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3-6. 국제련합군을 편성하여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3-6. 국제련합군을 편성하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220회 작성일 16-07-20 00:49

본문



6. 국제련합군을 편성하여



578F2C87394D840010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우리 혁명력사에서 그다지 많이 론의되지 않았던 1940년대 전반기 쏘련경내에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뜻깊은 회고를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는 국제련합군의 편성과 그 활동전모를 뚜렷이 밝히는것으로서 력사적의의가 자못 큰것이다.

 

1940년대에 이르러 항일혁명투쟁은 조국광복위업수행에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을수 있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 시기의 투쟁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된것은 우리가 1942년 여름부터 쏘련경내에서 중국, 쏘련의 전우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일제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기 위한 정치군사적준비를 백방으로 강화해나간것이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공동투쟁을 벌린것은 조선혁명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는것이였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우리 혁명은 원래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해방하는것을 당면과업으로 내세웠습니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됨으로써 우리는 조국해방의 위업과 함께 일본군국주의자체를 종국적으로 괴멸시키기 위한 세계사적인 과업을 겸하여 수행하게 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의 편성으로 하여 우리의 무장투쟁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제련합군편성을 분기점으로 하여 우리는 중국인민과의 공동투쟁단계로부터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내용으로 하는 폭넓은 공동투쟁단계에로, 세계 반제, 반파쑈투쟁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는 새로운 공동전선단계에로 넘어갔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결정적인 최후공격작전을 위해 유리한 지대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핵심을 보존육성해가면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수 있는 최종준비를 갖추던 시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1942년 7월에 우리는 쏘련,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나가면서 국제반제력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격멸과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습니다.

쏘련의 외교, 군사 관계문헌들에서 우리가 1942년 여름부터 쏘련에 들어가서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공동군사작전을 준비하였다고 쓰고있는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쏘련원동군의 일부 부대들로 이루어진 국제련합군편성의 력사적필연성과 그 발전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우리가 원동에 림시기지를 정하고 동북지방과 국내에서 적극적인 소부대활동을 벌리던 시기는 국제정세발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던 때입니다.

1941년 4월에 쏘련과 일본사이에는 중립조약이 체결되였습니다.

쏘련과 일본사이에는 로일전쟁 당시부터 력사적으로 형성된 뿌리깊은 모순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모순관계가 쏘일간의 새로운 전쟁으로 번져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즉시적인 충돌을 피하는 방향에서 정치군사외교를 추진시키고있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쏘련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한 세계최악의 호전국가들이였습니다. 쏘련은 반공의 돌격대로 등장한 히틀러독일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해보려고 여러모로 애를 쓰면서 독일과의 있을수 있는 전쟁을 피하든가 최소한 지연이라도 시킬 목적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일본사람들과의 화평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예방하려고 하였습니다. 쏘일중립조약의 체결은 이런 맥락속에 이루어진 일시적인 결과물이였습니다.

이 조약의 목적은 쏘일쌍방이 서로 상대를 견제하자는데 있었습니다. 조약이 체결되였다고 해서 쏘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없었습니다.

1941년 6월에는 쏘독전쟁이 발발되였습니다.

나는 소부대의 전체 성원들을 모아놓고 불가침을 약속했던 독일이 쏘련을 침공했다고 해서 놀랄것은 없다, 히틀러는 처신을 달리할수 없다, 앞에서는 악수를 하고 돌아서서는 불의에 뺨을 때리는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의 본성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산하고있다, 독일이 쏘련을 침공하는것은 히틀러의 무덤을 파는것으로 될것이다, 대세가 어떻게 변하든지간에 우리는 곁눈을 팔지 말고 기존방침대로 최후결전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파쑈독일의 불의적인 선제타격으로 하여 쏘련의 군사력은 전쟁초기에 심대한 손실을 당하였으며 붉은군대는 불리한 사태를 역전시킬 사이도 없이 일시적인 후퇴를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끼예브, 하리꼬브, 민스크를 련이어 함락하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로 육박하였습니다.

그후 나는 쏘독전쟁의 발발로 해서 새롭게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활동방안을 검토한 다음 하바롭스크에 가서 쏘련, 중국의 군사간부들과 함께 앞으로 세 나라 무장력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데 대해 협의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하와이에 있는 미군기지 진주만을 불의에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터쳐놓았습니다.

미일간의 개전은 우리를 크게 흥분시켰습니다. 개전일방인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한 적국이였기때문입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결속짓지 못한 상태에서 또하나의 다른 전쟁을 도발한것은 무모한 도박이였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석유, 고무, 철과 같은 전략물자를 긁어오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섬나라 일본이 무슨 타산을 가지고 그런 모험에 뛰여들었는지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국력을 탕진하게 되리라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였습니다.

어쨌든 일본이 태평양전쟁이라는 큰 함정속에 스스로 뛰여든것은 우리들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최후결전의 시기를 앞당길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셈이였습니다.

우리는 쏘일사이에 조만간 전쟁이 일어나게 되리라는것도 예견하였습니다. 쏘일전쟁이 현실로 된다면 일본은 중국, 미국, 쏘련을 상대로 하는 세 방면에서의 큰 전쟁을 동시에 치르는것으로 됩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만주에 있는 관동군이나 조선주둔군을 상대로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작전을 벌릴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해방을 앞당길수 있겠는가. 우리의 관심은 이 하나의 문제에로 집중되였습니다. 물론 마지막결판을 짓자면 우리자신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팔짱을 끼고앉아서 남들이 독립을 선사해주기를 기다릴수야 없지 않습니까. 우방들의 지원이라는것도 자체의 힘이 강해야 은을 내지 그렇지 않으면 은을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국제반제반파쑈력량과의 련대를 위해서도 응당한 노력을 기울이였습니다. 그 당시 쏘련의 원동은 조, 쏘, 중 세 나라 항일세력의 중요한 집결지로 되고있었습니다. 쏘련과 중국 두 나라 무장력과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기본집단이 동북항일련군의 전우들과 함께 원동의 림시기지에 들락날락하면서 투쟁하고있는 조건에서 중요한 문제로 나서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쏘, 중 두 나라 무장력과의 협동을 잘해나가는것은 우리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것을 확대공고히 하기 위한 국제적환경을 마련하는데서도 반드시 중시하지 않으면 안될 전략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쏘련, 중국 두 나라 무장력과의 협동을 어떤 형태로 실현시키는가 하는것은 매개 나라의 민족적리익과 세 나라 혁명의 공동의 리익에 맞게 우리들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조선인민혁명군의 독자성은 독자성대로 유지하면서 중국의 무장부대들과 함께 동북항일련군을 뭇고 공동투쟁을 해온 경험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조중인민의 공동의 적인 일제를 반대하여 진행한 조중무장력의 공동투쟁은 두 나라 혁명의 리익은 말할것도 없고 항일혁명의 객관적요구에도 완전히 부합되는것이였습니다.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공동투쟁은 쌍무적인 군사관계에서의 하나의 모범이였습니다.

조중 두 나라 무장력이 원동에 또하나의 기지를 가지고있고 또 쏘련원동군이 우리의 익측에 존재하는 조건에서 우리는 공동항일의 폭과 심도를 더욱 넓히고 그것을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이것은 조선혁명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할뿐아니라 중국이나 쏘련의 대일전략과도 일치하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조선, 중국, 쏘련 세 나라 무장력의 리상적인 련합형태를 국제련합군으로 보았습니다. 국제련합군편성과 관련된 나의 구상에 대해서는 김책, 최용건, 안길, 강건을 비롯한 우리 동무들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치하게 그 구상을 빨리 실현하면 할수록 좋다고 하면서 쏘련, 중국 동지들과의 협의를 나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한때 적지 않은 중국동지들은 만주의 항일무장부대들과 쏘련원동군의 일부 력량으로 하나의 새로운 군체계를 창설하고 공동활동을 할데 대한 국제당과 쏘련군사당국의 발기를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대한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쏘련측의 일부 당국자들이 일방적인 요구를 들고나온것과 관련되여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국제련합군편성과 관련된 구상을 무르익히고 그것을 토론에 붙이였을 때 그들은 종래의 립장에서 탈피하여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은 성숙된 문제로 된다고 한결같이 인정하였습니다.

쏘련군사당국도 그 구상을 지지하였습니다.

내가 국제련합군편성문제와 관련된 협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한것은 1942년 봄 쏘련의 고위군사관계자들과 남야영에서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날 국제당과 쏘련군사당국을 대표하여 우리와 련계를 맺고있던 쏘르낀장령은 모스크바방위전의 영웅들에 대하여, 모스크바방어와 반타격전에서 특출한 솜씨를 보인 씨비리사단들의 전공에 대하여 생동하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쏘련원동군의 래력에 대해서도 자랑하였습니다. 원동군과 모스크바방위전에 참가한 씨비리사단들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내가 국제련합군편성과 관련된 구상을 터놓자 쏘르낀장령은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지금 정세가 요구하는 가장 적중한 대안은 국제련합군을 편성하는것이라고 하면서 그 구상에 동감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는 솔직히 말한다면 자기도 사실은 조만간 그런 대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조선동지들이나 중국동지들의 리해와 지지를 받겠는가, 리해와 지지대신 오히려 대국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지나 않겠는가 하는 우려때문에 주춤거렸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어딘가 깊은 속대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력독립은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견지하고있는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적협조나 국제혁명력량과의 련합을 배제하지 않는다, 자기 나라 혁명에도 리롭고 세계혁명에도 리로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제주의야 왜 반대하겠는가, 일본제국주의와 같은 강적을 때려부시자면 힘을 합쳐야 한다, 쏘련과 같은 큰 나라도 다른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면 받아야 한다,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거나 다른 나라의 혁명력량과 련합하여 투쟁하는것은 사대주의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남의 덕을 볼 생각만 하거나 자기 나라 혁명은 다 집어던지고 남의 나라 혁명을 돕는것만이 진정한 국제주의라고 생각하는 사상적경향을 사대주의라고 본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쏘르낀장령은 나와의 담화내용을 쏘련군사당국과 국제당에 그대로 전달하였으며 국제련합군편성과 관련된 문제를 시급한 현안문제로 부상시키였습니다.

쏘독전쟁이 결속될 때까지 미일간의 전쟁이 결속되지 못하면 어떤 형세가 조성되겠는가. 우리의 공통된 관측은 쏘련이 대일전쟁에 참가하게 되리라는것이였습니다. 비록 쏘련이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하기는 했으나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대일참전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습니다. 국제항일력량과의 련합을 실현하는것은 대일전쟁준비에서 쏘련이 추구하고있던 중요한 항목중의 하나였습니다.

국제당이나 쏘련자체의 정치군사적요구와 우리의 전략적구상이 일치됨으로써 국제련합군편성문제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척될수 있었습니다.

1942년 7월중순경에 우리는 쏘련, 중국의 군사간부들과 함께 조, 중, 쏘 무장력의 련합문제를 최종적으로 토의하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독자성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국제련합군을 창설할데 대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942년 7월 22일에 나는 주보중, 장수전과 함께 쏘련원동군사령관 아빠나쎈꼬대장을 만났습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눈매가 예리한 아빠나쎈꼬는 다부진 몸매를 가진 50대의 로숙한 장령이였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조선의 젊은 빨찌산대장을 만나게 되여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령관의 방에서 참모장 니체브중장과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아빠나쎈꼬는 쏘련과 중국, 조선의 혁명무력을 련합하여 국제련합군을 편성하는것은 조선과 중국의 혁명투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쏘련의 안전과 대일작전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고 하면서 국제련합군이 자기앞에 부과된 력사적사명을 훌륭히 수행할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는 국제련합군이 편성되면 조선과 중국의 민족혁명전쟁에 필요한 군사간부들을 많이 양성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것이고 련합군의 조중부대들은 조선과 만주를 해방시키는데서 결정적력량으로 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아빠나쎈꼬는 훈련의 강도와 질을 높여 임의의 시각에 전쟁에 대처할수 있는 만단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거듭 말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큰 작전지도가 걸려있는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아빠나쎈꼬는 우리에게 지난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벌린 유격운동실태와 앞으로의 작전을 위한 구상을 알고싶다고 하면서 만주와 조선의 군사정치정세에 대해 설명해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주보중이 작전지도앞에 나가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의 활동정형에 대해 개괄하고 앞으로 있게 될 동북해방작전과 관련한 자기 견해를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활동정형과 현실태에 대하여, 일제를 격멸하고 조선을 해방하는데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군사정치적문제들에 대해 모를 박아 설명하였습니다.

아빠나쎈꼬는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무력배치, 조선자체의 반일력량의 실태와 그 발전전망, 쏘련과의 련합작전의 실제적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통보해주었습니다.

제3로군의 실태에 대해서는 장수전이 설명하였습니다.

아빠나쎈꼬는 북만일대의 군사정세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고있었습니다.

아빠나쎈꼬와의 협의에 따라 국제련합군에 대한 각종 무기와 군사장비, 피복과 식량을 비롯한 후방물자공급은 쏘련측이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식상 국제련합군을 쏘련원동군 독립88려단으로 부르도록 하고 부대의 대외번호는 8461보병특별려단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은 그 존재와 활동의 비밀을 보장하며 위장을 철저히 하기 위해 축소하여 편성하는 원칙을 세워 려단규모로 조직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1로군 력량으로 편성된 제1지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제1지대는 그 내용으로 볼 때 국제련합군의 조선지대였습니다.

그때 적들의 첩보암해활동으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군사관등급도 실제보다 낮게 상징적인것으로 정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의 편성과 때를 같이하여 우리는 모두 북야영에 집결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됨으로써 원동의 군사정치정세는 국제혁명의 편에 유리하게 전변되였습니다.

우선 쏘련이 그 덕을 적지 않게 보게 되였습니다. 쏘련은 일본의 침략책동에 주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군사정치적력량을 확보하고 중국 동북지방과 조선에서의 군사작전수행에 전적으로 복무하는 새로운 특수부대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의 존재는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에도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원동군과 함께 활동하게 됨으로써 정규무력의 테두리속에서 조국해방작전에 필요한 가장 현대적인 작전수행능력과 장비를 갖출수 있게 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쏘련경내에서 대사변이 도래할 때까지 조국해방의 과업을 자체로 수행할수 있는 충분한 군사정치적준비와 실력을 갖출수 있게 되였습니다.

나는 국제련합군이 편성된후 련합군본부에서 아빠나쎈꼬를 다시 만났습니다. 아빠나쎈꼬는 그때 군사위원을 비롯한 참모부와 정치부, 후방부 일군들을 데리고 북야영에 왔습니다.

국제련합군은 그날 분렬행진을 하였습니다. 분렬행진대오의 맨 앞장에는 조선지대가 서있었습니다. 조선지대가 행진을 잘했습니다. 그날의 행사는 국제련합군의 탄생을 경축하는 일종의 기념의식이라고도 할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빠나쎈꼬와 함께 오찬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아빠나쎈꼬가 자기 경력을 소개한것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는 10월혁명직후에 쏘베트정권을 지키기 위해 백파들과도 싸우고 독일강점군과도 싸운 로투사였습니다. 아빠나쎈꼬는 벌써 공민전쟁시기에 기병사단을 지휘하였으며 중앙아세아군관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원동군사령관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쏘련당국은 일찍부터 원동군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원동군사령관들은 모두 이름난 실력가들이였습니다. 쏘련의 력대 국방상들과 고위군사간부들 가운데는 원동군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아빠나쎈꼬는 1943년초에 쏘독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선의 하나였던 워로네쥬전선 부사령관으로 조동되여갔다가 그해 여름 치명상을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아빠나쎈꼬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련합군의 전체 장병들은 한자리에 모여 조중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고 도와주던 그를 슬픔속에 추모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전우애는 국적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쏘련인민이 당하고있던 국난을 자기 나라의 국난처럼 여겼습니다. 쏘련군대가 전선에서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많은 장병들이 서부전선에 보내달라고 탄원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제당과 쏘련당국은 련합군장병들이 참전을 요구할 때마다 당신들한테는 자기 조국을 해방해야 할 중요한 력사적과제가 있다고 하면서 그 요구를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성새이고 유일한 보루였던 쏘련을 그처럼 열렬히 옹호하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쏘련이 망하면 사회주의도 망하고 세계평화도 고수하지 못한다는것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머리를 지배하고있던 공통된 관념이였습니다.

적지 않은 나라의 인명사전들은 내가 조선사람들로 꾸려진 큰 부대를 이끌고 쓰딸린그라드격전에 참가했고 거기서 공을 세워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고 소개하고있습니다. 어떤 글들은 내가 베를린공격작전에도 제1선부대로 참가하였다고 쓰고있습니다.

나는 쏘련정부로부터 적기훈장은 받았지만 쓰딸린그라드격전이나 베를린공격작전에 참가한 일은 없습니다. 그 사전의 필자들이 어디서 그런 자료들을 입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글들이 참전열로 끓던 훈련기지분위기의 일단을 반영한것만은 사실입니다.

국제련합군의 존재는 조, 쏘, 중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두려워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떨게 하였습니다. 반대로 우리 인민들에게는 큰 신심을 주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쏘련경내에 훈련기지를 정하고 대일최종작전을 준비하신 사실과 관련된 적측의 자료들은 수없이 많다. 아래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김일성의 동정에 관한 건

입쏘중의 김일성은 … 지난해 여름 쏘련 하바롭스크로부터 … 연안에 가서 거기에 있는 중공요인 모택동, 하룡, 강생 등과 회견하고 일쏘개전전후에 있어 중공당군과 항련군과의 합작행동 기타 항련군의 금후에 있어서의 활동 등에 대하여 여러가지 협의를 하고 다시 연안부근에 있는 조선인공산당원과도 회견하고 각종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작년말경에 그곳에서 비행기로 쏘련에 돌아와 목하 쏘련 하바롭스크부근에 있으면서 … 대만선 첩보 및 사상공작에 노력하고있다. 또한 김일성은 하바롭스크부근 야영학교에 조선인, 중국인 공비 기타 입쏘한 선만인불령분자, 피랍치자 등 약 300명을 수용하여 하바롭스크붉은군대…의 지도원조하에 일쏘개전전후에 일제히 만주로 들어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할 임무를 수행할수 있게끔 훈련교육중이라 한다.》[남양경찰서장이 함경북도경찰부장에게 보낸 경찰자료, 소화19년(1944년)2월 21일]

《김일성은 지금 연안에 있으며 열하성에 군대를 들이밀고있다고 한다. 또 니꼴라옙스끼(연해주)에는 순전히 조선사람들로 편성된 4개 사단의 군대가 있으며 일쏘개전의 시기에는 4개 사단의 군대가 결사대로서 북조선지방에 상륙하거나 혹은 락하산을 타고 조선내에 강하할것이다.》[《성대출신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전쟁후방교란 및 무장봉기 불온책동 사건철(4)》고원경찰서, 소화20년(1945년)]

《씨베리아를 횡단해 돌아온 사람이 연설하면서 씨베리아의 어느곳에 주위가 10리나 되는 진지가 있고 거기에 조선기발이 꽂혀있으며 조선인군대가 수비를 서고있는것을 보았다고 말한 모양이다.》[《특고월보》내무성경보국, 소화19년(1944년)2월분 79페지]

 

국제련합군편성소식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싸우고있던 반일애국력량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만주에 있는 동북항일련군의 대원들이 삼삼오오 패를 지어 강을 건너와 련합군에 합세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위만군병사들이 반변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련합군이 조직된 전이였던지 후였던지 요하현 동안진에 있던 위만군련대의 1개 중대가 저들의 지휘관과 일본장교를 처단한 다음 수많은 보총과 기관총, 척탄통 등을 가지고 목선을 타고 우쑤리강을 건너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부대에 편입시켰습니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된후 우리는 전투정치훈련을 강화하면서 대일작전준비를 급속도로 다그쳤습니다.

그 당시 우리앞에 나선 가장 중요한 과업은 조선인민혁명군 대오를 정치군사적으로 더욱 튼튼히 다져나가는것이였습니다.

고대전쟁이건, 중세전쟁이건, 현대전쟁이건 군사작전의 근본원리는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전쟁수단들이 발전하는데 따라 그것을 어떻게 구사하며 각이한 군종, 병종간의 협동과 배합작전을 어떻게 조직해나가는가 하는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전법들을 파악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왔습니다. 이 노력은 국제련합군이 편성된후 배가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현대전법구사능력은 훈련기지에서의 훈련과 학습 과정을 통하여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백두광야에서 련마해온 유격전법들을 더욱 완성하는 한편 정규군의 요구에 맞는 현대전법들을 익혀나감으로써 조선혁명을 담당한 주력군으로서의 정치군사적면모를 훌륭히 갖추어나갔습니다.

쏘련원동군도 국제련합군의 전투능력을 속성으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였습니다.

1942년 11월중순경에 아빠나쎈꼬는 쏘련원동군 남부주둔군의 려단종합군사연습을 조직하고 거기에 련합군의 주요지휘관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하바롭스크에서 장갑렬차를 타고 그 려단으로 갔습니다. 다음날 거기서 려단의 동기종합연습이 진행되였습니다. 그날의 연습에는 4개의 보병대대와 땅크, 포, 박격포, 통신, 반땅크포 대대를 비롯하여 많은 무력이 참가하였습니다. 처음 보는 대규모의 군사연습이였던것만큼 우리도 큰 호기심을 가지고 흥미있게 그 연습을 참관하였습니다.

려단이 맡은 전투임무는 고지의 적을 공격소멸하고 그 고지를 점령하는것이였는데 낮 12시에 시작된 공격이 오후 4시에야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후 하바롭스크교외의 아무르강안에 주둔하고있던 또하나의 려단군사연습도 참관하였습니다.

그날의 연습에서 려단앞에 제기된 임무는 벨리좁까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부대를 집결시키고 전투준비를 완료하는것이였습니다.

그 연습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바롭스크에서 원동군부대들의 열병식도 참관하였습니다. 군사연습과 열병식에 동원된 여러가지 현대적 무장장비들과 전투기술기재들이 대단히 부러웠습니다. 우리도 언제면 저런 현대화된 군대를 가지게 될가. 이것이 군사연습과 열병식을 참관하는 과정에 내가 제일 많이 생각했던 문제입니다. 나라를 해방한 다음 인차 정규군건설부터 해야겠다는 결심은 원동의 훈련기지에 가있을 때 더욱더 확고한것으로 굳어졌습니다.

조, 쏘, 중 세 나라 군사지휘관들의 진지한 노력과 상호협조의 덕으로 국제련합군은 짧은 기간에 현대전에 상응한 무장력으로 급격히 발전할수 있었습니다.

쏘련은 전선형편이 몹시 어려워 하나의 련대나 대대무력이 그리울 때에도 국제련합군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고 련합군이 오직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최후결전을 위해서만 착실히 준비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쏘련의 군사일군들은 쓰딸린이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장병들을 얼마나 아끼는가에 대하여 자주 말해주었습니다. 쓰딸린은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에서 싸운 매개 전사들은 다 장차 자기 조국을 해방하고 새 조국 건설을 해나가는데서 한몫 단단히 할 귀중한 사람들이므로 한명의 손실도 없도록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쏘련 원동지역에서의 국제련합군의 창설과 발전은 구라파에서 체스꼬슬로벤스꼬와 뽈스까의 항쟁력량을 결속하는데서도 좋은 본보기로 되였습니다.

1943년에 쏘련과 체스꼬슬로벤스꼬사이에 친선과 호상협조에 관한 조약이 체결된것과 때를 같이하여 쏘련령토에서는 붉은군대와 함께 히틀러독일을 반대하는 공동투쟁에 참가할것을 목적으로 하는 체스꼬슬로벤스꼬인들의 부대가 조직되였습니다. 체스꼬슬로벤스꼬려단은 끼예브해방전투와 벨라야 쩨르꼬비해방전투를 비롯한 여러차례의 군사작전들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뽈스까도 쏘련령토에서 파쑈독일을 반대하여 싸울 군대를 창건하였습니다. 뽈스까집단군은 루블린해방전투로부터 시작하여 뽈스까땅을 독일파시스트강점자들의 마수에서 해방하기 위한 여러 군사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우리가 쏘련경내에서 국제련합군을 뭇고 활동하던 1943년 5월 국제공산당이 해산되였다는 소식이 훈련기지에 날아왔습니다. 국제당의 해산을 두고 훈련기지에서는 여론이 분분했습니다. 파쑈와의 대결을 위해 국제적인 단결과 협조가 가장 절박한 문제로 나서고있던 2차 대전도중에 어떻게 되여 세계혁명의 령도기관으로 20여년동안이나 존재해온 국제당을 해산하였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레닌이 국제당을 조직한것은 1919년입니다.

국제당이 해산된데는 두가지 리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의 리유는 국제당이 세계혁명을 령도해오는 동안 각국에서 공산주의적정당들과 혁명력량이 충분히 자라나 국제당의 중앙집권적인 령도와 간참이 없이도 자기 나라 혁명을 자신의 로선과 힘에 의거하여 독자적으로 추진시켜나갈수 있게 되였다는것입니다.

국제당이 해산되게 된 다른 하나의 리유는 국제공산당의 존재가 세계적인 범위에서의 보다 폭넓은 반파쑈련합을 실현해나가는데서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되고있었던 사정과도 관련되여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반파쑈련합은 리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는 새로운 양상의 련합이였습니다. 이 련합을 형성하고있는 나라들이 파쑈와의 대결에서 보여준 초리념, 초제도적인 립장은 사회주의국가인 쏘련과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나라들의 련합, 공산주의자와 부르죠아우익정객들과의 합작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은 반제를 리념으로,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목적으로 하고있던 국제당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국제공산당의 해산이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당시 정세발전의 요구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시기적절한 조치로 된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남의 힘이나 로선에 의거하지 않고 혁명의 매 단계에서 전략과 전술도 자체로 채택하고 혁명력량도 자체로 꾸리면서 만사를 자주적으로 개척해온 우리자신의 투쟁로정을 두고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국제당이 해산되였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인 단결과 협조가 무의미한것으로 되는것은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국제련합군의 테두리안에서 활동의 독자성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의연히 국제적인 벗들과의 단결과 협조를 강화해나갔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쏘련경내를 무대로 하여 벌린 군사정치활동은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사로 되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동향과 조직구조, 그 활동내용을 탐지하려는 일본 군부와 경찰, 특무기관의 책동은 참으로 집요한것이였다.

일제는 국제공산당이 해산된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신경을 쓰면서 차후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방침의 추향과 특별하게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활동을 두고 이러저러한 판단과 억측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가 발표한 《국제공산당의 해산과 금후전망》의 한 단락을 아래에 소개한다.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이고 따라서 이번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패전에로 이끌어감으로써 조선이 우선 민족해방, 민족적독립을 획득하는것이 당면한 전략적목표로 될것이며 … 무장투쟁의 임무에 대해 말한다면 … 만주에 있는 공산비 김일성일파 내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있는 조선의용군의 활동과 같은것은 이 방침의 표현으로서…현재의 조선에서의 운동은 일쏘관계의 여하에 따라서 규정되는데 일쏘현상유지의 경우와 정면충돌의 경우에 의하여 국면은 급전하며 후자의 경우 운동이 급속도로 테로화되여가거나 무장투쟁화될것이라는것은 동맹국인 독일의 점령하에 있는 나라들에서의 실례에 비추어보아도 명백한것이다.》[《사상휘보》속간호 131페지, 소화18년(1943년)10월 고등법원 형사국 사상부]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국제당이 존재하거나 해산되였거나에 관계없이 조선에서의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은 조선인민자체의 투쟁으로서 독자성을 띠게 될것이라는것과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무장투쟁이 국제반제력량과 련합하는 경우 매우 큰 힘으로 될것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국제련합군의 조직과 그 강화발전을 위해 기울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심어린 노력은 혁명투쟁에서 매개 나라의 자주성, 독자성과 국제적인 단결과 협조의 두개 원칙을 옳게 결합시킨 모범으로 됩니다.

국제련합군을 조직하고 그것을 강화발전시키는 나날에 얻은 성과와 경험은 일제를 격멸하는 최후결전의 나날에는 물론, 전후 복잡한 정치정세하에서 주체적립장을 가지고 사회주의나라들을 비롯한 국제혁명력량과의 련합전선을 유지하고 확대해나가는데서도 귀중한 밑천으로 되였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