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3-1. 하바롭스크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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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바롭스크회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73(1984)년 여름 쏘련과 동구라파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한 력사적인 공식친선방문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시던 도중 하바롭스크에 들려 하루동안 머무르시였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원동의 훈련기지에서의 생활과 하바롭스크회의를 두고 감회깊은 회상의 말씀을 하시였다.
하바롭스크는 내가 한번 와보고싶었던곳입니다. 요전에는 만주리로 해서 쏘련으로 들어왔기때문에 하바롭스크에 들릴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하싼으로 해서 두만강역을 거쳐 귀국하는것으로 로정을 잡았기때문에 이고장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여기에 와보고싶었는데 수십년 세월이 흘러서야 그 소망을 풀게 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쏘련원동군부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뭇고 공동투쟁을 벌리던 나날에 하바롭스크는 국제당일군들과 조, 쏘, 중 세 나라 공산주의자들, 군대의 지도자들이 서로 만나서 의사소통도 하고 공동투쟁의 방향과 방도도 모색한 중요한 회합장소로 되였습니다.
하바롭스크에는 그 당시 원동군사령부가 있었습니다. 국제당 동양선전부도 한때 여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쏘만국경을 넘어 쏘련경내에 들어선것은 1940년 11월이였습니다.
나는 필요한 수속이 끝난 다음 우리 동무들과 헤여져 쏘련군관의 안내를 받으며 곧추 하바롭스크로 떠났습니다.
달리는 차창밖으로 눈에 덮인 원동의 대지가 내다보였습니다. 나의 눈앞에는 이 땅에서 애국의 피를 뿌리던 수많은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지사들의 군상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많은 렬사들과 우국지사들이 이 땅에서 망국을 통탄하고 국권수복을 부르짖으며 속절없는 와신상담의 길을 걸어왔습니까.
총기를 얻으려고 간 사람, 단체를 무으려고 간 사람, 약소민족의 설음을 하소하려고 피눈물을 뿌리며 간 사람…
산천유람이나 하려고 이 땅을 찾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은 여전히 민족의 과제로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고혼이 되여 잠들고있는 선렬들의 영령앞에 자력독립을 성취하여 그들의 유한을 풀어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로 가는 걸음은 처음부터 내 마음을 퍼그나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참가하는 국제당의 회합인데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국제당이 우리를 회의에 초청한것은 주목할만한 일이였습니다. 그것은 국제당지도부가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그만큼 중시하고있다는 표시로 되기때문입니다.
국제당사람들이 자기네가 소집하는 회합에 조선사람들을 초청하는것은 드문 일이였습니다.
1920년대에 조선공산당 관계자들이 감자도장을 가지고 저마끔씩 국제당으로 찾아다니였지만 그것은 령도권쟁탈을 위한 파벌행각이였지 공산주의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참다운 의미에서의 활동이 아니였습니다. 그런 행각끝에 차례진것이 바로 조선공산당해산이라는 수치스러운 결과였고 1국 1당제에 의한 다른 나라 당에로의 의무적인 전당이였습니다.
국제당지도부가 조선혁명문제를 하나의 독자적인 의제로 삼고 그것을 회의에서 토의한적은 별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공산당이 해산된후부터 조선혁명은 거의나 국제당의 시야밖에 놓여있었습니다. 국제당이 안중에 두는것은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큰 나라들의 혁명이였습니다. 국제당지도부에 앉아있던 일부 사람들은 동북땅에서 싸우는 조선사람들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직접 드는것조차 막았으며 실정에 맞지도 않는 지령들을 연방 내려뜨림으로써 우리 나라 혁명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국제당이 조선혁명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처음으로 공식화한것은 국제당 제7차대회가 있은 때부터입니다.
국제당이 비록 조선혁명에 낯을 적게 돌렸지만 우리는 그와는 무관하게 시종일관 국제당을 지지하였으며 그 업적과 존재가치를 귀중히 여겼습니다.
국제당은 제1차 세계대전후 새로운 정세에 맞게 공산주의운동대렬을 결속하고 그 대렬의 순결성을 보장하는데서 커다란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세계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국제적전위대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여온 국제당의 공헌에 대하여 우리는 응당하게 평가하고있었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의 주인된 긍지와 함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당당한 성원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매진하는 한편 세계혁명발전을 위한 국제당의 지시 집행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에 대한 나의 기대는 자못 컸습니다. 세 나라 무장력대표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공동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론의하게 되는것만큼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회의의 전망에 대해 나는 락관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에 도착하니 눈이 무릎을 치게 쌓여있었고 날씨는 대단히 추웠습니다.
밀림속에서만 싸워온 우리 눈에는 모든것이 다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총성과 략탈도 없고 주림도 없는 평화로운 대통로들, 자유롭게 말을 주고받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시민들의 행복한 모습, 그 모든것은 우리가 리상으로 그려오던 생활이였습니다.
일부 지도책에는 하바롭스크가 합부 또는 백력이라는 지명으로 기입되여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과거에 울라지보스또크를 해삼위라고 불렀습니다. 쌍성자, 연추, 수청, 소성이라는 식으로 불리운 고장들이 원동지방에 적지 않았습니다.
하바롭스크라는 도시이름은 원동개척자의 한사람인 하바로브의 이름을 딴것이라고 합니다. 도시 한복판의 역전광장에는 하바로브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동상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그때만 해도 20여만의 인구가 살고있었습니다.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첫날 숙소에서 서철을 만났고 다음날에 안길을 만났습니다. 서철은 남만성위 위원의 자격으로 회의에 왔고 안길은 제3방면군 참모장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동만과 남만, 북만에서 전장을 누비며 다닐 때는 싸움을 하느라고 자주 상종하지 못했던 전우들을 만나고보니 그 감격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제1로군 군장인 양정우가 희생된데다가 위증민이 병중에 있고 또 방면군군장들인 조아범, 진한장 등이 모두 전사한 조건에서 우리 셋은 조선인민혁명군을 대표하였을뿐아니라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도 동시에 대표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남만에서 활동하는 당조직과 모든 유격부대들의 대표였습니다.
나는 서철과 안길을 통하여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이 11월초에 이미 하바롭스크에 왔고 뒤이어 제3로군 총지휘 장수전과 정치위원 풍중운, 제5군 정치부주임 계청 등도 와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길과 서철은 김책과 최용건도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여 나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보면 동북항일련군의 3개의 로군과 길동, 북만, 남만 성위를 대표하는 일군들이 다 모인셈이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가 열리기전에 나는 국제당대표인 쏘련원동군 장령 류쉔꼬를 만났습니다.
류쉔꼬는 국제당이 하바롭스크에서 만주빨찌산과 쏘련군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게 된 취지와 목적을 설명해주고나서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는 대응책을 함께 잘 세워나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남만성위와 제1로군의 구성, 사업내용에 대한 자료를 묶어줄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의 청탁에 동의하고 안길, 서철과 함께 남만성위와 제1로군의 활동과 관련된 상세한 자료를 작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왕신림앞으로 보낸 1941년 1월 1일 자료입니다.
왕신림은 쏘련원동군 정보부장 류쉔꼬의 가명이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부대들이 쏘련경내에 들어가 활동하던 시기 국제당과 쏘련당, 쏘련원동군을 대표한 인물은 자기를 왕신림으로 행명하였다.
하바롭스크회의가 마감고비에 이르렀을 때 쏘련원동군의 쏘르낀장령이 류쉔꼬가 맡아하던 임무를 넘겨받았는데 그도 역시 왕신림이라는 이름으로 행명하였다.
국제당문헌고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30(1941)년 1월 남만성위(제1로군)대표들의 명의로 작성하여 제출한 자료원문이 있다. 그 원문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왕신림동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1940년 봄과 여름 기간의 사업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제기된 모든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있는 정도에서만 대답하려고 한다. 때문에 이 보고는 항일련군 1로군의 모든 형편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
…
볼쉐비크적인사를 보낸다.
김일성
안 길
서 철
1941년 1월 1일》
나는 회의가 열리기전에 김책, 최용건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오래간만에 주보중과도 다시 만났습니다.
안길과 서철은 회의를 마치고 하바롭스크를 떠날 때까지 나와 한숙소에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침식을 잊고 회포를 나누던 일, 혁명의 장래운명과 관련된 문제들을 론의하던 일들이 어제 같습니다.
이미 1940년 1월말에 하바롭스크에서는 국제당이 소집한 만주빨찌산지휘관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제1로군의 대표들은 참가하지 않고 주보중, 장수전, 풍중운을 비롯한 제2로군과 제3로군의 대표들만 모여서 진행한 회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동북유격운동의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고 정세의 분석에 기초한 차후투쟁방침을 확정한 다음 쏘련원동군과의 련계를 이룩하고 호상 협조할데 대한 문제를 협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통일적보조를 맞출데 대한 문제들에서 필요한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과에 기초하여 1940년 3월중순경에 호상 련계와 협조를 강화하기 위한 동북항일련군측과 쏘련군사당국이 참가하는 협의회가 다시 열리게 되였습니다. 여기에는 동북항일련군 제2, 3로군 대표들과 원동군사령관대리, 하바롭스크와 워로쉴로브 주둔군의 책임자들 그리고 류쉔꼬 등이 참가하였습니다.
이 협의회에서 항일련군측은 국제당과 쏘련군이 동북항일련군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쏘련측은 동북항일련군부대들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줄것을 상대측에 요구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주둔군 사령관은 동북항일련군 무장부대들을 중국공산당 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것이 어떤가, 그렇게 되면 동북의 유격부대들에 대한 쏘련의 지원이 보다 쉽게 이루어질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쏘련측의 이런 태도로 하여 협의회에서는 큰 론난이 빚어지게 되였으며 동북항일련군과 쏘련원동군사당국과의 호상 지지와 협조의 형식과 내용 문제는 초보적인 합의를 보는데 그치고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그후에 열린 하바롭스크회의에서 다시 론의되게 되였습니다.
우리가 참가한 흔히 말하는 1941년의 하바롭스크회의는 1940년 12월에 소집되여 1941년 3월중순까지 계속되였는데 비밀사업을 하는 군대병영에서 진행되였습니다. 병영주변에는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회의장은 어느 공작원이 리용하던 아지트였습니다.
회의 첫 단계에서는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 각 성위의 책임일군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조건에서 각 로군과 성위간의 련계와 국제당 및 쏘련과의 관계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한 대책적문제를 놓고 여러날 진지하게 협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1941년 1월초부터 국제당 및 쏘련의 당국자들과 함께 만주에서의 항일유격운동의 장래문제와 쏘련원동군사당국과의 호상 지지와 협조의 내용과 방식 문제를 기본으로 협의하였습니다.
국제당과 쏘련측을 대표해서는 류쉔꼬장령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참석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는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권문제를 둘러싼 쏘련군측과 항일련군측의 상반되는 립장으로 하여 처음부터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습니다.
회의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든 다른 리유의 하나는 중국공산당 대표가 참석 못한것과 관련된 항일련군측 지휘관들의 불만이였습니다.
원래 쏘련측은 국제당의 명의로 하바롭스크회의를 소집하면서 길동과 북만 성위에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도 대표가 참가하게 된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중공중앙대표는 하바롭스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중앙과의 련계회복을 목마르게 기다려온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간부들은 적지 않게 실망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하바롭스크회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참가하게 된데는 중공중앙대표와의 상봉에 대한 기대가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중공중앙대표가 하바롭스크에 왜 오지 않았는지 그것은 우리도 잘 알수 없었습니다. 쏘련당국이 중공중앙에 회의소집과 관련된 통지를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통지는 했는데 련락이 채닿지 못했는지, 사유는 어떻든지간에 중공중앙대표가 오지 않은것은 항일련군 일부 대표들의 의혹을 샀고 그들로 하여금 쏘련이 국제당의 명의로 소집한 회의의 취지자체를 미타하게 생각하게 하였으며 초기 회의사업에 일부 그늘을 던지였습니다.
회의는 좌담회형식으로 진행되였는데 보고라는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의 각 로군 대표들이 자기 사업정형을 통보하는 형식으로 상정된 문제의 협의에 필요한 인식과 리해를 서로 촉진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제1로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정형에 대하여 통보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형편에서는 동북항일련군의 군사정치활동에 대하여 종합적인 보고를 제출할수가 없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항일련군의 활동에 대해 중앙집권적이며 통일적인 지도를 하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조상지나 주보중과 같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형식으로 당중앙과의 련계를 모색하고 또 독자적인 동북당조직도 구상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하였고 서로 병립된 북만성위나 길동성위, 남만성위가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형편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동북항일련군도 로군별로 제각기 활동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동북혁명을 통채로 장악하고 지도한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수십만의 일본군이 만주를 강점하고있는 조건에서 중국당이 관내에 앉아 동북사람들의 당, 군사 활동을 지도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에서 론의된 중심의제는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래활동방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결국 조선과 동북에서의 유격투쟁과 쏘련군대와의 호상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그것을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어떻게 적응시키고 강화발전시켜나가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쏘련측은 독일, 일본, 이딸리아를 비롯한 파쑈세력이 방공련합을 형성하고있고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 확대되고있는 조건에서 련합한 파쑈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공동투쟁을 강화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실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동북항일련군이 독자성을 포기하고 쏘련군과 통합하는것이 어떤가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조치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원칙에도 부합되고 동북혁명에도 리로울것이라고 력설하였습니다. 그 문제는 사실상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관들이 그 전해 회의에서 제일 완강하게 반대하던 문제였습니다.
한해사이에 세계정치정세와 원동의 군사정세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련이어 일어났습니다. 쏘련의 제의는 이런 정세의 흐름을 반영한것이였습니다.
그 당시 쏘련은 서부국경쪽으로 질풍같이 육박해오는 독일과의 충돌을 거의 불가피한것으로 보았습니다. 독일이 서쪽에서 쳐들어올 때 일본군이 동쪽에서 쳐들어오게 된다면 그것은 야단이였습니다.
쏘련사람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어떻게 해서나 동서협격을 피해보려고 하였습니다. 쏘련이 제출한 협동안을 보면 정세의 긴박성으로부터 오는 그들의 초조한 심리상태를 충분히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큰 땅덩어리의 한쪽은 구라파에 속해있고 다른 한쪽은 아세아의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있는 쏘련으로서는 그 넓은 국경선의 한쪽만을 지킨다거나 어느 한쪽의 적을 막을수 있는 능력만 갖추는것으로 국가방위의 완벽을 기할수 없었습니다.
쏘련은 국가건립의 초기부터 구라파와 아세아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적을 다같이 격파할수 있게 준비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국방에 큰 힘을 넣어왔습니다. 쏘련사람들은 이와 같은 국방원리와 대일, 대중 관계를 고려하여 처음부터 원동을 독립적인 군사단위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1차 5개년계획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쏘련의 구라파지역을 추켜세우는데 모를 박은것으로서 그 덕이 원동의 군력을 강화하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쏘련사람들로 하여금 원동의 군사력을 급격히 확대보충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로 된것은 1931년의 9.18사변이였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만주침공에서 큰 충격을 받고 늘 일본이 자기 무력을 원동에까지 진출시키지 않겠는가 하고 걱정하였습니다.
9.18사변이전의 원동무력은 5만의 보병과 100대의 비행기, 30대의 땅크를 가지고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쏘련은 일제가 9.18사변을 도발한후부터 원동무력을 2배, 3배, 4배로 늘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쏘련의 불가침조약체결제의를 거부한후부터는 중폭격기, 신형땅크, 잠수함 등을 원동에 배비하는것으로 일본의 침략위협에 대처하였습니다. 1936년에 몽골과 체결한 쏘몽협정도 그 목적은 일본을 견제하자는데 있었습니다. 쏘련이 원동에서 무력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한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이 련이어 발생하여 동쪽국경의 안전이 엄중한 위협을 받은후부터입니다.
동북항일련군을 쏘련원동군 직속부대로 만들데 대한 쏘련측의 제안은 한해전에 들고나왔던 주장의 재판으로 해석되고 지어는 쏘련이 자기의 정치군사적리익만을 앞세우면서 동북항일운동을 거기에 종속시키려 한다는 비난까지 야기시키였습니다.
그 당시 원동에 조성된 정세를 참작해볼 때 쏘련의 제안에는 리해할만한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독일과 일본에 의한 동서협격의 위험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가까운 현실로 눈앞에 다가오고있었습니다.
쏘련은 자기 나라의 동쪽에서 포성이 울리는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일본은 만주에 있는 항일무장부대들이 마치 쏘련의 사촉과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것처럼 선전하면서 쏘련으로 침공하기 위한 구실을 어떻게 하나 마련해보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습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쏘련은 원동의 방위를 강화하는 한편 필요한 외교적방법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일본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 당시 쏘련에는 독일과 일본의 침공에 공동으로 맞설수 있는 동맹자가 없었습니다. 쏘련은 구라파에서 증대되는 전쟁의 위험을 막아보려고 집단안전체계창설을 추구하였으나 서방제국주의자들의 책동으로 하여 실현할수 없었습니다. 동방에도 쏘련을 무력으로 도와줄수 있는 동맹국은 없었습니다.
중국이 일본과 싸우고있었지만 그것은 쏘련의 지원을 받는 존재였지 쏘련을 지원할수 있는 동맹자는 못되였습니다. 나라의 동쪽만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쏘련으로서는 동쪽에서 일본에 무력침공의 구실을 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쏘련이 원동군과 동북항일련군을 하나로 합치는 군사체계의 창설을 제안하게 된것은 한편으로는 일본에 쏘련침공의 구실을 주지 말자는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작전이 벌어지게 될 경우 원동군과 협동할수 있는 동맹자를 얻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봅니다.
동북항일련군과 쏘련원동군의 통합문제를 두고 회의장안팎에서는 격렬한 론의가 벌어졌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관들은 쏘련원동군의 우산밑에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있었습니다. 10여년동안 풍찬로숙하면서 혈전을 벌려왔는데 통합은 무슨 통합인가, 절대로 동북혁명을 포기할수 없다, 쏘련측은 남의 사정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기네 생각만 한다, 그들의 립장은 매개 나라 혁명의 독자성을 존중할데 대한 혁명적원칙을 무시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쓰딸린이나 지미뜨로브에게까지 제기하여 풀어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쓰딸린과 지미뜨로브도 동북항일련군측의 이러한 립장을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문제와 관련하여 류쉔꼬는 쏘르낀과 교체되였습니다.
그때 쏘련측은 통합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견해를 몹시 알고싶어하였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쏘련측의 제안이 민족리기주의로부터 출발한 제안이 아니라는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척 애썼습니다. 그들의 말에서는 쏘련이 건재하고 쏘련혁명이 잘되여야 중국혁명이나 조선혁명도 잘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풍기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제출한 제안은 일리있는 제안이다, 우리는 그런 제안을 내놓게 된 당신들의 형편을 리해한다, 그러나 그 요구는 아직은 일방적이고 시기상조라고 생각된다, 일본군이 쏘련침공의 기회를 노리는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전쟁이 당장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승리한 나라의 혁명을 보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승리하지 못한 나라의 혁명을 추진시키는것도 그만 못지 않게 중요하다, 당신들은 동북항일유격운동을 경시하는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쏘련측은 나더러 어떤 형태의 통합도 다 반대하는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다, 쌍방에 다 리로운 련합과 협동방식이야 왜 반대하겠는가, 내가 반대하는것은 어느 일방이 타방을 무시하거나 타방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한 통합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동지들과 함께 항일련군을 뭇고 공동투쟁을 하면서도 자기의 독자성을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그러니 공동투쟁을 해도 말썽이 없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항일련군에 용해시키는것도 반대하지만 쏘련군대에 배속시키자는것도 반대한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무시하는것으로 될것이기때문이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그리고 쏘련원동군과의 공동투쟁을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진행하겠는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문제는 앞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공동투쟁의 형식과 방법이 쏘련에도 도움이 되여야 하겠지만 조선혁명이나 중국혁명의 리익에도 다같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쏘련측은 내 말을 주의깊게 듣고나서 당신은 공회전을 거듭하고있는 우리의 론쟁에 종지부를 찍고 회의를 결속할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우리는 오늘 당신의 말에서 아주 좋은 시사를 받았다, 독자성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그렇게 결심했다면 좋다, 일방적인 주장은 그만두고 회의를 시급히 결속짓자, 빨리 전장에 달려가서 소부대활동도 하고 조직건설사업도 하고 인민들과의 사업도 해야겠는데 시간이 아깝다, 공산주의자들이 한가지 의제를 가지고 질질 끌면서 입씨름을 한다는것은 말이 안된다, 각자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정신에 기초하여 리성적인 사고를 한다면 무엇을 해결하지 못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주보중과 장수전도 나에게 제기된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어왔습니다.
나는 각자의 독자성만 인정해준다면 여러 무장력의 국제적인 련합을 반대하지 않겠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련합인가 하는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좀더 연구해보아야 한다, 쏘련측의 제안이 일방적인것이기는 하지만 씨앗은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배척하지 말자, 우리가 다같이 동지적이고 사심없는 태도로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를 최대한으로 발양하여 공동의 리익에 맞게 문제토의를 빨리 끝내도록 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회의에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회의과정에 발현된 우리의 원칙적인 립장은 조선, 쏘련, 중국 세 나라 혁명무장력사이의 단결과 협조를 실현하는데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에서는 혁명력량을 보존축적하며 대규모적인 유격투쟁으로부터 소부대활동에로 이행할데 대한 우리의 전략적방침이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부합되는 정확한 방침이라는것을 확인하고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부대들이 력량보존에 중점을 두고 소부대활동을 벌릴데 대해 진지하게 협의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이틀쯤 회의를 하였습니다. 비교적 순조롭게 견해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협의에서도 반론이 전혀 없은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규모유격투쟁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는것을 혁명에서의 후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대부대활동도 성차지 않은데 소부대활동이나 해가지고서야 어느 세월에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겠는가, 관내동지들이 대부대로 움직이면서 판을 큼직큼직하게 벌리고있을 때 항일을 먼저 시작한 동북사람들이 소부대로 활동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대활동을 해야 체면이 서고 소부대활동을 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것처럼 생각하는것은 잘못이였습니다.
나는 소부대활동방침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서도 회의장안팎에서 쏘련, 중국의 전우들과 함께 많은 론의를 벌리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소할바령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력량을 보존축적하기 위하여 소부대작전으로 이행할데 대한 방침을 채택했고 소부대분산활동을 성과적으로 벌려온 경험도 가지고있는것만큼 쏘, 중 두 나라 사람들은 나의 주장에 상당한 관심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정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우리의 손실도 적지 않다, 혁명의 오늘뿐아니라 래일을 위해서도 력량보존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일제를 쉽게 패망시킬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일제를 패망시키고 조국을 해방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도, 동북항일련군도 력량을 보존하고 확대해나가야 한다, 소부대활동을 하게 되면 전민항쟁을 위한 조직건설도 활발히 벌릴수 있고 식량도 쉽게 구할수 있다, 그리고 활동을 하기에도 편리하다, 우리가 지난해 여름부터 소부대활동을 해보았는데 결과가 대단히 좋았다, 해볼만한 일이다, 대부대활동은 필요한 때 벌려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소부대활동을 퇴보로 보는 사람들에게 소부대활동을 하는것이 정당하다고 어지간히 말해서는 잘 먹어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세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조선과 만주의 정세, 쏘련정세를 가지고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는것이 정당하다는것을 론증하였습니다. 정세토론을 하는 과정에 의견상이가 기본적으로 해소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정세토론을 진지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회의를 많이 하였지만 하바롭스크회의때만큼 정세토론을 장시간 진지하게 한적은 없었을것입니다.
나는 대부대활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국제당의 요구도 대부대활동을 삼가해달라는것이다, 그 요구속에는 쏘련을 옹호하고 쏘련혁명의 전취물을 보호하려는 각국 공산주의자들의 지향과 결의도 담겨있다, 대규모유격전이 쏘련의 안전에 불리한 영향을 준다면 응당 그것을 고려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쏘련측대표한테는 당신들이 우리를 무턱대고 여기에 비끄러매두려고 해서는 안된다, 력량을 보존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있으면 혁명을 전진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소부대를 무어가지고 국내와 동북지방에서 정치군사활동을 계속 활발히 벌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주장에 모두가 공감을 표시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쏘련사람들은 우리가 원동에 틀고앉아 훈련이나 하고 소소한 군사정찰활동이나 하면서 무난하게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일본에 쏘련을 침공할수 있는 언질을 주지 않는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을 그렇게 소극적으로 할수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정도의 활동으로 시간을 어물어물 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위도식이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론의끝에 앞으로의 활동에서 기본은 소부대활동, 군중공작, 조직건설, 실력배양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할바령회의에서 토의결정한 방침과 일치하는것이였습니다.
쏘련측은 회의에서 자기 나라 경내에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기지를 마련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마련해주는 장소를 또하나의 림시기지로 삼고 조선과 만주의 넓은 판도에서 소부대활동을 벌리기로 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쏘련은 원동지역에 2개의 기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하나는 워로쉴로브근처에 있는 남야영이였고 다른 하나는 하바롭스크부근에 설치된 북야영이였습니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남야영을 차지하였습니다.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5군의 일부 력량도 남야영에 함께 있었습니다. 북야영은 제2로군과 제3로군이 쓰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으로서 남야영을 책임지고 활동하였으며 얼마후에는 조선인민혁명군과 1로군에서 온 일부 력량을 하나로 묶어 제1지대를 조직하고 그 지대장으로 있으면서 소부대활동을 적극화할 대책을 세워나갔습니다.
우리가 원동에 새로운 림시기지를 꾸린 다음 국내와 만주일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소부대활동을 활발히 벌려나가게 된것은 항일무장투쟁력사에서 하나의 전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잠정적인 조치였지만 앞으로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수 있는 중요한 첫걸음으로 되였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는 시기적절하며 적극적인 대응책을 제때에 세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하지도 못했을것이며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이룩하지도 못하였을것입니다.
혁명을 하느라면 시련도 있고 역경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혁명에는 퇴조기도 없었고 소강기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앞에서 동요한적도 없었고 슬픔앞에서 주저앉은적도 없었으며 적의 공격앞에서 피동에 빠진적도 없었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가 역경앞에서 주저앉았거나 피동에 빠졌더라면 적들은 우리 혁명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버렸을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굴하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는다는 의지와 배짱을 가지고 언제나 화를 복으로,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군하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는 소할바령회의와 함께 우리 혁명의 새로운 전환기를 열어놓은 하나의 계기로 되였습니다. 소할바령회의와 하바롭스크회의는 1940년대 전반기 항일무장투쟁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해주고 조선혁명가들이 조국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면서 다가올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수 있게 해준 중요한 회합이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후 우리는 원동의 림시기지에서 군정훈련도 하면서 백두산을 비롯한 국내 여러곳에 튼튼히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를 거점으로 삼고 국내 무장투쟁과 혁명운동을 다같이 힘있게 밀고나감으로써 조국해방의 새날을 앞당기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새로운 로선과 전략전술을 제시하시고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을 벌리고계실 때 일만군경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책동하였다.
아래의 자료들은 적들의 당황상을 잘 보여준다.
《현재 쏘련의 령도하에 만주에 대한 책모를 행하고있는 조선공산당의 요소는 구 제1, 제2, 제3로군의 나머지세력으로서 그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것은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쏘련 붉은군대의 직속산하에 있는 오께안스까야야영소계통 군사책임자의 지위에 있다.》[《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 소화19년(1944년)]
《김일성, 최현, 안상길, 채세영 등 유력비단은 본년초두까지 전부 쏘련에 들어가 워로쉴로브에서 각종 훈련을 받고 4월이래 새로운 편성과 새로운 방침밑에 차례로 만주로 들어오고있다.》목단강 령사대리 후루야의 보고, [소화16년(1941년)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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