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15-2. 국내당공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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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당공작위원회
우리자체의 독자적인 공산당을 가지는것은 조선혁명가들의 일관한 념원이였고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면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내세웠던 가장 중요한 전략적과업의 하나였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 혁명투쟁의 실천속에서 단련육성된 우수한 전위투사들로 당의 기층조직들을 확대강화해나가는 자주적인 당건설방침을 관철하도록 하였다.
항일혁명의 주력을 담당했던 조선인민혁명군은 당창건의 조직사상적준비를 책임진 당건설의 주도적력량으로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의 령도적기능과 역할이 높아지는 가운데 활발히 조직전개된 당건설사업은 무장투쟁을 정치적으로 강력히 뒤받침하는 한편 그에 대한 당적령도와 대중적지반을 강화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가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였다.
항일무장투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있는 공산주의적전위투사들에 의하여 추진된 당조직건설사업은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당당한 주류를 이루었으며 확고한 정통성을 대표하게 되였다.
우리의 당건설사업은 처음부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힘들게 진척되였다. 그것은 우리 혁명의 특수한 사정과 그로부터 생기는 여러가지 난관과 관련되여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의 당을 가지기 위한 투쟁로정에서 남달리 비싼 대가를 치르며 남이 곧추 가는 길을 멀리 에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고심참담한 진통을 겪어야 하였다. 우리는 식민지나라의 항쟁투사들이 당을 창건하는데서 일반적으로 다 겪게 되는 보편적인 난관과 함께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였던 특수한 조건으로 하여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체험하지 못한 시련과 고충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미 서술한바와 같이 국제당은 1928년에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그것을 재조직할것을 지령하였으며 1국1당제원칙에 따라 만주와 일본에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재국의 당에 들어갈것을 요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반드시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대세에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다른 나라 당에 들어가 좋은 때가 오기를 고대하는 수동적인 길을 택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국제당의 주관주의적인 처사에 불만을 가지고 그에 역행하여 주재국의 당에 당적을 옮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동안 종전대로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타성에 의해서만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이런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죄다 주저앉았다.
공산주의자들이 필요에 따라 다른 나라의 당에 적을 림시로 두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다. 공산주의운동은 민족적인 운동인 동시에 계급적인 련대를 전제로 하는 국제적인 운동인것만큼 그 운동을 담당한 투사들이 국적을 초월하여 일시 다른 나라의 당조직에 망라되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이상할것이 없다.
국제당본부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거기에 가있던 여러 나라의 적지 않은 공산당지도자들과 정치망명객들은 자기 나라의 당적은 당적대로 가지고있으면서도 모두가 쏘련공산당조직에 림시로 이름을 등록하고 당생활을 하였다.
문제는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서 모체조직을 거세해버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구차스러운 곁방살이를 하지 않을수 없는 굴욕적인 처지에 떨어지게 한데 있다.
바로 그런 리유로 하여 우리는 처음부터 국제당의 처사를 온당하게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 엇나가거나 운동 그자체를 줴버리는것과 같은 자포자기적행위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당이 취한 조치를 일시적인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자체의 주동적노력으로 새형의 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꾸준하게 투쟁하였다.
우선 국제당에서 내놓은 원칙이 용납하는 테두리안에서 우리 혁명의 구체적실정에 맞는 방도들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독자적인 당을 내오기 위한 준비를 추진시켜나갔다. 《ㅌ.ㄷ》의 전위투사들을 망라한 건설동지사의 조직은 그 시발점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동만이나 북만땅에서 활동하던 193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당건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국내깊이에는 얼마 미치지 못하였다.
물론 그 시기에 벌써 우리는 온성, 종성 등 두만강연안의 국내 여러곳에 몇개의 기층당조직을 꾸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당조직건설을 위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활동판도는 아직은 동만이였다.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튼튼히 꾸리는데 주력하면서 간도 각 현의 당조직들과의 밀접한 련계속에서 우리 당조직을 확대해나갔으며 앞으로 국내에 당조직을 대대적으로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핵심들을 육성하였다.
우리가 남호두회의 정신에 따라 당건설방침을 심화시키고 그 방침의 실현을 위한 대책적문제들을 토의한것은 1936년 5월의 동강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는 국내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틀을 본격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과업이 상정되고 그 대책으로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혁명투쟁의 골간들로 전위적인 당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문제가 협의되였다.
그때 동강회의에서는 당조직건설사업은 유격대에 국한시켜도 안되고 동북일대만을 무대로 삼아도 안되며 국내깊이까지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초를 쌓아나가야 한다는것, 지금까지는 두만강대안 국경연선의 일부 지역들에만 기층당조직을 내왔으나 이제부터는 국내의 광활한 지대에 당조직들을 꾸려나가야 하며 국내에서의 당창건준비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서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내와야 한다는 문제들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였다.
국내당공작위원회를 내오는 문제는 전국적범위에서 벌어지게 될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대한 당적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서도 절실히 필요한것이였다.
이처럼 중대한 사명을 띠고있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실정에 맞게 잘 꾸리자면 반드시 조선실정을 환히 꿰들고있는 국내공산주의자들과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을 해야 하였다.
박달이 우리 밀영으로 찾아온것은 이런 의견교환을 할수 있는 좋은 계기로 되였다. 당조직건설, 이것은 나와 박달과의 담화에서 론의된 중심주제의 하나였다.
조국광복회문제에 대한 론의가 끝난 다음 나는 박달과 함께 국내에 당조직을 꾸릴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반나절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달은 내가 국내에 조국광복회조직만이 아니라 공산당조직도 내올 의사를 표명하자 무척 놀라면서 어떤 공산당조직인가고 물었다.
나는 그 물음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였다.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 당을 재건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거기에 바쳐진 투사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열정이 철창속의 서글픈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나라, 이미 오래전에 결사의 자유가 법으로 금지되여있는 나라에 공산당조직을 내오려고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박달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오히려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것 같았다.
내가 우리의 공산당, 조선의 공산당조직을 내오려 한다고 대답하자 그는 재차 물었다.
《조선에 공산당조직을 내오는데 대하여 국제당은 어떻게 생각하고있습니까? 말하자면 국제당이 그것을 승인하였는지요?》
《그건 우리들끼리 하는 일인데 국제당의 승인이고 뭐고 상관할게 있습니까? 국내에 우리 당조직을 내오는 문제를 가지고 반드시 국제당의 승인을 받아야 할 까닭이야 없지 않습니까.》
박달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각 나라의 공산당은 다 국제공산당의 지부로서 그의 지도와 통제를 받도록 되여있는데 우리가 국제당의 승인도 받지 않고 어떻게 함부로 자기 당조직을 내올수 있겠습니까? 제멋대로 그렇게 하는걸 국제당에서 허용할가요?》
박달은 확실히 교조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혁명이란 워낙 자기가 하고싶어서 하는 일이지 그 누구의 지령이나 승인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 좀 물어봅시다. 박달동무는 그 누가 시켜서 혁명을 시작했습니까? 또 그 누구의 승인을 받아가지고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냈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맑스가 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할 때는 누구의 승인을 받았습니까? 또 레닌이 볼쉐비크당을 조직할 때는?…》
말문이 막혀버린 박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맑스나 레닌은 누구의 승인도 받지 않고 당을 만들었는데 우리가 그럴수 없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국제당은 이미 1928년 12월테제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 당재건의 과업을 제시하였습니다. 테제에 명시된대로 국내에 우리 당조직을 내오려고 하는데 누가 감히 그걸 시비하겠습니까. 국제당도 시비할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승인이고 비준이고 하는 문제자체가 설정될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집안일을 우리 집안사람들끼리 처리하면 되는것인데 괜히 바깥사람들에게 우리 집일을 어떻게 하라느냐고 물을 필요야 있습니까? 조선혁명의 주인이야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닙니까.》
박달은 그제야 자기 생각이 너무나 짧았다고 하면서 우리의 립장과 제안을 적극 찬성해나섰다.
《전 정말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자신이 조선혁명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국제당이 각국 혁명을 좌지우지하는줄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장군님, 국내에 당조직을 꾸리게 되면 그 당조직은 어디에 소속됩니까? 그리고 지도는 어디에서 받게 됩니까?》
《국내의 당조직들은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에 소속되고 또 그 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될것입니다. 조선에 공산당이 없는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서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는 조선혁명전반에 대한 령도적기능을 담당한 참모부의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우리 당위원회의 활동은 무력에 의해 튼튼히 보호되고있습니다. 일제의 야만적인 헌병경찰통치는 조선에서 당재건의 모든 가능성을 박탈해버리였습니다. 당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투사들의 대부분이 지금 철창속에 갇혀있습니다. 적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은것은 오직 무력의 담보를 받고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뿐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가 조선혁명전반에 대한 령도적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리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가 조선혁명의 참모부적역할을 감당하게 된것은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발전의 필연적귀결입니다. 력사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명을 수행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앞으로 조직되게 될 국내당공작위원회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적보호를 받게 될것입니다.》
《이제는 더 물어볼것이 없습니다.》
박달은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우리는 곧 국내당공작위원회조직과 관련된 실무문제토의에로 넘어갔다.
이 토의에서도 박달은 질문부터 하였다. 그는 언제나 질문을 앞세우고 론쟁마당에 뛰여드는것 같았다.
《지금 국내에서는 당을 먼저 건설하는가,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는가 하는 문제가 한창 론의되고있습니다. 함흥패는 당건설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있고 단천패나 홍원패는 군중단체를 먼저 내온 다음 실지투쟁을 통해서만 당을 내올수 있다고 고집하고있습니다.》
《박달동무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나는 아무 견해도 없습니다. 상식으로 보면 당을 먼저 내와야 할것 같기도 한데… 그것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박달은 그런 론의가 생겨나게 된 연원을 국제당의 12월테제에서 찾고있었다. 그 테제의 원명은 《조선의 농민 및 로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이다. 국제당은 그 문건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로동자, 농민단체들속에서 사업을 활발히 벌리며 신간회를 비롯하여 신구민족해방단체안에서 투사들을 획득하기에 힘쓸것과 당의 사상적단결을 중시하는데 모든 주의를 집중하며 하루빨리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고 강화발전시킬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그 테제가 마치도 당건설과 군중단체의 조직을 동시에 제기하고있는것처럼 받아들인데로부터 인식상 혼란을 빚어내게 되였다.
《내가 보건대 그것은 론의의 대상이 될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후차를 결정하는거야 구체적인 조건과 실정이지 여기에 12월테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조건에 따라 당조직을 먼저 내올만 한 곳에서는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군중단체를 먼저 내올만 한 곳에서는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단 3명이라도 있다면 그 3명만으로도 당장 공산당소조를 무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한명도 없다면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고 거기서 공산주의자들을 키워낸 다음 당조직을 꾸릴수 있습니다. 물론 당과 군중단체라는 이 량자는 서로 련결되여있기때문에 인위적으로 분리해서 고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후차가 어떻게 되든지간에 공산주의자들은 군중속에서 당의 후비대를 육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원자격을 갖춘 전위투사들만 있으면 당조직은 아무때든지 내올수 있습니다.》
박달은 내가 내오려고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가 장차 어떤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 국내당공작위원회는 국내에서 혁명투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국내당조직건설을 맡아보게 될 지역적지도기관이다. 통일적령도기능을 수행하는 참모부가 없는것으로 하여 국내운동은 지금 분산성과 자연발생성이라는 두가지의 치명적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있다. 국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을 하나의 력량으로 결속하며 그들사이에 직접적인 련계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서는 그것을 맡아 수행할만 한 지도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지도기관이 바로 국내당공작위원회다. 앞으로 이런 위원회가 조직되면 우리는 여기에 박달동무를 망라시키려고 한다. 박달동무는 이런 위원회가 파견하는 국내전권대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것이다. 우리가 직접 국내각지에 널려있는 투사들을 일일이 다 만나보았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그럴 시간이 없다. 내 생각에는 박달동무가 이제 돌아가서 우선 함남북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운동자들을 만나보고 그들을 국내당조직에 묶어세우기 위한 준비를 추진하였으면 한다.…
박달은 내 말을 듣자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말 과분한 믿음이올시다. 제가 그럴만한 재목이 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미흡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박달의 솔직한 고백은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을 더욱더 굳혀주었다.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였다.
박달은 국내에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에 기초하여 장차 당중앙기관을 조직하며 당창건을 선포할데 대한 우리의 방법론을 지지하였다.
박달은 그 회의후 국내운동가들의 사업방법에서 지적할 점이 있거나 참고로 될만 한 요령이 있으면 죄다 이야기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무엇보다 망명객식의 사업방법을 퇴치해야 할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지금 국내동무들의 활동을 보면 망명객식방법으로 일하고있는데 이것은 백해무익한 방법입니다.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 가만히 내려와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조직원들은 놈들의 감시가 두려워 그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망명객식방법으로는 조직을 확대할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적후지하활동을 하는 동무들이 생산에 참가하면서 합법적인 활동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얻어야 합니다. 망명객식사업방법을 즉시 버려야 합니다.》
박달은 내 말을 듣고나서 얼굴을 붉히였다.
《나도 사실은 망명객식방법으로 사업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면충돌만 생각하였지 때에 따라서는 우회적인 방법도 적용해야 한다는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공식적인 담화를 떠나서 잠시 한담을 하였다.
나는 그에게 모두가 깃또구두를 신고 하이칼라를 하고 개화장을 짚고 현대인행세를 하며 다니는 때에 어떻게 되여 구습을 싫어하는 박달동무가 중머리를 하고 다니는지 그 까닭을 말해줄수 없는가고 물었다.
박달은 로조운동을 할 때 경찰서에 붙들려가면 순사놈들이 머리칼을 움켜잡고 담벽에 머리를 찧어대군 하기때문에 화가 동해서 아예 《벌초》해버렸노라고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박달의 그 《벌초》가 아주 기지있는 처사로 느껴졌다. 박달은 내가 요구한다면 중머리를 하이칼라나 상고머리로 바꿀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박달동무가 필요해서 한노릇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원상회복을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장군님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중머리를 그대로 두겠습니다. 앞으로 경찰서걸음을 또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박달은 실지로 그후 경찰서와 감옥에서 닥달을 많이 당하였다.
나는 그에게 혁명에 리익이 된다면 순사시험 같은것을 쳐볼 용의가 있는가고 물었다. 그는 눈을 크게 치뜨고 어리둥절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저를 순사로 둔갑시킬 생각이야 아니겠지요?》
《혁명이 요구한다면 순사 같은것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박달동무를 순사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순사모자는 써도 좋고 안써도 좋으니 그런 일을 통해서 주재소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기만 하면 됩니다.》
박달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피여났다.
《제가 순사들하고 좀 친하게 지내기는 합니다만 순사시험을 칠 생각까지는 못했습니다. 이번에 내려가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박달은 이듬해 봄에 정말 순사시험에 응시하였다. 그는 시험을 치기 전에 먼저 주재소 수석순사를 찾아가서 희떠운 소리부터 하였다.
《수석님, 나도 순사로 발전하고싶은데 수석님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순사로 발전할만 한 재목이 되겠습니까?》
수석은 그 말을 듣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그게 정말인가?》
《정말 아니구요. 오죽 순사가 되고싶었으면 내가 수석님을 찾아왔겠습니까.》
《당신은 재목이 되고도 남는다. 잘만 하면 이 주재소 수석도 할수 있다.》
《제가 수석님자리야 가로타고앉을수 없지요. 그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다. 내가 수석을 못하더라도 박달과 같은 사람이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개준된다면 나는 대일본제국을 위해서 기꺼이 수석자리를 양보할 용의가 있다. 그 포부가 아주 좋다. 어서 순사시험을 치라.》
박달은 순사가 될것처럼 소문을 크게 내면서 뻐젓이 순사시험을 쳤는데 답안을 적당히 썼다. 그래서 시험을 치는것으로 끝나고 합격은 되지 못하였다. 그는 우리가 짜놓은 각본대로 연기를 아주 능란하게 하였다. 일본인들도 그의 경력을 밝히면서 비밀문건에 《소화 12년(1937년) 3월 함경남도 순사에 자원하여 갑산서에서 응시, 락제》라고 한조목 적어넣었다.
박달은 순사시험을 친것으로 하여 일본인들한테서 신용을 얻게 되였다. 그곳 주재소에 있는 김순사는 박달을 순사시험까지 친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의 신원을 여러번 보증해나서기까지 하였다. 박달은 이처럼 순사들을 업고 그들에게 충실한척 하면서 하고싶은 일을 다하였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결성은 우리가 내놓은 자주적인 당창건방침을 고수하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을 힘있게 밀고나가는데서 실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였다.
이것은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후에 여러 갈래로 진행되였던 당재건운동의 단순한 연장이나 반복이 아니였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지도밑에 전개된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이야말로 국제당이 직접 주관한 당재건운동이나 또 국제적색로동조합(프로핀테른)이 적색로조운동을 통하여 이룩해보려고 시도한 당재건운동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철두철미 자주적인 당재건운동, 당조직건설투쟁이였다.
국제공산당은 1930년대에 들어와 조선에서의 민족해방투쟁, 특히 당재건운동에 대하여 일정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구라파에서의 파시즘에 못지 않게 일본군국주의가 극동에서 날로 위험한 세력으로 되고있는것과 관련되여있었다.
국제공산당에서는 조선에서의 공산당재건문제를 두고 꾸우씨넨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제나름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 대표적인것이 국제당 제7차대회 이후시기에 론의되였던 조선민족혁명당조직에 관한 제안이였다. 조선에서 반일을 목적한 민족혁명당조직에 관한 국제당의 의사를 보다 상세히 밝힌것은 《공산국제》에 만주에서의 반제통일전선에 대하여 쓴 양송의 글에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간도에 있어서의 현재의 국면은 중국공산당조직을 확충하기 위하여 혁명적인 중조 로동자, 농민을 더 많이 당내에 끌어들이는것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수립할것을 요구하고있다고 하면서 이 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반일과 조선의 민족적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되여야 할것이며 이 새로운 당의 창립자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썼다. 그리고 그 당은 성격상 반일통일전선적인 당으로 되여야 할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제당의 견해와 당시 국제당에 가있던 중국당일군들의 견해를 대변하는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에서의 당조직건설문제와 통일전선결성문제를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에 따라 해결하였다.
우리는 당조직건설문제와 통일전선결성문제를 같이 밀고나가면서도 그것을 서로 뒤섞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당이 통일전선을 대표하거나 통일전선체조직이 곧 당으로 될수 없기때문이였다.
그 당시 일부 독립운동자들가운데는 민족유일당이라는 명목으로 좌우의 모든 정치적력량을 포섭하는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정치단체를 내올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여 당조직건설을 밀고나가는 한편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를 내오는 방법으로 온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였다.
물론 국제당은 그 이전시기에도 조선에서의 당재건을 여러 방면으로 시도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지도밑에 있던 국제적색로동조합 집행국이 1930년 9월에 발표한 《조선의 혁명적로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세칭 《9월테제》)는 주로 공산당을 재건하는데서 혁명적로동조합의 조직을 필수조건으로 내놓고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 9월테제에 의거하여 혁명적로동조합(적색로동조합)조직에 힘쓰고 그것을 대중적지반으로 하여 공산당의 재건을 추진시키였다.
그 다음해 10월에 국제적색로동조합 산하조직으로 상해에 있는 범태평양로동조합 비서부도 《태로 10월서신》으로 알려져있는 《조선의 범태평양로동조합 비서부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긴급격문》에서 혁명적로동조합을 조직하고 그것을 대중적지반으로 하여 공산당을 재건할것을 촉구하였다.
국제적색로조계통의 이러한 문건들은 1931년 5월에 발표된 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의 꾸우씨넨의 의견서로 알려져있는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에 관한 의견서》와 더불어 내용상으로는 조선에서의 공산당재건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는것들이다.
1934년 6월 모스크바에서는 조선공산당 발기자그루빠 명의로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이 발표되였는데 이것도 역시 조선에서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조선인민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극악한 식민지통치가 계속되고 혁명운동에 대한 탄압이 날로 우심해지는 가운데서도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당재건운동을 면면히 벌려나갔다. 함남, 함북에서의 공산당사건, 조선공산주의자동맹조직사건, 조선공산당재건 코민테른조선레포트회의사건,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사건 등은 이 시기 국내 여러 지방에서 있었던 당재건운동의 일부였다.
중국을 근거지로 하는 당재건운동도 있었다.
엠엘파와 서상파는 중국 길림일대를 중심으로 당재건준비위원회, 당재조직중앙간부회, 당재건동맹, 당재건정리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당재건운동을 벌리였다.
일본에서도 도꾜를 거점으로 당재건운동이 벌어졌다.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 중기까지 전국적판도에서 전개된 적색로동조합, 적색농민조합운동도 당재건운동의 일환이라고 볼수 있다. 초기의 합법적인 형태로부터 지하운동형태의 비합법적형태로 전환된 적색로조와 적색농조의 기본적인 투쟁목적은 공산당재건에 있었다.
국내와 해외에서 전개된 당재건운동은 대부분 기성의 낡은 운동형식과 사대주의적경향, 파벌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층운동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래의 재건운동이 거둔 성과를 타고 국내에 새형의 당조직을 꾸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말하자면 지난 시기의 적색로조, 농조선들을 찾아 거기에 우리의 당세포들을 조직하기 위하여 많은 애를 썼다.
1937년 5월 하순 우리는 백두산근거지에서 국내당공작위원회 제2차회의를 소집하고 국내당공작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을 높이고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과 혁명운동에 대한 지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회의에서는 국내당공작위원회결성 이후의 당조직건설정형을 총화하고 국내당조직건설사업에서 나서는 과업과 방도들을 놓고 진지하게 협의하였다.
나는 그때 당조직건설과 당생활에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할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국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당을 비롯한 여러가지 혁명조직들에 받아들이며 당조직이 늘어나고있는 현실적요구에 맞게 당조직지도체계를 바로세우기 위한 몇가지 방도를 제기하였다.
그 회의에서 토의결정된 내용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선경내에로의 진출을 강화하고 당조직건설과 국내혁명투쟁을 발전시켜나가는데서 하나의 뚜렷한 리정표로 되였다.
그후 우리는 국내당공작사업을 방조할 사명을 지닌 정치공작대를 파견하였다. 1937년 여름과 가을에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 김평과 권영벽, 정일권, 김주현, 마동희, 김정숙, 백영철, 리동학, 최경화, 김운신, 리창선, 리경운, 리병선 등을 성원으로 하는 정치공작대가 북부조선의 여러 지역들에 파견되여 당조직건설사업과 군중과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공작대를 북선정치공작대라고 불렀다. 북선정치공작대는 북부조선일대를 혁명화하는 방법으로써 국내당조직건설사업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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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리는 북선정치공작대원들에게 정치사업구역을 맡겨주었다. 그 당시는 이런 정치사업구역을 정치구라고도 하였다. 정치구는 1호정치구, 2호정치구, 3호정치구, 4호정치구, 5호정치구 등으로 나누었다. 정치구의 지역범위는 주로 김평이 우리와 토의하고 설정하였다. 정치구는 동해안으로부터 시작하여 서해안으로 이르게 되여있었고 번호도 그에 따라 설정하였다.
북선정치공작대원들은 해당 공작지에 가서 직접 조직정치사업을 할수도 있었고 자기가 육성해낸 우수한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업할수도 있었다.
리동학을 책임자로 하는 북선정치공작대의 한 소조는 국내당건설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기 위하여 1937년초 리제순의 안내밑에 갑산군 운흥면일대의 농촌부락들에서 반일애국사상과 조선독립을 고취하는 수백매의 포고문, 격문을 살포하고 군중선전을 진행한 다음 번개같이 귀대하였다.
삼수군일대를 담당한 마동희조, 지태환조도 련이어 국내에 들어가 령활하고 용의주도한 정치공작으로써 령북지방의 민심을 뒤흔들어놓았다.
우리는 박달의 편의를 도모해줄 목적으로 그에게 어린 련락원 한명을 파견하였다. 그가 손장복이였다.
나는 손장복에게 국내에 들어가면 일본관청의 호적부에 이름을 등록하고 조선에서 나서자란 사람으로 행세하라고 하였다.
박달은 손장복을 데리고 주재소에 나타나 수석을 향해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수석님, 나를 축하해주시오다.》
수석은 멍청해서 두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박달이 순사시험에 응시한 후부터 수석은 여간만 싹싹해지지 않았다.
《당신한테 무슨 좋은 일이 생겼는가?》
《네, 동생이 공짜로 하나 굴러들었습지요.》
박달은 뒤에서 쭈밋쭈밋하는 손장복을 보란듯이 내세우고나서 온 주재소가 다 듣게 떠들었다.
《내 늘 수하에 동생이 하나도 없는것을 한탄해왔더니 아버지가 그 소원을 풀어주었습니다그려.》
《그럼 저 총각은 아버지가 붙여준 의형제인가?》
《의형제라니요. 아버지가 길주에 있을 때 딴장을 봐서 벌어놓은 이복동생이오다. 생모가 죽은 다음 고아로 떠돌아다니다가 이복형이 갑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구 이렇게 덜렁덜렁 찾아오지 않았겠소.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 애를 내가 돌보기로 결심했습지요.》
《아, 공짜로 저런 아들 하나 벌었으면 당신 아버지재간이 대단하다.》
수석의 그 말에 주재소순사들은 방안이 떠나가게 웃어댔다. 기분이 거나해진 수석은 아무런 트집도 걸지 않고 수속을 해주었다.
박달은 손장복을 박영덕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리였다. 그때부터 손장복은 지하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며칠후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여 갑산지하조직의 사업에 피해를 주었다. 갑산군 운흥면 대중리의 어느 농가에 강도가 나타나 돈 20원을 빼앗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 강도가 자기의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사람인체하였다. 그 당시는 유격대원을 《산사람》이라고 하였고 유격대공작원을 가리켜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강도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무렵 박달은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의 사업을 지도하려고 대중리에 다녀왔다. 이 우연한 일치로 하여 박달은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혐의를 받고 경찰에 피검되였다. 경찰들은 그때 박달의 집에 길주에서 온 리병선이라는 사람이 드나든다는것을 알고 그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당자가 없어 헛물을 켰다.
리병선은 길주에서 적색농조사건에 관계하였다가 김영국과 함께 그 전해에 갑산에 온 사람이였다. 김영국이 유격대에 입대한 뒤 리병선은 보천면의 한 목재소에 적을 두고 그 일대의 민족해방동맹조직들을 지도하고있었다. 일제경찰은 그날 박달의 집에 있는 손장복을 리병선으로 알고 덤벼들었으나 나이로 보아 리병선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돌아가버리였다.
우리는 그때 장백과 국내에 정치공작원들을 많이 파견하였는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만 가지고서는 그것을 감당할수 없었다. 필요한 공작인원을 다 채우자면 적어도 1개 련대인원만 한 정치일군들이 있어야 하였는데 유격대가 군사활동은 뒤전에 미루고 정치활동만 할수는 없었다. 우리는 정치사업경험이 풍부한 장백지방의 지하조직성원들과 지난날 동만일대에서 혁명조직에 망라되여 군중과의 사업을 많이 해본 준비된 동무들을 선발하여 국내에 파견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장백현 조국광복회조직에서도 리제순의 선을 타고 수많은 공작원들이 국내로 들어갔다.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는 사업은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인 김평이 주관하였다.
그 당시 김평의 직급은 7련대 정치위원이였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에서 적후공작에 대한 사업을 전담하고있던 유능한 정치군사일군으로서 풍부한 지하활동경험을 가지고있었다. 1930년대 전반기는 물론, 후반기에 들어와서도 그가 나의 사업을 많이 도와주었다. 김평은 항일혁명시기 내가 가장 아끼고 신임하던 정치군사일군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물론 그후 그는 변절자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되여 고생도 하고 정치생활에서 일정한 오점도 남기였으나 우리에 대한 충실성만은 변함없이 간직하고있었다. 김평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와 당위원회사업에 많이 관계하였고 우리가 국내혁명가들과의 련계를 강화하면서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고 전민항쟁준비를 본격화하던 시기 이 사업을 직접 주관하였기때문에 그때에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있었다. 군사문제와 함께 특히 비밀리에 진행된 정치공작과 관련된 사실들중 그만이 알고있는 내용들도 적지 않았다. 그가 회상한 매 세부들과 사건들, 년대들이 대체로 다 정확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이 우리 당의 혁명력사를 풍부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생각한다. 김평이 끝까지 유격대오에서 투쟁하다가 조국해방을 맞이했더라면 더 좋았을것이다. 나는 지금도 나의 사업을 그처럼 충실하게 보좌해온 백두산시절의 김평을 잊지 못한다.
국내에 파견된 정치공작원들은 로조, 농조를 비롯한 기성의 조직들과 개별적인 공산주의그루빠에 깊이 침투하면서 당조직건설사업과 조국광복회조직망을 늘이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려나갔다.
정치공작원들의 눈부신 활동에 의하여 국내인민들속에는 《백두산바람》이 억제할수 없는 힘으로 강하게 스며들어갔다. 그들의 영향밑에 국내의 동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수 있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인민혁명군에 참군하려고 백두산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조치로 조선민족해방동맹조직에서 단련된 우수한 동맹원들을 망라하는 국내당소조를 무어주었다. 력사가들은 박달을 책임자로 하는 이 소조를 《3인조》라고 부르고있다. 《3인조》는 기층당조직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국내당건설을 위한 모체조직으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있었다.
당조직을 확대하고 당대렬을 늘이기 위한 박달의 사업방법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것은 무명당조직의 결성이다. 무명의 당조직이란 정식 명칭은 없으나 실지로는 비밀리에 활동을 벌리고있는 당원들의 당조직을 말한다. 이런 조직은 조국광복회 내부에도 있었다.
무명의 지하혁명조직은 적들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을 때 조직을 건설하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이다.
조직명칭을 달지 않고 모여서 회의도 하지 않는 대신 개별적으로 만나서 교양도 하고 투쟁방법도 대주고 분공도 주면 유사시 어느 한사람이 검거된다 하여도 다른 조직성원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되여있었다.
박달은 우리와 헤여진 다음 갑산에 돌아가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사업에 온 넋과 육신을 다 바치였다. 그는 우리가 세운 방침대로 갑산과 삼수일대를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원종장으로 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타군, 타도로 활동선을 뻗치였다.
우리가 그 지방을 국내당조직건설의 원종장으로 꾸릴수 있는 가장 적합한 후보지로 선정한것은 그 지대가 가지고있는 특수한 사회경제적조건을 고려했기때문이였다.
삼수, 갑산이라면 뭐니뭐니해도 정배살이를 하던 고장으로 통한다.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조선속담은 이 지대가 유명한 정배지라는데서 생겨난 말이다. 리조때 봉건조정의 박해로 이곳에 쫓겨와 정배살이를 하던 몰락량반들의 후손들은 대체로 화전농이 되거나 광산로동자가 되여 최하층의 생활을 하였다. 《한일합병》후 살길을 찾아 개마고원일대에 밀려든 류랑민들도 이 일대에 와서는 모두 괭이로 드덜기를 찍어내고 푸장불을 피우면서 힘에 부친 화전농사를 하였다. 그 지방의 주민구성을 계급적인 각도에서 분석하면 본바탕이 좋다고 말할수 있다.
유격활동에 편리한 고원지대의 웅심깊은 자연은 1910년대로부터 의병들과 독립군들이 화승대를 들고 결사보국의 리념을 안고 출몰하는 전장으로 되였으며 사회운동자들을 품어주는 조선최대의 피신처로 되였다. 북부조선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합법적인 활동의 권리를 잃어버린 사회운동자들이 은신처를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조선경내는 물론이거니와 북간도와 서간도, 씨비리지방에서까지 뜻있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박달의 말에 의하면 1920년대 중엽에 평양숭실중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던 4명의 반일운동자들이 삼수, 갑산일대에 와서 화전민들을 망라하여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소조를 조직한것이 이 지방 사회주의운동의 시초로 되였다고 한다.
그후 동해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 로조, 농조운동에 부심하다가 망명의 길에 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청년동맹도 내오고 농민동맹도 내오고 전위동맹도 내왔다.
이상의 리유만으로도 삼수, 갑산지방은 국내당조직건설의 원종장으로 될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있었다.
갑산공작위원회는 처음에 특정의 명칭이 없는 조직으로 발족되였다. 1934년 5월부터 시작하여 처음에 리경봉을 인입하고 련이어 김철억을 쟁취했으며 그다음에는 심창식 또 그 다음에는 누구누구를 망라시켜 아마강제재배반대투쟁도 하고 미신반대투쟁도 하고 조혼반대투쟁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2년쯤 지나서 서로가 조직원이라는것을 다 간파하게 되자 그 무명의 조직에 갑산공작위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우리는 국내당조직건설에서 얻은 이와 같은 경험에 기초하여 그후 당지부사업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하여 쓴 글에서 이 방법을 정식화하였으며 1940년대 전반기에 소조공작을 하기 위하여 국내에 들어가는 동무들에게 이 방법을 활용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한 조직원은 해방후 이렇게 회상하였다.
《무슨 조직엔지 가입하였다. 그 조직의 명칭과 내용은 비밀에 붙여서 몰랐다.》
갑산출신의 한 혁명가는 박달이 비밀서적을 주면서 몰래 읽으라고 하기에 그것을 읽고 심부름을 하였을뿐인데 일제의 법기관은 자기에게 중형을 구형하고 해방될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특정한 명칭이 없는 무명의 조직원들일것이다.
박달은 삼수, 갑산일대를 국내당조직건설의 원종장으로 꾸린 다음 거기에서 키워낸 우수한 조직원들을 선발하여 린접군과 린접도로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박달이 그들에게 준 임무는 파견지에 가서 당조직을 내올수 있는 토대를 꾸리는것이였다.
그는 우리의 방침대로 파견성원들이 철저히 적합한 직업을 가지는 방향에서 사업을 조직하였다. 공작지에 파견되여가는 조직원들이 일정한 직업을 가지게 되면 신분이 사회적으로 합법화되고 맡은 임무도 훌륭히 수행할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망명객식사업방법을 근절하고 군중속에 튼튼히 발을 붙일수 있었다.
박달은 무산군에만 해도 5~6명이나 되는 공작원들을 파견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 산하조직인 보천면 선덕동반일회 책임자인 채응호도 그때 무산군에 파견되여 정치공작원들과의 련계밑에 유격대후방물자를 보장하기 위한 경제모연공작과 대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생산유격대를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맹렬하게 다그치였다. 그는 《혜산사건》이후에도 연길, 화룡일대에 망명지를 정하고 무산지방에 들락날락하면서 림업로동자들을 혁명조직에 꾸준히 묶어세웠다.
박달은 조선민족해방동맹 청년부책임자인 리룡술과 리병선을 함경북도의 남부군들에 파견하였는데 그들을 통하여 국내혁명운동과 당조직건설에 대한 우리의 방침이 성진적색농조지도자의 한사람인 허성진에게 전달되였다. 우리의 로선을 받들어 끝까지 싸울것을 맹약한 허성진은 우리를 만나려고 갑산까지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열하원정》의 후과를 가시느라고 림강, 몽강일대에 나가있었다.
박달은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망을 확대하는 한편 우리 혁명의 군사적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도 큰 힘을 넣었다.
우리는 리병선이 밀영에 왔을 때 그를 통하여 박달에게 국내당조직성원들과 조국광복회 청년핵심성원들로 생산유격대를 조직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박달은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첫 준비작업으로 자위단을 리용하였다. 일제는 《향토보위》의 미명아래 자위단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있었다. 그들은 무장까지 공급해가면서 단원들을 훈련시키였다. 생산유격대원들을 이 조직에 모조리 밀어넣는다면 그들이 모두 무기에도 정통하고 적들의 신임도 많이 받을것이 아닌가. 유사시에는 한꺼번에 왁 들고일어나 놈들에게 총부리를 돌려댈수 있을것이다. 박달은 이런 타산을 가지고 걸치기자위단 부단장이라는 직위를 리용하여 적들이 규정해놓은 입단년령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생산유격대원들을 자위단에 빠짐없이 입단시키고 그들이 거기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따내게 하였다.
그는 북선반일인민유격대조직과 관련된 우리의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우리는 북부조선일대에서 무장투쟁을 급격히 확대발전시킬 필요로부터 출발하여 국내당조직성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북선반일유격대를 조직할데 대한 구상을 제기하였다. 무산, 갑산으로부터 부전령에 이르는 령북의 광활한 대지는 유격활동을 벌리기에 알맞춤한 리상적인 지대였다.
나는 그때 국내동무들에게 북선반일유격대를 조직하라, 부대의 지도핵심으로 될수 있는 우수한 유격대원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보내주겠다, 그러면 당신들은 그들을 원종으로 하여 대오도 확대하고 훈련도 하라고 하였다. 북선반일유격대 대장으로는 7련대의 최일현이 임명되고 정치위원으로는 박달이 임명되였다. 만일 박달을 비롯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지도간부들의 대다수가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북선반일유격대의 편성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완료되였을것이다.
국내당조직성원들은 김주현별동대가 국내에 파견되였을 때에도 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박달은 일제교형리들이 국내당조직성원들과 조선민족해방동맹성원들을 마구 검거하고있는 살벌한 환경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꾸려놓은 기층당조직들과 조국광복회조직망을 지하에 은밀히 보존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국내당조직과 조선민족해방동맹성원들이 겪고있는 시련에 대해서는 김평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해주었다.
나는 그 통보를 받기 바쁘게 마동희와 장증렬을 국내에 들여보냈다. 그러나 이 구원조치는 박달을 찾아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던 마동희와 장증렬이 적들에게 붙잡히는것으로 하여 효력을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내공작경험이 풍부한 김정숙을 대진평에 파견하였다. 그동안 단천, 북청, 홍원, 신포를 비롯한 동해안지구에서 조직을 확대해가던 박달은 대진평에 돌아와 곤경을 겪고있는 조직을 수습하고있었다. 김정숙은 천신만고끝에 박달을 만나고 그와의 회견결과를 우리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고 우리는 백영철을 책임자로 하는 련락소조를 갑산지방에 보냈다. 백영철은 유격대활동을 하면서도 국내공작을 많이 한 사람이였다. 그는 우럭골지방에 밀영을 짓고 여러 지방에서 식량공작을 하다가 마동희와 장증렬이 체포된 후 부대에 소환되여 와있었다.
백영철은 국내에 들어선 첫날부터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였다. 형언할수 없는 고생끝에 박달, 김철억, 리룡술일행을 만났다. 우리는 련락소조성원들과 함께 백두산으로 찾아온 박달일행에게 파괴된 혁명조직을 복구정비하고 국내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릴데 대한 과업을 주어 다시 갑산지방에 내보냈다.
박달일행과 함께 다시 국내에 나왔던 백영철은 속신지구에서 공작하던중 일제경찰과 조우하였다. 복부에 총탄을 맞은 그는 흘러내리는 밸을 안고 적과 싸우다가 잡혔다. 일제경찰들은 그를 구뎅이에 꿇어앉히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산비적》이라고 하면서 돌멩이를 던져 생매장하게 하였다. 박달과 국내당조직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은 실로 막대한 노력과 희생을 동반하였다.
적들은 박달을 체포하려고 밀정들과 변절자들을 도처에 풀어놓아 산이란 산은 다 뒤지면서 소동을 벌리였다.
박달은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으로서 우리를 도와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하는데서 큰 공헌을 하였다. 실로 그는 국내당조직의 주되는 담당자였다.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추진시켜나가는데서 김평, 권영벽, 김정숙을 비롯한 정치공작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신파, 풍산, 랑림, 부전, 흥남, 신흥, 리원, 단천, 허천을 비롯한 북부조선일대와 장백일대에서 겹쌓인 난관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오고 공산주의자들을 튼튼히 묶어세웠다.
우리 당 전위투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국내의 넓은 지역에 당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였다. 갑산, 신파, 풍산을 비롯한 함경남북도와 양덕지방 그리고 평양, 벽성 등 서선일대의 여러 광산, 탄광, 공장, 농촌, 어촌, 도시들에 혁명조직들이 속속 건설되였다. 적색로조나 적색농조운동으로 들끓다가 잠잠해진 지역들에서 다시금 혁명적인 로조, 농조운동이 전개되였다. 어제날의 로조, 농조들이 재조직, 재편성되는 과정은 곧 당조직들이 생겨나는 과정과 일치하였다. 당조직망과 조국광복회망은 북부조선일대의 령역을 멀리 벗어나 서울을 비롯한 중부조선일대와 경상도와 전라도경계에까지 이르렀으며 제주도와 현해탄을 넘어 일본땅에까지 확대되였다.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은 장백과 림강일대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과 밀접한 련관속에서 추진되였다. 장백, 무송, 림강일대의 조선인거주지역들에도 당조직들이 뿌리를 박았다. 동만과 남만일대에도 당조직들이 확대되였다. 전국적판도와 전민족적범위에서 당조직건설사업이 힘있게 추진되는 과정을 통하여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결속되고 전반적조선혁명에 대한 당적령도가 더욱 강화되게 되였다.
모든 당조직들이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움직이는 전국적범위의 강력한 당조직체계가 세워졌다. 최고령도기관인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로부터 기층조직인 세포에 이르기까지 당조직지도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짐에 따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초축성사업에서 획기적전환이 일어나게 되였다.
이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가 이룩한 또 하나의 크나큰 전취물로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후 압록강과 두만강연안지구에서 얻은 군사작전들에서의 승리에 못지 않은 정치적승리였다. 당조직건설을 위한 우리의 피어린 투쟁은 조국해방을 앞당겨오는 힘있는 추진력으로 되였을뿐아니라 자주적인 당창건위업을 빛나게 완성할수 있는 강유력한 기초로 되였다.
파쟁과 리론적결핍과 실천적능력의 부족으로 소외되고 경시당해오던 조선공산주의운동은 항일무장투쟁의 불길속에서 자기의 새로운 길을 힘있게 개척해나가기 시작하였다.