼한 초석으로 되고있다. 조직이 자기를 믿어주고 동지들이 자기를 믿어줄 때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최대의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조직이 자기를 불신하고 동지들이 자기를 멀리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을 최악의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과의 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것은 그때문이다.
자본가들이 돈이 없이 살지 못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믿음이 없이 살지 못한다. 우리 나라에서 믿음은 사회관계의 총체로 되고있으며 집단주의의 존재방식으로 되고있다. 조직이 자기를 믿어주고 동지들이 자기를 믿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과 조국을 위한 투쟁에서 무진장한 힘을 발휘할수 있다. 믿음은 충신을 낳고 불신은 역적을 낳는다는 격언은 이런 리치를 반영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며 공동투쟁을 벌리던 항일전쟁시기 우리 대오에서 믿음의 원리를 파괴한 《민생단》보따리가 오직 조직에 대한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혁명에 뛰여든 투사들의 생활에 얼마나 큰 혼란과 피해를 가져왔는가 하는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는 문제이다. 그 당시는 적아간에 특별한 계선이 따로 없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가도 적이요, 강 하나를 건너가도 적이였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희들끼리나 실컷 혁명을 해라 하고 적구로 달아나버리면 다였다. 무고한 혁명동지들에게 《민생단》감투를 씌우는것은 그들을 모두 적진으로 차던지는것과 같은 망동이였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신의 올가미로 되고있는 부당한 《민생단》혐의를 벗겨주고 그 올가미를 흔적도 없이 제거해버리는것이다. 말만으로는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을 소생시킬수 없었다. 필요한것은 실천행동뿐이였다.
나는 수림을 빠져나와 다시 귀틀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느 나무뒤에서 한 녀대원이 불쑥 내앞에 나타났다. 키가 늘씬하고 눈이 억실억실하고 용모도 이쁘장하였다. 마음이 서글서글할것 같아 보이는 그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여있었다.
《장군님, 저는 〈민생단〉이 아닙니다!》
녀대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마디의 말은 무어라 이름할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나에게 주었다.
《저는 〈민생단〉혐의를 받았던 사람과 결혼했다는 리유로 〈민생단〉으로 몰렸습니다. 그런데 그 동무는 〈민생단〉이 아닙니다. 저도 물론 〈민생단〉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왜놈들의 간첩이 될수 있겠습니까. 저도 장철구어머니도 남편때문에 억울하게 〈민생단〉으로 몰렸습니다.》
이 용감한 녀대원이 후날 무송현성전투때에 적을 단꺼번에 여섯이나 찔러눕혀 《녀장군》이라는 별호와 함께 금반지표창을 받은 김확실이였다.
화전민의 딸인 그는 처창즈에서 유격투쟁에 참가하였다. 처창즈유격구의 동남차수림속에는 박영순이 책임지고있는 무기수리소와 박수환이 책임자로 있는 재봉대가 자리잡고있었는데 김확실은 무기수리소와 재봉대성원 20여명의 식사를 보장하였다.
어느날 무기수리소에서 뜻하지 않은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수리소건물은 일시에 폭연과 불길에 휩싸였다. 《민생단》이라는 오명을 쓴탓으로 무장대오에서 쫓겨나 무기수리소에 와서 일하던 강위룡이라는 청년이 보총탄알재생작업을 하다가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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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폭음에 놀라 곁에서 일하던 사람들마저 경황없이 작업장을 떠난 다급한 정황속에서 불길을 헤치고 수리소안에 뛰여들어 실신한 화상자를 업어내온것은 작식대원 김확실이였다. 강위룡의 화상자리는 험악했지만 군의는 화상당한 얼굴에 소독수를 붓고 쭈그러붙은 낯가죽을 뜯어낸 다음 와셀린을 바르고 붕대를 처매주는것으로 처치를 끝마쳤다. 그다음부터는 김확실이 간호병이 되여 종이에다 밀을 녹여 환자의 상처에 붙여주고 눈곱을 뜯어주고 발을 씻어주었다. 정성끝에 확실은 총각을 사랑하게 되였다. 총각도 역시 그를 사랑하였다. 두사람사이에는 곧 결혼문제가 상정되였다. 그렇지만 두차례의 오발사고때문에 《민생단》혐의자로 된 강위룡은 애인에게 루가 미칠것을 념려하여 비밀약혼만 하고 공식적인 결혼은 주저하였다. 박영순과 박수환은 주저할것이 무엇이냐, 일단 언약이 되였으면 냅다밀라고 그들을 부추겨주었다. 거기에 고무된 련인들은 처창즈인민혁명정부에 찾아가서 결혼등록을 하였다. 이 결혼이 문제시되였다. 숙반공작위원회에서는 《민생단》혐의자와의 결혼을 《민생단》의 수를 배가시켜주는 반혁명적인 리적책동으로 간주하였다. 좌경배타주의자들은 결혼한지 반달도 지나지 않아서 김확실을 강위룡의 곁에서 떼여내여 멀리 왕바버즈쪽으로 추방하였다. 조직생활에도 참가시키지 않고 죄인취급을 하였다. 그러다가 《민생단》혐의자들속에 걷어넣었다.
애인과 강제리별을 당한 때로부터 9개월이 지난 다음 김확실은 강위룡이 무기수리소와 함께 근처에 와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으나 조아범이나 김홍범의 승인을 받지 못한탓으로 애인과의 짧은 상봉마저 이루지 못하였다.
얼마후 강위룡은 조아범에게 끌려 2련대를 따라 교하원정을 떠나고말았다. 원정대에 무기수리기술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끼여있어야 한다는 사정이 《민생단》혐의자인 강위룡을 교하로 끌려가게 하였다.
《강동무가 진짜 〈민생단〉이라면 저는 결혼은 고사하고 불속에서 업어내오지도 않았을것입니다. 그는 적들의 〈토벌〉에 부친과 형제들을 몽땅 학살당한 사람입니다. 싸움도 잘했구요. 오죽하면 구국군들까지 군중심판장에서 그 동무를 두둔했겠습니까.》
나는 김확실이 그런 고백을 해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였다.
김확실은 장철구와 마찬가지로 사랑때문에 죄인으로 된셈이였다.
나는 김확실을 데리고 귀틀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아까와 다름없이 머리들을 떨어뜨린채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나는 장내를 둘러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동무들, 머리를 들라. 나는 동무들의 죄를 따지고 판결을 내리자고 온 사람이 아니다. 백두산에 나가 함께 싸울 전우들을 찾아온 사람이다. 나는 전우들을 찾아왔고 혁명동지들을 찾아왔다. 그런데 여기 있는 동무들은 모두 나의 전우로 될수 없는 친일역적들이며 반동들이라고 말하고있다. 나는 그 말을 믿을수 없다. 동무들이 〈민생단〉에 들었을것 같으면 일본사람들한테나 갈것이지 무엇때문에 산에서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스럽게 지내겠는가? 집에 가서 안해나 남편을 얻어가지고 뜨뜻한 구들에서 지내며 농사나 하면 편안할텐데 무엇때문에 산에서 고생하겠는가? 어디 한번 동무들스스로가 말해보라. 과연 동무들이 일제를 위하여 여러해동안이나 일부러 사서 고생해왔는가? 과연 동무들이 음산한 만주광야 빙천설지에서 풍찬로숙해온것은 일본의 개가 되여 자기의 혈육들과 동지들을 해치기 위해서였는가? 리두수동무, 말해보라. 동무는 허벅다리를 물어뜯던 일본사람네 개 같은 짐승으로 번지고싶어 고생스레 싸워왔는가?》
그러자 리두수는 오열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왜놈의 개가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왜놈의 개가 아닙니다! 〈민생단〉이 아닙니다!》
순간 귀틀집 여기저기에서 일시에 함성이 터져나왔다.
《저도 아닙니다!》
《저도 아닙니다!》
장내에서는 없는 죄를 만들어낸자들을 저주하고 규탄하며 《숙반》의 총대밑에서 당해온 설음을 하소하는 일종의 집회 같은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모든 사람들이 주먹을 흔들고 눈물을 뿌리며 가슴속에 서리서리 맺혀있던 사연들을 토설하였다.
집회가 거의 끝나갈무렵 나는 김홍범을 불러 《민생단》문서보따리를 가져다 불사를 준비를 해놓으라고 일렀다. 김홍범은 펄쩍 뛰였다.
《숙반공작위원회에서 작성한 법적문건들인데 그걸 어떻게 승인도 받지않고 함부로 없앤단 말입니까? 그걸 태웠다간 큰 변이 납니다.》
김홍범은 무장대오에 들어서기전부터 전문적으로 당사업을 한 오랜 정치일군이였다. 그는 연길사범학교출신이였다. 지식도 있고 일정한 사업경험도 가지고있었지만 창발적으로 사색하고 능동적으로 판단처리할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법을 거들지 말고 어서 가서 〈민생단〉문서보따리나 가져오시오. 남이 못하는 일이라고 해서 우리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소.》
《조직의 결정에 따라 절차를 밟아서 작성된 문건인데 어째서 그걸 없애는걸 보면서도 가만 있었는가고 따지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장군님도 곁에 안계실텐데 제가 어떻게 책임지랍니까?》
낯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김홍범은 두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나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법적성격을 띤 문건을 어느 개인이 자의적으로 소각해버리고 무사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이런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사변일수 있었다.
그러나 100여명의 《민생단》혐의자들에게 부당한 의심과 절망밖에 안겨줄것이 없는 그 죄악의 문서보따리를 흔적조차 없게 소각해버리려는 나의 결심은 드팀없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결심인가를 잘 알고있었다. 《숙반》운동을 조직지도하고 심문조서를 작성한 당사자들만이 처리할수 있는 일을 내가 치른다는것은 사실 모험이였다. 필요하다면 크고작은 모든 일을 죄다 《민생단》의 조작으로 볼 막강한 권한과 무제한한 허구력을 가진 《숙반》의 하수인들은 심문조서 한장을 불태우는 죄과만으로도 나에게 열백번의 징벌을 내릴수 있었다. 그들은 그런 선고로써 반《민생단》투쟁문제를 국제당에까지 제소한 나에 대한 앙갚음을 얼마든지 할수 있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김산호를 시켜 그 문서보따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살라버리기로 결심한것은 참으로 대용단이였다.
나는 나 하나의 목숨을 바쳐 100여명을 구원할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무슨 일이든 다해낼 결의에 넘쳐있었다.
문서보따리를 소각할 준비를 해놓고 집회를 결속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들을 오늘 누가 〈민생단〉이고 누가 〈민생단〉이 아니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수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오늘 동무들에게 명백히 선언할것은 지금 이 자리에는 〈민생단〉이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동무들자신이 다 〈민생단〉이 아니라고 부인하였기때문이다. 나는 동무들이 한 그 말을 믿는다. 동무들은 이 시각부터 백지상태로 돌아가서 다 새로 출발한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깨끗치 못했던 과거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무들의 혁명가로서의 진가는 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행동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동무들은 지금 다같이 인생의 백지를 나눠가지게 되였다. 그 백지에 얼마나 고귀한 삶과 투쟁의 기록을 남기는가 하는것은 전적으로 동무들자신에게 달렸다.
모두가 새 출발하여 조국과 인민과 력사앞에 떳떳이 내놓을수 있는 투쟁행적을 그 백지장들에 적어놓게 되리라고 믿는다. 나는 이 시각부터 동무들을 그토록 괴롭혀왔던 〈민생단〉혐의가 완전히 무효하다는것을 언명하는 동시에 동무들모두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대오에 들어섰다는것을 선포한다.》
나는 《민생단》혐의자라고 하는 사람들가운데서 몇명 선발하여 마당한복판에 문서보따리를 쌓아놓게 한 다음 불을 달았다.
그 문서장들에 불을 달면서 나는 비단 《민생단》혐의자들의 불명예스러웠던 과거뿐만아니라 온갖 악행의 정신적근원으로 되는 인간증오관념, 인간불신관념을 불태워 영영 없애치우고싶었다.
반세기도 훨씬 넘는 오늘까지도 《민생단》증거문서장들을 불태워버리던 일이 그토록 잊혀지지 않는것은 그 불을 지필 때 내가 마음속으로 기원한것이 아마 너무도 크고 심각한것이였기때문일것이다. 문서보따리에 불길이 타오르자 대원들은 모두 통곡을 하였다.
그때 그 불길을 지켜보며 울음바다를 펼쳤던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인간들로 탄생하게 되였다. 대렬안에서는 진정으로 서로 믿고 도와주고 사랑하는 새로운 기풍이 생겨나게 되였다. 심지어 김홍범이마저 다른 사람으로 번지게 되였다.
다음날 나는 일부러 휴식 겸 사냥을 조직하였는데 그것을 알게 된 김홍범은 호신용으로 감춰두고있던 100여발의 보총탄환을 그들앞에 내놓았다. 바로 전날까지도 수인처럼 취급하던 사람들에게 그가 자기의 호신용탄환전부를 희사했다는것은 하나의 사변이 아닐수 없었다.
원래 그들에게는 막대기정도의 구실밖에 할수 없는 쓸모없는 토퉁 같은 무기와 누기차고 녹이 쓸어 못쓰게 된 서너발의 탄알밖에 주지 않았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탄피에는 나무로 만든 가짜총알만 끼워있었다. 온전한 무기와 탄알을 주게 되면 그들을 불신하고 학대한 자기들에게 어떤 보복을 가할지 몰라 두려워했던것 같다.
재가루만 약간 남은 《민생단》문서장들의 흔적을 굽어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김홍범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어제 장군이 여기에 불을 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속이 너무 떨려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리고말았습니다. 소각현장에 있었다는 한가지 리유만으로도 위법대죄의 공모자로 몰려 목이 달아날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래 지금은 떨리지 않습니까?》
《선행을 지지한것때문에 목숨을 잃는것은 영광된 일이라고 생각하니 겁이 없어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생각했다니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감사의 인사는 제가 올려야겠습니다. 장군은 저도 새 인간으로 갱생하도록 구원해주었습니다. 제게도 은인으로 돼준셈이지요.》
그런 말을 듣기는 퍼그나 거북스러웠다. 김홍범은 나보다 나이가 더든 사람이였다.
《젊은 사람을 앞에 놓고 비행기를 태우는 과언은 그만두시오.》
내가 이런 핀잔을 하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장군의 그 도량과 큰 심장이 진정으로 부럽습니다.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춰주는 말은 그만하고 오늘은 우리도 같이 사냥이나 나가보지 않겠습니까?》
김홍범도 명랑한 기분으로 나의 제의에 호응해나섰다.
그날의 사냥은 참으로 별재미였다. 나는 호위성원들의 총을 그들에게 모조리 빌려주어 그들이 온전한 총으로 한방씩 다 갈겨보게 하였다.
몰이군이 많은 덕에 그날 사냥에서는 자그만치 7~8마리나 되는 메돼지와 노루를 잡았다. 녀대원들중에서는 김확실이 단발명중으로 노루 한마리를 잡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사냥해온 산짐승고기들과 얼마간 남아있던 통강냉이와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그날 저녁을 푸짐히 차리도록 하였다. 만찬뒤에는 오락회도 조직하였다.
마안산 삼포밀영의 퇴락한 귀틀집에서 가진 그날의 만찬회와 오락회는 더없이 검소한것이였지만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있었다.
2련대를 모체로 하여 조직하자던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새 사단은 이처럼 죄악에 찬 불신의 문서장들을 한줌의 재로 만드는 불길속에서 태여났다.
《민생단》문서보따리가 불타없어지고 새 사단이 태여났다는 소문은 삽시에 사방으로 퍼져갔다. 곳곳에서 숨어지내던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우리에게로 찾아왔다.
맨먼저 찾아든것이 대첨창골짜기에 숨어있었다는 화룡출신의 반일자위대원들이였다. 그 사람들속에 후날 사령부 전령병으로 된 백학림과 《꾀꼬리》로 소문난 김혜순이도 끼여있었다. 박록금(본명 박영희)이 우리를 찾아온것도 그무렵이였다. 그는 새 사단안에 잠정적으로 존재했던 첫 녀성중대의 중대장이 되였다.
무송현 로모정자에서는 장티브스에 걸려 앓고있던 청년들이 새 사단에 편입되였다. 그 청년들로 1개 소대를 조직해주고 김정필을 소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안도현 오도양차부근 수림지대에서 활동하던 김주현이네도 우리를 찾아왔다. 처창즈 방면에서는 김택환이네 소부대가 달려왔다.
나는 정식으로 련대들과 중대들을 편성하였다. 《보따지》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리동학이와 김택환이한테는 각각 중대장의 직무를 주었고 김주현에게는 정치지도원직을 맡기였다. 주력부대 련대정치위원사업을 하게 된 김산호는 그때부터 노상 싱글벙글 웃으며 지내게 되였다.
마안산에 와닿았을 때까지만 하여도 열댓밖에 안되였던 우리 대오가 동강에 이르러서는 수백명으로 불어났다.
우리는 새로 조직한 주력부대의 무장장비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렸다.
《민생단》혐의자들이 가지고있은 무기의 대부분이 토퉁이라는것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다.
나는 10~15명 규모로 조를 조직하고 책임자를 임명하여 주면서 자기 힘으로 싸울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이제부터 한달사이에 총탄도 보충하고 총도 바꾸어 메고오라, 총은 일본놈들에게 얼마든지 있다, 숲속에 엎디여있다가 적들이 지나갈 때 달려들어 총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총도 한방씩 쏘면서 무기를 빼앗으라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다 총창을 한개씩 차고 다니였다. 그들은 한달이 아니라 보름만에 다 돌아왔는데 총탄도 보충하고 총도 새것으로 바꾸어 메였다. 어떤 대원들은 기관총까지 빼앗아 메고왔다.
나는 그들을 기본으로 하여 련대를 조직하였고 후에는 이 련대를 조직하던 경험으로 사람들을 한명씩한명씩 데려다 6사와 2방면군도 조직하여가지고 일제와 싸웠다.
우리가 주력부대의 무장장비를 단꺼번에 몽땅 개선할수 있게 된것은 시난차를 친후 서강전투를 치른 다음이였다. 그 전투를 하게 된 목적의 하나가 부대의 무장장비를 일변시키려는데 있었다.
서강에는 1개 련대의 위만군이 주둔하고있었다. 그 련대의 그쯘한 무장이 우리의 구미를 당겼다.
교통이 불편한 외진 고장인데다 주변은 울창한 수림이 망망대해를 이루고있었으므로 불의습격을 하기에는 유리한 대상이였다. 적들도 그런 허점을 고려하여 병영주변에 아름드리 통나무들로 세길이나 되는 성을 둘러쳤고 그 성의 네 귀퉁이에는 포대까지 구축해놓고있었다.
전면공격으로 성내에 돌입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나는 화공전술로 적진에 혼란을 조성하고 적들을 위압하여 항복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적병영들은 완전한 목조건물이였다.
나는 날이 어두워진 다음 김택룡을 비롯한 수류탄던지기 명수들을 시켜 석유를 묻힌 솜뭉치에 불을 달아 적병영지붕들에 던지게 하였다.
초여름 보슬비가 내린탓에 젖은 지붕에는 쉽게 불이 달리지 않았으나 화공전술은 성공하였다. 우리 대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항복하면 살려줄테니 총을 버리고 밖으로 나오라는 함화를 들이대였다. 그러나 적들은 완강한 방어전으로 대답하였다.
나는 몇명의 대원들을 적지하포대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민가에 보내여 그 집 부엌으로부터 지하포대밑으로 굴을 파게 하였다. 한편 정찰병들을 시켜 위만군련대장의 장모를 데려오게 하였다. 우리는 로파에게 사위를 설복하여 무모한 저항을 그만두고 무기를 바치도록 할것을 권고하였다.
로파는 우리의 권고대로 기꺼이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사위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나왔다. 위만군련대장은 대원절반을 데리고 무송으로 갈수 있게만 해주면 투항하는데 동의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제기를 일축하고 철저하고 완전한 투항을 요구하였다. 재차 사위를 만나고 나온 로파는 자기 사위가 데리고 갈 인원수를 얼마간 축소할 용의를 표명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분명 련대장은 담판을 질질 끌면서 응원대가 올것을 기다려보자는 속심이였다.
지하포대를 폭파하기 위한 갱도굴설작업은 이미 반나마 진척되였다. 나는 로파에게 갱도와 폭약을 보여주고 사위에게 투항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포대들을 모조리 폭파하겠다는 우리의 최후통첩을 전하라고 일러주었다.
세번째로 성안에 들어갔던 로파는 싱글벙글하면서 내앞에 다시금 나타났다. 사위가 2명의 호위병만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하더라는것이였다.
나는 그 요구에 동의하였다.
위만군련대장은 부하들을 전원 정렬시키고 무장들을 해제하여 한곳에 모아놓은 다음 2명의 호위병과 함께 황황히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무장이 고스란히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새 사단을 꾸리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무송현성과 같은 큰 성시를 마음먹고 들이칠수도 없었을것이고 그후 압록강변과 백두산주변에서 련속적인 승리의 개가도 올릴수 없었을것이다.
당초에 생각했던바와는 달리 2련대는 새 사단의 탄생은 물론, 그 성장에도 보탬을 주지 못하였다.
우리가 마안산에서 접수하기로 되여있던 2련대가 우리에게 온것은 반년도 더 지나서 백두산에 나가 자리를 잡고있을 때였다. 그것은 이미 주력사단의 틀이 다 잡힌뒤였다.
너무나 때늦은 도착이였지만 오중흡, 권영벽, 김평을 비롯하여 오래전부터 정이 든 전우들과 다시금 한가마밥을 먹으며 같이 지내게 된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강위룡도 성한 몸으로 무사히 새 사단을 찾아왔다. 김확실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마지막상처까지 아물궈줄수 있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무척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들이 도착한 다음날 나는 강위룡을 찾았다.
《동무의 애인이 김확실동무라지?》
키가 꺽두룩한 그는 귀뿌리까지 새빨개졌다.
자기에게 안해가 있다는 대답을 하기가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확실동무는 여기 있지 않고 몇십리 떨어진 힁산쪽의 후방밀영재봉대에 가있소. 거기 가서 확실동무를 만나보시오. 내가 이제 곧 길잡이 할 사람을 달아주겠소.》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후에 천천히 만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확실동무에게 련락을 띄워서 이리로 오게 하면 상봉시간이 두배쯤 늦어질수 있기때문에 동무가 직발 그리로 가는것이 좋겠소.》
《우린 천천히 만나도 됩니다. 일없습니다.》
강위룡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오히려 나를 섭섭하게 하였다.
《동무는 천천히 만나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동무때문에 김확실동무의 살이 내리는걸 보고만 있을수 없소. 두말 말고 곧 떠나도록 하시오.》
그래도 그는 머리를 수굿하고있다가 눈물이 글썽해서 나를 쳐다보며 그렇지만 대렬편성도 받기전에 어찌 애인부터 찾아가겠는가, 혁명을 하자고 총을 잡았는데 혁명사업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못가겠다고 하였다.
나는 한가지 구실을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동무에게 한가지 과업을 주겠소. 2련대와 함께 온 녀성동무들을 데리고 재봉대에 들어가서 동기용솜군복을 만드시오.
그걸 다 만들기전에 돌아오면 처벌을 내리겠소.》
강위룡은 그제서야 더 구실을 대지 못하고 명령대로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좌경배타주의자들에 의하여 오래동안 강제리별을 당해왔던 애인들의 감격적인 상봉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마안산에서의 《민생단》문서보따리의 소각은 새 인간들의 탄생, 새 사단의 탄생만을 보게 한것이 아니라 사랑의 부활, 새로운 사랑의 탄생도 가져왔다.
사람들을 믿은 덕에 우리는 천하를 얻은셈이 되였다.
우리 혁명대오안에서 조선혁명의 령도핵심에 대한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충성이 보편화되고 그 령도핵심을 중심으로 한 참다운 사상의리적단결이 투쟁과정에 한층 공고화된것은 이런 믿음의 덕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의 일심단결의 력사적뿌리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탄생과 함께 믿음을 주고 사랑을 주고 덕을 베풀어주는속에서 그 무엇으로써도 깨뜨릴수 없는것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심장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마안산에 있던 그 100여명의 《민생단》혐의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혁명에 충실하였으며 시대와 력사앞에 티 한점 없이 깨끗한 량심과 조국애로 불타는 뜨거운 심장을 고스란히 바쳤다.
그들은 우리 조국의 광복혁명사에 영원히 빛날 고귀한 투쟁사적들을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